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우리는 영적 군사입니다

  이재훈 목사   에베소서 6장 10~20절   영적 싸움을 피할수록 더 큰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용맹스럽게 나아갈 때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믿음의 용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 전쟁에 관한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을 시리즈로 설교하는 동안 이 말씀을 매주 동일하게 진행합니다. 영적 전쟁의 각 부분을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이 시리즈 설교가 끝날 때 이 본문을 모두 암송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고 봉독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해서 매일 묵상할 수 있도록 매주 조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적 전쟁과 진정한 평화   구약에는 전쟁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대가 현대보다 전쟁이 많아서일까요? 아닙니다. 고대나 현대나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역사가에 의하면 과거 3천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268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 20세기만 해도 약 2억 명 가량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전쟁들은 혈과 육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생존 전쟁입니다. 전쟁이야기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 매우 특이한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해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 본인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상반되는 것 같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싸움 과정에서 고난 받으셨고 그 싸움의 절정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싸움에서 패배하신 것 같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승리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싸울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평화가 무엇입니까? 적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도 평화인 것처럼 보입니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에게 식민 지배를 당할 때도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싸워 이겨서 자신의 주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악’은 ‘선’에 대한 반역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우리에게 전쟁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전쟁은 혈과 육으로 인하여 싸우는 생존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때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며 빛과 어두움의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던 천사 중에서 타락한 무리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해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후에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라고 하니까 하나님과 사탄이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은 처음부터 대등하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선과 악이 대등하게 처음부터 존재했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악은 선에 대한 배반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성어거스틴은 ‘악이란 선에 기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이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세상의 악을 보아도 선을 이용합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은 처음에는 믿게 합니다.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선을 이용하고 악용함으로써 악을 이룹니다. 악은 반드시 선에 기생합니다. 그것은 악은 선에 대한 반역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바로 영적 전쟁의 시작입니다.   거대한 하나님 군대의 일원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축복하시는 백성들에 대한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전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예수님까지 공격했던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들고 싸워야합니다. 구약에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당시 주변에 있던 모압과 암몬의 큰 세력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여호사밧왕은 싸울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아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역 10:15b).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것은 사사롭게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하나님 군대의 일원으로써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전쟁을 보십시오. 치열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사들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싸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싸우기 싫은데도 싸우는 것입니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위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도자의 결정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모든 군사들은 개인의 목적과 계획대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항하는 공격과 전쟁 속에서 우리가 그 일부분이 되어서 싸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속한 전쟁의 부분으로 싸우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법칙을 기억하며 이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전쟁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하나님께서 지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령관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이 아무리 힘들고 치열해 보이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보여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여러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로는 연약하고 부족해 보여도 승리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민족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영광이 달려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신약 곳곳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때로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깨어있다고 하지만 깨어있지 못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때로는 졸고 있고, 때로는 두려움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왜 세상이 어지러운지 모르겠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나마 살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인 동시에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둘러서 진을 치고 구원하십니다(시 34:7).”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천사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영의 존재도 믿어야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면서 하나님 나라 일에 쓰임 받는 천사들의 존재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 주위에 진을 치고 보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를 돕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하나님의 천사가 도왔습니다. 예수님을 도왔던 천사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믿지 못하는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돕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가족들과만 인사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돕고 있는 천사에게도 수고 많으셨다고 인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를 통한 보호하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를 경외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의지와 선택으로 악의 길로 걸어간다면 천사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천사도 인격적인 존재이고,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할 때 우리가 주를 경외하지 않는 걸음으로 나아간다면 천사들의 보호막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인 동시에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하심, 우리의 믿음과 순종의 결합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우리의 싸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싸워야 할 전쟁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께 맡긴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다 싸워주시겠지.” “나는 넋을 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물론 그런 영역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졸고 있을 때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부분이 있지만, 믿음의 싸움은 내가 싸워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알아서 싸워주시겠지’라고만 생각하면 우리의 영적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마치 주님께서 싸움에서 져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악한 영에 의하여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고 변명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악한 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강건하지 않았고, 내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고, 내가 성령 안에서 늘 깨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나의 인격적인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면 왜 주 안에서 강건하라고 하고,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분의 임재하심에 내어드리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치열한 영적 싸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찬양 몇 곡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전쟁은 주님의 임재 약속과 함께하심의 약속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결합될 때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승리 경험하는 ‘믿음의 용사’   오늘은 영적 전쟁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예수님께서 싸우시고, 성령님께서 지원하시는 전쟁에 참가하는 군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의 몇 사람만 대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싸워야 하는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전쟁이 싫습니다. 체질상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런 전쟁은 목회자들이나 대표자들이 싸우는 것 아닙니까? 저는 믿은 지도 얼마 안 됐습니다. 제발 이 전투에서 빼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초신자든 오래된 성도든 상관없이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갈수록 이 전쟁이 민감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 싸우는 전쟁이 있고, 장성했을 때 싸우는 전쟁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영적 전쟁을 피하려하고, 무시하면서 살아가면 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의 삶에서 당하는 위기는 영적 전쟁이 때문이 아니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까, 도망갈 때 뒤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까? 사탄이 우리 등 뒤에서 공격하도록 내어줘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이 싸움은 맹렬해집니다. 이 세상의 전쟁은 끝나기도 하고, 냉전도 있고, 휴전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은 냉전도 없고 휴전도 없습니다. 사탄과의 평화협정은 없습니다. 사탄은 거짓 평화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만 합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이 전쟁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명예 제대도 없습니다. 의가사제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고, 대체복무도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모순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병역의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전시 중인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서 병역을 거부하면 적에게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영적 병역 거부를 했을 때 일어나는 비참한 사건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약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집트에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놀라운 기적과 은혜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거부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들어가서 싸우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만일 싸움 없이 들어가라고 했다면 아무 말 없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서 싸우라고 하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땅에 거인들이 있어서 두려웠고, 둘러싸인 성벽이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며 싸우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 동안이나 광야를 유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익숙해졌습니다. 광야에 익숙하다 보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하심에 안주하려 했던 것입니다. 싸우기를 거부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빠져서 불순종하고, 안일한 태도로 악의 영과 죄와 싸우기를 거부하면 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더 크게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악의 영과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일주일 내내 적들에게 패배하고, 주일날 교회가 패배를 보고하는 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승리를 보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과 보호하심과 승리가 약속된 크고 위대하시고, 강하신 용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패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용맹스럽게 나아갈 때 놀랍게 베풀어 주신 영적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믿음의 용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과 순종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18-08-12      제1209호

[인물]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만나고 싶었습니다   살던 집 팔아 온누리청소년센터 재건축 도운 이춘애 권사 바나바처럼 자신의 소유를 교회에 기부한 이춘애 권사와 온누리청소년센터에서 받은 감사패. 마치 곱게 늙은 귀부인 같았다. 은실로 짠 것 같은 백발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부잣집 노부인처럼 느껴졌다. 이춘애 권사(90세, 서빙고공동체)의 첫인상이 그랬다. 그러나 북한 사투리가 배어있는 말투로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이야기 속에는 결코 곱고 순탄한 삶이 없었다. 짜장면 한 그릇, 아이스케키 하나 사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을 이기려고 쉬는 날도 없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억척스럽게 일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다. 그렇게 어렵게 일군 재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기부했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이춘애 권사에게 지난 9월 19일은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됐다. 그날은 온누리복지재단 산하시설 온누리청소년센터 준공감사예배를 드린 날이다. 이춘애 권사에게 이 날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권사가 살던 집을 팔아서 기부한 헌금을 온누리청소년센터를 재건축하는데 보탰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밭을 팔아 교회에 기부한 레위족 사람 ‘바나바’(위로의 아들이란 뜻)처럼 기쁨과 은혜로 기꺼이 바쳤다. 액수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이 권사에게 조금도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받았어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게 어떻게 아깝겠어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이춘애 권사는 올해 구순(九旬, 90세)이다. 고향은 평안남도 순안이다. 21살에(1950년) 남한으로 피난 왔다. 당시 이 권사는 순안에서 이모가 있는 평양으로 잠시 피신을 한 상태였다. 징집 명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여자도 군대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무섭고 군대도 가기 싫어서 평양으로 나왔어요.”  잠시일 줄 알았던 피신이었는데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향 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이모랑 오빠와 함께 남한으로 피난 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나중에 따로 피난 내려오셨고요.”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지만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1954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큰아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단돈 3천원 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리어카 행상도 했고요.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오르막길을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1950~60년대 한국은 정말 못 살았다. 이춘애 권사는 그 가난 속에서도 빚지지 않고 살려고 죽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그 흔한 짜장면도, 아이스케키도 못 사먹었었어요. 배추도 값이 싼 겉잎사귀만 사다 먹었고요. 그래도 남에게 외상 한 번 지지 않고 살았어요. 돈이 없어 굶주릴 때도 많았지만 남한테 빌리지 않았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어요. 나는 나쁜 것을 쓰더라도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고요.” 삶은 궁핍하고 고단했을지언정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갖은 고생과 실패, 가난이 이어졌지만 남의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았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1960년 이 권사는 남편과 함께 고무공장을 시작했다. 이때도 정직과 신용을 지키려는 이 권사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공장을 하면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동업하다 실패하고, 공장에 불이 나기도 했고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2시까지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어요. 직원들 월급날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고요. 약속과 신용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그렇게 정직하고 열심히 산 것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한 개였던 공장을 세 개로 늘릴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공장 운영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남편과 편안히 살날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다. 함께 고난을 헤쳐 온 남편이 53세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늘처럼 믿고 의지한 남편을 잃은 슬픔은 생각보다 컸다. 빈자리가 너무 컸다. 상실감과 헛헛함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었다.  “앞만 보며 열심히 일해서 이제 조금 편히 살겠거니 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상실감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 십자가가 눈에 보이더라고요. 제 발걸음이 저절로 교회로 향하더라고요.”  이춘애 권사는 교회에 대한 마음은 있었지만 제대로 다니진 못했다. 주일에도 공장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공장을 더 키우고, 남들 사는 것처럼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남편과 사별한 이후 이춘애 권사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열심히 운영해 온 공장을 정리해서 동업자와 아들에게 분배했다. 오로지 교회와 집을 오가는 것이 그녀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새벽기도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니고 있다.  “하나님 믿고 나서 모든 것이 평안해졌어요. 남편 잃은 슬픔도 치유됐고, 하늘나라 백성으로 구원도 받았어요. 집안에도 아픈 사람 하나 없고, 나보다 먼저 간 자식들도 없고요. 아들들도  제 갈길 찾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벽기도하면서 나라와 교회, 온누리청소년센터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저는 하나님께 빚이 많아요”    이 권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구원받은 감격, 믿음 생활하는 기쁨과 감사를 되새기며 남에게 베풀고 싶었다. 그래서 2009년 살던 집을 교회에 기증했다. 부디 좋은 일에 쓰이기만 바랐다. 그 헌신이 드디어 올해 빛을 발했다. 이 권사가 기부한 집을 팔아 온누리청소년센터 재건축비용으로 보탰다.   “집을 흔쾌히 기부하게 된 것은 아들 덕분이에요. 아들이 먼저 교회에 기증하자고 했거든요. 아들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어미의 생각에 힘을 보태는 걸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이춘애 권사는 9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하고 꼿꼿하다. 집안일도, 취미인 화초 가꾸기도, 교회 봉사도 스스로 한다. 이 권사는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이 권사의 입술에서는 감사의 말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남을 사랑하며 착하게 살아야 해요. 남한테 무언가를 줄 때는 좋은 것을 주고, 누가 오면 물 한잔이라도 대접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는 하나님한테 많은 걸 받았다는 거예요.” 이 권사는 오늘이라도 하늘나라 가고 싶다고 했다. 노인들이 흔히 말하는 빨리 죽고 싶다는 푸념이 아니다.  “누군가 그랬어요. 장사 중에 ‘예수 장사’가 가장 남는 거라고요. 인생을 돌아보니 그 말이 정말 맞더라고요. 제가 남한테 빚지지 않고 살아왔다고 했잖아요? 저는 하나님께 빚이 많아요. 하나님께 너무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여한 없이 오늘이라도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요.”

 2018-10-07      제1215호

[사역] 기획_이번 추석에는 성경이 가르쳐준 대로 대화하라!

기획_크리스천들의 건강한 명절나기 예수님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유순하고 온유하게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즐거워야 할 추석이 ‘스트레스가 가장 많은 날’로 자리잡고 있다. 잡코리아(2017)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5명 중 4명이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다 추석이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렸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핵심은 무심결에 뱉은 말 한마디 때문이다. 온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고, 사랑을 꽃피우는 추석을 보내는 방법은 성경이 가르쳐준 대로 대화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초등학생 때까지만 명절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친척들한테 용돈도 많이 받고, 또 엄마가 명절이라고 꼬까옷을 사주시기도 했고요. 그런데 자라면서부터는 명절에 친척들 보기가 불편해졌어요.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기 시작했거든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사촌과 비교하고, 대학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는 회사를 비교하더라고요. 지금은 ‘남들은 벌써 애가 몇 살인데 너는 언제 결혼하니?’라는 잔소리를 들어요. 잔소리 듣기 싫어서 조카나 친척들께 용돈 드리고 나면 제 통장이 텅텅 비고요…”  A자매(40세, 청년부)의 하소연이 바로 명절 스트레스다. 명절 스트레스는 명절을 쇠면서 받게 되는 심리적?신체적 긴장이나 피로를 의미한다. 명절 스트레스를 단순히 집안일과 명절음식 준비하느라 바쁜 주부와 며느리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리면 어린대로, 나이 들면 나이든 대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학생, 미혼남녀, 취업준비생, 노인 등 모든 세대가 명절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명절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가 아니다. 비단 A자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다. 지난 12일 <벼룩시장> ‘구인구직 조사’에 따르면 명절 스트레스로 인해 직장인 절반 이상이 명절 연휴에도 출근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명절 스트레스가 가정파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명절 이후 이혼 건수가 평소보다 2.5배 증가한다는 통계(2017년 법원행정처)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명절 이후 10일 동안이 한 해 이혼신청의 14%가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명절 스트레스는 건강도 해친다. 2017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 따르면 추석이 낀 달에 화병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예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성인남녀 3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 25.8%가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답했고, 절반 이상은 ‘명절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성인남녀 33.3%가 명절에 다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다툼의 원인은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잔소리해서’(57.6%,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고, ‘피로가 쌓여 예민해져서’(23.6%), ‘집안일 분담 등이 불공평해서’(22.7%),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서’(19.7%),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아서(15.2%) 등의 순이었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다툰 경우가 무려 77.3%나 됐다.     안 그래도 힘든데…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될 수 있다   “취직은 했어?”, “결혼은 언제 할거니?”, “연봉(추석 상여금) 얼마나 받니?” 대부분의 가정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명절에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물론 걱정되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질문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질문에 답할 상황이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올 추석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유독 상처가 되고 스트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8월 취업자 수 증가폭이 7월에 비해 2천명이나 감소했다. 청년실업률은 10%, 실업자 수는 113만3천 명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가장 높다. 20대, 40대, 50대의 고용률이 전년동월대비 0.3%p 하락했고, 실업률은 전년동월대비 0.4%p 상승했다. 이는 20대 청년뿐만 아니라 40~50대 중년들에게도 직장이나 취업 관련 대화가 불편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결혼도 불편한 대화 주제다. 현재 우리나라 혼인율은 역대 최악이다. 지난해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를 보여주는 ‘조혼인율’이 5.2건으로 1970년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해는 이 기록마저 갈아치울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혼인 건수가 13만2400건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5,500쌍 적었다.  출산율은 또 어떠한가?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 옥스퍼드대 교수가 이미 2006년 대한민국이 저출산 문제로 ‘인구 소멸 국가 1호’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바 있다. 이 예상이 실제가 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0명대’를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안부를 묻거나 궁금해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당사자에게는 비수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척들끼리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주제로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건강한 대화법   성경이 알려주는 대화법대로 대화하면 가족들끼리 상처를 주거나 받는 일이 없다. 말씀을 한 구절 읽어보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설령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 치더라도 화를 내며 대꾸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유순하고 온유하게 대화하면 진노를 가라앉힌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듣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 1:19).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자. 속단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싫다고 중간에 끊는다던지, 상대방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대화를 지속할 수도 없고 다툼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잔소리와 관련된 말씀도 있다. 가슴에 새기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잔소리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결국 잔소리다. 허물을 들추는 대신 축복의 말, 위로의 말을 함으로써 회복시키고 격려해야 한다(살전 5:11).  성경이 말하는 대화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말로 공격하거나 책망한다고 똑같이 상대방에게 대꾸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그 본보기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다. 각자의 수준에 맞춰 들어주시고 가르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대화로 표현해야 한다. 가족과 친척들의 잔소리는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상처 받지 않는 대범함도 필요하다.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은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잠언 25:11).      *10대가 듣기 싫은 말 “너 몇 등 하니? 공부 잘 하니?” “OO는 OO대학 갔다더라”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게임만 하니?” “키가 작네”   *20~30대가 듣기 싫은 말 “어디 취업했니? 아직도 백수야?” “명절인데 어디 안가냐? 애인도 없어?” “왜 이렇게 살이 많이 쪘어?” “결혼 언제 할거니?” “OO집 자식은 부모에게 비싼 선물했다더라”   *40~50대가 듣기 싫은 말 “OO는 승진했다더라” “연봉 얼마 받니? 요즘 회사 괜찮아?” “명절 보너스 많이 받았어?” “OO는 강남에 아파트 샀다더라” “얼굴이 왜 그러니? 살이 더 빠진 것 같구나”   <듣기 싫은 말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 Q. “공부는 잘 하니?” A. “예, 열심히 하고 있어요”, “다음에는 더 잘할 거예요”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은 결국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이다. 설령 공부를 못하더라도 열심히 한다는데 뭐라고 할 어른은 없다. 몇 점이냐고 구체적으로 점수를 묻는 사람에게는 ‘만점 받겠다’는 각오를 내비치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Q. “결혼 안 하니?” A. “좋은 사람 찾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미혼남녀에게 이보다 곤란한 질문은 없다. 답도 없다. 기대하는 바가 큰 어른들을 위해 부드럽게 넘기는 수밖에는.    Q. “아기는 언제 낳을 거니?” A. “정말 낳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는데 잘 안 되네요” 결혼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다.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면 잔소리와 걱정을 피해갈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말을 맞춘다면 금상첨화.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Q. “애 아빠 왜 이렇게 말랐니?” A.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한약도 먹였는데 살이 안찌네요.” 이 질문도 역시 부부가 상의해서 모범답안을 마련해 두는 게 좋다. 남편의 식습관이나 체질을 핑계로 넘어가보자. 어차피 자식은 부모가 제일 잘 안다.    Q. “못 보던 사이에 살이 많이 쪘네” A. “그렇지 않아도 요즘 다이어트 중이에요.”  외모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럴 때는 상대방 외모를 칭찬하며 살짝 넘어가거나, 현재 상태를 솔직히 시인하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전문가 기고   명절에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   한 해의 결실을 감사하는 추석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친척들로부터 용돈 타는 재미와 명절음식 먹는 즐거움으로 늘 기대에 차 있었던 기억이 있다. 종갓집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차례음식 준비로 며칠 전부터 분주하셨고, 우리도 친척들 나눠줄 음식을 만드느라 허리가 아팠었다. 그래도 들뜬 마음에 한없이 행복했다.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명절이면 새 옷을 늘 사주셨다. 명절 때 만나는 친척 동생들은 키가 훌쩍 커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학, 결혼, 취업, 출산이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즐거운 명절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피하고 싶은 자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꿈이 많았던 나는 일에 몰두하느라 결혼은 뒷전이었다. 친척들은 노처녀가 되어가는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른을 넘기면서는 어머니까지 “함 들어온다, 함 들어오나 내다봐라!”는 잠꼬대를 하기에 이르렀다. 내 상황이 이러했으니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남편의 노총각 시절은 더했을 것이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아직 좋은 소식 없니?”라고 말할 때마다 어른으로서 당연히 갖는 관심과 걱정의 표현인 줄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혼기가 찬 미혼남녀에게 이 질문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미혼남녀에게 “아직 좋은 소식 없니?”라는 질문은 고문에 가까운 멘트이다. 결혼뿐만이 아니다. 재수, 삼수를 하며 대학 입시에 거듭 실패하는 입시생, 수십 개의 이력서를 내고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는 취업준비생, 아기를 갖고 싶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가슴에 멍이 든 불임 부부, 사업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 좋은 소식 없니?”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한 말이다.  “아직 취직 안 했니?”  “OO는 대기업에 취업했다더라”  “살 좀 빼라, 관리 안하니?”  “결혼은 언제 할거야?”  “애인은 없니?”  “아무데나 되는대로 들어가” “기술이라도 배우는 건 어때?” “어디 자리 한번 알아봐줄까?” “올해 몇 살이야?” 이 말들은 젊은이들이 명절에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고 한다. 비단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치매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올케 앞에서 명절에 어쩌다 한번 방문한 시누이가 “아니, 엄마 얼굴 왜 이렇게 핼쑥해졌어?”, “아버지 속옷 좀 자주 갈아입혀드리지, 노인 냄새 나네”라면서 생색내듯 부모님한테 용돈 꾸겨 넣어드리는 대신 수고하는 올케한테 “고맙다”고 말하며 “올케 옷 한 벌 사 입어”라며 봉투를 주는 게 맞다.  명절 가족모임에 눈에 띄게 값비싼 옷이나 보석, 명품시계로 온몸을 감고 나타나 설거지 한번 안 한다든지, 본인의 자녀가 명문대에 다니는 걸 은근히 과시하거나, 지위와 부를 갖춘 가문과 사돈을 맺게 된 것을 자랑하는 모습도 꼴불견이다.  크리스천들은 명절에 가족과 친인척 간에 겪는 갈등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신앙’이다. 조상에 대한 예(禮)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장손들은 제사문제로 신앙생활에 큰 장애를 느낀다. 크리스천이 되어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 아들을 향해 가문에서 축출하겠다는 협박이 가해질 때도 많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에게 효도하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고 약속하고 있다. 살아있을 때 잘 하는 것이 돌아가신 다음에 형식을 갖추는 것보다 중요한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차례(제사) 문제로 크리스천들을 비난한다.  명절에 믿지 않는 친척들과 마주칠 때 “나는 크리스천이라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든지 “내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친척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불신자를 품는 훈련을 해야 한다. 조상을 우상이라고 표현하면 반감만 더해질 뿐이다. 종교적인 논쟁은 결론도 없고 답도 없다.  정치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 간에는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이번 3차 남북회담을 두고도 진보와 보수의 입장 차이가 다르다. 여기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주장하다가 큰 말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명절에 꼭 듣고 싶은 말   이번 추석에 친척들을 만나면 먼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좋아 보이네요”  “형님은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아요” “어머, 안 보는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음식 솜씨 여전하세요. 저는 명절 때가 너무 기다려져요. 조금만 싸주세요”  “명절 때만 만날게 아니라 저희가 밖에서 식사 한번 모실게요” 교회 서점에서 축복의 말씀이 적힌 조그마한 액자나 액세서리라도 준비해서 칭찬과 격려의 말과 함께 나누자. 무교(無敎)나 불교신자라도 싫어할 리 없다. 비신자들도 지옥가라는 소리보다는 천국가라는 소리를 좋아하고 축복의 말을 좋아한다. 잔소리보다는 용돈을 주는 게 전도의 지름길이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달리 가족이나 친척은 어렸을 적 모습부터 보아왔기 때문에 현재 내가 이룬 사회적 위상을 인정하기보다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대하기를 원한다. 그게 맞는 일이고 그걸 인정해야 즐거운 만남이 된다. 올 추석에는 상대방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해 가자. 격려의 말, 인정의 말, 긍정의 말이 전도의 포문을 여는 단초가 될 것이다.   / 김수민 권사(동대문중랑공동체, 스피치 전문가)    발문 “형님은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아요.” "어머, 안 보는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격려, 인정, 긍정의 말이 전도의 포문을 여는 단초가 될 것이다.   

 2018-09-23      제12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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