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캠퍼스] 또 한 번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아이들

기획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   만 18세가 되면 아동복지시설 퇴소 … 4명 중 1명 빈곤층 전락  고아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크리스천의 도리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만 18세가 되면 퇴소해야 한다. 그때부터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때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 적절한 도움이 제공된다면 그 힘들고 외롭고 처절한 싸움이 한결 수월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고아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크리스천의 경건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퇴소해야 하는 이들을 ‘보호 종료 아동’이라고 한다. 보호 종료 아동이란 아동복지법 제16조에 따라 아동복지시설에 살고 있는 보호대상 아동의 연령이 만 18세에 달하였거나 보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인정되면 관할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아동의 보호 조치를 종료하거나 해당 시설에서 퇴소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2,470명의 보호 종료 아동들이 보육원 등의 아동복지시설에서 퇴소했다.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빨리 험난한 사회로 나가야만 한다. 또 다른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제도라고 하지만 정말 안타깝고, 어떻게 보면 잔인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자기 몸 누일 곳 찾아 전전긍긍… 보호 종료 아동들의 너무나 열악한 현실   가장 큰 문제는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란 이들이 보호 종료가 되어 퇴소한 다음 발생한다. 아동복지시설을 퇴소한 청소년 4명 중 1명이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는 자립정착금이 지원된다. 자립정착금은 보호 종료 아동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부지원금인데 1인당 300~500만 원 정도다. 자립정착금이 이보다 적거나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다. 자립정착금을 지원하는 기관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이다 보니 지역에 따라 지원 금액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 지원되는 자립정착금이 너무 적다. 서울 신림동 원룸 보증금이 500만 원에 월세가 40~50만 원 선인 것을 감안하면 자립정착금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지난 4월부터 보호종료아동(퇴소 2년 이내)들에게 월 30만원씩 ‘자립수당’이 지급되고는 있지만, 정착금과 수당만으로는 비싼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이나 자립지원시설 등이 있지만 그곳에 입소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방안’에 따르면 지난 2017년 보호 종료 조치된 인원이 2,593명이다. 그 중에서 835명(32%)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LH임대주택이나 자립지원시설, 공동생활가정 등에서 살고 있다. 나머지 68%는 스스로 월세를 부담하거나 기숙사, 친인척 집 등에서 머무르고 있다. 10명 중 7명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자립지원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립지원시설은 아동보호시설을 퇴소한 이후 거주지를 마련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기관인데 전국에 12개 밖에 없다. 시설 수용정원은 221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다수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자신의 몸 누일 곳을 찾아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의 눈물 경제적 어려움, 주거문제, 심리적 부담감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거주지뿐만이 아니다. 진로의 제한도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대다수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학 진학보다 취업을 선택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발간한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방안>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전체 보호 종료 아동의 대학(전문대 이상) 진학률은 13.7%에 그쳤다. 2017년 우리나라 전체 고교 졸업자들의 대학진학률이 68.9%인데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대학진학률도 낮지만 또래들보다 훨씬 빨리 사회로 나오다보니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2016 보호종결아동 자립실태 및 욕구조사’(2017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50.9%가 단순노무직, 서비스직에서 일하고 있다. 임금 또한 박하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의 월평균 수입은 123만원이었다. 2017년 최저임금(약 135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지출은 클 수밖에 없다. 월세 등 생활비로 월평균 138만원을 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안정적인 자립을 위한 자산을 형성하기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오죽하면 앞서 언급한대로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4명 중 1명이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으로 전락할까.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상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사회보장정보원에서 제출받은 ‘시설퇴소아동의 기초수급 및 차상위계층 수급 현황’에 따르면 2014년부터 5년 동안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중에서 기초생활수급자 혹은 차상위계층이 된 사람이 24.4%나 됐다. 빈곤층이 되는 속도 또한 빨랐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88.5%가 단 6개월 만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2016년 보호 종결 아동 자립실태조사에 따르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어려움(31.1%)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주거문제(24.2%), 심리적 부담감(10.1%), 돈 관리 지식부족(7.7%) 등의 순이었다.      태어난 지 6,570일이 되면  다시 혼자가 되는 그들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지 6,570일이 되면 아동복지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싫든 좋든 홀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때부터 외롭고, 힘들고,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아마 가장 빨리 빈곤의 덫에 허덕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디 경제적 문제뿐이겠는가. 외롭고, 쓸쓸한 그 심정은 또 어떠한가. 부모 없다고, 시설에서 자랐다고 기피하거나 업신여기고,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시선은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랐어도, 부모가 없어도,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하디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고, 적절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와 크리스천 말고는 그 아름다운 일을 해낼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면 될까? 오창화 팀장(사회선교부 입양커뮤니티 제이홈)과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가 그 방법을 제시했다. 오창화 팀장은 멘토가 되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은 그야말로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입양된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엄청난 빚을 감당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기댈 곳 하나 없는 그들의 빚을 갚아줄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아동복지시설과 결연을 맺어서 그들의 멘토가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는 아동복지설 퇴소자들에게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가족이 되어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혼자라는 사실만큼 서러운 게 없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 정말 따뜻하고, 포근하고, 사랑을 듬뿍 주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또한 성경은 고아를 돌보는 것이 곧 크리스천의 경건한 삶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전문가 기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동의 이름 우리가 100만 고아들의 눈물을 닦아줍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동의 이름이 무엇일까? 나는 고아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지켜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줘야 할 부모가 버린 존재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인 고아이다.  나도 고아이다. 1985년 화창한 어느 여름 당시 7살이던 나를 어머니가 고속터미널에 데려갔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고, 그 길로 나는 시설에 넘겨졌다. 나를 발견한 경찰은 유기범(부모)에 대한 조사나 실종신고 혹은 어떠한 조치나 기록도 하지 않고 그냥 시설에 넘겨버렸다. 어머니의 손을 놓친 지 불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가장 불쌍한 이름인 ‘고아’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그때 조금만 인내를 갖고 부모를 찾아줬으면 어땠을까? 고아원에 내던지듯 보내지 말고 입양할 부모를 만나게 해줬다면 고아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시설(보육원) 생활은 정말로 비참했다.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사랑은 고사하고 조금의 관심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는 생존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일을 시키면 땀을 가장 많이 흘려야 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힘 있는 선배한테 상납해야 한다. 선배들의 눈을 절대로 봐서도 안 된다. 거짓말 같지만 선배들이 똥을 먹으라면 먹는 시늉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진짜 죽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배들에게 대들었다가 호미에 찍혀서 평생 뇌전증을 안고 사는 아이들을 종종 봤다. 힘을 키워서 싸움을 잘하지 않는 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할 것이다. 원장님과 시설의 선생님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면 그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아원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아무리 심각해도 얼른 덮고 무마시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처럼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당시 고아원 동기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다.  “고아원에서 맞은 것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고아원의 ‘고’자도 듣기 싫다.”   만 18세, 퇴소 후에 찾아온 더 큰 고난    만 18세가 되었다. 나도 여느 보육원 동기들처럼 시설을 퇴소해서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의지할 곳도, 상담할 곳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겨우 지하 단칸방에서 보육원 동생들 10명과 칼잠을 자며 힘들게 살았다. 대학 졸업 이후 취업을 하려고 면접을 볼라치면 고아라는 주홍글씨가 취업의 문을 막았다. 그나마 선심을 베풀 듯 동정하는 마음으로 고용한 회사와 사람들도 내가 잘못하면 “역시 고아는 안 돼”라고 쓰디쓴 말을 내뱉으며 해고했다.  외롭고 힘들었던 나는 빨리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정말 운 좋게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부모라도 있으면 어떻게 생각해 보겠는데, 고아라 안 되겠다.” 지금의 아내는 두 번째 여자친구이다. 다행히 장인, 장모님께서 입양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셨다. 장인, 장모님은 아들을 입양하는 마음으로 고아 사위를 맞이해주셨다. 그 기쁨과 감격도 잠시, 이번에는 아내와 단둘이 살 신혼집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살 집이 있어야 하는데 모아둔 돈이 없었다. 결국 처남이 살던 전세집 방 한 칸을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동복지시설 퇴소자에 대한 주거 지원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 임대아파트나 취약계층의 주거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봤는데 노인,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저소득층에 대한 혜택만 있지 나 같은 고아나 보육원 퇴소자들을 위한 혜택은 없었다. 얼마나 막막하고 서러웠던지 보건복지부에 전화를 걸어 울면서 호소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달라고 애원했다.  보육원이 폐쇄 됐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선배가 하나 있었다. 그 선배는 폐허가 된 시설에서 전전긍긍했다.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 그 선배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살아있을까? 죽었을까? 고아는 죽는 순간에도 철저히 외로운 존재이다. 무연고자 사망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무연고자 장례는 가족이 나타날 때까지 10년 동안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기간이 지나도 가족에게 인도되지 못하면 공원부지에 매장되거나 자연장으로 처리된다. 고아한테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슬퍼하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고아들의 슬픈 숙명이다.      고아는 그저 피해자일뿐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고아를 단순히 불쌍한 아이, 자선을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동정했다. 이는 고아들의 눈물과 한은 외면한 일방적 접근이다. 고아는 취약계층이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걸인에게 적선하듯 동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생 고마워하며 살아라”, “부모도 버린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만으로 평생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라”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아는 명백한 피해자이다. 1차 가해자는 그들을 버린 부모이고, 2차 가해자는 그런 부모의 유기범죄를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한 국가이며, 3차 가해자는 ‘오죽하면 버렸겠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회이다. 결국 가해자는 우리 모두인 것이다.   고아들은 만 18세가 되면 더욱 냉혹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보호 종료가 돼 그동안 살아온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보육원 퇴소자들의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백석대 교정보안학과 김안식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교도소 수용자들의 경우 교정시설 퇴소 이후 절반 이상이 다시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들어오는데 반해, 보육원 퇴소자들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서 80% 이상이 교정시설로 다시 들어온다. 한번 보육원을 퇴소하면 더 이상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갈 곳이 그곳밖에 없다.  교도소, 군대, 보육원 등 대표적인 수용시설의 처우를 비교해 봐도 고아들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다. 세 군데 수용시설 모두 식사를 제공해주고, 옷을 입혀주고, 잠을 재워주고, 소정의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도소와 군대의 경우 상담 프로그램이 있지만 보육원에서는 원아들의 상담이 미비하다. 범죄자와 군인들은 이유야 어찌됐든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고아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다.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인권보호 및 감독 실태도 교도소와 군대에 비해 보육원이 더 나쁘다. 폭력과 학대 정도는 또 어떠한가? 교도소가 가장 적고 다음이 군대, 그리고 보육원이다. 보육원에서 발생하는 학대가 가장 많다. 시설 안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에도 차이가 있다. 교도소와 군대는 피해보상을 해주지만 보육원에서는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세 군데 수용시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퇴소 이후 대책이다. 교도소와 군대를 퇴소하면 가족들에게 돌아가지만, 고아들은 보육원을 퇴소하면 갈 곳이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보육원을 거쳐 성인이 된 아이들의 자립률이 7%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3%가 교정시설에 수용되거나 노숙을 하는 셈이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여기서 ‘신원(伸冤)’의 의미는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리다’는 뜻이다. 이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자식을 보육원 등의 시설에 맡기고 나 몰라라 한 부모들은 뒤늦게라도 그 자녀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으면 좋겠다. 국가는 고아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퇴소자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강화해야 한다. 보호자도 없고, 제대로 된 사회적응 교육도 못 받고 거리로 내몰리는 고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해져있다. 범죄에 빠지거나, 윤락가로 빠지거나, 생활고를 못 이겨 사채를 쓰고 빚더미에 앉는 것이다. 그들을 위한 멘토링, 상담 프로그램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사회는 ‘오죽하면 버렸겠니’라는 폭언을 함으로써 고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이 보육원 퇴소 이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인내와 배려,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을 돌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던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출해내셨다. 이 땅에는 100만 명의 고아들이 존재한다. 100만 고아들의 한과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들을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라!”  / 조윤환 대표(고아권익연대, 1급 사회복지사)     <발문> “이 땅에는 100만 명의 고아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한과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그들을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라!” 

 2019-11-10      제1269호

[부흥집회] “성경을 믿고 읽고 선포하라”

2019 TGC코리아 컨퍼런스 ‘하나님이 가라사대’   “성경을 믿고 읽고 선포하라” 한국 교회 지도자, 유학생, 성도 등 1,500여 명 참석   “성경을 믿고 읽고 선포하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자!” 2019 TGC코리아 컨퍼런스(이하 TGC 컨퍼런스) ‘하나님이 가라사대’의 핵심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TGC 컨퍼런스는 지난 10월 30일(수)부터 11월 1일(금)까지 양재 온누리교회 사랑홀에서 막 올랐다. 한국 교회 지도자, 유학생, 성도 등 1,500여명이 참석했다. 필립 라이큰 교수(제10장로교회 담임, 휘튼대학교 총장), 스티븐 엄 교수(보스턴시티라이프장로교회 담임, TGC 부대표), 브라이언 채플 교수(그레이스장로교회 담임, 커버넌트신학대학원 명예총장), 돈카슨 교수(미국 트리트니신학대학원 명예교수, TGC대표)등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에 대해 강의했다.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   필립 라이큰 목사는 ‘성경은 영원하다’, ‘성경은 명확하다’,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면서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보호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시도들이 있지만 성경은 반드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선포했다. 필립 라이큰 목사는 성경의 명확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 “성경은 많이 배우든 그렇지 않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는 만큼 명확하다”고 못 박았다. 필립 라이큰 목사는 사회 분위기를 꼬집기도 했다. 그는 명목적인 기독교인들이 되어가는 현상을 경고하면서 “오직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면했다.   성경의 참된 맛을 즐겨라!   스티븐 엄 목사는 ‘진리의 말씀’, ‘성경의 충족성’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사명을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방황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목회자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찾거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지하거나 인정받기 위한 설교를 하려는 것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목회자 본인과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밭을 가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스티브 엄 목사는 “성경의 참된 맛을 즐겨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성경에 담긴 정보만 취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성경 읽기의 핵심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오직 성경, 성경을 외쳐라! 브라이언 채플 교수는 ‘우리가 믿는 성경’, ‘말씀을 외치라’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는 사실에서 벗어나면 인간이 구원자가 되고, 목회자들의 설교는 우상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오직 성경의 권위와 완벽함이 인간에게 구원과 자유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목소리 높였다. 또한 그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브라이언 채플 교수는 “때가 없어도, 아무도 듣지 않아도,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행하라!   돈 카슨 목사는 ‘말씀 계시의 중요성’,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 설교하기’, ‘우리를 구원하는 그 말씀’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성경을 읽지 않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모든 든 것이 성경 안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말씀은 곧 하나님이며,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돈 카슨 목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에 빠진 크리스천들을 위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버림받고 짓이김 당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시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TGC 컨퍼런스 참가자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전은숙 목사(분당갈보리교회)는 “말씀에서부터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고 했고, 박연순 전도사(강서침례교회)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 받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윤석 집사(전주예은교회)는 “성경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성경이 나의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 김영선, 홍하영 기자

 2019-11-03      제1268호

[국내캠퍼스] 할로윈, 얼마나 알고 있나요?

기획_교회, 세상문화를 말하다 단순한 놀이문화로 인식하고 따라하는 건 지양해야  할로윈을 생명, 자유, 기쁨 누리는 절기로 바꾸자!  지난 10월 31일은 할로윈데이(Halloween, Hallowe’en, All Saints’ Eve)였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기괴한 분장을 하고 벌이는 축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태원이나 홍대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10월 마지막 주말(올해 10월 26일) 할로윈 축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할로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할로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해석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할로윈이 어디에서 기원했고, 그 의미가 무엇이며, 크리스천들인 우리는 그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살펴봤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K자매(41세, 직장인)는 지난 주말 이태원에 갔다가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말로는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눈알이 튀어나오고, 몸에 칼이 꽂혀있고, 피칠갑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더라고요. 옷은 또 어떻고요. 변장한 사람뿐만 아니라 구경 온 사람까지 인파가 어찌나 많던지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지겠더라고요.” P형제(40세, S브릿지공동체)도 지하철에서 할로윈 분장을 한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하철을 탔는데 입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고, 좀비처럼 끔찍한 분장을 한 젊은이들이 타더라고요. 근처 놀이공원에서 할로윈 이벤트를 했던 것 같아요. 기괴한 분장을 한 사람들을 보는 게 썩 좋지는 않더라고요.” 할로윈은 매년 10월 31일 만성절(All Saints’ Day; 모든 성인들의 완전한 덕과 위대함을 찬미하는 축일, 11월 1일) 바로 전날 미국 전역에서 유령이나 괴물 등으로 분장하는 축제다. 호박으로 잭오랜턴(Jack-o’-lantern; 호박에 유령 모습을 조각한 등불)을 만들고, 유령, 마녀, 괴물 등으로 분장한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 맛있는 것을 주지 않으면 장난칠 거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사탕이나 과자 등을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해골이나 잭오랜턴, 검은 고양이나 거미 등의 장식물로 집과 정원을 장식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할로윈축제는 소비와 지출이 크리스마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을 정도로 큰 이벤트다.   할로윈의 역사와 그 유래    할로윈의 역사는 2천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할로윈은 우리나라의 동짓날과 같은 서양의 절기인데 죽음의 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켈트족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할로윈은 기원전 500년 전,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켈트족의 삼하인(Samhain)축제가 그 기원이다. 켈트족은 1년의 주기를 겨울-봄-여름-가을 순으로 바라봤다. 한 해의 첫 번째 계절인 겨울의 시작을 11월 1일, 그 전날인 10월 31일을 마지막 날로 정하고 삼하인 축제를 했다고 한다. 삼하인은 죽음의 제왕인 샤먼을 섬기는 의식이었다. 우리 식으로 섣달그믐, 동짓날과 비슷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해 가을의 수확에 감사하고, 축하하며, 풍요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고, 새해 행운과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린 게 바로 할로윈의 기원이다. 유령, 괴물, 마녀 등으로 분장하는 것은 악령을 쫓아내려는 의식 중 하나이다.  할로윈의 기원 중에는 가톨릭 유래설도 있다. 매해 11월 1일은 만성절로 가톨릭에서 지칭된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원래는 5월 13일이었는데 교황 그레고리 3세가 11월로 옮겼다고 한다. 할로윈(Halloween)은 11월 1일 전야제(All Hallow's Eve)의 줄임말인데 ‘Hallow’가 앵글로색슨어로 성인(Saint)을 뜻한다. 할로윈은 위령제이면서 모든 성인과 순교자들을 기리는 가톨릭의 중요한 축제일 중 하나이다.  할로윈을 상징하는 물건이나 행위에 대한 유래도 있다. 호박등불 잭오랜턴은 술을 잘 마시는 잭이라는 사람이 마귀를 골탕 먹여 죽였는데, 그 마귀가 앙심을 품어 잭을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하게 하고, 추운 아일랜드 날씨 속에서 방황하게 했다고 한다. 추위에 지친 잭이 마귀에게 사정해 숯을 얻었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호박 속을 파고 그 속에 숯을 피워 등을 만들었다. 이것이 할로윈을 상징하는 잭오랜턴이 되었다.  ‘트릭 오어 트릿’은 마녀나 유령으로 분장한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문 앞에 잭오랜턴을 밝히는 집이 있으면 그 집 앞에 가서 “트릭 오어 트릭(Trick or Treat!)”이라고 외친다.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칠 것이라는 귀여운 협박이다. 그러면 어른들이 바구니에 사탕이나 과자, 초콜릿 등을 넣어준다.     할로윈과 이벤트와 마케팅의 결합   미국은 10월 31일 할로윈데이를 시작으로 11월 2일까지 이어지는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11월 넷째 주 목요일),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 11월 넷째 주 금요일), 크리스마스(12월 25일)까지 축제를 즐긴다. 할로윈이 축제의 시작점인 셈이다. 9월부터 상점가에서는 해골, 기괴한 가면, 잭오랜턴 등을 판매하는데 그 매출이 엄청나다. 매년 13억 파운드(약 5억9천kg)의 호박이 생산되는데 이중에서 상당수가 할로윈 잭오랜턴으로 사용되고 있다. 할로윈이 지나고 버려지는 잭오랜턴 쓰레기 배출량이 매년 2억5400만 톤에 달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붐(Boom)과 함께 할로윈이 퍼지기 시작했다. 영어유치원 및 영어학원에 원어민 강사들이 많아졌고, 이들 기관에서 작게 할로윈 파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때 무분별한 서양 행사를 따라한다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은 할로윈축제가 연중행사가 되었다. 영어학원, 외국인학교, 국제학교에서는 매년 할로윈 파티를 열고 있고, 대형쇼핑몰이나 빵집, 카페, 놀이공원 등에서는 할로윈을 활용한 이벤트와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파리바게뜨의 경우 할로윈 관련 제품이 2010년에는 3종이었는데 올해는 30종으로 9년 새 무려 10배나 증가했다. 판매 기간도 2010년에는 6일 정도였는데 올해는 28일이나 됐다.    할로윈,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    지난 2016년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제목은 ‘할로윈데이에 어느 유치원의 부작용 사진’이다. 가오나시(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하얀 가면과 검은 망토를 두른 귀신) 분장을 한 친구를 보고 놀라 대성통곡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찍혔다. 댓글에 적힌 “안타깝네요. 남의 나라 축제가 뭔지…”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할로윈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 남의 나라 축제에 괜히 열광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양한 놀이문화 중 하나로 보고 즐겨야 할까? 답부터 제시하면 적어도 크리스천들이라면 할로윈을 단순한 놀이문화나 이벤트 정도로 인식하고 무작정 따라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죽은 자를 예찬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할로윈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 거룩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절기로 바꾸어 누리는 것이 어떨까?     <기고>  할로윈, 죽음에 대한 묵상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 거룩한 기쁨 누리는 절기로 바꾸자!   인생의 가장 큰 시간 단위는 1년이다. 한 해는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반복해서 지나가는 시간들이 때로 지루할 수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해가 흘러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계절이나 절기라는 것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흐름이 단조롭지 않고 풍성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 하나님께서는 어떤 절기를 준비해주셨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지난 주간 우리는 10월 31일을 지나왔다. 10월의 마지막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교개혁기념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것은 기념일이지 절기는 아니다.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절 이후 절기를 보내다가 12월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는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이 시작된다.  ‘추분’에 해당하는 지금 시기는 교회력으로 어떤 절기를 보내야 하는 걸까?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시대 교황으로부터 선포된 절기가 있었다.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절기(All hallowtide)’이다.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사흘 동안이다. 첫째 날(10월 31일)은 모든 성인들의 날을 기념하는 전날 밤이라는 뜻으로 ‘All Hallow’s Eve(=Hallowe’en)’, 둘째 날(11월 1일)은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인 ‘All Saints’ Day’, 셋째 날(11월 2일)은 모든 죽은 영령들을 기념하는 날인 ‘All Souls’ Day’로 지켰다. 그런데 그 중에서 첫째 날인 ‘할로윈’에 대한 해석이 복잡해지면서 현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문화, 사회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기가 어렵게 되었다.  할로윈(Hallowe’en)이라는 말은 원래 ‘거룩함’이 중시된 기독교 절기 용어로 사용됐다. ‘Hallow’라는 동사에서 파송된 ‘Hallowed’로 많이 사용되며, ‘Holy(거룩한)’라는 의미의 고전적 영어표현이다. ‘-en’은 ‘Evening’이라는 말을 나타낸다.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전날 밤’이라는 의미다. 즉, 할로윈은 ‘Hallows’ Eve or Hallows’ Evening’의 줄임말로 ‘거룩한 전날 밤’ 곧 ‘모든 성인들의 축제 전날 밤’을 의미했다. 중세 시대(로마 가톨릭)에는 교회력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지켰던 절기였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다양한 해석들을 통해 그 이해가 종교다원적인 용어로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할로윈에 대한 세 가지 왜곡된 해석   할로윈에 대한 세 가지 왜곡된 해석이 있다. 첫째, 혼합된 영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이다. 유튜브에서 ‘할로윈 노래’를 검색하면 ‘할로윈 동요모음’이라는 영상이 나온다. 그 노래 몇 곡의 가사들이 다음과 같다.  “불을 뿜는 케르베로스, 작은 친구 호문쿨루스, 강철 먹는 불가살이, 홀홀 할머니 마고할망, 할로윈 축제 주인공은 바로 나 천년 뱀파이어 요아힘, 할로윈이야 할로윈이야 오싹오싹 할로윈 축제…”, “박쥐와 검은 고양이, 보름달, 쿵쿵쿵 발자국 소리, 그림자가 살아난다” 이 노래 가사들에 나오는 할로윈의 주인공들은 기독교의 상징들이 아니다. 유령과 마녀, 호박으로 만들어진 잭오랜턴, 거미줄, 흡혈귀, 미이라, 프랑켄슈타인 등 수많은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들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할로윈은 10월 31일 일몰부터 시작된다. 다신교와 애니미즘을 숭배했던 켈트족(Celts)은 새해 첫날의 전날인 10월 31일에 삼하인(Samhain)을 지켰다. 로마 가톨릭과는 무관한 전통이었지만 기독교 절기와 혼합되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절기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켈트족에 따르면 10월 31일 저녁이 되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가장 얇아져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점프해서 이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날 밤 조상신 같은 선한 영들은 집안으로 들어와도 괜찮지만, 악령들이 집안이나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 거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기괴한 가면과 귀신 복장으로 분장하고, 집을 무덤처럼 차갑게 하고서 그 밤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 교회 절기와 켈트족의 절기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서로 다른 영적 해석들을 섞어 하나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혼합된 종교와 문화의 열매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할로윈에 대한 이와 같은 혼합된 해석은 여러 가지 공포스러운 이야기들과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와서는 자본주의 중심의 문화적 해석과 연결돼 온 세상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둘째, 자본주의 중심의 문화적 해석이다. 미국 및 서양 문화에는 할로윈이 왜곡된 의미의 절기로 이미 오래 전부터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반면, 대한민국 문화 속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21세기를 맞으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현재는 너무 깊이까지 들어와 영향을 주고 있다. 몇 해 전부터 10월 중순이 지나고 나면 대형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대형마트와 상점들에서 할로윈을 기념하는 장식이나 상품이 진열되고 판매되고 있다. 많은 유치원에서 할로윈 코스튬 행사와 잭오랜턴 만들기 실습 등을 하고 있고, 초등학교에서는 영어 학습 시간에 서양문화를 배운다는 취지로 ‘Trick or treat!’(맛있는 것을 주지 않으면 장난칠거야)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있다. 놀이동산에서는 할로윈 퍼레이드와 공포체험 이벤트를 운영하고 홍보하고 있다. 대형엔터테인먼트기획사에서 주최하는 연예인 할로윈 파트와 유명 연예인들의 할로윈 코스프레 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할로윈 문화를 접하고 있다. 이 같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도 지불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라 단지 소비를 조장하기 위해 할로윈을 자본주의 중심 문화로 세워보려는 또 하나의 시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저항을 담은 사회‧문화적 해석이다. 할로윈이 지나면 곧바로 크리스마스 절기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역사 흐름 속에서 할로윈은 크리스마스의 화려함에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만인의 영성시대’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그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면 노래 가사나 뮤직비디오에서 크리스마스(Christmas)와 할로윈(Halloween)의 합성어가 등장했다. 2014년 발표된 서태지의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 ‘젠장, 악인이 이겼다?’는 의미)’에서는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을 대결구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럴듯한 논리인 것 같지만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의 기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하나의 비기독교적 동화이다.    할로윈, ‘하나님의 거룩하심’ 중심에 둔 절기로 지켜져야   할로윈에 대한 온갖 해석들이 올바른 것처럼 우리 생활 속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할로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할로윈은 그 의미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중심에 둔 절기로 지켜져야 한다. 어떤 교회들은 ‘할렐루야 나이트’로 바꾸어 할로윈을 보낸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본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거룩한 책 성경은 인생의 가장 큰 단위인 1년을 하나님의 절기 속에서 지내기를 제시하며 인도하고 있다. 유월절로 시작되어 무교절을 보내고, 곧바로 초실절을 통해 추수가 시작되고, 칠칠절을 지난 오순절까지, 그리고 모든 추수를 마치고 모든 결실을 창고에 들이는 수장절을 지나 정결함을 회복하는 나팔절 이후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초막절로 마치게 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모든 인생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과 연결되어 개신교의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거룩하게 기다리는 대림절기로 시작해 성탄절을 지나고, 주현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묵상하고,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깊이 묵상하게 한다. 사순절의 절정은 종려주일로 시작해 세족 목요일과 성금요일을 포함하는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주일로 마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이 지난 뒤에 오순절 성령강림절을 지키게 되고, 이후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교회력의 한 해가 마무리될 때까지 성령강림에 대한 묵상이 지속된다. 그리고 다시 대림절기로 이어진다.  할로윈은 성령강림을 가장 깊이 누리는 절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예찬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써의 할로윈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풍성한 생명력을 통해 모든 사람을 자유함으로 인도하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자유, 거룩한 기쁨 누리는 절기로 바꾸어 누리는 것이 어떨까?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창조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기다리는 대림절을 준비하는 거룩한 절기로써 할로윈을 이해하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노치형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2019-11-03      제12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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