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녀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문가기고   그녀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바라보는 시선 달라지기를                최근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삶을 지원하는 지원금 책정문제가 불거지면서 찬반 여론이 확대되고 있다. 대구와 인천에서 성매매 집결지가 폐쇄되면서 그곳을 터전으로 살던 성매매 피해 여성들에게 지원금 1인당 2천만 원(생계비 100만원씩 10개월, 이주지원비 700만원, 직업훈련비 300만원)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지원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글에 인간으로서의 그녀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람’보다 ‘세금’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글들이 정책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교란시키는 대중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이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을 바라보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시선이 달라지기를 바란다.   성매매 피해 여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   성매매 피해 여성들은 ‘불법행위’라는 범주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낙인으로 인해 가족은 물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보니 긴 세월동안 최소한의 권리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대부분의 성매매 피해 여성들은 가족에게 자신이 어떤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비밀에 부치고 있다. 그래서 성매매 중에 일어나는 비인격적인 대우나 불이익에 대해 의논할 대상이 없다. 혹시 가족에게 전해져도 주변에 숨기기만 급급할 뿐 그녀들을 지지해 주거나 대변해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성매매 현장은 성 구매 남성들의 성욕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푸는 비인격적 폭력의 공간, 수입을 위해 어떠한 여성도 마다하지 않는 업주들의 폭주 구간이 되고 말았다. 성 구매 남성들의 선호나 지급수준에 따라 여성의 외모를 A급부터 끝 모를 등급으로 가치폄하 하고 상품화 하고 있다. 업주들로부터 가치상승을 위장한 성형과 다이어트 등의 압박과 종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고가에 해당하는 비용은 모두 성매매 여성들의 몫이고 대부분 빚으로 남는다. 소위 A급 여성에게는 극진한 대우를 통해 ‘여기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대접할까’ 싶을 만큼 공을 들인다. 그 탓에 밖으로 나갔다가도 결국 거기로 돌아오게 한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상대해야하는 남성의 수는 하루에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다. 이쯤 되면 아무리 고와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녀들의 정신과 몸은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업주 가운데는 지적장애 또는 경계선에 해당하는 여성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옷값, 화장품값, 목욕비, 병원비, 숙식비로 처리하며 10여 년 동안 성매매 피해 여성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을 만큼 파렴치한도 있다. 그들은 폭력행사는 물론이고 아는 건달이나 사채업자와 모의하여 빌리지도 않은 돈에 대해 공증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면 성매매 피해 여성은 억울해 하면서도 그것을 갚기 위해 한 동안 성매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의든 타의든 한 번 발을 디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든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삶은 상당부분 업주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무력해져가면서 각종 트라우마와 우울증, 불면증, 성격장애 등의 정신질환을 호소한다. 심리상담을 진행 중인 반 이상의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정신과 치료를 병행한다. 그녀들을 ‘성매매 피해여성’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이 같은 상황이 조직력이나 관례들을 통해 성이 착취당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업소에서 선불금 1천 만 원을 사용하고 약1년 동안 갚다가 B업소로 옮길 때 A업소 업주는 각종 비용을 추가해서 B업소에서 다시 1천 만 원을 받고 여성을 두고 간다. 그동안 갚은 것은 이자였고, 숙식 등을 해결해줬으니 그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이런 계산법에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록이나 계산력이 약하고, 합리적인 대인관계에 취약하며, 이런 일이 두어 번 반복되면 희망마저 꺾여버리는 여성들의 자포자기를 업주들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구조는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이 길어진 결과다. 그러므로 ‘성매매’라는 거대한 조직에 의해 오랜 세월 길들여지고, 희망마저 무뎌진 그녀들을 ‘피해자’라 아니할 수 없다. 업주들은 재개발이 진행될 때 자기 몫 뿐 아니라 업소 여성들의 것조차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은 재개발사업주로부터 보상 받을 수 없는 구조에 놓인 경우가 많다. 가족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주소지를 다른 곳에 두거나 구두계약으로 전전세로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청량리588’이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폐쇄되는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다반사였다.   내 이름은 ‘윤락가 선교사’   2010년 3월, 사역에 대한 아내와의 갈등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윤락가 선교’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사역 시작 전 나고 자란 지역에 유명 집창촌이 있었던 까닭에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신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에게도 누군가를 보내 달라’는 기도 끝에 어느 날부터 ‘이러다가 내가 가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올라올 즈음 그 기도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부담을 덜어내고 싶어 1년만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찾아가 전도하겠다고 결정했다. 1년의 전도기간 중에 다행히 아내의 반대가 수그러들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내의 반대가 내가 이 사역을 끝까지 가지 않아도 될 면죄부가 되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길이 녹록치 않았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당위성만 충족된다면 언제든지 접으리라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은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위한 사역에 필요한 것을 한 번도, 어김없이, 때에 맞게 채워주셨다. 사역 3년차가 되었을 무렵 매주 지속되는 전도활동을 지켜보던 한 여성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본인은 한 업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나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업소에서 무조건 탈출시키기에는 그 여성에게도, 선교회 사역에도 위험부담이 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자메시지로 서로의 상황을 전하며 그녀의 자유를 도모하였다. 드디어 그녀를 구조한 날, 엄청난 감격과 감사가 밀려왔다. 쉼터를 완강히 거절하던 그녀가 마땅히 거주할 곳이 없었다. 그 무렵 아내는 사역의 동역자가 되어 있었고, 그녀를 흔쾌히 집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가정은 수입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고, 많지 않은 후원금은 오롯이 아웃리치와 그녀를 위해 사용했다. 15평 남짓의 투룸에 우리 부부가 성인 여성과 동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도와 고심 끝에 그녀를 위한 작은 원룸을 준비하고 나니 지출할 비용이 더욱 커졌다. 샴푸를 사 달라는 요청에 다음 후원금이 들어올 때까지 며칠을 기다린 적도 있다. 그녀에게는 점점 필요한 것들이 많아졌고, 그것들을 충족시킬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우리는 모든 상황을 이해시키고 지역 내 쉼터에서 기거하도록 권면하였다. 고마움과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면서 쉼터로 옮겼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날 언니가 아파서 본인이 돌보게 됐다며 떠났다. 그 후에는 독일에 다녀올 건데 돌아올 때 맛있는 차를 사 오겠다는 글을 남긴 채 연락이 두절 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게 아닐까? 그것을 숨기려고 독일행을 연출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어떤 이들은 ‘그것 봐. 그렇게 된다니까’할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그때의 시간들을 의미 없다고 할 수 없다. 2016년 가을, 또 다른 여성이 업주가 자기를 이리저리 팔아넘기려고 한다며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청량리 588을 철거하면서 주거지를 잃은 여성들을 위해 선교회 자체적으로 준비해 둔 쉼터가 있어 그곳에서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적 불안감과 생활능력은 혼자 쉼터에서 지낼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그녀는 늘 많이 아팠다. 다행히 그 무렵에는 상담소에 나오는 정부지원금이 있어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으나 1인당 사용할 수 있는 한정액이 있어 최대한 아껴 쓰도록 하였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생활능력은 물론 아무 런 기술이 없는 그녀를 근처 고시원으로 옮겨주었고, 상담소로 매일 나와 상담도 하고, 자잘한 일거리를 주면서 안정을 찾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지적장애 검사결과 3급이었고 그밖에 지병에 대한 검진결과를 통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삶이 유지될 수 있는 희망의 끈이 생기자 처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1년 3개월 동안 선교회에서 찾아준 부업으로 월 35~40만원을 벌고, 수급비로 생활하고 있다. 올해 2월 LH의 도움으로 아늑한 보금자리도 생겼다. 물론 2~3개월에 한 번씩 휴대전화를 바꾸는 등 자기조절능력이 아직은 어렵기는 해도 스스로 밥해 먹고, 청소하고, 유쾌한 웃음을 지을 줄 안다. 청량리에서 오래도록 그녀를 봐왔던 다른 성매매 피해 여성들도 선교회 예배시간에 그녀를 만날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이 글 서두에 성매매 피해 여성지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안타까워하였다. 또 성매매 피해 여성이 왜 피해여성이냐는 질문에 내가 본 현장이야기로 답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돌보는 사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10년 동안의 사역을 통해 그것을 주장한다고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나와 함께 해온 자매(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그녀들을 위해서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우리가 애써 지원하는 그녀들이 모두 탈성매매나 새로운 삶에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감사드린다. 우리의 시각에서 약간의 이기심과 편견을 닦아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누군가 지원금 2천만 원 줄 테니 당신이 하는 생업을 접고, 준비되지 않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선택하겠는가? 그것이 전부인 여성이 그곳에 아직 많이 있다. / 최선 선교사(이웃사랑선교회)

 2019-02-22      제1234호

[칼럼] 이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제사를 지내서 교회에 나갈 수 없습니다.”

신앙상담 Q&A 이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질문: “제사를 지내서 교회에 나갈 수 없습니다.”     답: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에 맞추어 가족이 함께 모여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가족의 정도 나눕니다. 기독교는 부모의 추모를 금하지 않습니다. 단지 추모를 예배로 드리는 것이지요. 예배란 기독교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의식인데 이 예배를 부모님의 기일에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추모 예배 즉, 기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왜 제사를 지내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왜 제사를 지낼까? 첫 번째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생전에 잘 해드리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불효자였다고 생각하며 후회한다. 그래서 그날(기일)만이라도 생전에 하지 못한 효도를 하고 싶어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부모님 사진에 절을 하며 그립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조상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다가 그만두면 조상에게 해코지를 당한다고 생각해서 고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사상을 차리면 조상신이 직접 내려와 준비한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마음에는 부모님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이해하고 기독교에도 일반 제사와 같은 추모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 된다. “우리 기독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에 맞추어 가족이 함께 모여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가족의 정도 나눕니다. 기독교는 부모의 추모를 금하지 않습니다. 단지 추모를 예배로 드리는 것이지요. 예배란 기독교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의식인데 이 예배를 부모님의 기일에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추모 예배 즉, 기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기독교인이 꼭 지켜야 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뉩니다.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서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기독교는 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효와 추모에 대해 설명한 이후 기독교에서 제사를 금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사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사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 중에서 1, 2계명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인데 제사를 드리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2계명은 ‘어떤 형태든지 우상(형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에다 절하지 말라’인데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갖다 놓고 절하기 때문에 2계명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한 이후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면 된다. 전도대상자의 가정을 축복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알리거나 제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죽음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면 좋다. 내 환자 중에도 제사 문제로 교회에 나오지 못했던 분이 계신다. 먼저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던 그의 아내와 동생이 제사 문제로 다투면서 교회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다. 그는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제사 문제로 다룰 때는 먼저 믿은 사람인 우리가 인내하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한다. 희생과 사랑이 믿지 않는 가족과 전도대상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더욱 상세한 대답은 필자의 저서 <날마다 111 전도> ‘반대질문’ 코너에서 만나 볼 수 있다.  / 장경문 장로(양천공동체)

 2019-02-24      제1234호

[주일강단] 주일강단-아브라함의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3  이재훈 목사      앞으로 몇 개월 동안 기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구약에 나타난 기도들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새롭게 하고, 기도 생활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거의 빠짐없이 “기도가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늘 ‘기도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 뿐 진정으로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단순한 생각과 바람에만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기도를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큐티생활도 더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큐티가 ‘경건의 시간(Quite Time)’이 아니라 ‘퀵 타임(Quick Time)’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큐티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말씀을 통해 인도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기도와 특권     믿음처럼 보이지만 불신앙인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문제 앞에서 “하나님, 다 알아서 하세요. 저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 같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요,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문제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한복판에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 마음, 의견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드리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하나님이 이미 뜻을 정하고 계실거야”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기도해봤자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잘못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영향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도에 그 뜻을 바꾸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됩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만 맞는 위험한 말입니다. 물론 기도하면 우리 자신이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만 바꾸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묵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변화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기도에 영향을 받으시며, 우리의 기도에 따라 뜻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우리의 기도에 맡겨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으로 되겠느냐? 행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독일 나치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분이 있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조차 기도 없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했습니다. 그는 “기도야말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파트너십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동일하게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양심적인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도 “하나님께서 두 팔을 높이 들어 기도하는 그 기도의 손들을 통해 이 지구와 역사를 움직여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던 때가 바로 연합군에 의해 독일 곳곳에 폭탄이 투하되던 시대였습니다. 무엇인가 행동해야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무엇보다 기도의 손이 중요하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역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기도의 특권입니다. 기도의 특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신앙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시며 친밀하게 친구처럼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타락이란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요,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친구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하나님의 친구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의 친구가 될 때 마음을 나눕니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공유할 때 친구가 됩니다. 나의 결정과 계획을 미리 알리고 그 의견을 참조하고 싶은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시고, 어떤 문제와 사건, 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참조하시고, 때로는 그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18장에 나타난 기도는 아브라함이 왜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계획을 말씀하셨는데 가장 많은 내용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족속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계획을 듣고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도성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땅에 악이 만연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강렬하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원하며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영성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     “아브라함이 다가서면서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만약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정말 쓸어버리시겠습니까? 의인을 악인과 같이 죽이고 의인을 악인처럼 대하시는 것은 주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3~25).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면 마치 하나님을 가르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믿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와 논쟁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셨고, 창세기 18장 17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의 생각을 알리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생각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의인들이 그 성에 있다면 악이 아무리 만연할지라도 남아있는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동일하게 멸망시키는 일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숫자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만약 50명이 있다면 의인 50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성을 용서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소돔 성에서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해 그 온 땅을 용서할 것이다’”(26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즉시 “의인 50명이 있다면 내가 그 의인을 위하여 그 땅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을 말해놓고 하나님이 즉시 응답하시니까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비록 먼지와 재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5명이 부족한 45명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좋다. 만약 거기서 45명을 찾으면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45명을 말해놓고 또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섯 명을 감한 40명을 제안했습니다. “4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십니다. “40명을 위해서라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40명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는 10명을 감합니다. “하나님, 3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30명만 찾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30명에도 자신이 없어 다시 10명을 줄여 20명을 제안합니다. “만약 20명을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20명을 위해 멸망시키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이제 20명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10명을 줄여서 10명을 제안합니다. “내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거기서 1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그 10명을 위해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의 제안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응답이 동일했습니다. “50명을 위해 내가 용서하겠다, 45명을 위해 용서하겠다, 40명을 위해, 30명, 20명, 10명을 위해 내가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간구하면서 점점 자신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을 교훈하듯이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30명부터는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노하실까봐 “하나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감히 주께 말씀드립니다”라며 점점 확신이 없어졌습니다. 10명까지 내려갔을 때 더 이상은 내려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의인 10명은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노하시지도 않고, 피곤해하지도 않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에게 노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숫자를 제시하든지 의인을 위해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숫자가 줄어도 하나님은 전혀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흥정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셨고, 태도를 보셨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기뻐하셨기에 숫자가 계속 줄어도 동일하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그 성에 의인 1명만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의인 1명을 제시해도 “그 의인 1명을 위해서 내가 그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세상 구원하는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   첫째, 아브라함의 간구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의 숫자를 계속 줄이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거나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겸손 가운데, 때로는 하나님이 노하실까 염려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멸망 받을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복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를 더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멸망 받을 세상을 위하여 중보하는 이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그 땅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멸망하시기로 했으면 멸망당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반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 받기로 계획된 곳이라 할지라도 의로운 중보기도를 통해 구원의 간청이 드려지면 그 기도를 근거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간구에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대표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어떤 이론을 근거로 호소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공정하시기 때문에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의인이 그곳에 있다면 그 의인으로 인해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근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주장을 풀어 보면 네 가지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의인은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인과 악인이 동일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악인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악인이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멸망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의인으로 인해서 악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근거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의인은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악인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인해서 악인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간구에 조금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계속 동일하게 응답하신 이유는 이 세상을 이 원리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멸망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의인이 단 1명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그 의인을 위해, 의인을 통해, 그 의인으로 인해 멸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의로운 분을 보내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의인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의 악인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한 분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롬 5:18). 하나님이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 악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뻐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이들은 장차 멸망 받을 운명에서 건짐을 받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후손을 통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통해 세우시는 의의 나라입니다. 그 의의 나라 백성들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차 멸망당할 세상이 예수님을 통해 멸망 받을 운명에서 건짐을 받기를 기도하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유일한 근거는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늦추시고 참으십니다. 그분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세상의 악인들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장차 멸망 받을 이 세상 가운데 건짐 받는 백성들이 충만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과 원리를 붙잡고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 나라와 민족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열방을 구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의 역사를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과 원리를 붙잡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친구로 초대받는 그 영광스러운 특권을  날마다 누리며 기도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19-02-24      제12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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