[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배우는 기독교 세계관] 귀먹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가폰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배우는 기독교 세계관 귀먹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가폰 세계관은 이야기(메타 내러티브)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현대 사회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혼재하고 있다. 세상에 나가서 성경적 이야기를 삶의 축으로 삼고, 공적인 영역에서도 삶으로 증언해야 하는 온누리세계관학교 스태프들에게 명료한 성경적 세계관 확립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2018년 성경적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눈앞에서 펼쳐 보여주는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대한 ‘작가와의 만남’과 ‘북클럽’에서 스태프들이 큰 용기를 얻었다. 2019년에는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심도 있게 공부했다. 장경철 목사님을 모시고 북콘서트를 진행했다. 장경철 목사님은 “하나님의 모험이란 비존재였던 인간을 창조한 것이며, 그 인간을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고, 인간을 하나님이 갈망하는 존재로 불러냈다”면서 인간의 고통 이전에 하나님의 고통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모순적인 것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미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악하게 행동한다고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혼들이 악해질 때 상대방을 해치려 할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기에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이 생겨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스스로 악하게 되어 하나님과 동료 피조물과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중하는 인간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받는 고통을 막아주지 않으시고 ‘쓴맛이 나는 약’으로 활용하시기도 한다. 이 경우를 구약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사무엘하> 7장 14절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 C.S. 루이스는 이것을 잘못이나 죄의 가면을 쓴 악으로 표현했다(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며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선택받은 자신들이 죄악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고통이 그 가면을 벗긴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든 아픔을 느낄 때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다고 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며, 우리 영혼 깊은 곳의 갈망인 진정한 자아의 회복, 즉 C.S. 루이스 고유의 개념인 ‘자유의지’로 ‘자아양도’를 하게 하는 고통의 심오한 효력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스태프가 북콘서트에서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북클럽을 통해 이해해 나갔다. 북클럽에서 나눌 때는 삶에서 얻은 간증을 기반으로 했기에 이해가 쉬웠다. 피드백을 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자아양도’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얻는 과정을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부분 인간들은 수 세기에 걸쳐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하여 확고 불변하게 그 뜻을 무시하게 되어버린 욕망의 체계 전체를 물려받았다. 그 결과 다른 인간들에게 높임을 받아 얻는 만족감과 자신의 신체 유기체와 유전 형질에서 나오는 욕구를 통해 양분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양분의 도움 없이 순전한 의지의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창조 때 받은 자기 본래의 선한 힘)으로만 행동할 때 우리는 창조의 협력자 내지는 살아있는 도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원죄의) 마법을 푸는 힘을 지닌 역(逆)주문으로써 아담이 후손들에게 걸어 놓은 반창조적인 마법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을 타락한 자아가 원하는 일과 하나님이 원하는 일 가운데 선택하는 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 C.S. 루이스는 자기가 원하고, 하나님도 원하시는 일(C.S. 루이스에게는 이 책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이 ‘자아양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아양도는 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6개월 된 신생아를 기르는 딸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나요? 신문에 보면 아기가 어릴 때는 엄마들이 만족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난 후에는 후회가 많다고 해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인 아기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아기는 성장해야 한다. 아기가 자라면서 고집을 피울 때는 엄마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아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부모를 떠나는 것이 합당하다. 아이는 여러 가지 실패 경험 속에서 생각이 성장하고, 스스로 판단이 가능해질 수 있는 자리까지 자라야 한다. 그 과정을 거쳐 선과 악을 분별해 낼 수 있을 때 아이는 엄마와 듀엣을 부를 것이다. 서로 다른 음을 내지만 같은 멜로디를 읊조리는 화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에 비춰 현대 사회가 부추기는 ‘자아’를 우기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과정을 통과해서 결과를 깨닫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자리를 깨닫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를 묶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신다. / 박은미 성도(서초A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5-11 제1491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찾는 방법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찾는 방법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나요?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혹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내 삶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숨바꼭질하듯이 어딘가에 숨어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끼시고, 배려하신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도록, 귀에 들리도록, 손에 잡히도록 드러내실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깨닫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드러나신다.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뜻이 가장 확실하게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류를 만들어 가신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신다. 다윗을 통해 왕국을 건설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신다. 수많은 제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다. 둘째, 하나님은 영혼 구원의 현장에서 드러나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은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많은 청년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이 있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기가 참 어렵지만, 선교 현장을 가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보게 된다는 고백이다. 왜 그럴까? 선교 현장에서는 나의 삶을 모두 내려놓고, 선교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내기 때문이다. 함께 해외 아웃리치를 다녀왔던 어느 청년의 고백이 기억에 남는다.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선교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일상에서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과 선교적인 삶을 살아낸다면 매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매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될 줄로 확신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하심은 영혼 구원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영혼 구원의 현장으로 달려가라.” / 김한국 목사(인천WEB대학청년부)
2024-05-11 제1491호
[맛있는 말씀해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맛있는 말씀해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이 말씀은 신약 성경 중에서도 매우 난제 구절에 해당한다. 이 말씀의 앞 절인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아나셔서 음부(옥)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사후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구원을 얻을 기회가 있다는 교리를 정당화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측면도 있다. 한국 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고백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4장 6절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구절의 공인된 사도신경 원문은 “장사 되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다. 많은 신학자가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몇 가지 주요한 관점의 해석들을 살펴보면서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 첫 번째 해석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영들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이들에게 전파한 것이 아니라 노아 시대에 영으로 선재하여 죄인들에게 전도하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지옥에 내려갔다는 의문을 제거할 수 있는 이론으로 많은 신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지는 않다. 둘째,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서 전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아닌 제한된 자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의 옥에 있는 영들을 노아 시대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가장 악한 죄인들이었기에 홍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은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파한 것인데, 여기서 선포는 회개의 기회가 아니라 심판을 전한 거라고 주장한다. 셋째, 예수님이 그의 죽음과 부활의 중간 시기에 죽은 사람의 세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주장이다. 예수의 육체는 비록 죽음을 당했지만, 그 결과 그는 영적으로 살아나 시공간의 제한에서 벗어나 모든 우주를 대상으로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나 평생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구원 제공은 그 어떤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뒷받침해 준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음부의 그늘에 들어갈 틈도 없이 세상에서 죽는 즉시 바로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갈 길이 열린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옥(음부)에 내려갔다는 사실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갔다는 것은 그가 실제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실로 죽음을 경험하셨고 부활하신 분이시다. 둘째,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보편적 승리를 말해준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었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셋째, 음부에 내려간 사건은 예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진리이다. 따라서 ‘예수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말씀은 매우 난해하고 해석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지만,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 혹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는 말씀이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4-05-11 제1491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가정] 가정의 신앙 교육과 믿음의 유산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가정 가정의 신앙 교육과 믿음의 유산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첫 번째 사회 기관이며, 교회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보다 세상적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말씀대로 부모가 살고, 성경을 기준으로 자녀를 양육하면서 믿음 안에서 소통하는 가정이 소중하다. 나의 믿음의 멘토인 장인어른은 모태신앙으로 6.25 당시 황해도에서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 그 이후 ‘이제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셨다. 그리고 현재 강서구(방화동)에 교회를 두 번 개척하시고, 장로로 은퇴하셨다. 지금은 천국에 계신 장인어른은 시간을 정해놓으시고 성경을 읽으셨다. 이때는 사위가 방문해도 눈인사만 하시고는 성경 읽기 목표 분량을 끝낸 다음 반갑게 맞아 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의 권유로 동네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시작된 영적 방황을 청년 시절에야 끝내며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다. 그 이후 신앙심이 돈독한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의 권유로 ‘BEDTS(예수전도단 직장인 제자훈련)’, ‘아버지학교’ 등 신앙 훈련을 받았다. 고민과 방황의 광야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다. 그리고 세 자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바른길을 가르치라. 그러면 나이 들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잠 22:6). 아이들이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신앙을 갖는 것이 가정의 제일 목표가 되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성장단계별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영아부 예배 참석을 시작했다. 유아부, 유년부, 소년부 교사도 했다. 특히 양재 중등부 교사를 하면서 그들이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직접 경험했다. 우리 아이들은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큐티. 제자훈련, 캠프 등)에 참여하면서 나름 신앙이 잘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엡 6:4). 바라봄의 법칙을 기억하며 부모를 그대로 닮아 간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들을 달래서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중간에 멈추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기다려 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않겠다는 한 가지 약속만 지켜 달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파워웨이브를 계속 다녔는데, 하나님이 세 자녀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제자양육을 받고, 신앙적으로 잘 성장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봤더니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있었고, 방학 때는 필사를 했으며, 큐티 나눔을 하고 있었다. 온누리교회 파워웨이브를 통해 신앙적으로 잘 성장한 아이들이 세상의 흐름(상대주의, 과학주의, 율법주의, 우상주의, 해체주의)에서 가장 취약할 수 있는 대학 생활을 학교 신앙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선후배들과 잘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었음은 큰 축복이요, 행운이었다. 이제는 세 자녀가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아이들을 돕기 위해 기독OTT 퐁당에서 ‘크리스천의 슬기로운 직장생활’(방선기목사, 직장사역연구소) 강의를 수강했다. <아바 일터 성경공부 시리즈(5권)>도 구매해서 ‘성경적 직업관’, ‘직업과 소명’ 등을 워크북으로 활용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아이들이 속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자녀들이 장성한 만큼 인간이 죄가 없었을 때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를 통해 복을 주시며,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창 1:26~28)의 생육·문화 명령을 이행하는 가정을 세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해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마 19:4~6)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흔들림 없는 가정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장인어른의 믿음의 유산이 세 자녀와 다음세대, 자자손손에게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 윤상우 집사(강남D, 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5-04 제1490호
[주일 강단] 어린아이의 하나님 어린아이의 하나님 마 18:1~6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종종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교훈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유대인 사회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린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지만, 당시에는 어른들에게 종속된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산력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방해물이나 혹은 무익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어린아이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서 여러 곳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을 어린아이들에게도 적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부정적인 측면, 곧 자기중심적인 모습, 연약함, 경험이 부족함, 그래서 보는 시야가 좁은 것들을 가리켜 교훈한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긍정적인 측면, 성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의심 없는 믿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하나님’이십니다. 첫째, 어린아이의 ‘의심 없는 믿음’을 닮아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3절).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그리고 모든 약속과 말씀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그 믿음은 의심 없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백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형성됩니다. 어떤 사회든 아주 어릴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하나님 말씀을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녀들은 평생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의심이 없어서 믿음이 곧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믿음과 확신이 분리됩니다. 믿긴 믿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믿음이 곧 확신입니다.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 믿는다는 것 자체가 곧 확신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을 모태로 일어났습니다. 교회 조직이 흠 없고 무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억압적인 권위를 따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사람들에게 의심 없는 믿음을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1789년 프랑스 혁명입니다. 개개인이 주체로 나서서 자유를 선포하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비판적인 이성이 급격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고 의심 없는 믿음 대신 비판적인 이성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의심 없는 믿음을 버리고, 비판적인 이성을 통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불안의 문제, 아픔의 문제,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신학자들도 이 흐름에 휩쓸렸습니다. 여러분, 의심은 영적인 질병입니다. 비정상적입니다. 의심이란 나누진 마음입니다. 두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는 언제나 의심할 때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요동치는 이유는 의심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오직 의심 없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으로 인하여 자기를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 의심 없이 기뻐하며 받아들입니다. 선물을 준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의존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하여 의심 없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의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요구하는 것이 의존입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욥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마음을 토로합니다. 욥이 어린아이 같고,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한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을 의심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조를 갖고 살아야 합니까?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가 이것을 대조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신자는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배욕 없는 섬김 둘째, ‘지배욕 없는 섬김’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4절).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이라는 말씀을 때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맥락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로 종종 다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이 권력욕, 지배욕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끊임없는 지배욕이 갈등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될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린아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입니다. 학령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유아 정도의 연령입니다. 그 연령의 아이들은 아직 비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 자신을 높이려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권력에 낯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의도 자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자기를 낮추는 상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왕은 섬기는 종입니다. 그에게 소유된 백성을 위해서 일하는 큰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자가 되려면 지배욕이 아닌 섬김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막 9:35). 이 말씀은 사회에서 성공의 법칙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신 분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섬김의 종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면, 그분처럼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한다면, 지배욕이 아닌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 셋째,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을 닮아야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막 9:37). 예수님이 자신과 어린아이를 동일시하셨고, 더 나아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 어린아이를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이 약하기 때문에 돌봄 대상으로 여기며 잘 보살피라고 교육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을 영접 하는 것’이라는 말씀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의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접’이라고 할 때는 내 안에 없는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주요, 내가 왕이 되었던 인생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자,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순한 믿음, 의심 없는 믿음, 지배욕이 아닌 섬김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녀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어린아이다움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닮게 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기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복잡했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헌신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언제나 허리를 먼저 숙이십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헌신하십니다. 피조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낮아지고, 겸손하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는 메시지는 오직 성경에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린아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C.S.루이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조지 맥도널드의 설교 중에 이 문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다움은 사람다움의 가장 심오한 핵심이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어린아이다우신분이시다. 어린아이다움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하나님만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온전히, 단순히, 겸손하게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아이다움을 영접해야 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 지배욕이 아닌 섬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어린아이다움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영접하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5-11 제1491호
[주일강단]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사도행전 8:26~40 / 이재훈 위임목사 한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에는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일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지만, 뜻밖의 사람을 통해서도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복음을 듣고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만남이 그러 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표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가운데 성령님이 그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빌립이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관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뜻밖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열심,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 체험하는 ‘단순한 순종’ “그때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26절). 사실 이해하기 힘든 지시입니다. 빌립이 이미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많은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떠나서 사람을 만나기 힘든 광야의 길을 가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빌립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빌립은 따지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빌립이 보여준 단순한 순종이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를 체험하게 합니다. 현재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에 단순히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님이 빌립에게 “네가 광야 길로 가면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몇 시경에 누군가가 어느 방향에서 오게 될 것이다”라고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면 아마 순종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빌립에게 주신 말씀은 “광야의 길로 가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두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라는 이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앞에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말씀해 주시면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지하철 노선표를 보듯이 이 역 다음에는 무슨 역이 있고, 종착역이 어느 역인지를 알 수 있도록, 노선표를 보듯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려 주시면 그때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단순히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단순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이 곧 다음 스텝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미리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아니하시고, 다음 걸음만 알려 주시는 것일까요? 그 다음에 어떤 열매나 성공이 있으면 우리가 미리 교만해지기가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으면 미리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걸음의 단순한 순종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단순히 순종할 때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빌립의 만남 하나님이 빌립을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고 했습니다. ‘남쪽으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이 내용이 ‘일어나 정오쯤 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번역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은 정오에는 태양이 남쪽에서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 시간입니까? 바로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 하나님의 택하고 부르시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일찍 가거나 더 늦게 간다면 만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의 타이밍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단순히 순종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빌립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광야 길을 지나가고 있는 에티오피아 관리 한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순종해야 합니다. 빌립이 순종해서 광야 길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가 아닙니다. 당시 이집트 남쪽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수단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에티오피아로 불리는 나라는 당시 ‘아비시니아’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성경의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사이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구약에서는 ‘구스’라고 불렸는데, 모세의 아내가 구스 사람이었습니다. 함족이 살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간다게’는 이름이 아니라 호칭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도 호칭입니다. 로마의 ‘시이저’도 호칭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같은 호칭입니다. 간다게는 당시 여왕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왕은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어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사를 맡아보지 않았고, 세상일은 어머니, 여왕이 맡아 보았는데 그 여왕을 ‘간다게’라고 불렀습니다. 간다게의 국고를 맡았다는 것은 오늘날 재무부장관 같은 책임자입니다. 그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실력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여겨 볼 내용이 있습니다. 27절입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근처에 있는 나라 정부 관리가 왜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옵니까? 당시에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질서 속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백성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 민족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아서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처럼 되기를 원해서 개종한 이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완전한 개종은 아니었지만, 절기에도 참여하고, 율법을 배우고, 영향을 받고 있었던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고,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갔었던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러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종교적 열심은 단순히 절기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학자들이 읽던 두루마리를 구입해서 마차에서 읽을 정도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 근처에서 예루살렘까지 마차로 여행하며 절기에 참여하는 종교적 열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구약을 읽을 수 있는 사본을 구해서 스스로 읽을 정도였습니다. 놀라운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이 사람에게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야한다! 빌립이 광야 길로 갔을 때 성령님이 “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거라”고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빌립이 그 마차에 있는 에티오피아 관리를 만났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그 사람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소?”라고 말하며 빌립에게 자기 마차에 타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언어적 능력이 부족해서 성경의 내용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날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어떤 학위 과정을 해야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학위 과정을 하고, 신학을 공부해도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깨닫고 알지 못합니다. 단지 종교적 열심이 영적인 눈을 열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한 윌리엄 윌버포스가 자신의 친구인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를 교회에 초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피트에게 당시 유명한 설교자 로버트 세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하려고 데려갔습니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을 잘 전하고, 지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윌버포스가 크게 기대했습니다. 자신의 친구이자 수상이 로버트 세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무엇인가 깨닫게 되리라 크게 기대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월버포스가 질문했을 때 윌리엄 피트 수상이 그에게 한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지적으로 열린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야합니다. 단순한 순종의 명령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전하기! 에티오피아의 관리에게는 종교적 열심이 있었지만,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이고 내용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에티오피아의 관리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입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며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해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이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32~33절). 이 구절에서 시작해서 빌립이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단순한 순종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읽은 말씀은 명백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지만,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구절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가 어린 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전했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읽어도 깨닫지 못했고, 열리지 않았던 에티오피아 관리의 눈이 예수님을 들음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여는 열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여는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 ‘모세의 율법’은 토라,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글’은 선지서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구분으로 말하면, 역사서도 선지서의 글에 포함됩니다. 그 다음 <시편>은 시가서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할 때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과 <시편> 세 구분으로 말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고, 예수님의 오심과 고난,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문화적 내용까지 예수님을 풍유적으로 말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흐름에서 직접적으로 예언한 것도 있고, 간접적으로 예언한 것도 있지만, ‘모든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화적,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전할 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소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오늘 우리가 단순하게 순종해야 할 소명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규칙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들은 에티오피아 관리가 스스로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려 물로 내려갔습니다.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두 사람만의 세례식이었지만,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가 나타나는 세례식이었습니다. 빌립과 에티오피아인을 비교해 보면 세상적으로 차이가 많았습니다. 빌립은 평범한 유대인이었지만, 에티오피아인은 한 나라의 장관이었습니다.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집트 문명이 최고의 문명이었습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도 강대국이었고, 선진국이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가 후진국이었습니다. 후진국의 평범한 한 시민이 당시 강대국의 한 장관에게 사회와 문화, 지적인 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전했을 때 그가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복음 증거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차이도 뛰어 넘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부족해도 세상의 지식이 가득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체험한 빌립과 같은 이들이 성령님께 단순히 순종하며 예수님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하심에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구원 받는 놀라운 <사도행전>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5-04 제1490호
[주일 강단]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사도행전 8:4~25 / 이재훈 위임목사 바람이 불길을 더 크게 만드는 법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의 바람은 교회를 무너뜨리기보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씨앗이 흩뿌리게 되듯핍박의 바람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들이 외로움과 절망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하셨고, 성령이 임하신 결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거라고 하셨지만, 당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어떤 의미에서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하여 시작된 핍박의 물결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은 교회를 위축시키기보다 본래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되도록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루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세운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637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큰 핍박이 일어났는데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이고, 가장 교회를 제한하고 핍박 하는 국가인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국가가 중국입니다. 아이러니한 상태 아닙니까? 중국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들은 오히려 교회가 침체하고, 극심한 통제가 있는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추방당한 선교사 중에서 286명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재배치되어서 아시아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러분, 중국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면 중국 교회는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1949년 중국내지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될 때 제2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중국에 엄청난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그 증거들이 있습니다. 조직화된 건물을 가진 교회들이 핍박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도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핍박의 시작은 형벌이 아닙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해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나타난 그 사건을 보고 그곳에 초막 세 개를 짓고 머무르기를 원했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강력하게 핍박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한민족이 전 세계에 750만 명 이상 흩어져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디아스포라가 된 이유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업을 위해,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에 어떤 상처가 있어서 흩어져 있겠지만, 세계 복음화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기여하는 것을 볼 때, 한민족의 흩어짐 또한 <사도행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심각한 문제와 풀리지 않는 고난은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의 전반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면 언제나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이끌어지고, 좌절에서 축복을 만들어 내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갔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는 한 도시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고 많은 중풍 환자들과 지체 장애인들이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도시 안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5~8절).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의 시각에서 이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섬세하게 분별했습니다. 과학적 지식을 기초로 병을 고치는 그가 바라볼 때 이것은 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표적들을 그가 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빌립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빌립이 전하는 말씀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 표적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믿게 하려고 표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표적과 함께 복음이 전해지고, 그 도시에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의 출입금지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사마리아가 점령을 당합니다. 앗시리아가 했던 정책은 바벨론보다 훨씬 잔인하고, 교활했습니다. 잔인하게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게 그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벨론은 피지배 민족을 보호하고 어느 정도 존중했습니다. 반면 앗시리아는 혈통을 섞었습니다. 이른바 사민정책입니다. 앗시리아의 주민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와 강제 이주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데려가 섞어버렸습니다. 강력한 이주 정책과 사마리아와 앗시리아의 혼혈정책을 써서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순수 혈통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조차 하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항상 돌아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갑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그곳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문화적 장벽, 역사적 장벽,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도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믿는 이들이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에 들어갑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베드로와 요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그들 가운데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 체험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14~17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변화되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의 전도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 물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세례와 같은 역사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와서 안수했더니 그들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교파마다 해석도 다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 어떤 교파에서는 그때 믿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세례이므로 ‘성령의 세례’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성령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도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니 성령의 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본문에 근거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물세례를 받은 이후 기계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규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분을 믿고 받아들였지만, 아직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고 사로잡히는 충만함을 경험하는 체험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고 고백했지만, 아직 온전히 주인 되지 못 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세례는 시기별, 사람마다 다릅니다.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고,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받는 이들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먼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중에 물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체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예수님을 입술로만 “내가 믿습니다”는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온전한 주인 되심을 확신하는 것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온전히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 집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고, 순교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구원 받았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쎄요 제가 좀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은 100% 성령의 세례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한다는 것이 구원의 보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구원이 임한다고 했으니 구원받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두 연락해서 그 피를 받아서 발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피를 바르면 보고 넘어가리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양의 피를 바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믿음으로 잠을 푹 잤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 잠을 못자고 ‘피의 양이 너무 적어서 못 보시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도배를 하듯이 바르고도 밤을 샙니다. 여기서 불안해서 잠 못 이룬 그 집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갔을까요? 안 들어갔을까요? “너는 못 믿으니깐 들어가야겠다”면서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의심과 불안과 염려가 있었지만, 약속대로 바르긴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하신 대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지나가고 나서야 안심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과 능력 없이,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 없이 믿는 단계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내리신다는 것은 바로 그 단계에서 확신과 능력 가운데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에 위협이 올지라도 예수님을 선택하겠습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그 단계 있는 제자들은 구원 못 받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그 상황을 사모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체험이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확신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에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스데반처럼 순교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세례 체험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 성령님을 따를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가짜 기쁨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경제 형편이 나아지고, 건강할 때 주어진 기쁨은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입니다.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명성을 날렸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내가 돈을 줄테니 그 능력을 나에게도 달라”고 요청합니다. 역사적으로 성령님이 역사할 때 항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스데반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 전투적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시몬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용조 목사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을 세속화하고 상품화하고 물질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그렇게 속이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온전히 따라야 할 분이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시몬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령님을 다루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물질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며 살기 위해 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분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20절).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선물로 주신 성령님의 역사에는 온전한 순종, 순전한 헌신, 그리고 순교만이 어울릴 뿐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과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결코 허락하시지 않고, 망하게 하십니다. 한때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은 사역자들이 마치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역하다가 망했습니다. 결국 열매도 없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때 성령님을 사모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순수하게 쓰임 받았던 이들이 어느 한 순간 시몬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을 상품화하고, 마치 성령님을 자신이 다루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될 때 복음의 문이 막힙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에 많은 일이 동반되어 나타날 수 있지만, 어느 때 변질될까요? 선교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일과 상관없어질 때입니다. 빌립이 표적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말씀을 믿게 하려고 표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하는 일과 상관없는 성령의 은사들은 그것이 치유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시몬과 같이 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선물이 주어진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역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체험을 원하십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간구하지 마시고, “하나님, 저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입술을 통해 복음이 증거되고, 저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시몬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시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하는 삶이 언제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할 때 가능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자신의 뜻대로 다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탄을 기쁘게 하는 시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르고 순종하십시오.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헌신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강하게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더욱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바로잡습니다. 지난 주 신문(4월 21일자) 주일강단 본문에 ‘<시편> 66편을 인용해서’라는 문장은 ‘<이사야> 66장을 인용해서’가 옳기에 바로잡습니다.
2024-04-27 제1489호
[주일 강단]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사도행전 7:54~8:3 / 이재훈 위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우리 모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생명을 내걸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시대와 상황에 있었던 성도들 가운데 기쁘게 예수님을 믿는 삶을 선택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 시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어떤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순교의 도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수하지 못하고, 때로 허영과 위선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을 신앙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인도해 주고,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순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았고, 동시에 교회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모습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모습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순교란 위대한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 에서 믿음의 선택을 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 앞에 담대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데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당한 이유는 예수님이 고소당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성전을 모독했다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등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정죄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으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줄기가 구약 역사의 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당신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그 예수님을 죽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다윗에서 그친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분노하며 중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계속 들었다면 이어졌을 텐데 설교가 중지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이었기에 더는 그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설교했습니다. <시편> 66편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며 오신 예수님을 당신들이 못 박아 죽였다”고 진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진실을 왜곡했고, 거짓 선동을 일으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은 살기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역사의 주인이시고, 중심이시며,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1~53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영적 상태를 담대하게 지적했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드러냈습니다. 진실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던 예수님처럼, 모든 불법 재판과 심문 앞에서 담대하고 진실을 증거하셨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모습 둘째, 분노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분노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54절).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분노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으로 충만했고, 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해서 그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광경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6절). 스데반은 자신의 용기로 이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 본문에서는 ‘서 계셨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초대교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는 심판자이심을 의미하고, 서 계신다고 말할 때는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곧 스데반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과 기쁨,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노하며, 죽이려 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자신을 위해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믿음의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셋째,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59~60절).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드린 두 개의 기도와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동일하게 복수의 기도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동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충만했기에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기도와 자신을 돌로 치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동일하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일으킨 변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함께 못 박힌 한 편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원래 양편에 있는 모든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편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조롱했던 이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반복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던 강도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당하면서도 용서하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 기도를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깨달아지고, 믿어졌기에 함께 죽어가는 죄수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함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한 한편의 강도를 구원했다면, 스데반의 기도는 어떤 열매를 낳았을까요? 곧바로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힌트가 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변화될 거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 이 사울은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쓴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라 스데반 죽음의 협력자, 나아가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돌을 든 자들이 바울 앞에 자신의 옷을 벗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들은 그가 어떤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전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바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 스데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는 장면, 그 순간에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을 누가를 통해 표현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상태였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그 출발을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자신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참여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기에 그 무리 책임자로 있었던 사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역사하신 은혜를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통해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넣도록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회심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이들의 중보기도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회심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바울이 변화된 것처럼, 바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된 것처럼 계속 중보의 기도, 특히 용서의 기도는 복음의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 핍박 신호탄이자 복음 퍼지는 영적 폭탄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주어진 핍박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고,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둘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고, 흩어짐은 곧 복음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 흩어져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니며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매달린 십자가의 두 끝이 가로로 땅속에 파묻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에 의하여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는가?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도 순교했습니다. 요한만 밧모섬에 갇힌 채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여정에 포함되어 더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며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그 이후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07년 순교를 당했는데, 그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일곱 개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유명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그분은 살고자 애쓰지 않고 도리어 순교하기를 사모했습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기도의 부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 일부 내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 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오.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라오.” 거룩한 확신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담대함만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핍박의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영적 폭탄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가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진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핍박한 원수까지 용서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스데반처럼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20 제1488호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1주년] 하늘을 향한 새로운 항해!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1주년 하늘을 향한 새로운 항해! 영종온누리교회의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의 꿈 영종온누리교회가 지난 5월 5일(일) 창립 1주년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종온누리교회는 지난해 5월 ‘하늘을 향한 새로운 항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창립한 국내 11번째 캠퍼스다. 영종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의 꿈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섬기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아름답고 소중한 꿈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 멋진 항해를 이어갈 것이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벌써 1년.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있다. 영종온누리교회가 받은 첫 번째 은혜는 ‘부흥’이다. 영종온누리교회는 창립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교회인데 매주 새가족들이 찾아온다. 서인택 팀장(새가족통합팀)을 비롯한 새가족통합팀원들이 매주 교회를 찾아오는 새가족들을 따뜻한 눈빛과 아름다운 하늘의 언어로 섬기고 있다. “매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새가족이 교회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를 잠시 떠났던 성도들이 갈급함을 가지고 교회를 다시 찾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부부 가정이 많이 왔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다자녀 가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영종온누리교회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영종온누리교회 새가족통합팀은 새가족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새가족들이 온누리교회를 잘 알아가고, 우리와 한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영종온누리교회가 받은 두 번째 은혜는 ‘다음세대의 성장’이다. 김동은 교사(꿈이자라는땅)는 영종온누리교회 소속 차세대들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차세대들이 말씀과 더욱 가까워진 게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교회에 성경책을 가져오지 않던 아이들이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회 올 때 꼭 성경책을 들고 옵니다. 말씀 암송도 꾸준히 하고, 성경 목록가를 외우면서 하나님 말씀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교회 창립 때보다 차세대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양적 성장과 더불어 영적 성장도 하고 있습니다. 영종온누리교회 소속 차세대들이 말씀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어서 정말 뿌듯합니다. 삶의 기준이 오직 말씀이 되고, 하나님 덕분에 행복하고,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하는 차세대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영종온누리교회가 받은 세 번째 은혜는 ‘선교’다. 임성호, 한명자 선교사(베트남)는 영종온누리교회 결연 선교사다.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영종온누리교회와 함께 선교의 꿈을 이룰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제가 영종온누리교회 결연 선교사인데 성도님들과 함께 교회 창립 1주년을 맞이해서 정말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올해 8월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이 베트남에 와서 함께 사역할 계획입니다. 현장의 필요를 함께 돌아보고, 기도하며, 서로를 돕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벌써 기대가 큽니다. 영종도에 귀한 온누리교회가 생겨서 감사합니다. 1년 만에 교회가 비좁을 정도로 하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새삼 느꼈습니다. 영종온누리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도육환 목사(영종온누리교회 담당)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영종온누리교회를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함께 해주신 동역자들과 성도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종온누리교회를 견고하게 세워가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종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의 꿈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칼럼 선교사들을 섬기는 영종 ‘M하우스’ 영종온누리교회가 창립 1주년을 맞았다. 온누리교회의 11번째 캠퍼스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과 생각하지 못한 곳에 또 하나의 캠퍼스가 개척되었다. 영종온누리교회는 한 가정의 헌신과 온누리교회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선물과 같이 주어졌다. 2022년 10월 2일 온누리교회 창립주일, 영종온누리교회는 영종하늘도시의 한 상가에서 첫 개척예배를 드렸다. 영종도에 거주하면서 서빙고, 부천, 인천온누리교회를 출석하던 몇 가정과 개척예배를 드린다는 이재훈 위임목사님의 광고만 듣고 영종도로 집을 옮긴 성도들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온라인예배만 드려왔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 있었던 성도들,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던 영혼들이 함께 모여 영종온누리교회를 개척했다. 그 자체만으로 ‘복음의 나팔’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와 선물로 주어졌다(요 1:12~13).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선물로 얻은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은 입당을 준비하며 예배와 기도에 힘을 쏟았다. 개척예배와 함께 시작된 ‘건축현장기도회’는 2023년 5월 교회 입당까지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교회 건축 현장 옆 공원에 모여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쓰고, 눈이 오고 추운 날에는 두 손에 핫팩을 쥐고,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함께 모여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아름다운 교회 입당보다 앞서 2023년 1월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게스트하우스 ‘M하우스’로 먼저 열매 맺었다.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를 드나드는 선교사님들과 한국에 잠시 머무는 선교사님을 위해 2000선교본부와 영종온누리교회가 협력해서 영종도에 선교사 숙소 ‘M하우스’를 마련했다. 영종하늘도시 신축아파트 중에 방 3개 거실 1개인 33평 아파트 하나를 계약했다. 내부에 들어갈 전자제품과 가구 등을 마련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광고를 냈는데, 단 2주 만에 모든 전자제품과 가구, 집기류 일체가 헌물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도 한 가정이 게스트하우스 청소와 관리, 헌물 등으로 헌신했고, 지금은 팀을 이뤄 M하우스를 이용하는 선교사님들이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섬기고 있다. 중남미 니카라과를 섬기는 김수선 선교사님(TIM)을 첫 게스트로 현재까지 많은 선교사님이 M하우스를 편하게 이용하고 계신다. M하우스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서 선교사님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오셔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숙소가 위치한 곳 앞으로 송산과 바다뷰가 펼쳐져서 선교사님들의 영과 육의 회복, 그리고 안식을 누리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다. 숙소를 이용한 한 선교사님이 “M하우스가 너무 좋은데 단점이 하나 있다면 너무 좋아서 선교지로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물게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영종온누리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확인한 지금, 또 한 성도님의 헌신으로 두 번째 ‘M2하우스’가 운서역 앞 오피스텔(원룸)에 준비되어서 더 많은 선교사님을 섬기게 되었다. 인천은 140여 년 전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선교사님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복음의 관문도시’였다. 영종도가 이제 그 받은 은혜를 나누기 위해 열방으로 나가는 선교사들의 ‘허브도시’가 되었다. 복음의 유통이 시작되는 복음 전파의 출발지다. 창립 1주년을 맞은 영종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의 비전과 ‘하늘을 향한 새로운 항해’라는 비전을 붙잡고,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더욱 힘차게 복음의 항해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 제치윤 목사(영종온누리교회)
2024-05-11 제1491호
[온누리가 함께 보낸 ‘장애인주일’] 사랑, 친절, 배려, 관심으로 하나 된 축복의 장(場) 온누리가 함께 보낸 ‘장애인주일’ 사랑, 친절, 배려, 관심으로 하나 된 축복의 장(場) 온누리가 함께 ‘장애인주일’을 보냈다. 지난 4월 20일(토)과 21일(일) 온누리교회 곳곳에서 ‘사랑’, ‘친절’, ‘배려’, ‘관심’을 주제로 장애인의 달 캠페인을 하고, 주일예배에서는 장애인들이 특순을 선보였다. 각 캠퍼스에서는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이 열렸다. 그야말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 된 축복의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올해 온누리교회 장애인 주일 주제는 ‘사랑’, ‘친절’, ‘배려’, ‘관심’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고, 그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제처럼 장애인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배려와 관심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을 참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주제는 ‘사랑’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게 바로 그들을 향한 사랑 표현이다. 장애인을 ‘장애우’, 비장애인을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틀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명칭이 옳다. 가끔 돌발행동(때리기, 소리 지르기 등)을 보이는 장애인을 만나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장애인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서 말로 표현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박마광 형제(SNS청년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장애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랑부에서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사랑부를 섬기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어느 날 장애인 청년이 먼저 제 손을 잡아줬습니다. 그날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그 아름다운 경험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친절’이었다. 장애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 표현 방법이 친절이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을 만나면 그가 먼저 내리거나 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친절이다. 정립원 성도(중국어예배공동체)는 장애인 주일을 보내면서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화장실에 걸린 ‘4월 장애인의 달 캠페인’ 포스터를 봤습니다. 그 포스터를 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잘 몰랐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장애인이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장애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을 먼저 배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장애인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배려’였다. 장애인들에게 양보하는 미덕이 바로 배려다. 예를 들어 주일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교회 주차장을 먼저 사용하도록 양보하고, 화장실도 장애인이 우선 사용하도록 양보하는 게 배려다. 박은희 성도(고양은평공동체)는 장애통합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장애인 주일이 더욱 뜻깊게 느껴졌다. “장애인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 예배당에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석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영아부터 성인까지 장애인들이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랑부가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는데, 그 시선이 관심과 사랑으로 바뀌기를 소망합니다.” 네 번째 주제는 ‘관심’이었다. 교회에서 보호자 없이 혼자 다니는 발달장애인을 만나면 부모나 선생님을 찾으러 같이 가자고 말을 걸어주는 게 관심이다. 목회지원실 담당 간사를 찾아가도 된다. 오미영 성도(예수사랑부)는 15년째 예수사랑부를 섬기고 있다. 그녀가 예수사랑부를 오래 섬기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받는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고, 장애인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애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사랑부에서 장애인들을 섬겨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섬기면서 받는 은혜가 훨씬 큽니다. 장애인을 무섭다고 생각하거나 피하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섬겨주십시오.” 사랑부 학부모의 간증 사랑 듬뿍 받고 자란 ‘한 아이’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사회 일원으로 자라도록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살피고 교육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인이 되어도 자립해서 살아가기 힘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장애인에게는 더 필요한 과정이다. 2015년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이를 양재온누리교회 사랑부에 등록시키면서 우리 가족도 온누리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다. 전에는 동네 작은 교회에서 아이와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아이가 성장하면서 눈높이에 맞는 예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장애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일대일로 돌봐주시며, 함께 예배드리는 사랑부 교사들 덕분에 우리 가족도 아이로 인한 분산되는 마음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매년 여름캠프를 위해 사랑부 교사들은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2박 3일 동안 온전히 아이들을 섬겨주신다. 그 덕분에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한 큰아이와 잠시나마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착석도 제대로 안 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순예배에 참석하면서 ‘내가 아웃리치를 가고,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순원들이 부담을 덜어주셨다.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다. 밤늦은 시간까지 순예배를 드리는 동안 아이가 집사님 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가끔 냉장고에서 음료수도 꺼내 마셨다. 그 아이에게 순원들이 사랑을 듬뿍 주셨다. 어느새 그 아이가 우리보다 순예배를 더 사모하고, 주말이면 사랑부 예배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제는 차분히 앉아서 예배드리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긍정적이고 좋은 경험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성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줬었다. 특수학교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일대일 면접이 있었는데, 면접관 선생님이 아이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다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리 가족이 공동체에서 받은 큰 위로와 격려, 사랑을 사랑부 부모님들과 아이들도 받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사랑부에 오신 부모님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 순예배에도 참석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했다. 지난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방과 후에 이용하는 센터 원장님이 아이가 성실하고 운동능력이 뛰어나다면서 장애인 의무고용인 직장 운동부 취업에 대한 정보를 주셨다. 협회에 수영선수로 등록하는 것을 도와주셨다. 취업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사랑부 목사님과 교사들, 공동체 식구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셨다. 모든 단계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나님은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한 아이’를 위한 모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지난달 4대 보험과 64세 정년이 보장되는 기업에 채용되었다. 이 모든 일을 앞서 행하시고 친히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이가 무사히 학령기를 마치고,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발걸음을 내딛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고, 사랑으로 섬겨주신 사랑부 교사들과 장애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서 기도해 온 사랑부 어머니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 교회에 잘 정착해서 하나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공동체 식구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희 가정을 기억해 주시고, 한결같은 기도로 힘을 실어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하다. 연약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을 돌보게 하시며,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자들로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 김영숙 성도(강남B공동체)
2024-04-27 제1489호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 온누리교회가 4월 21일과 28일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온누리교회는 매년 4월 재사용이 가능한 의류, 신발, 잡화, 생활용품 등을 기증하는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참여하는 교회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그 참여도가 높다. 성도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기증하면 굿윌스토어 매장에서 판매하고, 그 재원으로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꼭 필요한 캠페인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의 굿윌스토어 캠페인 참여가 실제 장애인들에게 어떤 영향과 변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찾아갔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임승진 형제(영업팀)는 굿윌스토어에서 일한 지 11년차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굿윌스토어 영업팀 에이스이자 수어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임승진 형제가 처음부터 수어를 할 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굿윌스토어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수어를 배우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명실상부한 굿윌스토어 도봉점의 대표 수어 통역사다. “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사람들과 관계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목사님 추천으로 굿윌스토어에 왔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직장 동료들과 관계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직장을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데 굿윌스토어에는 장애인의 취업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영업팀에서 저의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고, 수어로 청각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소통하는 것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최재훈 형제(물류팀)는 대학 시절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추락사고를 당했다. 몇 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결국,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는 도봉구 보건소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배워서 굿윌스토어 매장에 있는 카페직원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물류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그는 날마다 “직장을 다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갈 곳이 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릅니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 다른 일을 많이 했는데, 나쁜 상사를 만나거나 불가피하게 퇴직했습니다. 제가 정말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굿윌스토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굿윌스토어에서는 장애인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얼마 전에 자립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립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웃음) 함께 일하는 장애인 직원들에게도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하지수 자매(콜센터)는 4년 전 대인기피증이 심했는데 극복하고, 취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가족과 굿윌스토어에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여기서 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굿윌스토어에서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어려울 법도 한데 하지수 자매는 늘 친절을 잃지 않는다. “엄마랑 언니랑 물건사러 왔던 굿윌스토어에 취업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굿윌스토어는 직원들을 많이 배려해 주고,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이 좋아서 일하는 게 즐겁습니다. 게다가 다양하고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콜센터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저만의 노하우를 살려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웃으면서 말해서 듣는 고객들의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홍서윤 자매(사무보조)는 굿윌스토어 7년 차 직원이다. 전에는 인쇄소에서 일했는데 회사가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던 중에 굿윌스토어 사무보조 채용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했다. 다시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굿윌스토어에서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매우 만족한다고 고백했다. “장애인은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굿윌스토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좋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굿윌스토어가 정말 좋습니다.” 장은혜 과장(굿윌스토어 도봉점)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왜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소외된 장애인들에게는 일자리 그 자체가 행복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직원으로서 인정받고,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굿윌스토어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적극적으로 기증하면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장애인들이 자립하도록 돕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물건 하나라도 기증하고, 매장을 방문해서 구매해주시면 그것이 곧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것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많은 참여를 부탁합니다.”
2024-04-20 제1488호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온누리교회가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 중심에 ‘공동체 성경읽기’가 있다. 지난 3월 4일부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 모임’, ‘순 공동체 성경읽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6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비전홀에서 진행되는데, 그 유익과 은혜가 벌써 풍성하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그 고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만 해도 성경일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어디 있냐”고 고백하는 성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성경일독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일독을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크고 특별한 은혜로 손꼽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는 <우리말성경>으로 매일 신약과 구약을 함께 듣고, 읽는다. 5분 찬양, 15분 공동체 성경읽기, 5분 메시지, 5분 합심기도 순으로 예배가 이어진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경험한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성경을 듣고 읽으면서 누리는 은혜가 정말 특별하다”고 고백했다. 김국중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말씀 읽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좋든지 매일 새벽 교회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그동안 성경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중간쯤 가서 포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혼자 성경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더니 성경 읽기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말씀을 함께 듣고,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매일 구약과 신약을 균형 있게 읽으니까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게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최효은 성도(일산파주공동체)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더불어 함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하나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그 은혜를 기대하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큰 화면으로 말씀을 듣고, 보면서 더욱 집중할 수 있고,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습니다.” 김희선 성도(서빙고공동체)는 성경 읽는 좋은 습관이 만들어졌다. 분주한 삶에서 실천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성경 읽기가 이제는 즐겁고, 받은 은혜도 깊고 넓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받은 은혜가 기도로 이어지는 신앙의 성장도 경험하고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듣고, 읽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덕분에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맞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김선경 집사(일본어예배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말씀을 더 듣고, 더 읽고 싶고, 더 많이 기도하고 싶어졌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시간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한기인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한마디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라고 소개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나면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가득해진다고 간증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구약과 신약, <시편>을 함께 읽는데, 날마다 하나님이 제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김소망 선교사(TIM)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새벽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이라는 고요한 시간에 함께 성경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새벽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이 없어서 잠잠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와보십시오.” 사역칼럼 공동체 성경읽기, 하나님 말씀 듣는 훈련! <느혜미야> 8장 2~3절에서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씀한다. 실제 당시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스스로 해설자로 다가가기 전에 경청자로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구성을 크게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예배에서는 말씀을 적게는 1절, 많게는 1장 정도 읽고, 메시지(설교)를 길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은 성경을 봉독하는 부분인데, 이 시간이 너무 짧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신 이재훈 위임목사님의 제안으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특징은 본문 길이가 길고, 메시지(설교)가 짧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을 늘리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말씀 또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메시지(설교)가 끝나면 바로 합심기도로 넘어간다. 그래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1년에 성경을 일독하는데, <시편>은 두 번, 신약은 한번 읽고도 <로마서>까지 다시 한번 읽을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지속하기가 어렵다. 또한 말씀과 기도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혼자서 성경을 읽다 보면 기도가 약해질 수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이것을 보완할 수 있다. 함께 성경을 읽고,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도까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가장 큰 유익은 성경을 단순히 통독한다기보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 시간을 늘리고, 사람의 목소리는 줄여서 말씀이 말씀하게 하고, 이를 듣는 훈련이 바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시간’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말씀과 더욱 가까워지는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 강신익 장로(공동체 성경읽기사역팀)
2024-04-06 제1486호
[특집]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을 찾아라!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우정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독거노인들에게 따듯한 정(情)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다. 그들은 때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집수리도 해준다. 그들의 얼마나 정성스럽게 섬겼는지 꽁꽁 얼어 있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렸다. 지금은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뜨거운 우정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박온유, 이지영, 이희정, 김차영, 김현수, 김태현, 진병수, 공혜진, 김호영, 황명진, 정다영, 방유석, 노창우, 강원조.’ 독거노인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이름이다. 청년과 노인이라는 단어 옆에 ‘우정’이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굉장히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은 세대 간 갈등이 세계 1위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영국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갈등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28개국 시민 2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12개 갈등 항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7개 항목에서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중에서 빈부격차와 성별, 세대 갈등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28개국 평균 40%대인데, 우리나라는 80%에 달할 정도였다. 비율이 2배 가까이 높았다. 2018년 영국 BBC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전 세계 27개국 시민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개 갈등 항목에서 우리나라가 남녀갈등 1위, 세대갈등 2위, 빈부갈등 4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세대갈등이 세계 최고라고 공인받을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인데, 청년과 노인의 우정이라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세대갈등을 넘어서게 만들었을까? 청년과 노인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예수님 사랑으로 연결되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결성된 건 4년 전이다. 전에는 브릿지33+공동체와 산마루교회 성도들(노숙인 포함)이 함께 서울역 청소를 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사역이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멈춰 섰다. 아쉬운 마음에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다른 사역을 찾고 있었는데, 서빙고온누리교회 이웃사랑팀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로 지내며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는 어르신들의 사연이 브릿지33+공동체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브릿지33+공동체는 양재온누리교회 소속 청장년 공동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기꺼이 매월 서빙고동을 찾기로 했다. 마음이 맞는 청년 6명이 모여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의 태동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지역상품권을 들고 서빙고동, 동빙고동, 보광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분기별로는 생필품과 반찬 등이 담긴 ‘사랑의 상자’를 들고 찾아간다. 추수감사절 사르밧프로젝트에서 쌀 나눔을 할 때도 있다.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사역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만들어진 이후 4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동안 팀원이 늘어서 현재 14명이 동역하고 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만나는 어르신 대부분 홀로 지내신다. 무엇보다 정(情)이 고픈 분들인데, 웬일인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찾아갔을 때도 몇 번 오다 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다. 청년들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어드리고,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어르신들의 생일잔치를 열어드리기도 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4년 동안 꾸준히 이어지는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일까? 어르신들이 하나둘 마음의 문을 여셨다. 청년들이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품권만 주고 갈 거면 오지 말라”고 문전박대 하던 어르신들이 청년들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안부를 묻고, 준비한 선물을 나누고 일어서는 청년들에게 “나랑 같이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할 정도다. 귀가 잘 안 들려서 대화가 쉽지 않지만, 청년들의 전화만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청년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손자들이 집에 오는 것처럼 깔끔하게 단장하고 맞아주셨다. 한 어르신은 청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90세, 몸이 많이 아픈 어르신을 위해 청년들이 찾아갈 때마다 따듯한 국수나 부드러운 죽 등을 챙겨갔다. 그 어르신의 식사를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다. 청년들의 사랑이 그 어르신의 마음 밭을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복음의 씨앗이 금세 심겼다. 그 어르신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쁘게 고백하면서 청년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사랑과 섬김 덕분에 어르신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 청년들은 복음 전하는 기쁨과 조금씩 마음을 열고, 변화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다. 박온유 자매(브릿지33+ 이웃사랑팀장)가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뜨거운 우정을 쌓은 비결을 소개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면 나이를 떠나 정(情)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애틋하고, 그분들께 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어르신들도 저희의 마음을 잘 아시고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십니다, 손을 한 번 더 잡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합니다. 더 많은 어르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드디어 꿈꾸던 일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어르신들 댁에 갈 때마다 열악한 환경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 않는 현관문,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 타일이 깨지고 곰팡이 핀 화장실, 다 벗겨진 벽지, 얼음장 같은 바닥 등 어르신들의 주거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자매들이 어르신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방유석, 김태현, 강원조, 황명진 형제를 보내주셨다.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인데, 안전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따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팀원 대부분 자매들이라 가구나 장판을 교체하고, 수도관과 전기 배선을 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귀한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 댁을 드디어 수리할 수 있었다. 고장 나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화장실 환풍기를 고치고, 전등 스위치 배선 정리와 전등 교체를 해드렸다. 온수가 안 나와서 제대로 씻을 수 없던 어르신을 위해서 보일러를 수리해드렸다. 안방 전등 전기 점검, 현관문 닫힘 조절기 설치 및 페인트칠, 주방 양념통 선반 설치, 청소 및 물건 정리, 모기장 교체, 커튼 달기 등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대신해서 심부름도 하고 있다.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청년들이 자비량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어르신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뜨거운 우정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아름답고 귀한 헌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더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과 동역자가 필요하다. 문의: 010-2024-4220 기도제목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복음이 전해지도록, 어르신들이 영육이 강건하도록 2. 보일러 비용이 비싸서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사용하는 어르신들에게 난방비가 지원되도록 3. 문두현 어르신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눈과 치아 진료를 제대로 못 받는데 치료 받도록 4.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건강과 물질의 어려움 없이 어르신들을 계속 섬길 수 있도록
2024-05-04 제1490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더 사랑하고픈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하여” 만나고 싶었습니다 “더 사랑하고픈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하여”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 펴낸 김숙경 소장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면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으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부부들이 너무 많다. 힘들어하는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해서 ‘김숙경 사랑연구소’ 김숙경 소장이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펴냈다. 부부관계와 결혼 생활에 대한 명쾌한 솔루션이 담겨있다. 김숙경 소장은 15년 이상 ‘가족치료사’로 사역하고 있고, <온누리신문>에 ‘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다음은 김숙경 소장과의 일문일답.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가 화재입니다. 소개해 주십시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사랑이 메말라 버리고, 시들어 버린 부부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힘들어하는 부부들이 다시 사랑을 꽃피우고, 관계 회복과 갈등을 해결하도록 돕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부부 만족도 검사를 통해 부부의 현재를 알아 어느 영역에 성장이 필요한지를 보게 될 것이고, 부부 애착 검사를 통해 서로의 애착유형을 알고 안정된 관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부부에게 ”즐겁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서적 즐거움, 성적 즐거움, 영적 즐거움 등을 부부가 함께 누리면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열심히 준비해서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준비는 부족합니다. 또한 크리스천 부부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책이 많지 않습니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 친밀한 부부관계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위기 상황이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 모든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고, 친밀한 부부관계를 누리도록 돕기 위해서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많은 부부가 사랑을 주고받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제가 부부 생활 혹은 결혼 생활을 주제로 강의하고, 부부상담을 하면서 정말 많은 부부가 친밀해지는 방법과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어떻게 친밀해질 수 있는지,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부부상담을 하다 보면 비슷한 고민이 있는 부부들을 정말 많이 만납니다. 부부들이 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고 싶은 게 제 마음이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교회에도 제자 훈련이나 신앙생활을 돕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부부 관계 회복을 돕는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부부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게 최우선순위라는 것을 꼭 알려줘야 합니다.” 독자들이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읽고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에서는 부부들이 결혼 생활에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갈등을 세분화하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관계 회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책 내용을 삶에 적용하면 부부의 친밀감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부부들이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지식을 얻도록 돕는 쳅터도 있습니다. 부부의 성생활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활용해서 부부 소그룹 모임도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또래, 유사한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부들이 이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은 독자들이 있습니까? “제 소망은 이 세상 모든 부부가 이 책을 필독서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배우자와 더욱 친밀하게 지내고픈 분들, 건강한 부부관계를 하고픈 분들, 특히 사랑이 식었다고 여기는 부부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부부가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덮어두는 게 아니라 부부 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읽으면서 날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부부가 어떻게 친밀함을 유지하고, 성장해야 하는지를 매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넌크리스천이 읽어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결혼을 준비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랑은 성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성장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가 자녀들에게는 많은 투자를 하는데, 부부관계에는 투자를 하거나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관계보다 중요한 게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건강하고 친밀해야 자녀들에게 그 정서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부부의 사랑과 소통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따듯한 언어로 쓴 책이기에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부부들이 친밀감을 반드시 회복할 것입니다. 날마다 건강한 부부, 친밀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추천의 글 ‘사랑’, 이 단어의 익숙함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사랑은 참 쉽다’는 태도를 갖게 했다. 사랑을 쉽게만 생각한 우리의 교만과 사랑에 대한 무지가 개인의 삶과 부부의 관계, 가정과 사회, 온 나라를 병들게 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을 얼마나 몰랐는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문제를 지적하고 깨닫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 이미 오랫동안 사랑을 해왔고, 사랑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 새로운 사랑을 찾고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 이지웅 목사(더바이블미니스트리 대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아는 것만큼이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자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혼 생활은 더욱 그렇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칫 전문가의 도움을 얻고자 비성경적 가치관을 가진 분에게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부르심과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될 수도 있다. 김숙경 소장은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랑과 결혼, 부부 생활에 대한 대안을 알려준다. 성경적이면서도 사역 현장에서 쌓인 풍부한 처방 가이드는 반드시 부부로 부르신 이유를 깨닫게 하고, 변화되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부부들은 결혼 생활을 성숙하고 성화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담임) 이 책에는 오랜 시간 부부들의 속마음을 다독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가정을 건강하고 바르게 세워 가도록 카운슬링해 오신 김숙경 소장의 전문성이 담겨있다. 현장에서 만나 온 부부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함께 담겨있다. 이 책을 통해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서로의 속마음을 몰라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부부,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로 상처 주고 괴로워하는 부부,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휘둘리는 부부들에게 꼭 맞는 진단과 처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해서 아파하는 당신이, 사랑해서 더욱 행복한 당신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 주영훈 작곡가(방송인)
2024-05-04 제1490호
[특집]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양신 성도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김양신 성도(강남C공동체)다. 김양신 성도는 복음 전하고, 전도자를 세우는 소망을 품고 매주 토요일 새벽 서울에서 광주광역시로 가는 기차(KTX)를 탄다. 매주 이어지는 여정이 몹시 피곤하고 지칠법한데 그녀의 발걸음이 늘 가볍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김양신 성도가 한 마을회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새벽 5시 8분, 김양신 성도가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는 광주광역시다. 3년째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 시간에 기차를 타고 있다. 물론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잘까?’, ‘이번 주만 쉴까?’ 끊임없이 유혹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유혹이 김양신 성도의 전도 열정을 결코 가로막지 못한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몸을 일으키게 된다. 그 뜨거운 전도 열정이 만든 ‘열두 명의 전도자들’ 김양신 성도는 전라남도에서 전도폭발훈련생들을(이하 전남 전도폭발훈련) 교육하는 훈련자다. 매주 광주에 가서 전도자들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교회를 다니면서 전도폭발훈련 하기도 하고, 훈련생들과 함께 전라남도 곳곳을 누비며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 공원 등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지역교회의 요청이 있으면 직접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다. 김양신 성도가 서울에서 첫 기차를 타고 광주광역시에 도착하면 오전 7시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친언니 집으로 향한다. 언니와 함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전도폭발훈련 훈련을 한 타임 진행한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전라남도 함평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함평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훈련생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양신 성도의 토요일은 쉴 틈이 없다. “금요일까지 일하다가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광주에 가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정말 피곤합니다. 그래도 광주에 도착하면 하나님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전도할 힘을 새로 채워주십니다. 그 덕분에 저는 광주에만 오면 힘이 솟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거뜬히 해낼 힘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니까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에는 방학도 없다. 전도자를 한 명이라도 더 세워야 한다는 김양신 성도의 열정 덕분에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훈련하고 있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전도폭발훈련 수업을 듣는 훈련생이 한 명이어도 달려간다. 그 열정 덕분에 처음에는 전남 전도폭발훈련생이 두 명뿐이었는데, 어느새 열두 명이 됐다. 이 열두 명의 전도자들이 전남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하러 땅끝까지 나아갔던 열두 사도들처럼 말이다.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마을회관’ 하루는 전남 전도폭발 훈련생들, 강남C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천도교 사상이 깊이 뿌리 내린 어느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던 참 궂은 날씨였다. 걱정을 가득 안고 갔는데, 궂은 날씨마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 농사를 지으시는데, 비가 많이 오니까 일을 못 나가시고 마을회관에 모여 계셨습니다. 그날 세 마을을 돌았는데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가득했습니다. 마을회관에 꽉 찬 어르신들을 보면서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곳이 바로 전도의 황금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생을 천도교와 불교를 따르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김양신 성도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라 하늘과 땅, 자연에 친숙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어르신, 농사하면서 비가 안 오면 어떡하나요?’, ‘낮과 밤, 계절, 날씨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등의 질문을 던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어르신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셨다. 김양신 성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할 테니까 마음에 인정이 되면 “아멘”이라고 대답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접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어르신들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셨다. 어르신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날 이후 남해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남해로 2차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이번에는 의료사역팀과 함께 마을회관 네 곳을 다녔다. 어르신들에게 수액을 놔드리면서 한 분 한 분에게 복음을 전했다. 1박 2일 동안 주민 80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79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마을회관 전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을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느 목사님이 사역하는 곳이었다. 그 목사님은 추운 겨울 붕어빵을 직접 구워서 어르신들께 나눠드리면서 복음을 전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팀이 힘을 보탰다.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그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광백수교회에 어르신 24명이 찾아오셨다. 전남 전도폭발팀에게 마을회관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것이 전도의 참맛!” 김양신 성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난다. 어느 날은 광주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시는 97세 어르신에게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남편의 구박 속에서 7남매를 홀로 키우며 힘들게 살아온 어르신이었다. 그 어르신은 평생 절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의지하며 지내셨다. 교회 다니는 자녀들이 전도하려고 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셨다. 자녀들이 목사나 전도사와 함께 방문해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 어르신을 만나러 김양신 성도가 갔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요양병원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복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이 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병상에 누워계신 어르신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르신 그동안 힘드셨지요?’라고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평생 이웃 종교를 섬긴 마음을 알고 갔기에, 예수님을 믿는 일이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라는 설명했습니다. 그 어르신이 제 이야기를 쭉 들으시고, 영접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 말이 인정되면 두 눈을 크게 떠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어르신이 기도 한 문장마다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시며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한번은 함평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많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집에 온갖 불상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신을 섬겼지만, 예수만은 거부했다. 어릴 적 교회에 다니다가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교회와 척을 지고 살았다고 했다. 그에게 김양신 성도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형제님이 처음에는 자신이 섬기는 다른 신들처럼 ‘한번 알아나 보자’는 생각으로 제 이야기를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 형제님을 만나주셨습니다. 제가 부정맥이 있는 그 형제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드렸는데, 그 형제님이 ‘선생님이 믿는 신이 내가 믿는 신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내 몸에서 귀신이 나가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귀신을 쫓는 은사나 치유의 은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신을 섬기는 그 형제님의 상황에 맞춰 기적을 베푸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 남자는 예수를 깊이 만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전도자가 됐다. 이처럼 수많은 전도 성공 사례가 있으면 으쓱할 법한데, 김양신 권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전도는 절대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시며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장소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전도는 절대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면 그 이후 일은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의지해서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전도의 참맛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2024-04-06 제1486호
[특집]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손을 잡아주고, 이주민을 보살피고, 선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오지에 가는 일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도 만난다. 그 다섯 번째 주인공은 김숙경 권사(서빙고공동체,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다. 김숙경 권사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의료사역과 더불어 현지 교회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을 쏟았다. 김숙경 권사의 가슴 뜨거운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권사님, 우간다 함께 가실래요?” 2024년 새해가 시작되기 며칠 전, 김숙경 권사에게 메시지가 왔다. 매년 명절에 선교지로 의료사역을 가는 어느 병원 원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올해 구정 연휴에는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지인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 간다고 했다. 김숙경 권사가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이기도 하고, 선교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기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Yes!”를 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숙경 권사의 우간다 의료사역 일정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의료사역 일정이 한 달로 늘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베드로교회로! NGO 더멋진세상이 의료사역을 하는 남수단 난민촌은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 남수단 국경 지역과 가까이 있다. 김숙경 권사와 NGO 더멋진세상 의료선교팀은 남수단 근처 ‘모요’에 숙소를 잡았다. ‘모요’는 아프리카에서도 이동이 가장 힘든 지역 중 하나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열 시간 달리고, 중간에서 숙박한 다음, 다시 페리(ferry)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다. 김숙경 권사는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의료사역만 하고 돌아가기에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하나님이 어느 마을을 떠올리게 하셨다. 모요에서 차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산골짜기 ‘구피마을’이었다. 마침 그곳에 NGO 더멋진세상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헌당한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사역 일정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NGO 더멋진세상 사역 보고에서 들었던 ‘구피마을’을 떠올리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가 떠오르게 하시면서 ‘내가 사랑하는 그 교회에 가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곧바로 하나님께 ‘네 알겠어요, 제가 갈게요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종했어요.” 그렇게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현재 베드로교회를 섬기는 선교사나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교회를 개척했던 선교사 부부는 사역 기간이 끝나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베드로교회를 관리하던 NGO 더멋진세상 우간다 지부장도 사무실을 이전해서 매주 방문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숙경 권사가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려면 숙식과 교통편을 포함한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70세를 코앞에 둔 여성 혼자 감당해내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붙잡고 결단했다.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그곳에서 사랑에 빠지다 김숙경 권사는 이왕 들어간 그곳에서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료사역을 위한 한 달 비자 기간을 꽉 채워서 곧장 항공편을 3주 연장했다. 그리고 기도하며 사역계획표를 만들었다. 사역의 목적과 방식, 프로그램 내용과 진행 방법 등을 빼곡하게 적었다. 사역에 필요한 물품도 샀다. 예배를 위한 키보드, 영어판 일대일제자양육 교재, 전도용 영어 팝업책, 영어 찬송가, 영어 성경, 창조과학 교육을 위한 창조모빌, 전도를 위한 복음 팔찌와 전도지 등 현지 사역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준비했다. 자비량으로 준비하는 중에 아프리카 한 달 선교를 혼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후원금도 들어와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우간다로 떠나는 날, 식사하다가 오래전 치료한 앞니 세 개가 부러졌다.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치아가 부러졌다고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에 꼭 가야 했기 때문이다. 김숙경 권사는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작은 통에 넣고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가 시작됐다. 남수단 난민촌 의료사역을 마치고 들어간 구피마을은 생각보다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만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당연히 TV나 냉장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의 흔적이 드문 오지 중 오지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곳에서 김숙경 권사는 행복을 찾았다. 구피마을과 사랑에 빠졌다. “흙벽돌과 흙바닥 위에 잔 나뭇가지로 지붕을 올린 우간다의 전통 가옥이 참 정겨웠어요. 무더운 날씨지만, 가끔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에요. 들판에 자라는 푸른 나무와 풀들, 그리고 그들의 주식이 되는 까사바 열매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은 마음에 큰 평안을 주었어요. 무엇보다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해맑은 얼굴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어요. 구피마을은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연과 그 자연에 순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작은 호의에도 큰 미소로 감사하는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김숙경 권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피마을을 찾았다. 우간다에서 김숙경 권사가 보낸 하루는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큐티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순간접착제로 조심히 붙인다. 그날 사용할 교재들과 전날 모요시장에서 장을 본 음식과 간식을 챙겨서 썬데이 형제의 차를 타고 모요에서 구피마을 베드로교회로 출근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들과 훈련한다. 제일 먼저 온누리교회 양육의 뿌리인 QT 훈련, 그리고 일대일 제자 훈련, 점심 식사 후에는 예배를 위한 음악 교육을 한다. 악보 보는 법과 키보드 연주법을 가르쳐 준다. 잠깐 휴식 후에는 전도 훈련을 한다. 전도 훈련이 익숙해지면 창조신앙 회복을 위한 창조과학 교육도 했다. 중고등학생들이 하교한 오후 5시부터 6시 30분까지의 교육은 먼저 찬양단을 위한 발성 훈련을 한다. 이후 시간은 청년 리더십들이 맡아서 한다. 집중력도 좋고 성실해서 기대 이상으로 훈련이 잘 진행 되었다.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없는 이 교회에 훈련된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십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돌보고, 다음세대를 훈련 시킬 수 있도록 그동안 배웠던 모든 것을 전수했습니다. 모든 훈련을 기쁨으로 참여한 마낫세, 패트리샤, 임마누엘의 열심에 정말 크게 감동했습니다.” 김숙경 권사는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베드로교회를 찾아가 청년들을 교육하고, 성도들과 어울렸다. 훈련팀과 함께 구피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복음도 전했다. 복음이 온 마을에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전도하는 날도 만들고 전도용품도 마련해 주었다. 전하는 이나 전도 받는 이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숙경 권사의 열정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교회 앞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교회로 초대해서 창조과학 강의도 했다. 아이들은 동양에서 온 아줌마를 신기해하며 매일 교회를 찾아와 함께 찬양을 했다. 이웃 전도를 하면서 만난 마이클 할아버지 가족들은 베드로교회 일원이 됐다. 베드로교회의 리더십들은 김숙경 권사와 함께 예배 순서와 진행 등 예배 과정을 재정비했다. 찬양팀을 신설하고, 어린이 주일학교 분반 담임제도를 만들었다. 모든 성도가 성경통독도 시작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보고도 김숙경 권사는 끝까지 겸손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제 삶의 모든 것, 구피마을에서의 일들은 은혜의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제가 잠시 머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선교지에서의 한 달 살이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2024-03-30 제14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