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캠퍼스] 예수님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셨다!

기획 크리스천을 위한 ‘미니멀 라이프’ 2. 불평불만   불평불만,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예수님처럼 불평하거나 이익 채우려고 따지지 말아야    요즘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유행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지 않음으로써 여유를 가지고 다른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니멀 라이프다.  신앙생활에서도 미니멀 라이프가 꼭 필요하다. 그토록 자유로워야 할 크리스천들을 옥죄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미니멀 라이프 그 두 번째 제안은 불평불만 하지 않기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불평은 ‘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을 의미하고, 불만은 ‘마음에 흡족하지 않음(불만족)’이라는 뜻이다. 불만족해서 언짢은 마음과 그 못마땅함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불평불만이다.  불평불만에서 기인한 사건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태초 이래 사건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 불평불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들을 분석했더니 그 이면에 불평불만이 숨어있었다. 음주운전 단속에 불만을 품은 60대 남성이 파출소를 찾아가 경찰들에게 엽총을 쏜 사건(2016년), 지도교수에게 불만을 품은 대학원생이 사제폭탄을 제조한 사건(2017년), 한 지방의회 의원이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회의장에서 유리창을 깨고 자해하며 겁박한 사건(2018년), 수도사용 문제로 주민과 마찰을 빚은 70대 노인이 면사무소 직원에게 엽총을 발사한 사건(2018년)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불평불만에서 기인한 사건사고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7년 인사평가에 불만을 품은 일본 오사카 시청 직원이 상사 머리에 술을 들이붓기도 했고, 지난 4일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한 노인이 연금이 적다고 마크롱 대통령에게 불평하자 마크롱이 “국민이 불평불만을 그만하면 프랑스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평불만에서 기인한 사건사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생하고 있다. 약하게는 언어적 불평불만에서 끔찍한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성경에도 나타난 ‘불평불만’    성경에도 불평불만에서 기인한 사건들이 많다. 민수기에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때 백성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여호와의 귀에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그들 가운데 타올라서 진의 바깥쪽을 태웠습니다”(민 11:1).  시내 광야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진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광야 여행으로 인한 고생 때문이었다. 시내산 근처에서 근 1년 동안 평안한 생활을 하다 메마르고 험난한 광야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불평불만의 원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들은 하나님이 노하셔서 진영 끝을 불살라 버리심으로써 징벌하셨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다행히 징벌을 멈출 수 있었다(신 1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은 끝이 없었다. 이번에는 만나에 싫증났다면서 고기를 달라고 불평불만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울면서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해 줄 수 있을까? 이집트에서는 생선, 오이, 멜론, 부추, 양파, 마늘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우리가 식욕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뿐이니!’”(민 11:4~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끌어낸 것도 잘못이고,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고기를 줄 능력도 없는 분이며,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만나)은 너무 한심스럽기 그지없다며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워야 할 모세조차 불평불만을 했다.   “저 혼자만으로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제게는 벅찹니다. 주께서 제게 이렇게 하시겠다면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 당장 저를 죽이시고 이 곤란한 일을 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민 11:14~15).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외에도 성경에 나오는 불평불만 사례가 많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창 3:12)며 불평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는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동생 아벨을 죽였다(창 4:5~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의 경고를 듣고 모두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게 되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요나 4:1~3). 초대교회에서는 당시 그리스파 유대인들이 구제에서 자신들 파의 과부들이 홀대받는다고 불평했다(행 6:1).    불평불만이 손해인 세 가지 이유   불평불만을 하면 왜 좋지 않은지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뇌과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불평불만은 세 가지 이유에서 손해라고 말하고 있다.  첫째, 불평을 하면 할수록 뇌 건강을 악화시킨다.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보면 뇌의 시냅스가 발달해서 점점 숙련이 되는데, 이 원리가 감정이나 생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불평할수록 뇌는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수시로 불평불만이 나오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불평불만은 쉽게 전염된다. 불평불만은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 나쁘게 만든다. 1948년부터 미 매사추세츠의 프래밍험 마을에서 주민 5천2백 명을 대상으로 60년 동안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이나 분노조절장애, 외로움 등은 한 번 발생하면 주민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가는데, 행복한 감정은 쉽게 전파되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무엇보다 몸을 망친다.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은 스트레스에 반응해서 분비된다. 아칸소주립대 연구팀에 따르면 ‘회사나 가정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보통 사람에 비해 코르티솔 호르몬 분비량이 2배가량 많다고 한다. 코르티솔 호르몬 때문에 면역력이 더 낮았고, 혈압은 높았으며, 심장병 발병 확률과 비만, 당뇨병에 시달릴 확률도 더 높게 나타났다.  솔직히 세상을 살다보면 불평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수많은 불평불만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과격하고, 직설적이고,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불평불만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2000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소프트뱅크의 주가가 세계 IT시장에 닥친 ‘닷컴버블’ 붕괴로 100분의 1로 곤두박질쳤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이때 인터넷이 곧 부활할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초고속인터넷 서비스(ADSL)를 확장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총무성(우리나라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일본 행정기관)과 일본 거대 통신기업 NTT가 움직여야 했는데 지지부진했다. 두 기관이 전혀 협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ADSL 서비스를 성공시킨 이후 손정의 회장이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이 잘못된 거고, 정치인이 문제고, 경기가 나쁘다느니 그런 변명 따위를 해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불평불만은 결국 자신의 그릇을 작게 만들 뿐이다. 그럴 틈이 있다면 목숨 던질 각오로 맞서라. 그때야 파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조상들이 원망과 불평으로 광야에서 멸망당했던 예를 들면서 “불평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전 10:10). 베드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며 “정신 차리고 불평하지 말라”고 했다(벧전 4:7~9).  그 누구보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부당하거나 억울한 상황을 수도 없이 직면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고 따지지 않으셨다. 불평불만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불평불만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불만거리(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자. 꼭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셨다!   <전문가 기고>   오늘 당신의 옥수수는 무엇입니까? 일상의 선물 인정하고, 이웃과 나누고, 매사에 감사하자!   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길을 만들어놓고 달리는 경기를 상상해보자. 이 경기의 목표는 그곳을 달려가면서 가장 큰 옥수수 하나를 따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빨리 달려야 하고, 옥수수는 하나밖에 고를 수 없다. 지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어느 순간 가장 크다고 생각되면 그 옥수수를 따야만 한다. 이 경기의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Time)’이다. 국민대학교 이의용 교수는 시간의 개념을 옥수수밭 경주에 비유했다. 시간은 한번 흘러가면 되돌릴 수 없다. ‘오늘 하루 무엇을 했지?’라는 허탈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뿌듯하게 잠자리에 드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날의 옥수수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의 오늘 하루의 옥수수는 무엇인가?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당신의 인생에서 꼭 따야 하는 옥수수 하나를 생각해본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당신의 감정의 하수구는 누구인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옥수수를 잡아야 할지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이라면, 일상에서 버려야 하는 것을 분별해서 꼭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는 미니멀 라이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한번쯤 점검해봐야 하는 키워드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믿음의 경주에서 빠질 수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조금만 고민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완전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씀하셨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와 함께 출애굽 했을 때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다”며 염려를 넘어 불평을 하였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매일 수고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도 그들은 “물이 없다”며 또 불평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가? 며칠 전 버스를 탔는데, 맨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통화하면서 욕을 남발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남자의 육두문자 가득한 통화내용을 들어야 했다. 점점 불쾌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불쾌한 느낌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통화하는 그 사람과 전혀 관계도 없고 상황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제3자인 내가 이렇게 불쾌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친히 그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쏟아놓는 불평을 들으셨을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  ‘불평’의 ‘사전적 의미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이다(표준국어대사전). 못마땅한 상태 즉, 불만 상태에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불평’이라고 한다. 불평이 일어날 때는 상황과 대상이 존재한다. 한 가장이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로 인해 불만을 가득 품은 채 퇴근했다고 가정해보자. 준비된 밥과 반찬이 가장의 불만을 잠재울만한 잡곡밥과 맛난 고기반찬이 아니라 식은 밥과 아침에 먹다 남은 나물이 전부였다면 가장의 기분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밥에서 돌 같은 것이 나왔다면 자연스레 가장의 입에서 아내를 향한 불평이 쏟아질 것이다. 갑자기 화내는 남편에게 일격을 당한 아내의 화가 옆에 앉은 큰아들에게 향한다. “너 숙제 다했어?” 큰아들은 기분 나쁜 엄마의 불평에 대충 식사를 마친다. 그리고 일어나려는데 동생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형을 보며 웃는다. 큰아들의 불평은 자연스레 동생에게 향한다. 형한테 쓴 소리를 들은 동생은 방으로 들어가서 놀아달라고 쫓아오는 강아지에게 화풀이한다. 이렇게 불평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불평은 힘이나 권력이 있는 대상에게서 시작되어 그룹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을 향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소아정신과 서천석 의사는 공동체 내에서 불평의 대상이 되는 약한 대상을 가리켜 ‘감정의 하수구’라고 표현하였다. 평소 쌓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는 불평을 통해 감정의 하수구에게 전달되고, 감정의 하수구는 다른 감정의 하수구를 만든다. 당신의 감정의 하수구는 누구인가? 만약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평소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대상에게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사소하지만 일상의 날씨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자주 불평한다면 불평의 대상이 무의식중에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일상영웅>의 저자 팀 체스터는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자주 화가 난다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일 수 있다. 삶을 하나님 편에서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잘 이행하고 있지 않은 계약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외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행동 아닐까?      일상을 감사로 채우기   우리의 옥수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선택해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일상에서 받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는 새로운 선물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 그러나 매일 주어지기에 그 선물이 ‘만나’와 같아서 좋은 것으로 여기지 못할 때가 있다. 따라서 만나를 보면서 또 다시 없는 것을 찾으며 불평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만나를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인 감사(gratitude)로 일상을 채워야 한다.  감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에게 매일의 만나를 음미할 수 있도록 돕는가? 한번은 수원에서 서울로 향하는 용서고속도로를 타고 가던 중에 터널 안에서 멈춰야 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시설 관계자가 다급히 뛰어와 내 차를 멈추고 터널 밖으로 나가라고 다급히 손짓했다. 알고 보니 차 한 대가 전소(全燒)되는 바람에 터널 안에 있던 모든 차가 그대로 멈춰 선 것이었다. 그 결과 예정된 미팅도 못 가고 터널 밖에서 몇 시간 동안 발을 구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크게 깨달은 게 있었다. 그동안 그 터널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이런 사건이 처음 일어났다는 사실과 별 문제 없이 터널을 다닌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고가 일어나봐야 그 이전의 평범한 상태가 얼마나 좋은 상태였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라. 평범한 일상 같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만나가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만나로 인한 기쁨이 첫날보다는 둘째 날,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 줄어드는데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한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자 에드 오브라이언 연구팀은 매일 동일한 선물을 받을 때 점차 만족감이 떨어지곤 하는데 이를 유지할 방법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동일한 선물을 받아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기쁨이 오래 유지되었다. 받은 선물에만 집중할 경우 어느 순간 더 좋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행복감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누는 사람은 행위 자체에서 얻는 기쁨으로 인해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멈추지 말고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자족하는 감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의 큰 복을 누리는 비결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도 우리가 선택한 옥수수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향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한건수 교수(수원 온누리교회, 국민대 겸임교수, 감사연구소장) <발문>  “우리가 멈추지 말고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는 선물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며 감사를 선택하는 것이다.”

 2019-10-20      제1266호

[국내캠퍼스] 내려놓으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기획 크리스천을 위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1. 체면  체면 지키느라 무리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  타인 시선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은 위선, 경계해야   요즘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유행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지 않음으로써 여유를 가지고 다른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니멀 라이프다. 비단 일상생활에서만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미니멀 라이프가 꼭 필요하다. 그토록 자유로워야 할 크리스천들을 옥죄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 첫 번째가 신앙생활에서조차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다. 체면(體面)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낯’, ‘면목’, ‘위신’ 등이 있는데,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체면, 버리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예부터 우리 민족은 체면을 참으로 중요시 여겼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 “냉수 마시고 이 쑤신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 “조선 사람은 낯 먹고 산다”, “체면 차리다 굶어 죽는다” 등 다양한 속담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남의 시선을 참으로 중히 여긴다. ‘남부끄럽다’, ‘남 보기에 창피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남의 이목이 있는데’ 등 스스로(가족 포함)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쓴다. 나를 평가하는 남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인 나머지 진짜 자기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K 자매(42세, 타교회)는 대학교 진학 당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  “부모님이 교사셨어요. 저도 자연스레 교사가 되고 싶어서 교대(지방)에 지원했고 합격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교대보다 명문사립대 진학을 원하셨어요. 사립대 학비가 부담스러워서 학비가 사립대보다 싼 교대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큰딸이 남들 알아주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 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교회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요. 결국 아버지 뜻대로 명문사립대로 진학했는데 그때 교대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커요. 왜냐하면 학과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았거든요.”  이와 같은 일이 비단 K자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든 교회에서든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한국, 중국, 일본의 체면문화    사실 체면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본고장 중국에도 체면문화가 강하다. 중국의 체면문화를 ‘미엔즈(面子)’라고 한다. 미엔즈는 ‘자신의 얼굴 즉 체면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중국인들이 대단히 중요시하는 덕목이다. 死要面子活受罪(체면 때문에 생고생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도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초나라 패왕 항우는 백전백승을 한 영웅이었지만 단 한 번 해하전투에서 패배한다. 그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 네 방향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항우는 이 전투에서 도망쳐서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죽고 혼자 고향에 돌아갈 체면이 없다며 자결하고 만다. 중국인들은 그런 항우를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꼽고 있다. 중국인들이 거리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것도 미엔즈문화에 기인한다. 별것 아닌 문제에도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더 크게 언성을 높이는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주문하거나 손님에게 상다리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것,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 등이 바로 중국의 체면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 미엔즈문화가 있다면 이웃나라 일본에는 ‘하지(恥; 수치, 부끄러움)’문화가 있다.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은 부끄러움의 문화’라고 규정지은 데서 파생되었다. 일본의 하지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사무라이(무사)들의 할복(割腹)이다. 봉건시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죽음과 같았다. 단적인 예가 바로 ‘시미즈 무네하루’라는 무사다. 시미즈 무네하루는 모리가문에 채용된 전국시대 무사였다. 모리가문을 정벌하러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가문과 화친을 맺으면서 화친 조건으로 시미즈의 할복을 요구했다. 시미즈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승낙했고, 며칠 뒤 자신의 형과 함께 성 앞에 배를 타고 나와 할복했다. 도요토미는 시미즈가 죽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며 “이것이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이후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명예 즉,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성경에도 나오는 체면문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도 체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이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사울에게 보내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그 명령을 어겼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아말렉 왕)뿐만 아니라 양과 소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과 살찐 송아지와 어린 양들을 비롯해 좋은 것들은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고…”(삼상 15:9). 불순종한 사실을 지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거짓말하고(삼상 15:13), 변명을 늘어놓기 바빴다(삼상 15:20~24).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의 체면 지키는데 급급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나와 함께 가서 내가 여호와 당신의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해 주십시오”(삼상 15:30).  분봉왕 헤롯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세례 요한을 죽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친척 형으로, 예수에게까지 세례를 베풀 정도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헤로디아)를 취하고 왕위를 찬탈한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고, 이에 분개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뒀다. 헤롯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웠다. 이에 헤로디아가 계략을 꾸민다. 헤롯의 생일날 헤롯의 조카이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 헤롯 앞에서 춤추게 한 것. 헤롯은 자신을 기쁘게 한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녀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이에 헤롯은 남들의 눈을 의식해 소녀가 해달라는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헤롯왕은 난감했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도 있고 손님들도 보고 있으므로 소녀의 요구대로 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마 14:9).  반대로 체면을 내려놓으면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인물도 있다. 바로 세리장 삭개오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인에게 부과된 세금이 많았다. 로마 총독에게 징수를 위탁받은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대인 중에서 세리를 고용했는데 대다수 세리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했다. 삭개오도 그런 세리 중 하나였다. 삭개오는 권력을 이용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지만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 삭개오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만나면 삶이 변하고,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예수 만나기를 갈망했다.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갈 때 삭개오는 먼발치에서라도 보려고 했다. 그런데 키가 작아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서 그만두고 돌아갔을 텐데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그런 삭개오를 발견한 예수님이 발길을 멈추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회개했고 놀라운 고백을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철저한 삭개오의 회개 앞에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을 위선이라고 하시면서 경계하셨다(마 6:1~2).  전셋집에 살면서도 자동차는 비싼 외제차를 사야 하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자녀의 적성보다 학교 이름이 더 중요하다며 강요하고,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몇 개월 월급보다 비싼 명품백을 할부로 사는 것도 체면의식에 사로잡힌 행동이다.  크리스천들도 체면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지만 체면 때문에 순원들에게 공개하고 기도제목을 알리는 것이 불편하거나, ‘교회 다닌 지가 얼만데, 집사(장로, 권사) 직분은 받아야 하지 않나?’ 혹은 ‘동료 장로(권사)들이 저만큼 헌금하니까 나도 이 정도는 해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무리하고 자유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체면문화에 사로잡힌 행동들이다. 신앙생활에서 체면치레는 불필요하다. 체면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기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예수님의 영성을 따라 단순하게 살아야   오늘날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물론 풍요 속에서도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풍요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도시마다 넘쳐나는 음식물은 물론 플라스틱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풍요로운 삶이 환경을 파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을 넘어서 이제는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예수님은 ‘미니멀리스트’   이러한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이 취해야 할 대응방법이 무엇일까? 그 해답을 2010년부터 영미권에서 시작된 ‘미니멀 라이프 운동’에서 찾고자 한다. 미니멀 라이프란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단순함을 추구하면서 본질에 더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전제로 삶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더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 미니멀 라이프의 근본정신이다. 절제하면서 꼭 필요한 물건만으로도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한다. 이들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지 않고 삶의 본질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철저한 미니멀리스트이셨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19~20)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삶의 의미를 소유에서 찾지 않고 영적인 것에서 찾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단순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머니에 금도 은도 동도 지니지 말라. 여행 가방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마 10:9~10)고 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떠나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는 요구를 하셨지만, 단순한 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생활철학이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이처럼 예수님은 미니멀 라이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의 몸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족함 없이 생활하셨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준다. 예수님은 소유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셨다.   기독교 영성에서도 단순한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할 일이 많고, 가야할 곳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 생활환경 속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없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은 정서적, 영적으로 병들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이 시간은 예수님이 하실 많은 일 중에서 우선순위였다. 그러므로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단순하게 생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재정, 만남, 일, 쇼핑 등에서 꼭 필요한 것부터 순위를 매겨보라. 그리고 끝 순위부터 하나씩 정리를 해보라. 정리된 것들 때문에 삶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복잡하게 살던 삶의 패턴을 점점 단순하게 사는 패턴으로 바꿔보라. 이것은 영성을 깊이 있게 해주는 좋은 일상의 훈련이 될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가 주는 선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산다. 집안 살림 중에서 1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분명히 있다. 버리기는 아깝고, 남 주기는 그래서 집안에 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꼭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라 좋아 보여서 혹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사놓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또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쁘게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잡하고 바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은 없고 일과 타인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잠시 여기에서 발을 멈추고 다음 질문에 답을 달아보자.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영적인 삶에도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내 시간은 없고 예수님을 위한 시간만 있는 것이 헌신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다가 병들어 쓰러지는 교인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참 예배자가 되는 것과 일상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듯 정서적,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관계 다이어트와 스케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사람이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단순한 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모임과 만남을 줄일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스케줄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 왜냐하면 관계와 스케줄 다이어트가 자신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제공해 준다. 첫째, 재정의 자유를 준다. 꼭 필요한 물건만 구입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돈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재정의 압박 대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대신 좋아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자기발전을 위한 투자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둘째, 시간의 여유를 준다. 꼭 필요한 모임과 만남,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을 더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 셋째, 안식을 준다. 재정과 시간이 단순화되면 일단 스트레스가 감소된다. 재정과 시간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게 된다. 삶의 쉼을 얻게 된다. 쉼이 있는 삶이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넷째, 영성을 깊게 해준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살면 하나님을 건성으로 만나게 된다.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신앙인으로 살게 된다. 그런 모습으로는 온갖 시험을 싸워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안식이 있는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영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체면치레에서 벗어나라!   우린 너무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체면치레는 특히 혼인예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체면 때문에 혼수를 남들만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라며 결혼예식에 막대한 돈을 들이는 것, 꽃값을 5천만 원에서 1억 원을 쓰는 것, 그동안 투자한 축의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잔치를 크게 벌이는 것 등은 모두 체면치레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리스천은 체면치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혼식의 본질은 신랑신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화려한 잔치가 아니다. 수백만원짜리 결혼사진을 찍고 얼마 못 살고 헤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액의 결혼식을 치러놓고 불행하게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창한 혼수를 장만해놓고 힘들게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혼의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화려한 잔치가 아니다. 요즘 젊은 층에서 스몰웨딩에 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허례허식보다 결혼의 본질을 택하겠다는 성경적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롬 12:3). 그렇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다. 크리스천의 미니멀 라이프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영성의 과정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는 예수님의 영성을 따라 단순하게 살 시대가 되었다. /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    <발문> “크리스천의 미니멀 라이프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영성의 과정이다.”

 2019-10-13      제1265호

[국내캠퍼스] “목사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기획 10월 9일은 한글날  우리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잘못 쓰고 있는 표현들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한글을 아끼고, 정신 기리는 것   오는 10월 9일(목)은 573돌 맞는 한글날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도 불리는 한글은 세종대왕 25년(1443년)에 완성해서 3년 동안 시험기간을 거쳐 세종 28년(1446년)에 세상에 반포되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 이를 위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배우고 익혀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한글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주도해서 창의적으로 만든 문자다. 세계 문자 역사상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문자이다. 한국의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그 보물을 허투루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인터넷과 방송 매체를 보면 한글 훼손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줄임말은 기본이고, 어느 나라 말인지 구분 못 할 외계어가 범람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싸용어’라는 말이 문화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는 표현들은 또 어떤가? 사물에게까지 존칭을 쓰는 잘못된 높임말 사용하고 있다.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한글을 아끼는 것이고,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것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한글은 현존하는 지구상의 문자 중에서 유일하게 그 기원과 만든 인물이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의 진가는 한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메릴랜드대학 로버트 램지 교수는 “세계에서 이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고 극찬했고, 영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했다. 또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은 한글을 “24개 단순한 알파벳과 몇 가지 조합 규칙만으로 무한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놀라운 언어”라고 했고, 레어드 다이아몬드 교수(UCLA)는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1994년 6월호)에서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며, 또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해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평가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세계 모든 문자 순위를 매겼는데 1위가 바로 한글이었다. 그 이유는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을 조합해서 약 8천개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여 개 소리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글은 소리 나는 것은 모두 쓸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한글만큼 우수한 문자가 없다고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수하고 독창적이며 과학적이고 간결한 문자인 한글이 너무 많이 오염되고 훼손되고 있다.      이 한글 뜻 아시나요?   ‘떡상, JMT, 별다줄, 낫닝겐, 비담, 좋못사…’  흔히 말하는 ‘인싸용어’ 들이다. 인싸는 ‘인사이더’의 줄임말로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 인싸용어는 인싸들이 쓰는 용어를 뜻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인터넷 신조어나 줄임말 등이 모두 인싸용어다. 떡상은 ‘가격이나 상태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 JMT는 ‘존맛탱’(굉장히 맛있다), 별다줄은 ‘별걸 다 줄인다’, 낫닝겐은 ‘not+닝겐(にんげん, 인간의 일본어)’의 합성어로 외모나 능력 따위가 아주 뛰어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인간을 의미한다. 비담은 ‘비주얼담당’, 좋못사는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다’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인싸용어는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이 문장을 한번 읽어보고 해석해보자.   “지금 TMI 때문에 갑분싸 됨요.” “ㅇㄱㄹㅇ?” “ㄹㅇ” “ㅇㅈ?” “ㅇㅇㅈ” “ㅂㅂㅂㄱ”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면 인싸일지도 모른다. TMI는 ‘Too Much Information’(너무 과한 정보),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다’의 약자이다. 이 문장을 해석하면 ‘알고 싶지 않은 과한 정보 때문에 분위기 싸늘해졌다’는 뜻이다. 두 번째 예문은 “이거 레알?” “레알” “인정하는거지?” “응 인정” “반박불가”라는 의미다.  요즘 청소년들의 SNS에는 이와 같은 정체불명의 줄임말과 영어인지 일본어인지도 구분 못 할 외계어들이 넘쳐나고 있다. 시대의 유행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변화하기도 하고, 또 신조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줄임말과 출처도 모를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심각한 한글 훼손이다.    높여야 할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   “궁금한 점이 계시면 문의해주세요”,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까 조심하세요”, “거스름돈 3천원 나오셨습니다”, “이 구두는 볼이 넓으셔서 발이 편하세요”, “이 상품은 품절되셨습니다”, “고객님, 이 상품은 세일 중이세요”…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카페나 백화점, 홈쇼핑 등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말이 불편하기 시작했다. 비문법적인 과대 존경 표현 때문이다. ‘-시-’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가 화자에게 사회적인 상위자로 인식될 때 그와 관련된 동작이나 상태 기술에 결합하여 그것이 상위자와 관련됨을 나타내는 어미다. 쉽게 말해 존재의 대상을 높이는 어미이다. 따라서 사물에 ‘-시’를 붙이는 존대법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상품은 반응이 너무 좋으세요”, “주문하신 상품이 나오셨습니다”는 말은 무심코 들으면 매우 정중한 표현처럼 들리지만 고객보다 판매하고 있는 상품을 높여 부르는 것으로 도리어 고객을 무시하는 말이 된다. 높여야 할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있다’와 ‘계시다’도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계시다’는 ‘있다’의 높임말로 동물이나 사물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할머니께서 집에 계신다”처럼 사람에게 사용해야 한다. “부탁의 말씀이 계셔서 도와드렸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계셨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말씀’은 사람이 아니므로 ‘계시다’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부탁의 말씀이 있으셔서 도와드렸습니다” 혹은 “목사님 말씀이 있으셨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틀리기 쉬운 맞춤법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글을 올리고 읽을 수 있는 시대다. 문제는 글을 자주 쓰고 올리면서 맞춤법 실수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하지… 라면 또 먹었어…” 어느 유명 가수가 자신의 SNS에 ‘어떡하지’를 ‘어떻하지’라고 써서 글을 올렸다. ‘어떻게’는 ‘어떠하다’가 줄어든 ‘어떻다’에 어미 ‘-게’가 결합해 부사적으로 쓰이는 말이고, ‘어떡해’는 ‘어떻게 해’라는 말이 줄어든 말이다. 이 상황에서는 ‘어떡하지’ 혹은 ‘어떻게 하지’라고 써야 올바른 표현이다. 지난 2013년에는 사진 한 장이 뜬금없이 ‘아이돌 출산설’을 만들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아픈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보고 팬이 댓글에다 ‘낫다’가 아니라 ‘낳다’라고 쓴 것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면서 아이돌 출산설로 이어진 것이다. 해당가수는 ‘낳다’가 아니라 ‘낫다’임. 뭘 그렇게 낳아”라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틀리기 쉬운 맞춤법도 너무 많다.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글 맞춤법> 제27항 “어원이 분명하지 아니한 것은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에 따라 ‘몇일’이 아니라 ‘며칠’이라고 써야 맞는 표현이다. ‘며칠’의 경우 ‘몇+일’로 분석하여 그 표기가 ‘몇일’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밖에도 곱빼기(←곱배기), 곁땀(←겨땀), 게거품(←개거품), 범칙금(←벌칙금), 띄어쓰기(←띄워쓰기), 족집게(←쪽집게), 단말마(←단발마) 등이 있다.  언어(말)는 단순한 의소소통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역사와 정신이 담겨있다.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한글 덕분이다. 분단국가이면서도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 일컫는 것도,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 주가 분리운동을 하는 것도 언어 때문이다. 충격적인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6천여 개인데 2주에 한 개 꼴로 소멸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소중한 우리 한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한글을 아끼는 것이고, 그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것이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잠 4:24).    <전문가 기고>    한글 아끼고,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 언어 사용에 세심하게 주의해서 올바로 쓰려고 노력해야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게 된다. 즉, 언어는 해당 사회의 모습이나 특성을 드러내며, 경우에 따라 언어가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언어에는 지역, 인종, 나이, 계층, 신분, 성별, 직업, 이념 등에 따른 사회적 특성이 드러나 있다. 언어는 기호성,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 규칙성, 창조성 등 6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언어는 정보적, 정서적, 친교적, 명령적, 미적 기능 등 5가지 기능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마다 사사건건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그 어떤 제재가 필요 없는 대화 파트너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이나 정중함이 필요한 순간에는 누구나 언어 사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올바로 쓰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올바른 높임말 사용법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계층화된 우리말의 높임말과 낮춤말, 그리고 예삿말이다. 적절한 높임 표현을 통해 상대를 존대하는 우리말의 섬세함은 이미 다른 언어권에도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그 후한 평판에 걸맞지 않는 우리들의 민망한 실수 때문에  실소가 새어 나올 때가 있다.  첫째, 주체상실 존대이다. 얼마 전 건강종합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간 일이 있었다. 검진 코너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가 있어 어렵지 않게 검진을 잘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직원들의 친절한 안내 멘트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실게요”, “수납 먼저 하고 오실게요”, “잠시 기다리실게요”, “피검사 하실게요” ‘-ㄹ게요’는 말하는 사람의 의지가 담긴 말이다. “제가 할게요” 혹은 “제가 바로 갈게요”처럼 자신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날 때 써야하는 어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쪽으로 오실게요”처럼 주체가 상실이 된 존대는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쪽으로 오실게요”는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기다리실게요”는 “잠시 기다려주세요”, “이쪽으로 주차하실게요”는 “이쪽으로 주차하세요”로 순화시켜야 한다.   둘째, 천사(天使)행세 존대이다. 우리말 ‘돕다’는 남이 하는 일이 잘 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탠다는 뜻이다. 혹은 위험한 처지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계산대에서 흔히 직원이 손님에게 “손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들 한다. 직원이 손님을 대신해서 돈을 내주는 상황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직원이 마땅히 할 일을 도와준다고 표현하는 것도 매우 어색한 표현이다. “자리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문도와드리겠습니다”는 “주문받겠습니다/주문하시겠습니까?”, “계산도와드리겠습니다”는 “계산하시겠습니까?”로 말해야 적절한 어법이다.  셋째, 사물(事物) 존대이다. 아무리 귀중한 물건과 돈이라고 하더라도 사물에게까지 높임선어말 ‘-시’를 남용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고객님, 그 상품은 방금 품절되셨습니다. 대신 다른 상품이 있으세요”와 같은 홈쇼핑 상담원의 전화응대는 자사 상품을 너무나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상품을 고객 위에 올려놓는 우를 범하는 모양새다. 이외에도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으세요”는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특별새벽기도회 기간이세요”는 “~ 기간이에요”, “음료 나오셨습니다”는 “음료 나왔습니다”로, “주차비 3천원이세요”는 “주차비 3천원입니다”, “궁금한 점이 계시면 말씀해주세요”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장로님의 인사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장로님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로 순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용해야 옳다   우리말에는 총 세 가지 높임법이 있다. 첫째, 존경법이다. 주어를 높임으로써 행동의 주어를 존경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주체 존대법이다. 둘째, 겸양법이다. 겸손하게 사양하여 대상을 높이는 객체 존대법이라고도 한다. 셋째, 공손법이다. 상대를 높임으로써 상대를 공손하게 대하는 높임법이다.  “저희 교회는 매달 마지막 주에 자가용을 가져오지 않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 교회에 갔더니 환경도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하는 자발적 불편함을 실천하자는 광고가 나왔다. 캠페인 자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저희 교회’ 대신 ‘우리 교회’라는 정확한 대명사가 주체어로 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광고를 말하고 듣는 모든 청중은 다 같은 교회 구성원이기에 마땅히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또는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로,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따뜻한 우리말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동네, 우리 엄마… 종종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정중한 표현으로 ‘저희’를 쓰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사용법이다. 위아래가 없는 국가 간에는 나라 앞에 결코 ‘저희’를 놓을 수 없다. 상대가 외국이나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 배어 있는 현학적(衒學的; 스스로 자기 학문이나 지식을 뽐내는)인 표현은 자칫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교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증경’이란 말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고 본다. 교단 총회 등 교계 지도자들 모임에서 총회장을 지낸 분을 소개할 때 ‘증경총회장 OOO입니다’라고 한다. 증(曾)은 ‘이미, 일찍이’, 경(經)은 ‘지내다’로 ‘이미 지냈다’는 말이다. 증경(曾經)이란 말은 중국 당나라 노조린이란 사람이 쓴 고시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장안고의(長安古意)라는 시에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일찍이 춤을 배우느라 젊은 시절을 보냈다’라는 의미다. 전임 총회장을 비롯해서 전임자를 존중하고 높이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 ‘젊은 시절 춤 배우느라 시간 보냈다’는 증경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더욱이 이 단어는 국립국어원이 발행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증경국무총리’, ‘증경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증경이란 말을 ‘전임’ ‘이전’이라는 말로 고쳐 ‘전 총회장’, ‘전 노회장’으로 부르면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들 문화의 잔해는 기독교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상당수의 불교 및 유교 용어들이 교회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조문하면서 유족을 위로할 때 흔히 하는 인사말이다. 장례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도 종종 “잠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기독교적 표현이 아니다. ‘명복(冥福)’은 불교에서 온 말이다.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명부(冥府)라고 하는데, 명부에는 사후세계를 다스리는 염라대왕이 살고 있고 죽은 사람은 이곳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명부에 가서 염라대왕으로부터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내세관에서 비롯된 불교의 신관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글은 전 세계 언어 중에서 유일하게 반포일과 만든 이, 창제원리를 알 수 있는 문자이다. 많은 이들이 그 독창성과 우수성에 감탄한다. 가장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언어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으로 가득 찬 문자이다.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알파벳이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전 세계인들에게 각광 받고 있는 K-POP의 흥행 원인도 사람의 섬세한 마음까지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한글의 저력에 있다고 보는 분석이 우세하다. 한글을 바르게 표현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세종대왕의 후예로서의 당연한 마음가짐 아닐까?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소통해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언어임을 인정한다면 언어를 보듬고 아껴야 할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  / 곽상학 목사(양재 차세대, 前 고교 국어교사) <발문>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언어임을 인정한다면,  언어를 보듬고 아껴야 할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 

 2019-10-06      제12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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