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엡 2:14)]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평화
[맛있는 말씀 해설(엡 2:14)]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평화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 된 것을 헐어 내셨고”(엡 2:14).
앞뒤 맥락을 고려할 때 본문이 말하는 화평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수직적 차원의 화평이다. 죄로 인해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화평이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엡 2:3~5).
둘째, 본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화평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서로를 하나로 연합해서 한 몸이 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에 원수된 것을 허시고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해 화평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다(엡 2:15).
바울에게 화평은 이 두 가지 차원, 즉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별개가 아니다. 사실 본문이 말하는 화평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 되게 하는 핵심 원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대인이요, 헬라인으로서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경험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근본적인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화해는 마땅한 것이다.
십자가로 이루어진 화평은 당시 에베소교회를 둘러싼 상황과 가치관에 큰 파장을 가져다주는 호소였음이 틀림없다. 이 편지가 향했던 에베소는 로마 본토와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이다. 교통의 요지인 덕에 군대 이동이 용이했고, 행정적 통제가 수월했으며, 반란 진압도 효율적인 도시였다. 곧, 로마제국이 외치던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를 작동하게 하는 상징적인 도시였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교회를 이루고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자신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을 것이다. 힘과 세력의 논리, 민족과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는 많은 차별과 소외감을 낳았고, 반목과 갈등의 악순환을 심화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제국이 주는 힘에 의한 평화 대신, 희생과 화해에 기초한 십자가의 평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로마제국이 보여주는 힘에 의한 평화, 곧 폭력이나 억압으로 위협이 될 대상을 제거하는 방식의 평화는 임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는 불안과 긴장이 계속 심화하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틀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이 줄 수 없는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우리가 져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지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성소 휘장을 찢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을 이루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높이 가르던 중간 담을 무너뜨려 둘이 한 몸 되게 한다. 곧,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는 원수된 것을 잠시 보류하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강제적 통일성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결속된 한 몸 된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하늘의 시민권을 지닌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평화가 간절한 시기를 살고 있다. 나라, 조직 등 집단적 거대 담론의 영역뿐이겠는가. 개인적 영역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늘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혹시나 있을 위협에 대비한다면서 중간에 높은 벽을 쌓아간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란 진정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툼과 미움, 증오가 팽배하고, 서로를 힘으로 통제하려 하는 이 세상에 어떤 평화를 전해야 할까. 오늘 말씀이 우리를 향해 묻는다.
/ 박근범 목사(김포공동체)
2026-04-25
제15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