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질문 있습니다!]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치는 인생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치는 인생 “이단이 정말 많은데, 기독교와 이단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또 이단과 사이비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알려주세요, 목사님!”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 14:6). 이때 도마는 영적 무지 상태였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셨다. 예수님이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이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이시며, 홀로 영원한 생명 되심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을 내포한다. 유일한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은 시작점이요, 하나님은 마침표이다. 하늘의 질서로 정해진 이 시작과 마침을 왜곡하려는 시도들을 이단(異端) 혹은 사이비(似而非)라고 부른다. 이단은 다를 이(異)와 끝 단(端)의 한자어이며, 사이비는 영어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닮을 사(似), 같을 이(而), 아닐 비(非)의 한자어이다.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결국 이단과 사이비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끝이 다르고(이단), 시작이 다르다(사이비).” 어느 날, 홀로 카페에 앉아있었다. 옆 테이블에 중년 남성과 여학생이 마주보며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중년 남성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묘한 위화감이 들었고, 그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여학생이 중년 남성에게 성경을 배우는 중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이 신천지였다는 것이다. 대화 도중 중년 남성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요.” 다행인 건가 싶었는데,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총회장님은 바로 그 예수님을 대언하는 이 땅의 유일한 사자입니다. 총회장님만이 계시자입니다.” 이단은 끝이 다르다.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여도 전혀 다른 샛길을 걸어간다. 성경 말씀을 오용해서 인간의 욕심을 채운다. 삶을 왜곡하고, 종착지를 하나님께로 이끌지 않는다. 사이비는 시작부터 다르다. 한자어의 뜻풀이처럼 닮거나 같지도 않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전한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시대에 분명한 진리를 붙잡지 않으면 이단과 사이비의 목소리조차 긍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가르침에 대해 진리인지 분간하기 힘들다면 두 가지 질문을 해보기를 권면한다. 그 가르침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긍정하는지 그리고 사도신경의 모든 고백을 긍정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두 질문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부정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체들을 리더십으로 세우기 위해 대화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제가 말씀도 잘 모르는데, 섬길 수 있을까요?” 지금도 그렇게 질문하는 청년 리더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마도 영적 무지 상태였다. 그랬기에 그는 질문했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들을 수 있었다. 도마의 영적 무지가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명료한 진리를 이끌어 내는 통로가 되었다. 세상 다른 모든 것에 무지해도 괜찮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 14:6)는 말씀을 기억하면 된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치는 인생, 이 진리만 명확히 알고 걸어간다면 우리 인생에 담대한 평안이 가득할 줄 믿는다. / 최종현 목사(하늘대학부)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는 청년들의 신앙적인 질문이나 고민에 대학청년부 목회자들이 답과 권면을 건네는 코너다. 질문 및 고민 보내실 곳: joo@onnuri.org
2023-02-04 제1428호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절대적 도덕률이 있는가?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절대적 도덕률이 있는가? 도덕률은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행위의 기준이 되는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도덕법칙’이라고도 한다. 시대에 따라 도덕률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 다신론이나 범신론 종교를 가지거나 무신론자들이다. 절대적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혹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률을 생각하기 힘들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부정할 수 없고, 시대를 초월한 도덕률을 모든 인간이 알고 있으며 많은 경우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S.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것을 중력의 법칙이나 유전의 법칙 같은 자연법칙(laws of nature)과 구별되는 ‘자연법(Law of Nature)’ 혹은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고 표현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소리를 들었을 때 “가서 그를 위험에서 구하라”는 내면의 소리와 “도우러 가면 위험하거나 귀찮아질 수 있으니 피하라”는 다른 본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적 본능 외에 “도망치려는 충동을 버리고 가서 도우라”고 하는 제3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을 도덕률 혹은 양심이라고 말한다. 캘빈 린턴은 인류에게는 공동의 도덕적 유산이 있으며 시대적,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도덕성과 행동규범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 후반부의 6개 계명이다. 불효,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탐욕 등은 모든 문화권에서 금지하는 도덕률에 해당한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나 삶으로 드러내신 도덕률은 누구에게 제시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며 절대적인 도덕률이다. 만일 절대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만 할 것이 분명하고, 그 분쟁을 해결할 수단이 있을 수 없다. 결국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사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분쟁을 해결하게 된다.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한 가지 충동을 다른 충동보다 선호할 어떤 기반도 없다. 오직 어떤 충동이 얼마나 더 큰지만 차이가 날 뿐이다. 선악과를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도 충동의 힘이 도덕률의 저지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무제한적 욕구를 향한 충동은 도덕적 규제나 법적 처벌 없이 제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윤리와 법의 절대적 기준이 없을 때는 충동과 힘이 윤리의 근원이 된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 자신의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상황 윤리를 제시했다. 절대자로부터의 절대적 기준 없이는 그 충동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하시며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뿐임을 분명히 하셨다. 공산주의자 레닌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명백하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신의 도덕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자본가나 제국주의자에게 선한 것은 노동자나 식민지 사람에게는 악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선과 악은 없다”며 기독교의 절대적 도덕률을 부인했다. 반면 네오막시즘에 기반을 둔 포스트모던주의자는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인권의 기준으로 주장하며,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한 약자의 행동은 비록 불법적일지라도 정치적으로 정당하다(politically correct, PC) 주장한다. 즉, 노동자나 약자의 권익을 위한 것은 절대적 선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에도 약자를 보살피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불법을 동원한 소수자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는 것을 힘들어 할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성경에서 예수님은 상황마다 독창적이며 적절한 대답을 하신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에는 사랑과 공의가 균형 있게 공존한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율법의 공의로 그 행위는 정죄하되 그 죄를 저지른 여인은 사랑으로 용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간음은 죄이며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명제적 진리로 인정받았겠지만, 간통죄가 폐지된 이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에게 행한 예수님의 인격적 행동과 말씀의 선하심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명제적 진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절대성이 부정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말씀으로 드러나는 인격적 진리의 절대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류현모 교수(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2023-02-04 제1428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예수님의 성품 닮아가기!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 닮아가기!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욕을 하면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순장님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은 크리스천답지 않다고 말하더라고요. 크리스천은 욕을 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어릴 적 크리스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를 한 적이 있었다. 크리스천은 화를 내지 않고, 나쁜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생각이 틀렸음을 나를 통해서 고스란히 증명하고 말았다.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이 없지 않다. 욕이 입가에 맴도는 상황을 마주하지 말란 법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죄의 유혹과 도전에 노출되어 있기에 좌절할 때도 있고, 절망할 때도 있다. 인간의 감정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한 부분이기에 비록 그것이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분노, 좌절, 슬픔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존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이다. 시편의 주된 저자 다윗은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고백했다. “주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십니까?”라며 대적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아들이 자신을 위협할 때 분노와 억울함,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머물러 있지 않다. 부정적인 감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상황이나 환경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억울함과 분노를 아신다. 반대로 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감정과 마주할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것을 용인하고 인정하지 말고, 깨어서 분별하고 대적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의 감정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은혜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3)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감정을 온전함으로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이루실 능력이 충분하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과 인격, 성숙과 성장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3)라고 했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고, 인격을 성숙시키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하는 것으로 복음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통해서 세상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부정적인 감정의 실체와 원인을 분별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성장하고 성숙하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의 삶 가운데 새겨질 것이다. / 정한효 목사(W청년부)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코너는 청년들의 신앙적인 질문에 대학청년부 목회자들이 조언과 권면을 건네는 코너다. 질문 및 고민 보내실곳: joo@onnuri.org
2023-01-21 제1427호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진리가 무엇이냐?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진리가 무엇이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은 인간을 이성, 의지, 욕망의 세 영역으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다.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인 이성, 선을 추구하는 능력인 의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능력인 감성의 진선미는 서양철학에서 인간 이해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을 연구하던 부분은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지를 밝히는 철학의 인식론으로, 선을 추구하는 의지의 능력을 연구하던 부분은 윤리학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감성의 능력을 연구하던 부분은 미학과 예술로 발전했다. 이 세 가지 주제 중에서 뒤쪽에 있을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동물적 속성에 가깝다. 앞쪽에 있을수록 가려져 있고, 신적인 속성에 가깝다고 평가하면서 진리를 진선미 중에서 가장 앞자리에 두었다. 많은 학교 교시 혹은 교훈 속에 진리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공부하고, 학문을 익히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는 나의 빛’, ‘진리를 알고 옳게 생각하여 바르게 행하자’ 등 배움의 길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란 꼭 찾아야 할 목표이다. 사전에서는 진리를 첫째, 참된 이치나 참된 도리, 둘째,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명제나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않는 바른 판단이라 정의하고 있다. 두 번째 정의는 참 혹은 거짓을 선택하는 진위형 문제에서 참인 명제를 찾을 때의 정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말하는 것이라면, 첫째 정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공자는 이를 ‘도, 道’라고 표현하면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할 만큼 진리를 알고 싶어 했다. 진리가 모든 배움의 목표라면 모든 사람이 평생에 걸쳐 추구할 방향성을 제공하는 “절대 진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범신론이나 다신론 종교에서는 다양한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상대적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또 인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같은 무신론에서는 유물론적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진화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시공을 초월한 절대 진리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다신론과 범신론 종교와 모든 무신론에서는 진리가 상대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반면 유대-기독교-이슬람의 일신론 종교에서는 절대적인 신이 있고, 그 신으로부터 계시된 절대 진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 종교의 진리에 대한 정의가 매우 다르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심문을 받던 중에 자신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밝혔을 때 빌라도가 반문한 말이다(요 18:38). 예수님은 더이상 말씀하지 않으셨고, 빌라도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서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하시며 스스로 진리임을 명백히 하셨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 하는 이단의 괴수로, 이슬람에서는 선지자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부인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공교육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 국가의 탄생 이래 공교육은 국민교육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진리의 추구보다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 양성을 지향한다. 일본의 황국신민교육과 미국의 실용주의 국민교육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역시 좋은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상식교육과 입시교육이 공교육의 목표가 되었다. 대학 교육 역시 실용주의에 빠져 취업교육으로 흐르고 있어서 참된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부족하다. 대학 신입생들의 교양을 위한 추천도서는 무신론자들의 베스트셀러로 가득 차 있다. 다윈, 도킨스, 세이건, 하라리 등의 유사 과학자들과 칸트, 루소, 마르크스, 니체, 푸코 등의 무신론 철학자들의 책이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다. 세상에서의 명성이 그들의 주장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 주장은 일리가 있을 뿐 진리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이 없는 것처럼 그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주장했다 하더라도 절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진리가 아니다. 절대 진리만이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명확히 알고 난 이후에 어떤 책이든 분별하면서 읽을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3). / 류현모 교수(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발문>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절대 진리만이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명확히 알아야 어떤 책이든 분별하며 읽을 수 있다.
2023-01-21 제1427호
[주일강단]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 43:18~19 / 박신웅 목사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심판할 것이고, 흩어지게 할 것이며, 징계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고, 회복시킬 것이며, 다시 살아나게 할 거라는 소망의 약속이 힘차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18절). ‘지나간 일들’이라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리쇼노트’입니다. 구약성경에 5번 정도 등장하는 ‘리쇼노트’라는 단어를 신학자들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었던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상처와 아픔을 더는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지난해는 어땠습니까? 기쁘고 감사하고 좋은 일도 있었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해뿐만 아니라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렵고, 죽음과 눈물의 골짜기 같은 시간을 통과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과거의 실패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에 묶여있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새 일을 향해 달려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실패에 묶이면 낙심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하나님의 일을 향해 달려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리쇼노트’라는 단어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지난날의 실패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홍해 사건과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가장 위대하고, 기적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은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고, 사면초가 위기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통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여정이 시작되고, 애굽 군대가 수장되었던 홍해 사건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리쇼노트’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했던 과거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가장 큰 승리와 영광의 순간들을 더는 기억하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과거의 승리에 사로잡혀 우리의 신앙고백이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최고의 은혜와 새로운 믿음의 기록을 경신하지 못하고 과거에 신앙이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가 의미 없다는 게 아닙니다. 소중한 추억은 마음과 심령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의 실패와 성공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말고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시작을 향한 첫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여실 새 일들을 기대하며 과거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들고 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막 솟아나고 있는데 너희는 느끼지 못하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들고 있다”(19절).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어가 되셔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보라 내가 새 일을 할 것인데 광야의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가장 큰 역사와 위대한 기적은 하나님의 길이 열려 물이 갈라지고, 바닷속을 통과했던 것이었다면,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기적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한가운데 강이 생겨날 것이고, 광야 한가운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는 말씀은 과거를 모두 부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우리 인생에서 펼쳐 나가실 위대한 내일의 꿈과 소망을 과거의 기적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오늘의 새로운 창조 역사가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일을 기대하라고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길이 없는 곳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한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강이 생길 줄 믿습니다.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도시가 되고, 위대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태어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심령을 터치할 때 상한 심령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을 터치할 때 이 땅에서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이 회복되는 위대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삶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음 세대 신앙의 불길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일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하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아멘”으로 붙들 때 그 아름다운 계획이 반드시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하나님이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우리를 향한 생각이 크고 위대함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크고 높은 뜻으로 평안과 희망과 소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를 살아갑니다. 이미 완성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미래를 기대하며 현재라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 새 일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과거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한 다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 속 위대한 영웅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다렸고, 이삭이 기다렸고, 야곱이 기다렸고, 요셉이 기다렸고, 다윗이 기다렸고, 베드로가 기다렸고, 바울이 기다렸습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체험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기도로 그 시간을 채우십시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은혜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너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우러 일어나신다.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되다. 그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아!”(사 30:18). 하나님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복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 베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시간에서는 늦은 게 늦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 받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기다림에 지쳐 있지 않습니까? 꿈과 희망을 향한 기다림에 지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약속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오늘도 동행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기다림은 축복으로 끝날 줄 믿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로 그 시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기다렸던 안나와 시므온은 성전에서 늘 기도하며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했습니다.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에 이어서 예레미야가 동일하게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구원과 회복의 약속 시각을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70이레가 지나면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심판의 모든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회복의 시간이 올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선언된 70이레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완성되기 시작합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에스라를 통해서 성전 회복과 성벽 재건, 위대한 예루살렘의 재건이 일어나는 기적을 성취하기까지 기다리며 기도하는 다니엘과 예레미야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를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의 시간을 기도로 기다리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에 함께 하실 때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과 눈물과 깨어짐이 아름답고 위대한 걸작품으로 다시 빚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사연 많은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새로운 내일을 향해 달려가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힘차게 승리하는 한 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2-04 제1428호
[주일강단]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11~18 / 이재훈 목사 모든 사람에게는 지우고 싶은 인생의 흔적이 있고, 남기고 자랑하고 싶은 인생의 흔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기고 자랑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이 남기신 세 가지 흔적이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고,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둘째, 빈 무덤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빈 무덤을 흔적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두고 있던 무덤의 문이 열렸고,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빈 무덤이 이 땅에 계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었던 고난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부활을 이루셨는데 십자가 고통의 흔적을 남겨놓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와 같은 이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그러한 제자들을 복음과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흔적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고난의 흔적을 본 자들이 확신을 얻었고, 그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고난의 흔적은 <요한계시록> 기록으로 볼 때 영원한 예배를 돕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천상의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의 중심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주제, 예배의 내용, 예배의 목적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흔적을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흔적을 보면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기억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예배하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임에도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신 까닭은 선교와 예배에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는 삶 예수님은 당신에게 흔적을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17절).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에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받은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인에게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39대씩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습니다. 돌과 채찍에 맞은 흔적과 상처가 그의 몸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라는 고백이 “내가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보다 대접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인정받아야 하는 교회 역사에서 길이길이 빛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흔적과 상처를 자랑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써 온 모든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사도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을 책망하고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가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을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었던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 같지만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한 것은 인간의 의와 공로, 자신의 행함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 할례를 행하는 것 등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복음을 인간의 공로와 헌신, 인간의 의를 가미한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1장부터 책망하고, 도전하며, 그것이 왜 잘못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다가 결론 부분에서 “내 몸의 흔적을 보아라”면서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고 헌신했는지를 나타내면서 자랑의 도구로 삼는다면 앞서 권면한 모든 교훈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이 흔적이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는지 아느냐?”라는 고백은 인간적인 의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몸에 있었던 예수님의 흔적을 왜 강조했을까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당신들이 알아주어야 한다’ 또는 ‘당신들도 이렇게 고생해야만 한다’는 육체를 자랑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요소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12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요구하는 희생과 핍박, 헌신을 받지 않으려고 우리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밀 때 나타납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기를 꺼려하고, 그것을 교리적인 한계처럼, 이전 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고, 육체의 겉모양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세련돼 보이는 교양과 같은 종교와 문화 속에 머물 때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예배에 참여하십니까? 어떤 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이 있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십자가와 부활, 말씀밖에 없는 교회는 지루하다. 무엇인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라는 욕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온통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입니다.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예화나 감동적인 스토리, 용기를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면, 십자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라면 어쩌면 갈라디아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들어서 “새로운 것 없습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교회를 종교적, 문화적으로 만들어 가려하고, 육체를 자랑하려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고, 십자가를 자랑했던 사도 바울의 신앙을 이어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나쁘고 악한 사람들만 곤경에 처하는 게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도 곤경에 처합니다. 십자가에 거치는 것, 십자가의 참혹함, 십자가의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세련된 종교의식의 문화로 표현할 때 육체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거의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화려한 의식들과 시설, 성상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가운이 필요하다면 검정색으로 단순하게 하나를 입어라. 그것도 안 입을 수 있으면 좋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성도들과 하나 되고자 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진 예배당을 보면 강대상만 큰 예배당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를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변은 모두 옛날식으로 했고, 강대상만 앞에 갖다 놓은 예배당도 있습니다. 세계관을 바꾸는 게 그렇게 힘듭니다. 십자가에 집중하기보다 그 밖의 많은 요소들을 더욱 중요시 하고, 어떤 의식이나 절차, 문화와 종교화되는 것들이 결국 무엇을 가로막습니까? 교회의 본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 그리고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선교의 걸림돌은 사실 믿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세상 이념에 포로가 되어 있고, 세상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육체를 자랑하고 있는 교회, 선교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은 교회,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교회가 걸림돌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14절). 바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는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가 강렬히 빛이 나는 꿈을 꿨다면 ‘아, 은혜로운 꿈을 꿨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십자가 꿈을 꿨다면 악몽을 꾼 것입니다. 그만큼 수치스러운 도구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경건하고 교양 있고 보수적인 액세서리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왜 자랑할 것이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자랑’이라는 단어가 그의 전문 용어라고 할 만큼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 59번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55번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사도 바울이 사용했고, <고린도전후서>에서는 39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랑’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와 꼭 맞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의미를 풀어보면 ‘영광을 구하다’, ‘어떤 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다’, ‘어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다’ 등입니다. 제가 원문적인 의미에서 ‘자랑’이라는 단어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랑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손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이 믿고 의지하며 삶의 중심이 되고 지탱해주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삶에 자랑이 되는 흔적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자랑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는 사람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삶에 의욕을 일으켜 기뻐하게 했고, 삶의 중심이 되고 지탱이 되었습니다. 선교의 삶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인생의 흔적이 되는 삶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한 세 가지 이유 사도 바울은 왜 십자가만을 자랑했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흉악한 교수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진리는 사람들에게 거슬리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둘째,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안에 있는 신념들, 이 시대의 풍조, 그리고 왜곡된 이념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복음을 시시한 것으로,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만의 세상 논리로 그렇게 여깁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이 세상을 못 박았고, 더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가 되었기에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판단과 평가,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셋째, 십자가가 나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과 연합한 모든 이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으로 세상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세상에 대해 죽었음으로 더는 세상이 그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 진리를 증거하는 삶 십자가의 도를 믿고 체험하는 삶이 나타나는 게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자신의 공로로, 자신이 인정받아야 하는 공로로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는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에 자신도 못 박혔고, 세상도 못 박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무엇을 흔적으로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훈장이 아니라 흔적을 조사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긴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에게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삶, 증인의 삶, 선교의 삶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바울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고, 바울의 삶 속에 임하셨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셔서, 이 땅에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1-21 제1427호
[주일강단] 길, 진리, 생명(2) 길, 진리, 생명(2) 요한복음 14:1~6 / 이재훈 목사 올해 온누리교회의 영적 표어는 길, 진리, 생명입니다. 이 시대 세상을 주관하는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이념에 대해 이 말씀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올 것을 아셨기에 이 말씀을 남겨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빼내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독교가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확신하지 않으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이 말씀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이 말씀이 참이기에 교회는 역사 속에 존재해 왔고, 이 말씀이 진리이기에 세상의 그 어떤 공격과 위협에도 교회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벌써 세상 속에 사라져야 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이 말씀이 살아있는 진리,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는 것을 체험한 믿음의 선배들과 이 시대 사역자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말씀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꼽으라면 아버지입니다. 어떤 분은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은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합니다. 관련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의 ‘National Center for Fathering’이라는 단체에 의하면 미국에는 2천만 명이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아버지 없는 전염병(Fatherless Epidemic)’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합니다. 청소년 시기 감옥에 간 사람의 85%가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나왔습니다. 문제 행동을 가진 어린이 85%, 약물 중독에 있는 사람 75%, 고등학교에서 중퇴하는 이들의 71%, 10대 임신하는 이들의 71%, 모든 노숙인과 가출 어린이의 90%, 청소년 자살의 63%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사회에서 심각하고,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Fatherless Home’입니다. ‘Fatherless’란 단순히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인 경우입니다. 세계 역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무신론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아버지와 심각한 문제에 빠진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아버지들에게 질문하면 그들도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고 할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조상 탓만 할까요? 아버지의 문제, 그 아버지의 아버지 문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의 문제일까요? 인류가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입니다. 입양된 사람들이 친부모를 간절히 찾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고, 그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인류 전체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26번, 15장에서 11번, 16장에서 14번, 17장에서 52번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합하면 103번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는 호칭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위해서이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103번이나 사용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셨고,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셔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때에 다시 오셔서 믿는 자들을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이루신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원래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아들이기에 예수님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실 일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아버지 집에 거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아버지로 부르며,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큰 상처와 아픔을 줬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고아로 자랐다 할지라도, 육신의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이 땅에서 주는 최고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오심, 이 땅에서 행하심, 떠나심, 다시 오심을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때,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 일을 행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길, 진리, 생명이라는 세 단어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축복을 예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삼중적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었고, 아버지의 생명 안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진리가 아닌 거짓을 따라 살게 되었고, 아버지의 생명이 아닌 육신의 자연적 생명에 갇혀 결국 죽음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고, 진리를 잃어버렸고,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행하신 일은 죄 가운데 처해있는 인류에게 필요한 세 가지 축복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인류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하는 상태라면 아버지 집 밖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란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현재 상태, 실존이라고 말하는 이 상태는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들어 주신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가지 비유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 양을 끝까지 찾아 와 기쁨을 나누었다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그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결국 찾아내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먼저 요구하고 아버지 집 밖으로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먹을 것이 떨어져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상태에 이르러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쁨으로 그 아들을 맞아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연속적인 세 가지 비유에서 주시는 교훈도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목자에게는 양이 소중한데 그 양이 잃어버려져 있고, 여인에게 드라크마가 소중한데 드라크마를 모두 잃어버렸고,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소중한데 그 아들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죄 가운데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존재로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잃어버려진 상태이기에 인간에게 결핍이 있고,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있기 때문에, 잃어버려져 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열심히 산 거 같은데 허무하고, 스스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루었어도 허무감이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잃어버려진 것이 소중한 만큼 찾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의 양에 대한 사랑, 잃어버려진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과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아버지는 찾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달려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 번째 교훈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함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연속적인 비유는 인류의 상태, 실존을 의미합니다. 초점은 세 번째 비유에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찾듯이 아버지는 집을 떠난 인류를 찾고, 찾아오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드라크마를 찾듯이, 찾을 때까지 열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찾은 자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아버지 집 밖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 그냥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아버지 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 회개한 흔적이 있습니까? 거짓말로 변명하고, 숨겼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각과 이성적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 아버지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회개는 인간 스스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유일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회개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이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회개의 길입니다. 인류에게 진정 필요한 길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가능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예수님을 긍휼히 여겨 주는 주간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너희 자신과 너희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당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불쌍해서 믿어주고, 예수님이 불쌍해서 교회 나와 준다면 신앙의 근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죽음이고 곧 나의 옛사람의 죽음임을 믿을 때 회개가 가능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이제 아버지의 집에 예수님과 함께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갈라짐으로 히브리서 말씀처럼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회개의 길이 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 둘째, 인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남으로 진리를 잃어버렸고,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버지 집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를 버림으로 거짓을 믿었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을 버리고,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말을 믿음으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타락의 본질은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일컫는 말이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입니다. 탈진리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이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증거가 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바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가 그것을 규정하고, 분석을 할 능력이 발달한 것뿐이지 태초 타락부터 그랬고,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스트 트루스’는 진리를 버린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사실이 나왔는데도 믿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거나 무엇인가를 믿고 있습니다. 가훈을 믿든지, 과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믿든지, 어떤 책에서 나온 말을 믿든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생철학을 믿든지, 무엇인가를 믿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짓의 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을 살펴보면 거짓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짜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각한 인간의 질병은 바로 타락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렸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는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양심이 남아 있고, 윤리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본능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넣어 주신 진리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윤리입니다. 인간의 윤리는 진리의 그림자입니다. 원래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우리는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존재하고, 바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 아버지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윤리를 뛰어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보면 당시 그 어떤 법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합니다. 하나님 진리의 그림자를 율법에 담아서 보여주셨는데 세상 그 어떤 나라의 법전보다 탁월합니다. 십계명이 모든 윤리와 법전의 근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인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이 세상에서 많은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지혜로운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은 진리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이 없어도 예수님을 바르게 믿었던 믿음의 조상들에게 놀라운 영적 분별력이 있었기에 이 나라와 민족이 이처럼 번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분이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셨기에 그분은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그분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세상에서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세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거하기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 셋째, 인류는 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이 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조치하신 것이 있습니다.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셨지만 두 번째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계속 먹으면 하나님이 영생하도록 계획하신 실과이기 때문에 타락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벌로 그들이 죽음에 처하도록 하셨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획이 있으셨기에 타락한 상태,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의 실과 12그루가 나오는데 그것이 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있는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습니다. 다시는 시험이 필요 없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래서 동산 밖으로 쫓아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적 생명만 의존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생명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인 ‘조에(zoe)’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생명인 ‘비오스(bios)’입니다. 자연을 의지해야만 하는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제한적인 자연을 의지해야 하는 생물학적 생명만 남았습니다. 자연적 생명에는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을 보면 본능과 자연 질서에 순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만큼은 땅에 딛고 있지만 우주를 탐험하고, 바다를 탐험하고, 자연 질서에 의존하면서도 자연 질서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연적 생명에 국한한 인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 아들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가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인류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되셨고, 사탄의 거짓에 속아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리가 되어 주셨고,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얼마나 확신하느냐에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확신하고 체험하는 것은 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전하는 삶이 없다면 확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이 선교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이 진리, 이 생명, 이 길을 온 세상에 알리는데 힘을 다하는 온누리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1-14 제1426호
[주일강단] 길, 진리, 생명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1~6 / 이재훈 목사 우리 인생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직면한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문화재 법으로 건물 외형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술집으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고 해고 위협을 받는 일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공립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징계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밝힌 교수는 소수종교보호법에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배당이나 개인의 사생활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흐름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도 거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사립학교에서도 건학이념에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도록 많은 규제를 받습니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수세기 동안 흘러온 흐름이 최악의 상황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진리와 권위로 받아들여졌던 모든 사실을 이성과 경험으로 의심하고 비판하는 문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회의와 의심이 전염병처럼 온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다음 세대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신앙보다 의심과 회의가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사상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위치에 인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은 어떤 것이든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념이 절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모순과 거짓, 앞뒤가 맞지 않는 사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을 규정해서 이름을 붙인다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실(fact)’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 사항인 ‘가치(value)’의 세계라고 주장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선택영역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각자 가치 있게 여기는 것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계시된 진리는 수많은 이데올로기, 마치 상점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 중에서 하나의 브랜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진리의 기준을 믿고 찾는 것은 독선적이고, 분열을 일으키며, 차별을 조장하는 태도라고 비난합니다.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고, 진리와 거짓의 구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거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다섯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첫째, “어느 종교가 모두를 위한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배신행위에 가깝다.” 둘째, “모든 종교는 같은 범주에 속하기에 궁극적으로는 같은 진리에 이를 수 있어서 표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하려는 소위 전도는 예의가 아니고 대화의 수준에 멈춰야 한다. 그것은 강요가 될 수 있고 심지어 폭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어떤 종교든 진리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만 주장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누군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이것이 나에게는 진리다’라고 말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진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명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바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항상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와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씨름해야 했고, 그 후에는 로마의 여러 종교와 사상, 고대 그리스 종교, 여러 종교의 도전과 씨름했습니다. 요즘은 이주로 인해서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원화된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종교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교회만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중세시대에 실패했습니다.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적 다원주의와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다원주의는 구별해야 합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란 무엇입니까? 사회 안에 다양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무엇입니까?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각자의 선택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서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진리이고, 절대적인 진리인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같이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적 다원주의입니다. 이 근본적인 사회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사상을 우리가 규명하고 진단하지 않으면 휩쓸려 갑니다. 언어적인 화려함으로 성도들의 삶을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 예수님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출연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곧 예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갈 것인지 둘 중 하나일 뿐이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맞는 것 같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양쪽에 설 수 없습니다. 둘 다 포함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명하게 구별되는 주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은 “세상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고, 또 한편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있으며 그것이 곧 예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에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가치일 뿐입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지 않고 계속 변한다면 어떻게 과학을 공부합니까?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일정한 속도를 대입해서 연구하지 않습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움직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거리에 따라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과 역사, 세상을 지탱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합니다. 과학의 영역에도 존재하듯이 우리의 삶과 역사에도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교계에서도 이 시대는 다원주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세상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도 전부 상대적으로 바꿔서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생각이지 이 시대는 아니라면서 성경도 다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퀴어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그들에게 맞게 성경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선포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던 시대도 다원화된 세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시대와 그리스 시대 수많은 종교와 사상, 그 시대 다원적인 세계에서도 “예수님은 유일한 주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세속 권력이 종교화돼서 황제를 ‘큐리어스(주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시대에 “예수님이 주님”이고 고백했던 이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흐름과 조류를 거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시대의 흐름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가 세상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많이 안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회사업을 해야 한다고 결론 낸다면 저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봉사에만 집중하면 세상이 흐름을 바꿀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순교의 각오로 이 시대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에 사로잡혀 휩쓸려 갈 때 “유일한 진리가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유일한 생명이 있습니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세상에게 신뢰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 교회마저 참된 신앙고백을 희석시키고, 지켜야 할 진리를 포기하고, 질서를 내어 줘서는 안 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가 그래서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성을 받아들였던 영국의 교회가 일주일에 평균 10개 정도 문을 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 생명 되셨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세속의 이념에 내어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견고하게 믿고, 주장하는가에 따라서 대한민국 성도들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느냐 아니면 세속의 이념의 먹이가 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정말 중요한 해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교회가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먹이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해라고 느낍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그 신앙고백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심판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살아나셔서 그 대적이 모두 항복할 때까지 지금 아버지 곁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죽으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하는 것은 그 영향력입니다.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대개 어떤 지도자든 살아 있을 때 영향력을 미치고, 죽고 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기념일은 있지만 그 영향력이 점점 쇠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향력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하심이 사실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악을 이기는 승리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고백을 개인의 가치 영역, 책 속에, 예배당 안에 가둬 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의 거센 이념과 사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몸만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세속의 사상에 팔아넘긴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과 모든 판단에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굳게 믿고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6절). 우리 모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신 그분께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분께 인도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15세기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수도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썼습니다. “길이 없이 가는 곳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없이 앎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명 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따라가야 될 길이며, 너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너희가 소망해야 할 생명이다. 나는 침범할 수 없는 길이며, 흠이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가장 올바른 길이며, 진실로 옳은 진리이며, 축복된 생명이다. 너희가 나의 길에 거하고, 나의 진리를 안다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통화기에 어느 길로 가든지 꼭대기에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어떤 길은 낭떠러지로 향하고, 어떤 길은 골짜기로 빠지고, 어떤 길은 막다른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신학자들도 진리라는 단어가 분열을 시키기 때문에 사랑이란 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거짓을 믿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를 설명하는 대표적 예화가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인용하는 예화입니다. 어떤 인도의 왕이 기르는 코끼리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서로 코끼리를 만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아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몸통을 만졌습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다리를 만진 사람이 “아, 코끼리는 엄청난 둔탁한 벽과 같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과 같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를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만지고, 부분을 말하는 것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핵심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짚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틀렸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나옵니다. 코끼리인 줄 알고, 코끼리를 몇몇 부분만 알고 잘못 이야기한 것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평가하는 왕이 있습니다. 틀리게 말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왕의 이야기는 싹 빼버리고,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그 부분을 전부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전체를 알고, 전체를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모든 것을 판단하실 만왕의 왕이 계십니다. 교회가 절대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왕이 계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상 속에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수많은 종교와 사상, 우상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분들을 지탱해주는 게 무엇입니까?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로입니다. 아프리카에서 25년 사역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건강도 무너지고, 미래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은퇴한 그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귀국하는데, 그 배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항구에 배가 도착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을 환영하는 팡파르와 환영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부부를 환영하는 인파는 없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낙심과 절망 속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남편 선교사가 아내에게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야. 우리는 선교지에서 수십 년 동안 생명을 다해서 사역을 했는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고, 대통령은 여행을 다녀오는데 환영을 받는 거는 불공평한 일이야.” 낙심에 빠져 있는 선교사 아내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처와 아픔, 불평을 쏟아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고쳐주셨어. 나의 아픔, 불평을 쏟아냈더니 하나님께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신 걸 느꼈어.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집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고,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유일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속입니다. 이 세상의 헛된 이데올로기와 다원주의에 속지 않고,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확신 있게 걸어가십시오.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1-07 제1425호
[맛있는 말씀 해설]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맛있는 말씀 해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이 말씀에 나오는 ‘계명성(morning star)’을 어떤 성경 초기 번역본에서는 ‘루시퍼(Lucifer; 타락한 천사, 사탄)’라고 번역해 놓았다. 라틴계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의 영향을 받은 영어번역본(New King James Verison)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성경공부를 하다가 계명성이 사탄 루시퍼를 가리킨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정말 계명성이 루시퍼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계명성’은 ‘할렐’로 표기되었는데, 동사 ‘할랄(비추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밝은 것,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뉴킹제임스 번역성경은 아마 계명성을 ‘빛을 가져오는 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초기 교부전통을 따라 무작정 루시퍼로 번역한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벌게이트와 뉴킹제임스가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루시퍼로 번역한 이유는 13절에 등장하는 “북극 집회의 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북쪽의 높은 산에 신들의 모임이 있다는 전설과 가나안 신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거나 인정해서라기보다 문화적 배경을 수사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칼뱅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계명성을 루시퍼로 이해하기보다 ‘교만한 바벨론 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본문과 앞뒤 문맥에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서려 했던 바벨론 왕은 스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떨어지게 된다(15절)는 것과 그의 멸망으로 그의 후손과 그의 시체는 매장지도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19절)는 구절은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자처하던 바벨론 왕이 얼마나 하늘을 찌를 듯 교만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허망한 제국의 영광만을 추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교만과 권력, 세상의 영광과 힘은 새벽 별이 뜨는 아침이 되면 부질없이 사라지는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새벽에 가장 먼저 떠올라 잠시 누리는 샛별과 같은 빛난 영광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게 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역사의 무대에 샛별처럼 등장한 신흥국가 바벨론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권세가 천하를 호령하고 수많은 열왕과 나라를 두려움에 빠뜨렸고(16절), 전성기 시절 바벨론 왕은 강력한 힘과 군사력으로 나라와 도시들을 짓밟고 모든 것을 초토화했다(17절). 교만한 바벨론 왕을 이사야는 ‘계명성’이라 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데, 2인칭 서술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 의지가 담긴 1인칭으로 전환해 선포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2절). 이사야 선지자는 그 권력과 욕망의 속성을 파헤치며 계속해서 말한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4~15절). 끝없는 교만과 자신의 영광에 도취된 바벨론 왕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를 맹렬하게 쏟아놓고 있다. “열방의 모든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 쌓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18~19절). 이와 같은 문맥과 주석적 작업을 토대로 볼 때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타락한 천사 루시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제한시키기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바벨론 왕과 그 같은 교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해석할 때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2023-02-04 제1428호
[맛있는 말씀 해설] 로마서 5장 20절 맛있는 말씀 해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간혹 간증하는 성도 중에 “삶 속에서 큰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 은혜가 크다”고 고백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간증을 들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죄를 크게 지어도 나중에 큰 은혜를 받는다면 오히려 적당하게 죄를 짓다가 회개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말성경으로 읽어도 그 뜻이 비슷하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롬 5:20). 이 본문을 읽다보면 일단 율법이 들어온 목적은 범죄를 증가시키기 위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은혜가 크다고 한다. 둘 다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분의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범죄를 줄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읽다보면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증가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죄가 많은 곳에는 은혜가 많다고 한다.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많이 지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려고 고쳐 읽는다. 흔히 하는 해석은 이렇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된다” 즉,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더욱 느끼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로마서 3장 20절은 이 해석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본래 목적과 다르게 율법의 기능 중에 죄를 깨닫게 하는 요소가 있음이 분명 맞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억지로 율법의 목적이 죄를 더 깨닫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근거가 별로 없다. 이 구절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공동번역 개정판으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롬 5:20, 공동번역). 로마서 4장 15절도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마음으로 더 많은 죄를 지었다. 속과 겉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율법을 교묘하게 벗어나 더 많은 죄를 짓고 살았다. 율법은 아담의 범죄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죄는 율법을 악용해서 사람들이 더 많은 죄를 짓게 했다. 따라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의미는 율법으로 인한 엄청난 범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그 범죄를 능히 덮고 이길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죄를 많이 짓는 만큼 은혜가 커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죄가 있을지라도, 그 강력한 죄를 덮을 만큼의 더 큰 은혜가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어진다는 의미다. 바닷가에 쌓아 올린 모래더미가 아무리 커도 파도가 밀려오면 순식간에 쓸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는 항상 크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3-01-21 제1427호
2023년 설 가정예배 및 추모예배 2023년 설 가정예배 및 추모예배 * 가정예배 지침 1)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헌법 <예배와 예식> 편에서 “우리나라의 민족이 오랫동안 지켜 온 명절과 국경일 등은 우리의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예배의 계획과 설교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에 온누리교회는 절기에 맞는 예배 자료를 성도에게 공유하는 것입니다. 2) 추모(追慕)예배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제사와는 완전히 다른 예식이며, 죽은 자를 추억하며(追) 슬퍼하는(悼) 추도(追悼)예배와도 다릅니다. 사랑했던 가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며, 한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을 지켜 죽은 자를 경배하는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향이나 촛불을 켜지 않으며, 지방을 쓰거나 음식상을 차려 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했던 가족의 사진을 놓고 그리워하며 생전의 좋은 추억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설 가정예배의 경우 가족들이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눈 다음 검소한 선물을 교환하거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작은 사랑을 실천한다면 더 의미 있는 명절이 될 것입니다. 설 가정예배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찬송 ............................... 아 하나님의 은혜로(새310, 통410) ................................ 다같이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엡 4:21~6:4 ......................................... 가족 중에서 설교 .......................................... 그리스도인의 가정 ........................................... 설교자 축복의 마음 나누기 ............................................................................................. 다같이 (말씀에 비추어 돌아가며 서로에게 축복의 마음을 전한다) 중보기도 ............................................................................................................ 다같이 찬송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새436, 통493)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그리스도인의 가정 들어가는 말 ‘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마음이 설렙니다. 아마도 설이라는 단어가 새로움과 기대, 익숙하지 않음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관계에 ‘21세기형 가족’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는 가족이라는 단어는 ‘안정감, 익숙함, 연대감’ 등의 따뜻한 분위기를 나타냈다면, ‘21세기형 가족’에서는 ‘외로움, 낯섦, 독립적’이라는 차가운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아무런 대비 없이 맞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실천편에 해당하는 긴 본문 중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실천강령입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관계를 세워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새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확인하고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함께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묵상해봅시다. 1.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서로를 거룩한 새 사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21세기가 깊어가고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선포한 이상 이제는 세속적인 유혹의 욕심 때문에 가정이 흔들리거나 썩어질 것들 때문에 가정이 무시당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다면 믿음의 가족들끼리는 거룩한 새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고 선포하며 새로운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을 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언어와 감정생활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예수님의 가치가 달려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거짓과 더러운 말, 희롱의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들이 그리스도인의 입과 입술, 혀와 목구멍에 맴돌거나 드러나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저질스러운 욕을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은 선한 말과 용서하기를 즐기는 삶입니다. 그래야 주변 이웃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에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계신 성령님께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노를 잘 다스려 주실 것임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맡겨 드릴 때 분노로 인해 죄를 낳고 마귀가 틈타게 하는 어리석음을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특히 가족들을 향한 언어와 감정 표현이 전달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성령 충만하고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세월을 아끼고, 술 취하지 말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나눠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가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중보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족 간에 피차 복종하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찬양과 기도, 말씀을 나누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는 말 2023년 설을 맞으면서 더는 낯설지 않은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개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관계에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움을 향하고, 예수님을 향한 기대를 품고, 익숙하지 않지만 간절히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2023년 한 해 동안도 우리 가족과 날마다 순간마다 동행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추모예배 예배순서 오늘 우리는 고(故) OOO님을 추모하며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시간 신령과 진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묵상 ............................................ 시편 23:1~6 .................................................. 다같이 찬송 .................................. 주 안에 있는 나에게(새370, 통455)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살전 4:13~18 ....................................... 가족 중에서 설교 ......................................... 믿음 속에서 위로합시다 .................................... 설교자 찬송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새545, 통344) .................... 다같이 추모하는 이야기 ................................................................................................. 다같이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유품을 통해 고인에 관한 추억을 나눈다) 주기도문 ............................................................................................................ 다같이 믿음 속에서 위로합시다 들어가는 말 죽음이라는 것은 산 자들과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살아 남아있는 자들에게 슬픔과 아쉬움을 남겨두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을 ‘자는 자들’(헬라어 ‘코이모메논’, κοιμωμνων, 잠든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라 말하면서 그들을 기억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태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자는 자들’을 기억할 때 슬픔보다 소망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이 경험하는 유익은 ‘이제 다시는 세상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마지막 부활의 때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부활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요 5:29). 남아있는 자들이 이것을 기억할 때 슬픔과 아픔과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더라도, 남은 생애를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될 것과 귀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믿게 됩니다. 절망을 모두 내려놓고 소망을 키워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자는 자들’을 ‘예수 부활 신앙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살아 남아있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졌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자는 자들과 이 순간에 믿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역사할 것을 확신하고, 기쁨으로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3. 다시 오실 예수 강림의 때 ‘자는 자들’을 다시 만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별로 끝나는 게 죽음이라면, 믿음과 상관없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주 강림하실 때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을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고 기뻐하며 기다립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늘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고, 서로 위로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십시오”(살전 4:18). 우리가 사랑하던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인의 신앙과 삶을 인정하셨고 기뻐하셨다는 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고인의 신앙과 삶과 사역들이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믿음의 유산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이 신앙이 복음의 능력이 될 것을 담대히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노치형 목사(중종로공동체)
2023-01-14 제1426호
[맛있는 말씀해설]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맛있는 말씀해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눅 11:9)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누가복음 11:9~10). 이 말씀은 많은 성도에게 가장 사랑받는 구절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기도생활에 큰 혼란을 겪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우선, 이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청원과 간구가 이루어질 거라는 긍정적인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정말 이 말씀처럼 기도하는 자의 내면동기와 무관하게 하나님께 무조건 기도하기만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교회에서 기도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가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서의 기도 관련 본문들과 이 구절을 서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또 다른 본문은 제자들에게 ‘강청기도(persistent prayer)’를 강조하고 있다(눅 11:5~8, 18:1~8). 반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씨름하고 있다(눅 22:35~45).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11:2~4)과 성령 안에서 기도함의 중요성(11:11~13) 사이에 놓여져 있다. 이 말씀에 비춰보면 참된 기도란 주기도문의 내용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이 의도하신 기도란 내 신념과 욕심을 내려놓고,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가는 것이다. 무조건 내 고집과 신념, 자신의 기도제목에 하나님의 뜻을 집어넣고 반드시 응답해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기도를 하나님 뜻 안에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것은 잘못된 동기와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기도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기도하면 적어도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배치되지 않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0).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는 기도응답이 내 기대에 못 미치거나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빌 하이벨스의 책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를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도는 네 가지 형태로 응답된다. 첫째,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면 즉각 ‘Yes’가 온다. 둘째,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가 안 되면 일반적으로 ‘No’가 온다(이때는 안 들어준 것이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맞춰져 가고 있는 과정이라면 ‘Silence(침묵)’라는 기도응답이 올 수 있다. 내면의 그릇과 성품이 축복을 받을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도응답이 지연(Delayed)되는 경우다. 하나님 편에서 응답을 주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획과 비밀에 속해 있어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보다 앞서면 결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응답이 오더라도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신실한 믿음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기도의 본질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신 것이다. 따라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성도들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반드시 응답되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2023-01-14 제1426호
남상옥 장로의 시나브로 기부와 이웃사랑 인물 인터뷰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 일상적이고, 꾸준하게 남상옥 장로의 시나브로 기부와 이웃사랑 <일상적이고 꾸준하게 기부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남상옥 장로> <지난 1월 13일(금)부터 28일(토)까지 다녀온 우간다 의료 봉사.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시나브로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유사어로 ‘살금살금’, ‘은밀하게’ 등이 있다. 남상옥 장로(강촌공동체, ㈜엘브리지아브노바 대표이사)의 기부와 이웃사랑이 ‘시나브로’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린다. 남상옥 장로에게 기부와 이웃사랑은 삼시 세끼 밥 먹듯 일상적이다. 또 꾸준하다. 10년 넘게 예손(발달장애인 화가들의 아트 스튜디오) 달력을 구매하고, 20년 넘게 아프리카 의료 봉사를 이어오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하던 기부와 봉사가 어느새 일상이 된남상옥 장로의 시나브로 기부와 이웃사랑 이야기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남상옥 장로는 대학교 1학년 때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 소속된 같은 대학 친구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1978년 11월 4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된 친구인데, 그 친구가 저에게 ‘사영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길래 ‘못 들어봤다’고 했더니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더군요. 그 친구를 통해서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다음 날 그 친구가 기숙사를 찾아와 교회 가자고 했다. 그렇게 남상옥 장로가 교회에 나갔다. 처음 간 교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제 옆에 앉은 분이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서 헌금하는 걸 봤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분이 김준곤 목사님 사모님이셨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대학생에게 당시 만 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어떻게 저 큰돈을 아낌없이 낼 수 있을까’ 놀랐고, ‘나도 저분처럼 헌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백 원, 이백 원 헌금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더 많이 헌금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남상옥 장로는 그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헌금을 아낌없이 기부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남상옥 장로의 신앙은 기복(起伏)의 부침이 없었다. 교회에서 맡은 일에 묵묵히 책임을 다했다. 그런데 평온하던 그의 신앙생활에 일대 전환기가 있었다. 1998년, 남상옥 장로가 교회를 다닌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다니던 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공사대금 관련 비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제가 건축업자들에게 뭐라고 했더니 목사님이 그걸 아시고 ‘자기한테 이야기하면 될 일을 왜 업자들에게 싫은 소리 하느냐, 오늘부로 이 교회를 떠나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잘 다니던 교회에서 갑자기 쫓겨나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크게 실망했을까? 그런데 남상옥 장로의 고백은 달랐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교회로 가야 하나 그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남상옥 장로는 여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정착할 교회를 다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CCC 선배 목사님들이 있는 사랑의교회에도 가보고, 지구촌교회에도 가보고. 마지막으로 온누리교회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 CCC에서 하용조 목사님이 정말 좋은 말씀을 하셨던 게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예배드린 바로 그날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깨닫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맡겼어야 했는데, 제가 잘난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여러 교회를 전전하는 일을 멈추고 온누리교회에 정착했다. 남상옥 장로는 온누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게 참으로 재미있었다. “온누리교회에서 아버지학교, 하나님의가정훈련학교, 일대일제자양육 등 체계적인 양육 프로그램들을 접한 게 가장 즐겁고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온누리교회의 양육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제가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좋다! 남상옥 장로의 시나브로 기부와 이웃사랑도 조금씩 성장했다. 그는 2013년부터 매년 예손 달력을 대량 구매해서 회사 홍보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손 달력 구매액이 무려 2억 원이 넘는다. 이뿐만 아니다. 2016년부터는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온누리복지재단 산하시설)에 발달장애인 화가 양성을 위한 ‘(주)엘브리지아브노바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금식기도를 합니다. 2016년 건강기능식품 회사를 확장하면서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때 ‘이익 1%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매년 그 금액이 늘고 있습니다.” 남상옥 장로의 섬김과 기부를 일일이 늘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남상옥 장로가 기부를 일상처럼 하는 그 비결이 무엇일까?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바쳤듯이 주는 것을 정성껏 드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는 사람은 계속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상옥 장로의 따뜻한 마음에 온누리복지재단이 화답했다. 지난 1월 5일(목) 온누리복지재단이 남상옥 장로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작은 이익으로 예손 화가들을 도울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저는 예손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작품에 묻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예손 달력을 선물 받은 직원들과 거래처 사람들도 그림을 보면서 놀라워하고 정말 좋아합니다.” 남상옥 장로의 기부와 섬김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남 장로는 지난 1월 13일(금)부터 28일(토)까지 크리스천 의사들과 함께 우간다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우간다 의료봉사는 남상옥 장로가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봉사다. “하나님의 사역은 함께, 한마음으로 할 때 이루어집니다. 제 힘으로, 제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들과 함께 섬길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쁘고 행복합니다.” 남상옥 장로가 새해를 맞아 온누리교회 성도들님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한동안 전도하지 못해서 크게 아쉬웠습니다. 크게 아쉬웠던 만큼 올해는 더 열심히, 더 많이 전도하려고 합니다. 전도폭발훈련도 받을 예정입니다. 前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이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 행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전도하고 싶습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도 전도하는 한 해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 합니다. 모두 함께 전도에 힘을 보탰으면 좋겠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훌륭하고 출중한 교역자들과 리더십들이 있고, 지역사회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좋은 교회에 안개 성도들이 많은 게 정말 아쉽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꼭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체계적인 양육 훈련을 받고, 농어촌교회나 미자립교회들을 돕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온누리교회 성도 모두가 예손 달력 하나씩 사서 책상에 뒀으면 좋겠습니다(웃음).”
2023-02-04 제1428호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동성애는 유전되지 않는다! 류현모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동성애는 유전되지 않는다! 서구와 북미에서 친동성애적 제도와 법률이 통과되는데 큰 이정표가 된 두 가지 거짓이 있다. 첫째, 1948년과 1953년 각각 발표된 ‘킨제이 보고서’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性的) 행동에 대한 연구보고서인데, 성에 대한 담론을 터부시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킨제이 보고서는 수많은 노골적이고 충격적인 조사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미국인 약 10%가 동성애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동성애 운동가들이 “국회, 법원, 정부, 언론은 국민의 10%나 되는 동성애자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공격적인 질문을 뒷받침했다. 이 보고서는 이후 40여 년 동안 성적 담론의 독점적 근거자료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1990년 라이즈먼의 저서 <킨제이: 성과 사기>, <킨제이: 범죄와 그 결과>를 통해 킨제이 보고서가 의도를 가진 통계조작임을 폭로했고, 그 이후 국가 단위의 조사에서 동성애는 양성애를 포함해서 1~2% 정도인 것이 밝혀졌다. 둘째, 1993년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원이었던 딘 해머가 사이언스 저널에 발표한 ‘Xq28’ 부위에 남성동성애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다는 논문이다. 앞의 폭로로 무너져 내리던 친동성애 분위기가 이 논문을 기반으로 부활했다. 동성애 행위가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유전이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므로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생겨났다. 동정론과 함께 2001년 네덜란드를 필두로 2015년 미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가 동성혼을 허용하고, 친동성애적 법률을 제정했다. 킨제이와 해머는 모두 동성애자이며, 모든 형태의 성적 행동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2019년 사이언스 저널에 영국과 미국 연구자들이 50여만 명의 유전체를 분석해 동성애 유전체 연구의 결정판이 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작위 모집단을 선택함으로써 이전의 남성 동성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비해 표본 선택이 공정했고, 전체 50여만 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택함으로써 이전의 수백 혹은 수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비해 통계학적 신뢰도가 높다. 둘째, 1993년 해머의 연구는 ‘염색체 연관 분석(chromosomal linkage analysis)’이라는 불확실한 방법을 사용했으나 2019년 연구는 ‘전장 유전체 연관성연구(genome-wide association study)’라는 가장 정밀한 기법을 사용해 신뢰도를 높였다. 셋째, 이 연구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샘플 선정과 분석방법, 논문에서의 용어 선택과 결론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단체 대표자들의 사전검열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 논문 결과에 대해 동성애자들이 반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논문은 1993년 해머 등이 동성애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Xq28’ 부위에 동성애와 연관된 어떤 변이도 발견되지 않음을 밝혔다. 동성애가 유전된다는 과거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확실히 밝혔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도 동성애자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다섯 군데의 ‘SNP’(단일염기 다형성)를 밝혔다. 4번 염색체에서 여성 동성애자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SNP는 조울증과도 연관이 있다. 7번과 12번 염색체에서 남녀 동성애자 공통으로 나타나는 SNP는 각각 조현병과 우울증과도 연관이 있다. 남성 동성애자에서만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두 SNP가 있는데 11번 염색체의 SNP는 후각 수용체와 연관이 있어서 특별한 냄새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고, 15번 염색체의 SNP는 대머리를 유발하는 남성호르몬 조절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다섯 가지 SNP를 모두 종합해도 동성애 성적 행동의 1%밖에 설명할 수 없고, 그 외의 모든 관련된 유전요소를 합쳐도 동성애 성적 행동의 8~25%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즉, 동성애처럼 복잡한 인간의 성적 행동을 몇 개의 유전자 변이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최근 유전학과 유전체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들로 인간 질병의 원인에서 유전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 질환 중에서 특정 유전자 하나의 변이로 발생하는 혈우병, 색맹 같은 유전질환은 특정 유전자와 명백한 인과관계가 있다. 반면 흔히 발견되는 만성질환들은 유전적 소인이 있지만, 질병 발생에 많은 유전자가 관여한다. 예를 들어 제2형 당뇨병 발생의 유전적 요소는 30~90%에 이르는데, 당뇨병 발생에 관여하는 수십 종의 유전자 중 하나 이상의 SNP를 많은 환자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성애도 단일유전자 변이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 논문에 의하면 동성애 발생의 유전적 소인은 8~25%이고, 이는 2형 당뇨병보다 훨씬 낮다. 당뇨병 발병에는 유전적 원인과 함께 과식과 운동 부족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질병 발생의 책임은 그 행동을 선택한 환자에게 귀속된다. 식이조절이나 운동을 통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그 행위를 선택한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논문에서는 이전에 유전적 소인이 큰 28종류의 행동요소와 동성애 사이의 유전적 상관관계도 동시에 살폈다. 거기에는 위험한 행동을 잘 선택하는 성향, 중독적 성향, 다양한 정신질환의 성향, 어린 나이에 첫 성관계, 많은 성 상대자 등과 연관된 유전자가 동성애자에게서 아주 높게 나타났다. 행동들과의 상관관계를 볼 때 동성애자는 동성애라는 위험한 행동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어린 나이에 시작된 잘못된 성경험으로 수많은 성 상대자를 가지게 되는 중독성 있는 행위를 탐닉하는 정신질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이언스와 경쟁 저널인 네이처에서도 이 논문에 대해 “게이 유전자는 없다”는 제목의 논평을 게재했다. 결국 동성결혼이나 차별금지법 허용의 기반이 된 동성애 유전은 사실이 아님이 명백해졌다. 이를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나 제도들은 그 근거가 사라졌다. 이 상황에 다형의 섹슈얼리티나 성적자기결정권 등 젠더이념이 깊숙이 뿌리내린 ‘2022 교육과정 개편안’이나 차별금지법의 입법 시도는 진리에 대해 눈감은 시대에 뒤떨어진 잘못된 시도이다. / 류현모 교수(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기독교 세계관 바로세우기> 저자)
2022-12-31 제1424호
“예손 화가 황유정, 최선영입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손 화가 황유정, 최선영입니다!” 예손 정기 전시회에서 만난 발달장애인 화가들 <예손 황유정 작가> <예손 최선영 작가> 2022년 예손 정기 전시회 ‘예술가의 시선’展이 12월 12일(월)까지 갤러리 라메르 제1전시실(종로구 인사동5길 26 라메르 빌딩)에서 열린다.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온누리복지재단 산하) 소속 발달장애인 작가 20여 명의 그림 113점을 전시하고 있다. 꽃다발을 들고 환한 미소를 주고받는 감미로운 프러포즈 그림, 핑크빛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을 표현한 그림, 돌고래가 바닷물을 가르며 뛰어오르는 그림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유독 눈길을 끄는 그림 두 점이 있었다. 황유정 작가와 최선영 작가의 그림이다. 그림 그리는 스타일도, 예손에서 그림 그린 시간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고백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나는 예손 화가입니다. 예손에서 그림 그려서 너무 행복해요”다. 예손에서 그림 그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황유정, 최선영 작가를 만났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황유정 작가가 그린 ‘루돌프와 크리스마스 장식’ 그림은 이 계절과 정말 잘 어울린다. 빨간 코 루돌프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활짝 웃고 있다. 루돌프 주변에 있는 트리 장식이 한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낸다. 새하얀 눈꽃 문양도 빠질 수 없다. 정말 예쁘고 잘 그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이번 예손 전시회 메인 그림으로 디스플레이(Display) 되어 있다. 황유정 작가에게 왜 루돌프를 그렸는지 물었다. 단순하면서도 아주 확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루돌프 사슴, 예뻐요. 눈꽃, 너무 예뻐요!” “자그마치 10년 기다렸다” 황유정 작가는 올해 7월 1일 예손에 들어온 새내기다. 그녀에게는 이번 예손 전시회가 첫 전시회인 셈이다. 황유정 작가는 예손에 들어오기 위해 무려 10년을 기다렸다. 예손 새내기지만, 그림 실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녀의 어머니 최영혜 씨가 예손 작가가 된 딸의 마음을 알려줬다. “유정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기 직전에 예손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봤는데, 자리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름만 올려놓고 기다렸는데, 자그마치 10년이 지났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지만, 유정이가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곳이라 그런지 정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조언으로 예술대학교에 지원할 정도로 황유정 작가는 그림 실력이 출중하다. 그런데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유정이 아버지가 대학교 진학을 결사반대했습니다. 아무래도 유정이가 비장애인과 달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니까 걱정됐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대학교 수업을 못 따라가거나 학우들에게 따돌림 당할까 걱정한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지만, 황유정 작가는 그림 그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가 있어서 나갔는데 유정이가 그 대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유정이의 그림 재능이 뛰어납니다.” 학교 다닐 때도 사생대회를 휩쓸었던 황유정 작가다. 미술학원이라곤 한 번도 다닌 적 없는데 말이다. 엄마 눈에 그 딸이 얼마나 대견하고, 안타까웠을까. 그래서인지 10년 만에 예손에서 연락이 왔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예손에서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유정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얼마 전에도 ‘엄마, 나는 행복해. 예손에서 그림 그리는 게 제일 행복해’라고 하더라고요. 안정적인 환경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돼서 유정이도, 우리 가족도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어머니 옆에 있던 황유정 작가가 한마디 거들었다. “(예손에서 그림 그릴 수 있어서) 기분이 좋고, 편안해요. 좋은 화가가 될 거에요! 저는 예손 화가에요!” 아주 특별한 재능 가진 ‘최선영 작가’ 최선영 작가의 그림은 다채롭다. 커다란 진주 목걸이, 두건, 안경을 쓴 강아지 푸들, 핑크빛 갈대밭이 넘실대는 파란색 철교(鐵橋), 활짝 핀 나비 날개에 새겨진 생생한 주름 무늬까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자랑한다. 사실 최선영 작가는 손으로 하는 건 뭐든 다 잘한다. 최선영 작가의 보호자 김수남 씨(이모)가 조카의 재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또 했다. “우리 선영이는 손재주가 엄청 좋습니다. 비즈공예로 스마트폰 액세서리도 잘 만들고, 피아노도 잘 쳐서 음악대학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과제빵을 잘해서 일본 연수도 다녀왔습니다. 제빵 관련 대기업에서 취업 제안이 들어올 정도였다니까요. 본인이 거절했지만요.” 최선영 작가가 왜 제빵 관련 대기업의 취업 제안을 거절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음악대학에 입학해서 음악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취업을 거절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선영 작가가 그 좋아하던 음악대학을 다니다가 몇 년 만에 그만뒀다. “수업 중에 음악감상 과목이 있었는데 학점이 너무 안 좋게 나왔어요. 그것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담당 교수가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최선영 작가를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도 최선영 작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잘 다닐 줄 알았던 음악대학을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까 가족들도 걱정이 많았다. 그때 예손을 알게 됐다. “때마침 지인이 예손을 알려줬습니다. 운이 정말 좋아서 예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손에서 전문적인 미술 훈련을 받으면서 선영이가 조금씩 화가로 성장하더라고요. 가족들이 좋아한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최선영 작가는 예손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전문적인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요새 예손에서 실시하는 ‘디지털 드로잉’ 과정도 그녀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디지털 드로잉은 한국마사회 강북지사에서 예손 발달장애인 화가들에게 디지털 드로잉 훈련을 위한 드로잉 기기(아이패드) 및 강사비를 지원하는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최선영 작가는 디지털 드로잉 훈련을 받는 예손의 대표 작가 중 하나다. “예손 친구들과 함께 그림 그리면서 제 그림이 더욱 풍성해지고, 실력도 느는 것을 느껴요. BC카드 홈페이지(payZ; 미술품 거래 플랫폼)에 제 그림이 올라간 것을 보고 정말 뿌듯했어요. 가장 기분 좋을 때는 사람들이 저에게 그림 잘 그렸다고 칭찬해줄 때에요.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쁘고 신나요! 제 그림을 좋게 봐주시고, 도움도 많이 주시고,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성실하게 그림 그릴 거예요. 많이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세요. 전문가 못지않은 화가가 되고 싶어요.” 최선영 작가의 이모가 예손과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꼭 인사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선영이가 예손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주신 예손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발달장애인들이 더 큰 꿈을 꾸고, 실제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금처럼 많이 도와주십시오.”
2022-12-10 제1421호
[온누리의 이웃사랑]고3 학생들의 뜻깊은 발걸음 온누리의 이웃사랑 고3 학생들의 뜻깊은 발걸음 차세대와 서빙고 이웃사랑팀의 이웃사랑 <고3 학생들(파워웨이브)이 서빙고 이웃사랑팀과 함께 독거노인을 방문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계절이 시작됐다. 아무리 추워도 온누리의 이웃사랑은 절대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른다. 올해 겨울에도 온누리교회의 이웃사랑은 쉼이 없다. 사회선교부 ‘엔젤트리’에 사연 5,756건이 접수됐고, 천사가 되어줄 성도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청년부에서는 ‘사랑愛나눔’과 ‘크리스마스 블레싱’을 시작한다. 불우이웃 및 차상위계층 1,055가구를 지원할 예정이다. 전국 74개 지역교회, 쪽방촌, 다문화센터 등도 방문한다. 이 아름다운 온누리의 이웃사랑이 추운 겨울을 녹인다. 여기, 더 아름다운 이웃사랑을 실천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수능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의 이웃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몽글몽글 지난 11월 27일 동빙고 근린공원에 설치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한 무리 사람들이 모였다. 차세대 파워웨이브 학생 50여 명과 서빙고 이웃사랑팀(이하 이웃사랑팀) 봉사자들이다. 매월 마지막 주일은 이웃사랑팀이 구제봉사하는 날이다. 서빙고온누리교회 주변(동빙고동, 보광동 일대)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50여 가정을 방문해서 안부를 묻고, 생필품 등을 나눠준다. 매달 하는 봉사지만, 이날 봉사가 더 특별한 이유는 차세대 파워웨이브 학생 50여 명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철원 총무(서빙고 이웃사랑팀)가 차세대 파워웨이브 학생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이 정말 기특합니다. 보통 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마음껏 놀고 싶을 텐데, 온누리교회 고3 학생들은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이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 시켜서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기획하고 봉사자를 모집하고 신청했습니다.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3 학생들의 이웃사랑 실천은 소하연 학생(19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올해 초 학생회 임원 선거에서 제가 내놓은 공약 중 하나가 ‘1일 아웃리치’였습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 공약을 거의 잊었는데 추수감사절에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수학능력시험까지 연달아 이어지면서 봉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 준비했습니다. 친구들이 많이 신청해줘서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막상 어르신들을 만날 날이 다가오니까 긴장됐다. 마음이 요동칠 정도로 어색하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오늘 봉사 안 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가 안 왔으면 박경애 할머니의 긴 손톱을 잘라드리지도, 온복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해드리지도 못했을 거잖아요? 우리를 보고 정말 좋아하시고, 또 오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더라고요.” 손자 손녀들의 방문에 어르신들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유복순 할머니는 학생들에게 “덕분에 너무 행복하다. 하나님의 선물 같다”고 인사했다. 김숙연 어르신은 그동안 주저하던 세례를 받겠다고 고백했다. 김예은 학생(19세)은 이날 만난 할머니들이 벌써 그립다고 했다. “할머니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같이 기도하면서 제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앞으로도 외로운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그분들을 도울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할머니들을 또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김치” 온누리선교재단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 <온누리선교재단이 직접 키운 배추를 수확해 '사랑의 김치'를 담가 이웃들에게 전해줬다.> 월동준비의 꽃 ‘김장’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한 이들이 있다. 그 주인공은 온누리선교재단 직원들이다. 지난 11월 14일(월) 온누리선교재단이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를 개최했다. 온누리선교재단 직원, 이웃 주민 등 약 서른 명이 모여 배추 250포기를 김장했다. 온누리선교재단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가 특별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용산가족공원 텃밭을 빌려 온누리선교재단 직원들이 정성을 다해 키우고 수확한 배추로 김장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성껏 담근 김치를 이웃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온누리선교재단이 담근 사랑의 김치는 미자립교회 목회자,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아파트 경비원, 장애인 등 이웃 70여 명에게 전달했다. 박경화 성도(고양은평공동체)도 온누리선교재단으로부터 사랑의 김치를 선물 받았다. “온누리선교재단에서 보내주신 사랑의 김치가 살림에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김장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거든요(웃음). 딸이 온누리선교재단이 보내준 사랑의 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엄지척 했습니다.” 박경화 성도는 한부모 가정이다. 초등학생 딸(12세)과 단둘이 산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요새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라서 걱정이 많았다. ‘올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온누리선교재단으로부터 반가운 선물이 도착했다. 사랑의 김치였다. “정말 감사하고, 귀한 김치여서 아껴 먹고 있습니다. 김치가 줄어들 때마다 너무 아쉽습니다. 김장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선교재단 직원들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딸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김치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박경화 성도가 온누리선교재단 직원들과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에 참가한 주민들에게 꼭 인사하고 싶다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김치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사랑을 보내주신 분들이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해주는 분들이 늘 행복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전진숙 씨(이촌동 주민)는 온누리선교재단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에 봉사자로 참가했다. 그녀와 온누리선교재단의 인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흙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용산가족공원 텃밭을 분양받아 이것저것 작물을 가꾸고 있는데, 어느 날 직장인으로 보이는 분들이 텃밭에 오셔서 배추 농사를 짓더라고요. 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텃밭에서 키운 배추로 김치를 담가 이웃들에게 나눠준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좋은 일인데 제가 안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유튜브와 책으로 배운 지식을 공유하면서 텃밭 일을 도왔습니다.” 전진숙 씨는 이번 온누리선교재단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에 동네 지인들을 데리고 왔다. “한 명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고, 한 명은 무교, 또 한 명은 독실한 불교 신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친구들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교회 가도 되냐’며 주저하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일 하는데 종교가 무슨 상관이냐, 종교를 떠나서 뜻깊은 봉사에 함께 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온누리선교재단과 함께 사랑의 김치를 만들고 나서 ‘온누리교회가 대단하고, 정말 좋은 교회’라고 칭찬하더라고요. 벌써 내년 사랑의 김치 나눔 축제가 기대됩니다. 올해보다 김치를 더 많이 담그고, 더 많은 주민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2022-12-03 제14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