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심판

복음과 하나님의 심판    로마서 2:1~11 / 이재훈 목사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계시가 주어졌음에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게 되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상실한 마음, 타락한 마음, 어두운 마음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죄악의 공장처럼 온갖 죄악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에 대해 순간순간 심판하심으로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때로 내버려 두심으로서 우리가 최악의 결과를 겪으며 고통 가운데 살도록 하기도 합니다. 내버려 두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요, 진노의 한 표현입니다.  명백하게 죄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죄가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 보기에는 의롭고, 스스로 자부할 만큼 도덕적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비난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훈계할 수 있고 지적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판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 사회의 기준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도덕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합당한 도덕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고 말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2장에서 어법을 바꿉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논술형으로 설명했는데, 2장에서는 헬라 시대 전통적인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놓고, 그 가상 인물에 대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통렬하게 털어놓는 수사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이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그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대가 똑같은 일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1절).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타인의 죄와 문제를 판단하지만, 그 이면에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여깁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판단하려는 사람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분을 내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로움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하고 만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보면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셨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입니다. 그 시대 사람 중에 가장 의로운 이를 꼽으라면 선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엄청난 고난이 오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욥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로 욥이 ‘자신의 모든 의가 도금된 것과 같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그의 밑바닥에 있었던 불의함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욥의 불의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고난이 우리 삶을 휘젓기 시작하면 엄청난 불의함이 쏟아져 나옵니다. 욥이 그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할 수 없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의로움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 앞에서 더러운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얼마나 판단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진리대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심판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면서 똑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대를 회개로 이끄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합니까? 그대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그대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날에 그대에게 임할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3~5절).  온갖 흉악한 죄들, 우상숭배, 더러운 마음, 타락한 마음, 어두운 마음으로 죄를 나타내는 사람이라기보다 도덕적으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말씀 속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압니다”(2절).  진리란 절대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진리입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복음이 진리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요즘은 “당신은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각자 옳은 대로 생각하는 것이 진리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사상이자 사고방식입니다. 진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진리를 양분화합니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진리가 있고, 사적인 영역에서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앙의 영역은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잘못된 구분입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영역에서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당에서만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진리란 절대 기준이며, 절대적으로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절대적인 의로움과 선함에 합당하지 못한 것은 모두 죄악 된 상태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처한 것입니다. 하나의 답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자연 질서에도 과학의 법칙이 있습니다. 절대적입니다. 증명된 과학적 진리가 있듯이, 모든 세상에도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인 진리대로 이루어지기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행한대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심판   둘째,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행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입니다”(6절).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9~10절).  하나님이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기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함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했던 모든 기준을 스스로 지켰는가를 물으십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우리의 모든 삶이 녹음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녹음하고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기초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의롭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때에 보이지 않는 녹음기를 틀어 네 입으로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한 말을 기준 삼아 심판하신다.”  “죽은 사람들이 책들 안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그들의 행위가 기록돼 있었습니다”(계 20:12).   하나님의 생명책에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기준으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저의 대학 동아리 후배가 어느 날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꿈을 꿨는데 심판대 앞에 섰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있는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마침 천사가 자리를 비워서 볼펜을 꺼내 자기 이름을 거기다 적으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서 야단맞고 꿈에서 깼다고 했습니다. 그 후배가 그 꿈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말씀을 실제로 느끼고, 생명책 앞에 서서 떠는 경험을 통해서 신앙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영원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단지 육체적 탄생에서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영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선한 열매를 쌓거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쌓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로 심판하시는 까닭은 그것이 참된 구원을 받는 믿음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계시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셋째,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이 소유한 계시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율법 없이 죄짓는 사람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짓는 사람은 모두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2절).  ‘율법 없이 죄짓는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율법 안에서 죄짓는 사람’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율법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하나님이 율법과 대등한 역할을 하도록 주신 게 있습니다. 양심과 도덕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심판하시고,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지 않으셨기에 양심을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각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던 기준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고대 페르시아 시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역사와 운명을 판단했던 사람들에게는 별의 징조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만 준 계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양각색의 계시를 통해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변명할 수 없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율법을 모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시지 않은 기준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미움받는 선생님이 누구입니까? 시험 범위를 알려 주셨는데, 그 범위 밖에서 문제를 내시는 선생님입니다. 불공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공정한 선생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부인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계시를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그 중요한 증거가 양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도덕적인 본성, 양심의 소리가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과 같은 기능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누구도 변경할 수 없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기에 구약의 율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양심과 도덕적인 본성에 새겨주신 절대적으로 옳으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시기에 공정하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시기에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기에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계시대로 심판하시기에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의 통념, 각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보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심판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모든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하늘 아래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이 없으면 우리가 심판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로 죽음 이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 영원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심판의 정당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더 깊이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2-06-18      제1398호

[국내캠퍼스] [혐오 사회에 사랑 심기-노인 혐오] 당신도 노인이 된다!

크리스천의 또 하나의 사명  ‘혐오 사회에 사랑 심기’   당신도 노인이 된다! 노인혐오 벗어나기 … 노인이 존경받는 사회 만들어야   갈등과 다툼, 분열이 만연하다. 그래서 오늘날을 가리켜 ‘혐오의 시대’라 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다. 혐오(嫌惡)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다른 세대와 성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모습의 이웃을 품지 못하고,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잣대로 세우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경계 대상이 된다. 그 잣대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도 혐오 대상이다. 혐오 시대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교회와 크리스천은 이 삭막한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야 한다. 이 지면에서는 ‘장애인 혐오’, ‘아동·청소년 혐오’, ‘노인혐오’, ‘젠더혐오’, ‘자기혐오’를 주제로 우리 사회 민낯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이 사회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알아본다. 그 세 번째 주제는‘노인혐오’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어린아이 너무 나무라지 마라. 내가 걸어왔던 길이다. 노인 너무 무시하지 마라. 내가 갈 길이다.” 배우 박중훈이 한 방송에서 한 말이다. ‘혐오 사회에 사랑 심기’ 기사를 기획하면서 독자들에게 이 말을 가장하고 싶었다. 아이와 노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은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를 미워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아이였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경로 사회에서 혐로 사회로   ‘혐로(嫌老, けんろう)’라는 말이 있다. ‘노인을 혐오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 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인 일본에서 시작된 신조어다. ‘노인을 공경한다’는 뜻을 가진 ‘경로(敬老)’와 대비되는 이 단어가 참 씁쓸하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도 옛말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고령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다.  유례없이 빨리 진행되는 고령화 속도만큼이나 노인을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가 극에 달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혐로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온라인에서만 보더라도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 할매미(매미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할머니), 연금충(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벌레) 등 노인을 비하하는 말들이 유행한다.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 같이 웃고 즐기는 하나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노인 인권 종합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청장년층 80% 이상이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전국 청장년층(18~64세) 500명과 노인층(65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청장년층 87.6%가 노인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로 보고 있다. ‘노인과 청장년 간 갈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청장년층 비율이 80.4%나 된다. 노인을 향한 젊은 세대의 눈길이 너무 따갑다.   그것은 노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혐오(嫌惡)라는 말은 ‘싫어하고 아주 미워한다’는 뜻이다. 원어로는 ‘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미워하다’라는 의미다. 누군가를 이만큼 미워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노인이 정말 혐오 받을 만큼의 잘못을 했을까? 과거 공경의 대상이었던 노인이 왜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노인에 대한 청년들의 부정적 인식이 복지와 일자리 등 사회적 자원의 배분 문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년 77.8%가 ‘노인 복지 확대로 청년층 부담 증가가 우려된다’고 답했다. 청년 55.4%는 ‘노인 일자리 증가 때문에 청년 일자리 감소가 우려된다’고 응답했다. 과연 노인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노년층 고용률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노인이 하는 일과 청년이 하는 일이 다르다. 노인들은 대부분 청년들이 회피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높은 고용률이 질 좋은 일자리와 연결되는 게 아니다.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에 노인이 고용되기란 쉽지 않다. 노인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인 복지 확대로 청년층의 부담이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노인을 혐오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고령화로 인한 청년들의 재정 및 부양 부담은 노인이 만든 문제가 결코 아니다. 노인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 현상이다. 이를 두고 노인 개인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사회 현상에 맞춰 알맞은 제도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정치권과 기업이 할 일이다. 사회에 해야 할 요구와 사회 현상으로 인해 생긴 불만을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결국 세상은 돌고 돈다   노인이 되면 대부분 존재의 위치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많은 경우 가르치는 존재에서 배우는 존재로 변화된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우던 어릴 적 기자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는 지금 기자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신다. 몇 번을 가르쳐드려도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잊으실 때가 많아 사용법을 공책에 하나하나 적어드렸다.  조부모님과 키오스크(무인단말기)가 설치된 매장에 갈 때면 주문부터 결제까지 모두 기자의 몫이다. 어릴 적에는 계산할 줄 몰라 슈퍼마켓에 갈 때면 할머니 등 뒤에 숨어 수줍게 좋아하는 과자를 골랐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부모님과 기자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귀찮거나 싫지 않다. 이제껏 받아온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크다.  노인의 존재 위치가 달라졌다고 해서 존재 가치까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인들은 젊은 시절 배곯아가며 자식들의 배를 채우고, 본인은 글자 하나 못 읽어도 자식은 대학에 보내고,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내걸고, 산업 전선에 뛰어들어 지금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노인들이 현역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그 노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 사회에 설 자리가 좁아진다고 해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늙어도 가치 있고, 노인들이 존재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세상은 돌고 돈다. 노인들이 피, 땀, 눈물 흘리며 지켜온 이 땅에 청년들이 살고 있다. 또 청년들이 일구는 세상에서 노인들이 살아간다. 언젠가 청년들도 노인이 되고, 우리의 자식이 청년이 된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분명 우리는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으로 자라왔고, 우리가 베푸는 배려와 희생을 곧 다시 돌려받는다. 

 2022-06-04      제1396호

[인물] 이주민 자녀 섬기는 김금희 원장, 정태욱 성도 부부

크리스천이 세상에 보여야 할 자화상   보석보다 귀한 섬김! 이주민 자녀 섬기는 김금희 원장, 정태욱 성도 부부   모처럼 활짝 웃었다. 지난 5월 27일 남양주 썸머힐어린이집에서 열린 ‘한국어말하기 대회’에 참석한 아프간특별기여자 가족들이 말이다. 자녀 걱정은 만국 공통인데 어린이집에 잘 적응한 자녀들을 보면서 아프간특별기여자들의 기분이 얼마나 좋았을까?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과 이주민 자녀들을 섬기는 썸머힐어린이집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요즘 평생을 다음세대 교육에 헌신한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적자를 감수하며 이주민 자녀들을 섬기는 보석보다 귀한 부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매달 수백만 원씩 적자가 나면 어떨까? 아마 하루하루가 끔찍할 것이다.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북누리공동체, 썸머힐어린이집)는 멀쩡한 집까지 팔아서 적자를 메꾸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부는 한 푼이라도 아끼고 더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돈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김금희 원장, 정태욱 성도 부부가 운영하는 썸머힐어린이집에서는 이주민 자녀들을 돌보고 있다.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이주민 자녀들을 돌보기 어렵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말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희 부부는 남양주시에서 썸머힐어린이집 두 곳을 운영하다가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리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2017년 무렵 운영이 잘 되던 어린이집은 휴원하고, 나머지 한 곳은 2020년에 정리했습니다.” 다시는 어린이집을 운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에게 다시 썸머힐어린이집을 운영하게 하셨다. 김금희 원장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원아를 모집했다. “어린이집을 3년 휴원하면 다시 개원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동안 휴원했으니 다시 개원하라는 교육부의 안내를 받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매월 수백만 원씩 적자가 나던 때라 폐원하고 싶었는데 폐원도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외부 강의를 다니면서 적자를 메꾸려고 노력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뜻이라 생각하고 아파트까지 팔아서 썸머힐어린이집을 다시 살리기로 했습니다.”   망하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일 이주민의 자녀들을 돌보다!   심기일전한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는 2020년 썸머힐어린이집 원아를 모집했다. 홍보하느라 노력과 돈이 많이 들었는데 결과가 비참했다. 118명이 정원인데 모집된 원아가 18명에 불과했다. 김금희 원장은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망하니까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망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 말입니다.” 정태욱 성도는 2020년 초에 온누리교회 비전헌금 영상을 보고 이주민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의 자녀들을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이주민 자녀 한명을 돌본다고 저희가 더 많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망하지 않았더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긴 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이주민 자녀를 단 한 명이라도 보내 주신다면 주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거짓말처럼 이주민 부모와 자녀가 찾아왔습니다.”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를 찾아온 이주민 자녀는 K국 출신 부모를 둔 은혜(가명)였다.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돌보려는데 등록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은혜가 우리나라와 K국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 아동이었기 때문이다. 정태욱 성도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은혜가 썸머힐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었다. 은혜가 썸머힐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가 다시 한번 하나님께 조건을 걸었다. “이주민 자녀 한 명 만 더 보내 주시면 정말 하나님 뜻으로 알고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성공회 선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 한다며 도와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B국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광호(가명)는 7년 동안 엄마와 함께 집에서만 생활했다. B국에서는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엄마 품에서 돌보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선교단체가 수소문 끝에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를 소개했다. “은혜와 광호 같은 아이들을 미등록 이주 아동이라고 합니다. 전국에 2만여 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부모가 불법체류자여도 국내에서 출생한 자녀가 14세가 되기 전까지는 국가에서 교육을 제공합니다. 이 기간 부모들도 강제 출국을 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를뿐더러 아이들을 받아주는 교육기관이 별로 없습니다.”   전국에 이주민 자녀들 돌보는 어린이집이 많아지기를…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는 은혜와 광호를 섬기면서 정말 많은 일을 경험했다. 생소했던 행정절차의 달인이 되었고, 어린이집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이주민 부모들을 교육하는 경험도 했다. 썸머힐어린이집에서는 매주 1회씩 채플을 하는데 이 채플을 통해 이주민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주민 자녀들을 섬기는 게 익숙해질 무렵 남양주온누리M센터에서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을 섬겨달라는 연락이 왔다. “남양주온누리M센터를 섬기는 한 성도님께서 썸머힐어린이집에서 채플을 하는 것을 기억하고 저희에게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집을 선택하는 것은 아프간특별기여자 부모들의 결정이라 저희는 기도만 할 뿐이 없었습니다. 아프간특별기여자 부모들이 남양주 일대 어린이집을 둘러보고 선택한 곳이 저희 썸머힐어린이집이었습니다. 이주민 자녀를 돌본 경험이 없는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모두 사양했기 때문입니다.” 김금희 원장은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과 부모들을 섬기는데 38년 교육 경력을 모두 쏟아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보람차다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고 있다. “오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그동안 훈련 시키셨다고 확신합니다. 아마 제가 38년 교육 경력이 없었더라면, 은혜와 광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썸머힐어린이집이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을 섬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급하게 아프간을 떠나면서 받은 상처가 아직 많습니다. 그 상처가 아물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말 큰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는 아프간특별기여자 자녀들을 섬기면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전국에 썸머힐어린이집처럼 이주민 자녀들을 섬기는 어린이집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김금희 원장과 정태욱 성도 부부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온누리가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다. “미등록 이주민 자녀들이 고립되지 않고, 신앙을 어린 시절부터 썸머힐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전국의 기독어린이집에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섬기는 기쁨이 너무 커서 재정의 어려움을 잠시 잊고 있지만, 저희 가정의 재정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함께 기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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