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질문 있습니다]결혼은 결단이자 헌신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결혼은 결단이자 헌신! “저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상대방이 결혼하고 싶어합니다. 이 사람이 내 평생의 배우자인지, 내가 한 사람과 평생 잘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으로 결혼해야 할까요?” 청년들과 상담하다 보면 단골 메뉴처럼 이야기하는 주제가 ‘결혼’이다. 결혼을 주제로 나 또한 질문을 받곤 한다. “목사님은 언제 결혼에 대한 확신이 들었나요?”라는 질문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마주하며 살고, 근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결혼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결혼을 확신하는 게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 이후 부부 관계를 결혼 전에 먼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 관계에서 아무리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길고 깊어도 연애 관계는 어디까지나 연애 관계일 뿐이다. 데이트하고 나면 각자 집으로 가야 하고, 나의 민낯을 확인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결혼해서 한집에 산다는 전제로 알게 되는 서로에 대한 모습이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이러한 이유로 ‘살아보고 결혼을 결정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단순히 한집에 함께 살고, 생활을 공유한다고 해서 결혼 생활을 먼저 경험하거나 배울 수는 없다. 결혼은 언약의 관계이고, 동거가 아닌 결혼이라야 주어지는 약속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결혼을 확신하려고 할 때 대체로 나에 대한 확신보다 상대에 대한 확신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결혼과 만남을 주제로 상담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저 사람이 나의 평생의 배우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이다. 그때마다 나는 주저없이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평생의 시간이 주어져도 확신할 수 없다. 결혼을 통해 삶을 나누고, 한 몸이 될 때 진짜 서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결혼은 상대에 대한 확신이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상대에 대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모습이나 성격을 보게 되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의 삶의 패턴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다름과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이유로 고백할 수 있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 앞에 배우자를 사랑하기로 결단할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결혼할 때다. <창세기>가 전하는 야곱이 가정을 이루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그가 가정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영적으로 준비시키셨다. 그가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린 게 먼저였다.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던 인생,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던 인생에서 하나님 앞에 삶을 헌신하는 인생으로 바뀐 이후에 배우자를 만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혼은 확신이 아니라 결단이자 헌신이다. 우리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조차 예측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데, 평생 함께할 누군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결단과 헌신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게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순전하게 준비되었다면 믿음으로 고백하고, 확신하고, 결단하라.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어 주실 것이다. / 정한효 목사(W청년부) “결혼은 확신이 아니라 결단이자 헌신이다.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2023-05-27 제1444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예수님은 이미 만나주셨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만나주셨다! “저에게는 남들이 말하는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특별한 신앙체험’이 없습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건가요? 궁금합니다, 목사님!”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만남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한다. 때로는 그 만남을 통해 극적으로 변화되고, 폭발적으로 신앙이 성장하곤 한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만나고픈 마음이 곧 신실하고 거룩한 갈망이다. 예수님과 만남을 향한 갈망은 믿음에서 발아한 싹이다. 그 만남의 갈망은 굳은 땅을 뚫고 자라난 믿음의 새싹과 같다.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 되심을 믿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믿기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꽃 피우지 못했고, 열매 맺지 못했지만 분명 생명력을 가진 갈망이다. 故 하용조 목사님이 믿음을 임신에 비유해서 설명하신 적이 있다. 여성이 결혼해서 막 임신했을 때는 자신의 몸에 자라는 생명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야 몸에서 이전과 다른 현상을 발견하고, 그제야 임신한 것을 알게 된다. 믿음 역시 그렇다.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자라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엡 4:13). 지금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자라 풍성한 생명이 될 것이다. 혹여 작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다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만남이 소위 특별한 신앙적 체험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길을 알려주셨다. “만일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 구원에 이릅니다”(롬 10:9~10).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입술이 될 수 없다. 성령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한다. 믿음이 있는 영혼에게 구원이 있다. 체험은 구원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구원의 필수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기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요 14:6).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많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군병들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만나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만남의 갈망이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옆에 계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날마다 성령의 시선으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기를 축복한다. / 최종현 목사(하늘대학부)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만나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만남의 갈망이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옆에 계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코너는 청년들의 신앙적인 고민과 질문에 대학청년부 목회자들이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코너다. 질문 및 고민 보내실 곳: joo@onnuri.org
2023-05-13 제1442호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해체주의의 반기독교적 속성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해체주의의 반기독교적 속성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종래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철학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철학 이론)는 1960년대 후반 파리 고등사범 철학 교수였던 자크 데리다가 제안한 이후 서구 사상계와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론이다. 대부분의 현대 문학이나 철학 비평이론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해체주의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글쓰기’와 ‘글읽기’, 그리고 ‘해석’에 관한 것으로 이전 시대의 서구 형이상학 전통을 전반적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사조는 모더니즘의 이성적이며 틀에 짜인 모든 것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며 탈 이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는다. 문학·철학 비평에서 시작돼 건축, 미술, 음악 같은 문화예술 분야에 투영되어 기존의 효율과 명확성을 중요시하는 구조들을 해체하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말(speech)을 글(writing)보다 중요시한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이 다른 매개체 없이 직접 전달하는 것이 그 의도를 가장 진실하게 전달한다는 ‘진리의 현존(presence of truth)’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전달되는 이야기는 말로 전달되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진실성을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 말씀(logos)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복음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의 주장은 말 중심의 서구 전통 형이상학이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글’뿐 아니라 ‘말’에도 기표(표시 하는 바)와 기의(뜻 하는 바)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고 주장하며 ‘차연(differance)’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 단어는 자크 데리다 해체주의의 중심적 개념으로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합친 다름’으로 정의했다. 이것은 ‘difference’와 같은 발음이지만 뜻은 다르며, 글에서는 둘의 다름을 구분할 수 있지만 말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말이 글보다 의미를 더 진실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말 중심주의’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도전은 전통 서구사상에 존재하던 이분법적 서열 계층구조의 기반을 흔들게 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말과 글, 기표와 기의 등의 이분법적 계층구조를 설정해 전자를 중심에 놓고 후자는 전자에서 파생되어 그 의미를 보충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는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는 상하구조를 해체한다. “말과 글은 상호보완적이지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중심적이지 않다. 모든 말과 글은 은유적이며, 기표와 기의를 구분할 수 없다. 또 어떤 단어는 잘못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해석하는 과정에 삭제하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까지 해체주의를 이끈다. 롤랑 바르트는 1967년 그의 에세이 <작가의 죽음>에서 문학에서의 해체주의를 주장한다. 전통적 독서에서는 작가가 의도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출판과 동시에 작가의 의도는 사라지고 모든 권한은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손에 넘어간다. 즉, 독자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만의 생각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과 글의 해체가 문학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법의 해석이나 경전의 해석으로까지 연결되면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해체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해체주의가 서구문화 전반에 끼친 강력한 영향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가지는 반기독교적인 속성 때문이다. 해체주의는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어떻게 규정하든 간에 그것은 절대적이지도 최종적이지도 않다. 진리는 항상 상대적이며, ‘타자’인 ‘거짓’을 억압해서 얻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또한 문장은 수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은유의 덩어리이며, 자유롭게 단어들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문장에는 절대 진리가 없고 절대적인 의미도 없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문장은 항상 확정적이지 않으며 열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경을 의도적으로 오역하는 퀴어 신학이 태어났다. 문학적 해체주의가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해 사회의 이분법적 대립구조(자본가 vs 노동자, 강자 vs 약자)에 대해서도 전자에 의한 후자의 억압구조를 비판하고 타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해체주의적 비판은 대안이 없으면서 파괴적이기 때문에 사회를 결코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없다. 결국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무정부 상태의 파멸로 몰아넣게 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 류현모 교수(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발문 해체주의적 비판은 대안이 없으면서 파괴적이기 때문에 사회를 결코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없다.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무정부 상태의 파멸로 몰아넣게 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2023-05-13 제1442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우리가 섬기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지금 하는 일이 100%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먼저 질문자의 상태에 대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응원을 하고 싶다.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 대부분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회사에 입사한 3년 이내 신입사원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무려 10명 중 8명이 이직 또는 퇴사를 고려했거나 지금도 고민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반응일 것이다. 청년부 사역을 하면서 많은 청년이 일과 신앙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건강한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그 분은 쉬지 않고 일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물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 2:10, 12, 18, 21, 25, 31). 우리는 가장 처음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하나님도 일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기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셔서 동산을 일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15).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땅에 가득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그리고 ‘동산을 일구고 지키라’는 일을 주셨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만드신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태초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세상 가운데 운행하신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우리가 하는 일과 일터는 어떤 곳인가? 단순히 개인의 성취와 경제적 수입을 위한 직장에 그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고 부르신 곳이며,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은혜의 자리다. 직장이 만족스럽지 않은가? 물론 그럴 수 있다.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 원인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먼저 직장에서 하나님의 소명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해 하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주께 유업의 상을 받을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분은 주 그리스도이십니다”(골 3:23~24). 나를 위해,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예수님과 함께 일해야 한다. 부르심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할 때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 최재윤 목사(길청년부)
2023-04-29 제1440호
[주일강단] 하늘이 열리다 하늘이 열리다 창 1:6~8, 20~23 / 이재훈 목사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믿으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됩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복잡한 질문만 남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세상이 우연한 어떤 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연을 기대하고, 우연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전능하신 분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인생이 됩니다. 창조에 대해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를 유한한 지식과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설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창조가 불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모순처럼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또 <창세기> 1~2장 기록이 창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빠짐없이 기록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유한한 인간이 연구를 통해서 완전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모두 기록할 수 없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만 택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창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믿어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은 문학적인 비유나 상장.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이 담긴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모든 세상과 보이는 모든 세상을 포함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은 진화론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많은 학문으로 높은 성을 쌓고 있습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매우 소수이기에 사이비 취급을 합니다. ‘한국창조과학회’같은 단체를 과학을 부정하는 사이비 단체처럼 매도합니다. 여러분, 절대 그 정보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천동설을 믿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은 처형당할 만큼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적 발견들은 도리어 진화가 아닌 창조를 증거합니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바라보며 아주 오랜 세월 우연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믿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전능하시며 지혜로우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설계를 통해서 질서를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실험이든지 믿음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토대로 증명해 가는 것이 과학적 연구방법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되었다고 가정하고, 오랜 세월 우연한 변이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이 형성되었다고 가정하고 실험합니다. 그러나 진화를 증명할 화석, 유전자 문제 등 중요한 과학적 근거들이 진화론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6일 동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를 거부하는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조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때 겸손해야 하고, 창조주의 계획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지 않고 6일 동안 창조 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우연한 진화의 변이에 의해 세상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이 그 생각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진화를 사용해서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고, 순수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설계와 능력의 말씀으로 이 모든 세상을 질서 있게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든 부정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세상을 질서 있고, 전능하신 설계에 의해서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3일은 무형의 상태에서 이 세계의 형태와 영역을 창조하셨습니다. 나중 3일은 그 형태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크게는 형태를 만들고 나서 채우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각 3일은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땅으로 진행됩니다. 셋째 날을 보면 땅이 식물을 내고, 여섯째 날에는 땅이 동물을 냅니다. 첫째 날과 넷째 날이 짝을 이루는 단일한 창조를 하지만, 둘째 날과 다섯 째 날은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진 창조를 하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분리된 두 개의 창조를 행하십니다. 점진적으로 하나님이 질서를 만들어 가시는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둘째 날과 다섯 째 날이 짝을 이루는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 공간이 생겨 물과 물이 나누어지라’ 하셨습니다”(6절). 둘째 날에 물을 나누심으로 하늘을 만드시고, 물에 거주하는 생물과 하늘의 생물, 곧 어류와 조류를 창조하셨습니다. 물 가운데 공간이 생기도록 물을 나누셨습니다. “물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 물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다시 살펴보면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고 했습니다. 2절의 ‘땅’은 세 번째 날에 나오는 물이 한꺼번에 모이게 해서 바다를 만들 때 드러난 그 땅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땅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구를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전체적인 선언이고, 2절은 그중에 땅의 창조, 즉 지구의 관점에서 창조를 바라보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부터 땅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 또 우리가 거주하지 않는 환경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하기에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 환경을 중심으로 한 창조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지구보다 더 큰 창조의 선언입니다. 그 결과로 지구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2절에 물로 덮여 있는 형태가 없는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이 천지창조 전체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2절 이하에 땅의 창조에 대한 배경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벵도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에 2절의 ‘물’이라는 원물질의 창조가 포함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1절과 2절에 엄청난 시간이 들어있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구의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일부분만 설명하시고, 2절이 땅의 창조 과정이기에 여기서 물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의 창조 이후 물을 나누심으로 그 사이에 공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때 지구의 상태가 물의 상태였습니다. 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게 아니라 물을 나누심으로써 공간과 대기권을 만드셨습니다. 진화론은 항상 단순한 물질로부터 점점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게 가설인데 물(H2O)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물보다 미세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소, 산소, 핵 등은 물보다 훨씬 미세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이 수소나 핵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가장 안전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복합물질이 물 아니겠습니까? 이 물을 나누심으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세상을 조장하셨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신비하고 놀랍고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물의 분리를 통해서 공간을 창조하셨고, 공간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셨습니다. ‘공간 위의 물’이라고 표현된 것은 창조과학회 과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언제든지 물이 될 수 있는 수증기 상태의 존재입니다. 물이 기체 상태로 있다가 비가 되는 것처럼, 언제든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기체, 하늘에 떠 있는 상태를 물이라고 표현한 일종의 덮개 효과(Canopy effect)를 만듭니다. 그래서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수증기의 띠가 덮개 효과를 발휘해서 인간이 거주하는데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창세기> 2장 5~6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안개가 땅에서 솟아 나와 온 땅을 적셨습니다.” 비가 내리려면 기압골이 있어야 하는데 기압골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 안개만 땅에서 올라오고, 그 자체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전과 이후 크게 바뀌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 800~900년 사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공간 위 물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출렁이듯 물이 하늘에 떠다녔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때 하늘의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공간 위의 수증기 상태의 물이 쏟아져 내림으로써 지구를 보호하는 띠가 사라짐으로써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영향을 받게 되고, 추운 곳과 더운 곳이 생기고, 북극과 남극이 생기고,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광야가 생기는 지구 상태에 혼돈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설명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물을 나눠서 ‘하늘’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하늘은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이 아닙니다. 그 하늘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가 ‘Sky’라고 말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창조를 통해 의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주께서 그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습니다”(시 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보여 줍니다”(시 19:1).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대기권과 대기권 밖에 있는 더 넓은 의미의 하늘이라면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라고 할 때 그 하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하늘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신 하나님이 빛을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빛과 하늘, 모두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하늘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도록 하신 것입니다. 상상력과 창조력을 일깨우기 위해서 둘째, 하늘을 창조하심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없네”라고 한다면 과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일단 하늘이 파랗습니다.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기권 밖으로 가면 파란색이 점점 없어지고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공기층이 있기 때문이고, 공기층이 인간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체 상태의 많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별의 크기가 실제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앤트로포스(?νθρωπο)’라고 합니다. 영어로 인류학을 ‘앤트로폴로지(Anthropology)’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앤트로포스라는 말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문명이 발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늘을 보고, 그 하늘에 움직이는 해와 달과 별을 보며 무한한 우주를 발견하며 인간은 겸손하게 됩니다. 무한한 우주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우주의 광대한 규모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으뜸 되는 태양계의 태양조차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별 하나일 뿐입니다. 은하에 있는 수많은 별 중에 하나고, 그 은하도 수많은 은하 중에 평범한 하나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무한한 우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를 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다 만들었어. 이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만들 만큼 너는 소중해. 그렇게 인간은 고귀한 존재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떠나서 달 주위를 맴돈 때가 1968년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의 지표면을 돌면서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달에 올라간 비행사들이 지구로 어떤 교신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지구로 보낸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입니다. 달에 가 봤더니 지구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구 같은 행성이 없는 것입니다. 화성을 가보고, 달을 가보고, 다른 행성을 가봐도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지구처럼 완벽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신 것은 지구의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는 대기권, 파란 하늘을 순수하게 건조한 상태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색, 무미, 무취의 상태의 기체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질소 78%, 산소 21%, 기타 1%입니다. 80km 안에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합니다. 산소보다 더 많은 것이 질소입니다. 대기 중에 가장 풍부한 기체인 질소가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들의 영양소 공급원입니다. 비가 오면 식물들이 살아나지 않습니까? 질소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면 질소의 화학작용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산소를 뿜어냅니다. 그래서 비온 뒤에 숲을 가면 그 맑은 공기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기체 속에 있는 질소를 통해 식물들이 공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둥 번개를 무서워합니다. 번개가 칠 때 온도가 높지 않습니까? 그것이 질소를 반응시켜서 화학작용에 의해 더 풍성한 영양을 공급합니다. <욥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개의 빛으로 먹을 것을 넉넉히 공급하신다.” 번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지구 주변에 운석들이 떨어지는데 대기권이 없다면 그대로 떨어져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빗물도 떨어질 때 대기권이 없으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빗물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는 것은 공기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한 과정, 오랜 시간 지나다보니 어떻게 됐다고 믿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늘을 보며 완벽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어떤 한 가지 종에서 모든 종이 나왔다고 하는데, 대기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공기도 진화합니까? 생명이 거주하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환경과 빛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하는 진화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지, 발견할 뿐이지, 빛의 기원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을 창조하신 분을 설명합니다. 물을 나눔으로, 대기권을 창조하심으로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기초 환경을 만드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다섯째 날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아래 물과 위의 물, 대기층과 공간을 형성하심으로써 그 공간을 나는 새들을 창조하셨고, 물속에 다니는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에서 날아다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다 생물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온갖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온갖 날개 달린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20~21절).‘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하나에서 많은 종류가 나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종류대로’였습니다. 각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지 하나에서 여러 종류가 나온 게 아닙니다. 진화론이 결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어류와 조류입니다. 물고기와 새는 진화론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류와 조류를 창조하신 게 정말 기묘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진화론이 나올 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물고기로 존재하는 종류와 하늘을 나는 종류가 다르게 종류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류와 조류가 섞이는 화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인 화석은 지구적인 홍수를 증거할 뿐입니다. 세상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며 질서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원래 오묘하고 복잡하고 광대한 것이 조화 있고, 질서 있게, 하나님의 지적인 설계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점차 망가졌을 뿐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조화로운 창조의 신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모든 것을 종류대로 창조하시며,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5-27 제1444호
[주일강단] 내일이 창조되다 내일이 창조되다 창 1:3~5, 14~19 / 이재훈 목사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선언할 따름입니다. 창조를 증언할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된 책임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이요, 모든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만물이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 만물이 창조되었는가?’에 초점을 둘 뿐입니다. ‘어떻게’라는 인간의 과학적 탐구로는 창조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두 알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반항입니다.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충분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흔적을 심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드신 모든 만물, 작은 피조물 속에도 하나님 속성 일부를 나눠 주심으로 그 중요성과 필요, 용도와 존재 목적에 따라서 흔적을 심어 주셨습니다. 가장 많이 하나님의 흔적을 담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타락 시키는데 초점을 둔 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반역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 반역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반역의 역사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반역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 6일 동안 과정을 거쳐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질서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봐도 창조 기록은 어떤 설화나 신화, 풍유가 아니라 역사적 계시입니다. 큰 틀에서 과학이 발견하는 진리와 전혀 배치되지 않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 삼일은 하나님이 형태를 만드시고, 나머지 세 날은 그 형태 안에 내용을 채우는 창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창조하셨습니다. 네 번째 날에는 그 빛의 통로가 되는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입니다. 두 번째 날에는 물을 공간 아래 물과 위의 물로 나누시고, 그 공간을 하늘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섯째 날은 하늘을 나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심으로써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세 번째 날에는 하늘 아래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함으로 드러난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습니다. 그 땅에는 식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날에는 그 땅에 존재하는 동물, 생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짝을 이루고,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짝을 이루고,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앞의 세 날은 형태를 만드는 창조였다면 남은 세 날은 그것을 채우는 창조였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매우 질서 있고 체계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려고 하나님이 순차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첫째 날과 네 번째 날의 창조를 연결하고, 앞으로 3주 동안 6일 창조를 살펴보고, 마지막에 인간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너지의 근원, 생명 지탱하는 ‘빛’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게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 빛은 태양 빛이 아닙니다. 태양은 네 번째 날에 창조된 것이기에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아닙니다. 도리어 태양이 빛나게 하는 빛입니다. 태양에 빛을 부여하는 빛입니다. 태양 빛보다 근원적인 빛입니다. 태양을 빛나게 하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을 창조하신 게 첫 창조입니다. 태양이 사라지면 온 세상이 어둠에 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으로부터 나온 빛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빛 되심을 표현합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도 “빛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빛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이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3절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빛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빛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창조된 빛입니다. 만물의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일서>와 <디모데전서>, <야고보서>에 나오는 빛이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빛이라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에 필요한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으로써의 빛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게 천지창조인데,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태양의 빛만 비춰지지 않아도 생물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식물도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고, 하늘로 자라는 것은 빛이 비춰야 합니다. 햇빛이 없으면 사람도 영양분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물론 노아 홍수 이후 자연이 파괴되어서 햇빛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빛이 생명을 주고, 지탱하게 하는 힘입니다. 병을 치료하는데도 빛을 사용합니다. 몸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태우고, 피부 치료도 빛으로 합니다. 레이저도 빛의 종류입니다. 빛이 가져다주는 생명과 에너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그 빛의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무지개가 빛을 투과할 때 여러 가지 색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을 연구하면 할수록 빛의 세계가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극히 일부분만 체험할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빛이신 하나님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고, 생명을 지탱하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다!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신 이유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진술을 받으실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습니다”(히 4:13). 빛이신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어떤 피조물도 사람에게는 숨을 수 있어도 하나님 눈은 가릴 수 없습니다. 어떤 어둠 속의 일이라도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며,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빛이 생겼는데,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낮과 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사역에 반복되는 단어가 ‘나누다’입니다.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둘째 날에 물을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셨고, 셋째 날에 땅과 바다를 나누셨습니다. 이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양성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이 원래부터 두 개로 나뉘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원론’이라는 사상은 처음부터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가 동등한 힘으로 서로 싸우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게 여기 나옵니다.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별도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어둠조차 빛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어둠은 나쁜 게 아니었습니다.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통해서, 낮과 밤을 창조하심으로 시간의 흐름을 만드셨습니다. 빛과 어둠이 가져다주는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눈으로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것도 명암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색과 예술도 명암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입체적인 것도 빛과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빛과 어둠의 조화가 없었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공간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이 세상을 풍성하고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저녁과 아침이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날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하나님께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만물에게 필요한 것이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시고, 풍성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은지를 빛과 어둠의 조화를 통해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과 항상 함께 나오는 말씀이 “그대로 됐습니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던 이유는 말씀하신 그대로 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지켜보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계속 일하십니다. 시간 그리고 공간의 창조 첫째 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심으로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간의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공간 속에 살면서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그런데 영원에 더 가까운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공간에 빼앗기지 않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마련하는 게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이 없으면 어떤 공간에 있어도 허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날마다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영원에 닿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보다 공간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에 감사하기보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멋진 자연에 들어가면 우리가 기쁘게 되고, 무엇인가 새롭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첫째 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통해서, 낮과 밤을 통해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넷째 날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빛을 세상에 비춰주는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것인데, 그것으로 인간을 위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공간에 빛들이 생겨 낮과 밤을 나누고 절기들과 날짜들과 연도들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게 하라’”(14절). 여기서 ‘빛들’이라고 번역된 것이 광명체들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그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을 반사하고 나타내는 통로가 되는 광명체, 발광체들을 의미합니다. 낮과 밤의 흐름을 통해서 날짜와 연도를 계산할 수 있도록 표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첫 번째 날에 빛과 어둠을 통한 시간의 흐름이 창조되고, 네 번째 날에 광명체들을 통해 공간의 창조가 통합됩니다. 그래서 첫째 날 시간을 창조하시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날마다 ‘내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 내일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창조의 기록에서 또 반복되는 표현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입니다. ‘날’이라는 표현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창조의 시간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일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신학을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날은 우리가 생각하기 어렵고 판단하기 불가능한 종류의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벵도 “<창세기> 1장을 가지고 천문학과 심오한 학문을 탐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패턴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지, 창조의 연대를 계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6일을 창조의 날로 나누신 것은 창조질서대로 살아가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제7일째 안식하신 것은 6일 동안의 창조와 제7일 안식은 6일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휴일을 제정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 이전에는 휴일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항상 일하는 날이고, 주인들은 항상 노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하루 안식이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일종의 도피심리 매커니즘입니다. 창조와 진화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에 의한 게 아닙니다. 진화를 과학적 탐구에 의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출발을 모릅니다. 출발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느냐고 할 때 진화론은 항상 오랜 시간 동안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패턴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태양이 존재하기 전부터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창조되었습니다. 밤의 영역을 저녁이라고 하고, 낮의 영역을 아침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라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패러다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 속에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깨어 있을 때부터 하루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하루는 저녁부터 아침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모든 절기를 저녁식사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저녁 전까지 합니다. 일상에서는 안 지키지만 절기는 지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녁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어야 합니다. 하루의 출발을 하나님 안에서의 쉼과 안식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침은 우리가 세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해가 떴고, 하나님이 시작하신 하루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입니다. 우리는 저녁에 쉬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침에 깨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앞서 시작하신 일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아침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을 내가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 하나님이 밤새 준비하신 일을 우리가 아침에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녁에 지쳐서 쉼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따라가는 삶이 창조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일은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도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5-20 제1443호
[주일강단] 모든 것의 시작 모든 것의 시작 창세기 1:1~2 / 이재훈 목사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지는 질문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사춘기 방황의 시절에 호기심으로 한번 던져 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작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시작을 아는 게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당할 때 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을 때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기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방황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세찬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이 세상의 강물에 떠내려가듯 살고 맙니다. 깊은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했던 욥도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파헤쳐 가면서 결국 이르게 된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욥이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느냐? 네가 아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단단한 기초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2~6). “빛의 근원지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네가 그것들을 제자리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욥 38:19~20). 하나님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 질문은 욥이 원하는 대답과 동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오히려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만물의 시작을 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신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고난이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사실만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부터만 알 수 있기에 자신의 시작을 스스로 능력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적 사고나 과학적 연구로도 인간은 그 시작을 명백하게 알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모든 원리 자체가 창조에 의해 생겨난 이후 결과이므로 창조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어떤 자료나 이론은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광대함과 신비함은 과학이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말씀의 증거를 통해서만 그 시작의 이유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대답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시작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절). 성경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창조’를 의미하는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 ‘바라’라는 동사는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로 이루어집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아싸’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다른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바라’는 ‘create’라는 단어를 쓰고, ‘아싸’는 ‘make’라는 동사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우리말로는 ‘만들다’는 표현으로 쓸 수 있습니다. 또 ‘야차르’라는 동사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물질을 새롭게 조성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가장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쓰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어떤 존재나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이미 어떤 물질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하지만, 이것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훨씬 낫습니다. NIV도 ‘비어 있다(empty)’고 썼습니다. 무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을 설명할 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표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히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미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부터 우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창조를 통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만들 때 대개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만듭니다. 재료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도 재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로부터 창조하셨기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완전한 자유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아주 작은 생물, 미생물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초월적, 실제적 영역을 포함 모든 것이 시작된 태초(in the beginning)가 존재합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표현, 인간을 위한 표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더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시작 시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만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인간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입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창조의 정확한 시간, 연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가 구체적으로 몇 년 전에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시작이 있었다”, “그 시간의 출발이 있었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역사 너머에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게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기권과 우리가 딛고 있는 흙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모든 초월적 영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실제의 영역을 포함한 것을 ‘하늘과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초월적인 세계와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의 세계 모든 것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할 때 그 ‘하늘’과 ‘땅’은 대기권의 하늘과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적 실제, 초월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뜻이 오늘 삶 속에,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늘과 땅’이 같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이어서 ‘곧’이라고 한 것은 해석입니다. 즉, 하늘과 땅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해석을 근거해서 <니케아 신경>에서는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한 시점이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2절).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2절에서는 땅에 집중합니다. 1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나오고, 2절에서는 하늘이 언급되지 않고 땅만 언급됩니다. 1절은 모든 것의 창조에 초점을 두었다면, 2절에서는 땅의 창조에 집중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가 지구 중심의 창조를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1절의 결과로 2절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혼돈하여 공허하다’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었기에 1절과 2절에 큰 간격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많은 공백을 우리가 상상하며 해석하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그 결과가 공허하고 혼돈하다면 하나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설명 이후 2절부터 땅의 창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서술적인, 주제상의 순서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땅의 창조를 이뤄가는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3절 이하에 오는 6일 창조가 어떻게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 내용을 채우시는 창조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3절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해석하면 늪에 빠집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로힘, 성부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1:1~3). 여기서 ‘그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부터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골로새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계셨고,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이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을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며 존재하는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의 사랑, 성령 안에서 그 아들과 누리시는 사랑, 그 사랑이 흘러넘쳐 창조하셨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 모든 것이라는 창조가 나 한 사람, 나같이 작은 존재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붙잡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창조의 신앙입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의 증언, 선언 그리고 대답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증언입니다. 창조의 유일한 목격자가 계십니다. 창조주 그분입니다. 모든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이 창조 역사를 증언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창조주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언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신론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의 존재를 당연한 사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은 유물론을 배격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범신론을 배격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는 종교, 철학, 사상, 신에 대한 관념 등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선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너는 지음 받은 존재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만 하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우연히 존재했다고 하는 막연한 대답을 하면 막연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신격화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 창조주의 솜씨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피조물 자체를 신격화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숭배를 가리켜 ‘인간의 자기기만이요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인간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두 구절의 창조 기록을 자신의 증언, 선언, 대답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창조를 분석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가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만드실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닌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된 것을 말씀하는데 단 한 절이면 충분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창조를 설명하는데 1장의 30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제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말씀이 단순한데 그 범위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런데 그 표현이 얼마나 간결하고, 과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합니까? 전문적인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입니다. 창조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이고,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고, 참된 지혜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전도서> 12장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축복된 미래를 가져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5-13 제1442호
[주일강단]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전 5:5~11 / 이재훈 목사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빌 3:10~11).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가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알고자 한다”, “이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알고자 한다’는 것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체험적인 앎입니다.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고,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지금 죽었다가 바로 부활하는 체험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현재 우리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체험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은 진노를 당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깨어 있든 자고 있든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9~10절).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분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는 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는 게 부활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단계가 이어져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합니까?”(롬 6:3). 하나님 구원의 해결책은 개선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고치는 게 아닙니다. 성격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옛사람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주시는 약속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음을 경험하는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1~2).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엡 2:4~6). 이미 완료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닙니다.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려고 할 때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것도 완료된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경험하는 일을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믿는 모든 자,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그분과 함께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전의 생명이 아닙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다른 차원입니다. 성육신하신 생명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완전한 죽음을 통과해 새롭게 살아나신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탄을 이긴 생명이요, 세상을 이긴 생명이요, 육신을 이긴 생명이요, 지옥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미래 우리에게 약속된 것만이 아닙니다. 현재 삶 속에서도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부활을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살리심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시제가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날 때 그 사건과 연합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세대에 걸쳐 감춰져 온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 1:26~27).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비밀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믿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 부활과 함께 우리도 부활해서 새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것만 믿는 게 아닙니다. 살아계신 그분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미래에 확실히 약속된 부활과 영광을 지금 삶 속에서 맛보고,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 살도록 하려고 영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생명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 성육신을 제외한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승천, 그분의 재림에 함께 연합하고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음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늘에 올리심을 받아 그분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함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있을 영광을 바라볼 때만 이 일이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그처럼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임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삶은 영적으로 잠자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5장 6절에서는 악한 삶을 ‘자는 삶’이라고 비유합니다. 원문을 보면 ‘곯아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무관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것은 다시 오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의 모습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에게는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깨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기에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미래에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현재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구원의 기대감만이 아니라 현재 체험하는 구원의 긴박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으로 평가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신부와 같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만남과 같은 준비를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이 어느 때 오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성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올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어서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근신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변화를 기대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무감각하게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예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예배로 간주하신다.’ 깨어서 자신을 근신하는 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셋째, 더 나아가 무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이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가슴받이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씁시다”(8절). 엄격한 훈련을 통과한 군인만이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든, 자든, 함께하는 자신을 늘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 소망, 사랑이 나옵니다. 은혜의 세 가지 요소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제일이 사랑이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는 소망을 강조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순서를 바꿔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깨어 있도록 돕습니다. 소망은 우리가 무장하도록 돕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근신하도록 돕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장래의 부활만 약속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고, 그리스도와 함께 근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장되어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십시오.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능력을 전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5-06 제1441호
[맛있는 말씀해설]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6) 맛있는 말씀해설 “…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이 말씀은 성도들이 크게 혼란스러워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됨이냐”(겔 18:2). 지금까지 교회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배웠는데, 위의 본문을 보면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내 믿음과 상관없이 부모님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의 후손과 자녀들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그의 자녀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이유가 전부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게 만들기에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 말씀에는 올바른 해명이 필요해 보인다. 이 난해한 구절은 과연 어떤 취지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은 부모가 신앙이 없어서 저주를 받고, 한평생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맥락을 먼저 살펴야 한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십계명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십계명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언약을 체결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은 하나님 은혜의 구원을 토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적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본문은 부모가 죄를 지었는데 자녀가 3~4대에 걸쳐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 말을 우리가 아는 대로 인과응보식 처벌이나 혈통적 가계에 저주가 임한다는 뜻으로 보면 안 된다. 고대 가정의 문화적 맥락에서 볼 때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고대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한 가정의 영적인 대표로서 3~4대, 친인척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미치는 대표성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만일 가장이 큰 실수로 가산을 탕진하거나 잘못된 일에 가담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나머지 가족과 식솔들이 엄청난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 자녀들에게 저주가 유전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천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문자적 해석보다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봐야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천대까지 이를 정도로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엄청난 사랑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악의적인 죄를 계속 짓는데도 부모님의 선한 행위 때문에 벌을 면제받거나 구원받는 것처럼 곡해해서 이해하면 결코 안 된다. 혹자는 이러한 난해성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식으로 설교하는데, 이는 매우 반성경적이고 올바른 복음의 해석이 아니기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류의 모든 죄가 대속 되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선포한다. 믿음으로 내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더는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약속하고 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게 다윗 가문 이야기다. 이 말씀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맞는다면 다윗은 즉각적으로 심판받아야 했다. 후손들 모두가 심판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2023-05-27 제1444호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네오마르크시즘이 기독교에 끼친 악영향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네오마르크시즘이 기독교에 끼친 악영향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20세기 사회와 경제에 맞게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이 이념은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주체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대립만 강조했다. 그러나 네오마르크시즘은 이를 확장해서 다양한 집단 즉, 인종, 성,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을 강조한다. 네오마르크시즘은 대안적인 사회체제와 경제모델을 제시하지만, 그 근원이었던 마르크스주의처럼 자유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불공정한 권력 구조와 계급 간의 대립을 강조한다. 네오마르크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각국에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시에 봉기해서 공산혁명을 일으키지 못했었는가?”라는 자성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 원인을 ‘문화주도권(cultural hegemony)’에서 찾았다. 지배층인 귀족이나 자본가들의 문화, 즉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중심 가치로 두는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리고 혁명을 일으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람시는 10년 이상의 감옥 생활 동안 33권의 감옥노트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네오마르크시즘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2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생한 문화비판이론의 대표적인 학파이다. 이들은 대중문화와 매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변화를 다루는데 중점을 뒀다. 그람시와 이 학파의 직접적인 관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그람시의 이론을 계승 및 확장해서 문화와 매체가 대중을 지배하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초기의 이 학파는 독일의 호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주도했다. 1930년대 나치 정권 등장으로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서 이 학파를 주도하던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1940년 미국에 이민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미국에서 뿌리내리고 발전했다. 마르쿠제는 뉴욕과 보스턴 유수의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UC샌디에이고로 옮기면서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도 관여했다. 그의 글 ‘순수한 관용에 대한 비판(a critique of pure tolerance)’을 통해 모든 것에 대해 공평하게 관용해야 한다는 ‘순수한 관용’의 개념은 불충분할뿐더러 제도적 불평등과 억압이 특징인 사회에서 오히려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종 차별, 성 차별 또는 억압을 조장하는 관점들은 관용 받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며 약자에 대한 관용의 개념을 확립했다. 그리고 네오마르크시즘의 아버지라 불렀다. 네오마르크시즘이 기독교에 끼친 가장 나쁜 영향은 ‘성-생명-결혼-가정’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기본 가치를 해체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람시가 그의 감옥노트에서 제시한 문화주도권 획득의 방법은 개인의 성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기혼자의 혼외 성관계를 확장하고, 미혼자의 혼전 성관계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 결과는 가정의 파괴와 결혼 관계의 약화를 가져와 교회와 국가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해체하게 된다. 성적으로 타락한 가정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자녀들이 거리에 나가게 되고, 불안한 가정들이 재생산되면서 사회는 불안해지고 공산혁명의 기회가 온다는 것이 문화주도권 획득을 위한 그들의 처방이었다. 네오마르크시즘을 포용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가 중요시하는 결혼을 가장 큰 악으로 간주하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전통적인 성, 사랑, 결혼의 개념을 혐오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라”는 생육문화명령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구성된 가정에 내린 최초의 명령이다.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거룩함으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성경적 결혼제도를 존중하고(중혼 금지, 동성혼 금지), 부부의 성적 순결을 지키며(간음 금지), 태아(낙태 금지)나 죽어가는 사람(안락사 금지)도 귀한 생명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사람이 좌우할 수 없다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생명-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 류현모 교수(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발문> 그리스도인들은 ‘성-생명-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2023-05-27 제1444호
[맛있는 말씀해설]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1) 맛있는 말씀해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1)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시간, 공간, 물질, 우주, 생명, 인간 등이 전혀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한다. 모든 것의 시작을 설명하는 이 놀라운 진리를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간의 경험과 사고, 지식 등 모든 것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한 가설과 신화들을 만들었다. 아예 시작을 부인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다는 것이다. 또 과거의 어떤 모습이 변해서 현재의 모습이 된 거라고 상상한다. 많은 전설과 신화에서 어떤 신이 죽어 땅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생각들은 과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과학자들은 거대한 우주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는 ‘정지우주론’을 주장했다. 그런데 우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게 관찰되자 우주가 대폭발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빅뱅이론’이 등장한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시작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드디어 창조를 인정한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빅뱅이론이 성립되려면 우주 전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지성과 과학의 한계다. 무(無)에서 모든 것이 생겼다는 창조의 개념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 1절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데 무엇이 저절로 생기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개념 너머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이제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시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시간도 창조하셨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공간’이라고 표현한다. 20세기 들어서기 전까지 사람들은 시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가지지 못했다. 공간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지만, 시간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밝혔고, 그래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나 미래의 시공간으로 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20세기 과학이 밝힌 시공간의 존재를 수천 년 전에 쓰인 <창세기> 1장 1절이 기록하고 있다.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 처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21세기 과학도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를 조금도 설명할 수 없다. 과학은 단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를 연구할 수 있을 뿐이지, 무(無)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초월적 능력을 검증할 수 없다.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를 믿으면 모든 게 훤히 보이고 알기 시작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압니다”(히 11:3)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믿으면 보이고, 그리고 알게 된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질서가 존재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창조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엉뚱한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인간과 생명의 창조는 진화론, 우주의 창조는 빅뱅이론으로 대신하는 이론들은 순수한 과학을 넘어서 왜곡된 믿음 체계가 된다. 창조신앙을 과학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와 우주에서 사는 누구도 하나님을 거부한 것을 변명할 수 없다(롬 1:20). 하나님 은혜로 <창세기> 1장 1절의 위대한 진리를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기도하며 기대하고 있다. / 이은일 장로(성북공동체,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
2023-05-20 제1443호
11번째 캠퍼스 ‘영종온누리교회’ 11번째 캠퍼스 ‘영종온누리교회’ 5월 7일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및 헌당예배 드려 11만 영혼 구원하고, 열국의 영혼 선교하는 비전 11번째 온누리교회 캠퍼스 영종온누리교회가 창립했다.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로 49(운남동 1709-3)에 있다. 지난 5월 7일(일)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및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에는 온누리교회 목회자와 리더십, 영종온누리교회 성도, 지역주민 및 교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영종온누리교회 창립 및 헌당예배는 당회서기 홍성호 장로 대표기도, 더블레싱 특순, 이재훈 담임목사 메시지, 전영한 회장(하님(주) 대표) 헌사, 감사패 증정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이재훈 담임목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이 목사는 “새 포도주는 발효과정에서 팽창하기 때문에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터지지 않는다”면서 “영종온누리교회가 새 포도주 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가득한 교회, 새 가죽부대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전영한 회장은 “영종온누리교회가 거듭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는 교회, 은혜가 풍성한 교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도육환 목사(영종온누리교회 담당)는 “130여 년 전 대한민국 선교가 시작된 인천에 열방을 향한 선교 비전센터로서 영종온누리교회가 세워졌다”면서 “영종도 지역교회들과 함께 11만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국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선교하는 교회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제래미 어린이(초5, 꿈이자라는땅)는 “드디어 영종온누리교회가 온전히 완성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면서 “하나님 안 믿는 친구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장기홍 성도는 “영종도 주민들에게 환영받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종온누리교회는 2019년 12월 전영한 회장의 재산 기부로 태동했다. 당시 전영한 회장은 “내 재산은 내 힘으로 번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게 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게 마땅하다”면서 100억 원을 기부했다. 영종온누리교회는 2021년 4월 착공감사예배를 드리고, 2022년 2월 상량식을 거쳐 2023년 5월 7일 창립예배를 드렸다<관련기사 6면>.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2023-05-13 제1442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동화로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 만나고 싶었습니다 동화로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 홍경미 작가의 신앙 그리고 고백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와!”라는 탄성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도 닦았다. 잊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홍경미 작가와 인터뷰하려고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동화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동화에서 만난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홍경미 성도(분당A공동체)가 쓴 동화의 힘이다. 하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동화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홍경미 작가를 만났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으뜸포도마을은 한 집 건너 포도 농사를 지을 정도로 포도가 유명하다. 마을이 시작되는 길목에 키가 크고, 열매도 풍성하게 열리는 왕 포도나무가 있다. 그 왕 포도나무에 탐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그리고 왕 포도나무의 포도가 잘 자라도록 따뜻한 햇볕과 포근한 바람, 촉촉한 비를 선물하는 ‘아버지’가 있다. 포도송이들은 그 아버지의 보호 아래 왕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포도 두 송이가 집을 나갔다. 왕포도나무 가지에만 매달려 있기 지루하고, 아버지 보호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나섰다.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포도송이들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죽을 뻔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물을 마시지 못해 온 몸은 쭈글쭈글해졌다. 그제야 아버지가 있는 으뜸포도마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떠나왔다. 과연 포도송이들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홍경미 작가(분당A공동체)의 동화, <집 나간 포도>의 줄거리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율처럼 느껴진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막 하나님을 만난 초신자, 하나님과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은 성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까지 하나님 품으로 초대한다. 녹음실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 홍경미 작가의 동화를 덮으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이토록 잘 전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의 신앙이 궁금했다. 당연히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 내공이 단단한 성도라 여겼다.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홍경미 작가는 하나님을 만난 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40여 년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부적이 한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무당이 와서 굿을 했고요. 엄마는 옆집 문에 교회 문패가 붙어 있으면 ‘예수쟁이 왔다’고 욕하실 정도로 기독교를 싫어하셨습니다. 주변의 몇 몇 말과 행동이 다른 일부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40여 년 하나님과 예수님을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홍경미 작가는 알아주는 워커홀릭(workaholic)이었다. 야근이 취미이고 주말에도 회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20여 년간 그렇게 땅만 보며 살았다. 원하던 대로 목표도 이뤘다.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광고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인정받았고, 부하 직원들도 잘 따랐다. 마냥 순탄하게 달리던 홍경미 작가의 삶에 예상하지 못한 제동이 걸렸다. 직장 상사와 갈등으로 회사생활이 힘들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롭힘을 계속 당했다. 공황(恐慌, 두려움이나 공포로 갑자기 생기는 심리적 불안 상태)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복도에서 그 상사를 마주치면 숨이 막혔다. 회사에 갈 생각만 하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꾸역꾸역 몇 개월 버텼다. 버티고 버티다 ‘이러다가는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홍경미 작가만 보면 전도하려고 눈에 불을 켜던 거래업체 녹음실 사장님이 말씀 모임에 초대했다. “제 사정을 잘 알던 녹음실 사장님이 매주 목요일에 모임이 있으니까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너무 힘드니까 가게 됐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직장인 예배의 자리였습니다. 괜히 왔다 싶고, 녹음실 사장님께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설교를 듣는데 모두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한 번만 더 가보자’는 마음으로 한 달에 한 번, 2주에 한 번씩 찾아갔다가 매주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 녹음실에서 홍경미 작가는 하나님을 만났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이유 없이 저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던 중에 저도 똑같이 이유 없이 그 사람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 귀가 열렸고 듣기 싫었던 상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처럼 상사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졌습니다.” 동화로 전하는 ‘참 좋은 하나님’ “이 좋은 하나님을 왜 아무도 나에게 소개하지 않았지?” 홍경미 작가가 말씀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나서 든 생각이다. 홍경미 작가는 그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야근을 하고 새벽에 퇴근해도 꼭 성경 3장씩 읽고 기도를 드렸다. 출근하면 지난밤에 읽은 하나님을 팀원들에게 전했다. 갑자기 국장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며 놀라워했다. “제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니까 팀원들이 까무러치게 놀랐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이야기밖에 안 하니까 저를 말릴 정도였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팀원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기회가 있어서 제가 ‘식사기도를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사주는 밥이니까 어떻게 거절하겠어요?(웃음) 이후 매일 새벽에 일어나 팀원들의 도시락을 싸기 시작 했습니다. 제가 정성을 보여야 순순히 하나님 이야길 들어 줄거라 생각했거든요.(웃음) 그만큼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온종일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던 바로 그때 <양 한 마리가 사라졌다> 집필을 시작했다. 목자를 사랑하지 않는 양 한 마리도 귀히 여기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사랑을 동화에 담았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어머니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간호를 도맡았다. “엄마가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엄마를 만나주시려고 생긴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어야 1~2년 누워계실 줄 알았는데 9년 가까이 병원에 계셨습니다. 긴 시간 동안 계속되는 아픔과 고난의 상황을 이해하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홍경미 성도는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성경을 녹음해서 들려드렸다. 요양병원에서 드리는 예배에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참석했다. 하나님을 강하게 거부했던 어머니는 계속되는 고난 속에 말씀을 진짜로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요양병원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매일 전화해서 <요한복음> 14장과 15장을 읽어드렸다. 그 때 이미 어머니는 꺼져가는 촛불 같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가 소천하시기 전에 어떻게든 영생의 소망을 전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을 읽어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음식을 못 넘기시던 어머니께서 찬송가 ‘주 음성 외에는’의 후렴구인 기쁘고 기쁘도다를 부르셨어요. 그때 함께 부르며 어머니께서 영원한 본향, 천국의 삶을 믿기 시작했다는 믿음이 들어 엄청 울었습니다.’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동화 <집 나간 포도>에 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시고, 영원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그 사랑을 동화에 녹여냈다. 고난이라 생각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이 있음을 글과 그림으로 따뜻하게 풀어냈다. “제가 쓴 동화를 읽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나고, 사랑하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2023-05-27 제1444호
[가정사역] 가정사역과 함께 행복한 가정 만들기! 가정사역과 함께 행복한 가정 만들기! 행복하고 건강한 부부, 가정, 미래를 선물합니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신혼, 중혼, 황혼 등 인생 시기에 따라 갈등이 다르고, 임신과 출산, 사별과 이혼 등 예기치 못한 환경 변화 등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인생의 단계마다 경험하는 어려움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에서 알려주는 행복한 가정 만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단계를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고, 지혜롭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에서는 인생 단계별로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역팀을 세분화해서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맞춤 양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가정사역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만 배워도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결혼해 보니까 알겠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의 뜻 말이다. 부부의 사랑, 젊음의 패기, 꿈과 희망만으로는 헤쳐나가기 버거운 게 결혼생활이다. 20~30년을 각자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꾸렸는데 문제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면 그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부부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면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법도 꼭 알아야 한다. 온누리교회 가정사역본부에서는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어로 내걸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의 단계마다 찾아오는 문제와 위기를 온전히 극복하도록 돕고 있다. 부부사역팀(아름다운동행, 젊은부부학교), 하가훈팀(하나님의가정훈련학교, 대외협력), 드림사역팀(야베스맘, 드림어게인), 출산장려사역팀(크리스천 결혼문화, 헬로맘, 헹가래)으로 사역팀을 세분화해서 성도들에게 맞춤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행복한 부부 생활’ 배우기 부부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정의 시작인 부부가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 부부의 행복이 곧 가정의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젊은부부학교’에서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젊은부부학교는 젊은 크리스천 부부들(20~40대, 결혼 12년 차 이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정의 원리를 가르쳐준다. 말씀을 바탕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가르쳐준다. ‘성경적 결혼관’, ‘남녀차이 & 부부 대화’, ‘친밀한 부부의 삶’, ‘축복의 가정’ 등을 주제로 실제적이고 심도 있는 강의를 제공한다. 무엇인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먼저 경험한 이들의 조언과 지지만큼 값진 게 없다. 부부 생활도 마찬가지다. 부부코칭 프로그램 ‘아름다운동행’에서는 가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갈등, 시행착오를 다른 부부들과 나누고, 부부코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8주 동안 일대삼 부부 코칭을 통해 실제적인 부부 관계를 배울 수 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정말 귀한 선물이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돌볼 의무가 있다. 자녀 양육은 부모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 양육이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그때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을 찾으면 된다. 자녀 양육에 첫발을 내디딘 부모, 사춘기 자녀교육에 대해 알고 싶은 부모, 자녀 양육과 중년의 어려움이 겹쳐 힘겨워하는 중년 부부들을 위한 솔루션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가정훈련학교’는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다. 두란노아버지학교와 두란노어머니학교 사역의 모태이기도 하다. 결혼 10년 차 이상 부부를 대상으로 하나님이 꿈꾸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도록 돕는다. 자녀들을 위한 ‘홀리 스카우트(Holy Scout)’ 프로그램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성경적 가정제도의 원리’, ‘부부 대화’, ‘부부의 성’, ‘자녀교육’, ‘가정 경제’ 등을 주제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다. 가정에 새 생명이 찾아오는 임신과 출산만큼 좋은 소식이 또 있을까? ‘헬로맘 스쿨’에서는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는 예비 엄마, 임산부, 영유아기 자녀가 있는 엄마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성경적인 태교 방법부터 임신과 출산 이후 마음 관리 방법, 영유아기 자녀 양육까지 성경적 부모를 만드는 실제적인 방법을 아낌없이 전수한다. ‘새로운 삶, 행복한 미래’ 꿈꾸기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에서는 예기치 못한 고난의 파도를 만난 성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혼자들의 회복을 돕는 ‘드림어게인’과 여성사별자모임 ‘야베스맘’이 그것이다. 이혼과 사별의 아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온전한 회복을 돕는다. ‘드림어게인’은 이혼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 충격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매주 토요일 예배와 매년 두 번 스쿨(상반기, 하반기)을 개강한다. 이혼자, 이혼 위기에 있는 사람, 별거 중인 성도가 대상이다. 드림어게인은 타교회 성도 비율이 50%나 될 정도로 외부에서도 칭찬과 관심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야베스맘’은 사별로 인한 정서적 상실감과 두려움을 예배로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회복을 경험하도록 돕는 여성사별자를 위한 모임이다. 매주 화요일(비대면)과 토요일(대면) 정기모임을 하고, 재능기부, 야유회, 수련회, 세미나 등도 한다. 온누리교회 가정사역에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사역도 있다. ‘크리스천 결혼문화팀’에서는 매년 ‘결혼문화세미나’를 개최해 결혼 적령기 청년과 부모를 대상으로 올바른 결혼문화를 교육한다. 오는 6월 10일에는 40대 이상 미혼기독청년을 위한 결혼문화세미나 ‘지중해(지금이 중요해)’를 실시한다. ‘헹가래팀’에서는 ‘청춘클래스’ 프로그램을 통해서 크리스천 청년들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유익한 강의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문의: 02-3215-3221
2023-05-20 제1443호
[행복드림콘서트] 부모님께 드린 가장 귀한 선물 '복음' 부모님께 드린 가장 귀한 선물 ‘복음’ ‘행복드림콘서트’ 148명 결신, 107명 세례 신청 올해도 사랑하는 부모님께 가장 귀한 선물 ‘복음’을 드렸다. 지난 5월 8일(월) 서빙고온누리교회 본당에서 60세 이상 부모님을 위한 맞춤전도집회 ‘행복드림콘서트’(이하 행복드림콘서트)가 막 올랐다. 부모와 자녀 378명(부모 227명, 자녀 151명)이 참석했다. 전도대상자인 부모 227명 중에서 148명(65.19%)이 결신카드를 작성했고, 107명(47,1%)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다짐했다. 가스펠 보컬 밴드 크룩스(CRUX)의 무대로 행복드림콘서트가 시작됐다. 이어서 세시봉 윤형주 장로가 등장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공연과 간증이 참가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물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이재훈 담임목사가 메시지를 전했다. 이 목사는 “우리에게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영원한 세상으로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다”면서 “어르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그다음은 자녀들이 준비한 순서였다. 부모님께 정성껏 쓴 편지를 읽어드리며 예수 그리스도 품으로 부모님을 초청했다. “엄마 아빠와 천국에 함께 머물고 싶다”는 자녀들의 고백이 그 어떤 메시지보다 큰 울림을 줬다. 부모들이 결신카드를 작성하고, 세례를 신청하며, 자녀들의 초청에 응답했다. 권정혜 성도(찬양공동체)는 행복드림콘서트에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녀는 천국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와 함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다. 그 안타까움을 이번 행복드림콘서트에서 말끔히 해소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세례받기를 주저하던 어머니가 결신카드를 작성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권정혜 성도는 “엄마가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으셨던 것 같다”면서 “엄마가 하나님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셨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임길자 어르신(권정혜 성도 어머니)은 “이 자리에 초대해준 딸에게 고마워서라도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고규선 성도(양천공동체)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어서 통영에서 모시고 왔다. 그리고 30여 년 간절히 드렸던 기도를 응답받았다. 고규선 성도는 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 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지난해 어머니와 오빠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올해 행복드림콘서트에서 아버지를 전도했다. 고규선 성도는 “하나님께서 행복드림콘서트를 통해서 제가 30년 가까이 드렸던 기도를 들어주셨다”면서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지석 어르신(고규선 성도 아버지)은 “정말 고맙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면서 “나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싶다”고 고백했다. 고모를 모시고 온 조카도 있었다. 정동우 형제(SNS청년부)는 부모님만큼 사랑하는 고모에게 복음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모의 손을 꼭 잡고 행복드림콘서트에 왔다. 정동우 형제는 “새신자 눈높이에 맞춰 예수님을 전하고, 함께 기도해주는 사역팀 덕분에 고모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앞으로 고모가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고, 고모와 함께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정정옥 어르신(정동우 형제 고모)은 “행복드림콘서트가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었다”면서 “앞으로 조카와 함께 꼭 교회에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 아들이 ‘감사’를 담아 부모님께 봄바람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좋은 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무거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 분이 평생 일궈 온 지난날을 자주 가늠하게 됩니다. 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쁨과 두려움, 유치원을 오가는 길에 대한 염려, 초등학교에서 받아온 상장을 훈장처럼 액자에 고이 수집하는 즐거움, 시작되는 중학생의 반항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닥쳐오는 IMF의 매서운 바람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철없이 덩치만 커져 버린 고등학생, 멀리 떨어져 대학생활 하는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쥐어짰을 시간, 사고를 당해 아파하며 신음하는 아들을 어찌할 줄 모르며 바라보는 미안함과 슬픔, 사회에 진입하려 고군분투하는 자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안쓰러움,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예쁜 여자를 데려와 놓고는 히죽 웃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왠지 모를 뿌듯함, 열심히 수고해서 키워 놨더니 결혼하고 나서는 연락이 뜸해지니 드는 서운함, 손주를 기대하는 마음과 걱정, 은퇴하고 나면 다시 시작해야 할 또 다른 인생에 대한 불안함. 그 모든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깊고 무거웠을까 감히 헤아려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얼마나 고되고, 슬프고, 불안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불행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의 초입에서 가늠해보는 부모님의 지난 시간에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눈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두 형제가 가정을 꾸리고 새 생명을 태에 품어가며 새로운 꿈을 바라보는 이 모든 것의 기반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희로애락이 있었음을 다시 기억해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우리 가정을 도와주신 하나님을 기억해 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함께 울고 웃었던 이 땅에서의 인생과 작별을 고할 때가 올 텐데,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우리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다시 만날 수 있답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글을 올립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 김규성 성도(이수공동체) 딸이 ‘사랑’을 담아 엄마께 엄마가 낳은 둘째 딸 재연이에요. 엄마가 나 태어났을 때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묻지 않고, “한 명 낳았어요? 두 명 낳았어요?”라고 물어봤다면서요. 이렇게 튼튼하게 낳아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나는 이제야 철이 드나 봐요. 나의 믿음 생활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새롭고 싱그럽게 피어납니다. 엄마, 나는 어머니의 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랍니다. 요즘 아버지가 저와 식사하실 때 “너 얼굴 많이 좋아졌다”고 여러 번 말씀 하셨지요. 제가 행복한 것은 세상과 구별된 기쁨을 체험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 덕분이랍니다. 엄마에게 참 좋은 가사의 찬양을 선물하고 싶어요. “♪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신나고 힘나는 찬양인지요. 찬양 가사처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따라 엄마의 삶이 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엄마에게 당당하고, 담대하고, 힘차게 말씀드려요. 예수님 믿고 의지하는 성도 유재연처럼 엄마도 성도 이정숙이 되어주셔요. 예수님 잘 믿고, 사랑의 통로로 쓰임 받는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축복합니다. 엄마 정말 사랑해요. / 유재연 성도(중종로공동체)
2023-05-13 제1442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기도의 작은 거인들! 만나고 싶었습니다 여성사역 ‘무릎선교기도학교 2조’ 기도의 작은 거인들! 어르신들의 기도 그리고 힘 ‘작은 거인’이라는 말이 있다. 외형적으로는 작고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잠재력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뜻한다. 온누리교회에도 작은 거인들이 있다. 새하얀 머리카락, 구부정한 허리, 왜소한 체격의 어르신들이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기도하는 작은 거인들이다. 여성사역 ‘무릎선교기도학교 2조’를 만났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누구보다 뜨겁게 기도하는 여성사역 '무릎선교기도학교 2조'(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윤선영 권사, 현경자 권사, 황승희 집사, 민정원 권사, 임복순 권사, 박옥자 권사). “한나의 기도가 이렇게 뜨거웠을까?” 여성사역 ‘무릎선교기도학교’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채 애처롭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도의 여인 한나가 떠올랐다.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이 여인들이 드리는 기도로 뜨겁게 달궈졌다. 수많은 기도의 여인 틈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성도들이 있었다. 제대로 펼 수 없는 구부정한 허리 때문에 엉거주춤 일어나 손뼉 치며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어르신들이었다. 그 어르신들을 본 순간 그들이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얼른 예배드리고 그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기도의 자리로 불렀다! 무릎선교학교에 모인 성도들은 모두 선교사들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선교지와 선교사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으로 선교하는 ‘무릎 선교사’다. 무릎선교학교에는 13개 조가 있다. 조별로 선교지를 정하고, 그 선교지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선교사들과 동역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남아시아를 품고 기도하는 ‘무릎선교학교 2조’의 이야기가 더욱 특별하다. 무릎선교학교 2조의 평균 연령이 78세다. 무릎선교학교에서 최고령 조원들이다. 그러나 80세 가까운 평균 연령이 무색할 정도로 가장 뜨겁게 기도하고 있다. 2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는 박옥자 권사, 허리와 다리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용인 수지에서 2시간 넘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는 임복순 권사가 무릎선교학교 2조의 주춧돌이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왔다가 7년 넘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윤선영 권사, 남편이 소천한 충격으로 인지 장애가 생겼는데, 예배의 자리만큼은 절대 잊지 않는 민정원 권사도 있다. “함께 기도할 수 있음이 그저 은혜”라고 고백하며 연로한 권사들을 섬기는 황승희 집사도 빼놓을 수 없다. 현경자 권사는 조장을 맡아 때로는 딸, 때로는 언니, 때로는 엄마처럼 15년째 무릎선교학교 2조를 섬기고 있다. 무릎선교학교 2조 조원들이 오랜 시간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2시간 거리를 달려 기도하러 오는 임복순 권사가 그 비결을 알려줬다.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를 기도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남묘호렌게쿄’라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딸이 전도해줘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은혜가 정말 감사해서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20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는 박옥자 권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도 들을 수 있었다. “2005년 예루살렘으로 2,500여 명이 평화행진을 떠났습니다. 그때 제가 무릎이 너무 안 좋아서 참여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딸 부부가 저 몰래 신청해서 갔습니다. 갈릴리호숫가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 무릎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앉지도, 걷지도 못하던 제 다리로 행진 첫날부터 끝날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그 기적을 체험하고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무릎선교기도학교에 참여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행하신다’는 믿음으로 기도가 필요한 선교지와 사람, 교회와 가정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만난 나의 하나님 무릎선교기도학교 2조는 기도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이 귀해서 기도의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민정원 권사의 소원은 날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지난해 남편이 소천하고 그 충격으로 인지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기억해내는 게 어렵고 힘듭니다. 아들이 무릎선교학교에 저를 데려다줬습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80년 살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수두룩합니다. 그 은혜만큼은 절대 잊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자리와 시간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오늘 하나님을 잊는다면 내일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선교지 영혼들도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황승희 집사는 권사들의 기도 덕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저는 믿음이 아주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힘에 대해 의심이 생길 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무릎선교학교에 와서 권사님들의 신앙과 기도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복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고 있습니다. 권사님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저를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의심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그 자리에 은혜의 감격이 채워집니다. 믿음의 선배들에게 기도를 배우고,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몸소 경험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무릎선교기도학교 2조가 그것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기도할 때마다 사람이 변하고, 선교지가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선영 권사는 남편의 임종을 바라보며 기도의 힘을 경험했다. “제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5년 전 갑자기 췌장암에 걸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를 선고받았습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어떻게든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방문해주셨는데 ‘나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다’면서 복음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어서 무릎선교기도학교와 공동체에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 기도가 닿았는지 남편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받고, 천국에 갔습니다. 남편을 간호하면서 기도가 강퍅한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변화시킨다는 것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현경자 권사는 인도네시아 크리스천 국제학교에 비전헌금을 봉헌하던 몇 년 전 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살면서 여러 기도응답을 받았는데 기도하던 선교지에 크리스천 국제학교가 생긴 일만큼 뿌듯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전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몇 년 이어오다가 잊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어느 주일날 예배에서 인도네시아 크리스천 국제학교 설립을 위해 비전헌금을 봉헌한다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네가 기도했잖아’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 작은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일하신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선교지를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변화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2023-04-15 제14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