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해설]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맛있는 말씀해설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히브리서>는 유대교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대교 전통에 해박한 지식으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중보자들보다 위대하니 결코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고 전한다. <히브리서> 1장은 ‘옛날에’와 ‘마지막 날’로 시간적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여러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옛 언약의 중보자들보다 뛰어난지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을 받은 존재다(시 2:7~8). 상속자를 ‘주권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이 곧 예수님의 주권이다. 둘째, 예수님은 모든 세계를 지으신 만물의 창조자다.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계셨던 분이다(요 1:1~3).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다른 피조물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천사보다 뛰어나시고(1장), 모세보다 뛰어나시며(3장), 아론보다 뛰어나시다(5장). 셋째, 예수님은 영광의 광채이며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참 하나님이다(요 1:4~10). 초대교회 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던 고백이 잠시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다. 하나님께만 사용했던 ‘영광의 주님’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에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넷째, 예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통치자다. 창조 이후 세상을 방관하는 분이 아니라 지속해서 세상을 관리하시고 감찰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이다. 다섯째, 예수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는 희생제물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이다. 예전에는 수많은 동물로 매번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단번에 희생재물로 드렸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새 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된다. 여섯째,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존귀한 하나님이다(시 110:1, 빌 2:6). 예수님이 하나님 아래에 앉지 않으시고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있는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성경을 해석한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히브리인들의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 가능하다고 논증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점은 우리의 삶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 삶에 왜 이러한 상황이 찾아올까?’, ‘나의 인생은 대체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라고 고민할 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의 측면에서 내 삶을 바라본다면 풀리지 않았던 삶의 고민이 해결된다. 인생의 해답이 되시고, 삶의 이유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나아갈 때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해석될 것이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2023-09-23 제1460호
[어린이신문] 자녀 마음으로 퐁당! / 차세대 아웃리치 간증 자녀의 마음으로 퐁당! - 대인관계와 성격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성격’ 성격은 우리 인생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성격에 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상, 타인을 바라보는 타인상,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성격 좋은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성격이 있다. 성경적으로 자녀를 ‘성격 좋은 아이’로 키우는 방법도 있다. 성격이란 무엇일까? 심리학에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지속하는 행동 패턴’을 성격이라고 말한다. 자라면서 누군가의 칭찬을 듣기 위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심을 얻기 위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해온 행동이 성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이 해본 행동이 자신의 행동 패턴, 곧 성격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습관보다 고착화된 행동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은 타인에게 보여진다. 성격이 고착화된 행동이라면, 나의 성격이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 것이다. 내가 하는 좋은 행동 혹은 좋지 않은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성격이 좋은 사람’, ‘성격이 안 좋은 사람’으로 구별한다. 성격은 언제 만들어질까? 대부분 어릴 때 만들어진다. 양육 환경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자녀의 성격 형성에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심리학에서는 만 18세까지는 성격 변화의 여지가 크다고 본다. 이 말은 즉, 청소년 시기 자녀라도 부모의 양육 방법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유형은 ‘나는 특별해, 나는 잘났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까? 타인을 하찮게 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모든 인생의 실패에서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남 탓을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 곁에는 아무도 없다.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할 수 없다. 심리학에서는 부모가 훈육하지 않을 경우 이 성격 유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혼내지 않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남탓으로 돌리며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 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없기에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두 번째 유형은 ‘나는 부족해,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늘 위축되고 불안함을 느낀다. 타인은 모두 자신보다 잘 나고, 힘이 센 사람처럼 여기기 때문에 경계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행동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에게 심리적 벽을 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도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심리학에서는 학대하는 부모에게서 성장한 자녀가 이러한 성격 유형을 띈다고 말한다. 아이의 자존감을 낮추는 말을 하는 언어적 폭력, 아이를 때리는 신체적 폭력, 부모 시선에서 완벽한 기준을 만들고 아이를 끼워 맞추려는 정신적 폭력이 모두 해당한다. 이러한 양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인관계에 서툴 수밖에 없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된다. 변화하는 부모를 통해 자녀의 변화도 나타난다. 자녀를 ‘성격 좋은 아이’로 양육하고 싶다면, 부모의 생각과 행동부터 달라져야 한다. 상담에서 말하는 좋은 성격은 ‘나도 약하고, 남도 약하다. 나도 강하고, 남도 강하다’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상담에서 말하는 이 정의를 성경에서도 똑같이 말한다. 성경은 “나도 죄인이고, 남도 죄인이다. 나처럼 남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매일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나와 남을 다르게 보지 않는 아이, 나를 귀하게 여기듯 남을 귀하게 여기는 아이가 ‘성격 좋은 아이’다. / 최은영 교수(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 이 글은 기독 OTT ‘퐁당’ 프로그램 ‘[청소년 감정 코칭] 자녀 마음을 읽어주세요 3편 대인관계·성격’을 요약 및 정리했습니다. 자세한 강의는 기독 OTT ‘퐁당’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세대 아웃리치 간증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 8월 고등부 해외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교회에서 일본으로 아웃리치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아웃리치에 가고 싶다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학원은?”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학생으로서 가는 마지막 아웃리치일 수 있고, 코로나19 이후 첫 해외 아웃리치라 꼭 가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사실 해외 아웃리치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이번에도 힘들겠지’였습니다. 4년 전 갔던 필리핀 아웃리치가 정말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일본 아웃리치를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걱정을 모두 지워주시고 은혜를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이번 아웃리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요코하마교회에서 진행한 ‘원데이캠프’입니다. 원데이캠프는 미취학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캠프에 온 아이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캠프에 모인 아이들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프로그램들을 즐겁게 보여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매일 밤 기도회도 은혜였습니다. 기도회에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일본의 크리스천이 전체 인구의 0.5%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땅에 하나님의 사랑이 퍼지기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100%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전에 경험했던 아웃리치와 전혀 달랐습니다. 일본에 대한 편견도 사라졌고,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도 깊이 체험했습니다. 목사님이 아웃리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들은 너희가 예수님께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디딤돌 같은 분들이야.” 목사님이 해주신 이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목사님과 선생님들 덕분에 이번 아웃리치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땅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디딤돌 삼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 서인영 학생(대전 고등부)
2023-09-23 제1460호
[어린이신문] 자녀 마음으로 퐁당! / 차세대 아웃리치 간증 자녀의 마음으로 퐁당! - 진로와 꿈 자녀의 진로 탐색과 부모의 역할 요즘 아이들에게 “진로를 정했니?”라고 물으면 “네”라는 답변을 듣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 시기에 ‘진로탐색’이 꼭 필요한데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진로를 찾아주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상담학에서 말하는 진로탐색에 대해 알아보고, 자녀의 진로탐색을 위해 크리스천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살펴보자. 상담학에서 이야기하는 ‘진로 찾기’의 선행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신뢰’다. ‘부모가 나를 믿어주는구나’라고 느끼는 아이들이 자신의 진로를 잘 찾을 수 있다. 둘째, ‘자율성’이다. 스스로 해볼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주어진 아이들이 진로를 찾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셋째, ‘주도성’이다. 스스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아이들이 진로를 결정할 때도 확신을 갖고 결정할 수 있다. 넷째, ‘근면성’이다.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해서 이룬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진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섯째, ‘정체감’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아이들이 그 과정에서 진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진로상담에서는 진로 결정에 필요한 지식 두 가지를 강조한다. ‘나에 대한 지식’과 ‘직업 세계에 대한 지식’이다. 진로 탐색이란 ‘나와 직업 세계의 최적의 조합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적성, 흥미, 성격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나에 대한 지식을 쌓을 때 가장 중요한 게 ‘가치관’이다. 가치가 분명하면 적성에 조금 안 맞아도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면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나에 대한 지식을 쌓을 때 의사결정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자신에 대한 지식과 직업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았어도 의사결정력이 없으면 진로를 결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유부단하고, 결정력이 없는 아이들이 진로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외에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인간관계 능력’, 진로를 탐색할 때 필요한 ‘정보수집능력’도 필요하다.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능력을 키우도록 도와야 한다. 직업 세계에 대한 지식은 그 직업이 어떤 능력을 요구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과정과 훈련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준비하는 일이 직업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실제 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만족도, 그 직업의 전망 등을 파악하면 직업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한국직업사전>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자녀의 진로 탐색과 결정을 위해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자녀가 잘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모든 일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많은 부모가 자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모의 눈에 자녀가 잘하는 게 안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부모가 원하는 것만 찾기 때문이다. 부모가 원하는 직업,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직업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 자녀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 능력을 벗어난 자녀의 관심과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가 진정으로 원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 관찰해야 한다. 둘째, 자녀의 견문을 넓히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여행, 학교 구경, 봉사활동 등 넓은 세상,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내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그때 아이에게 조건을 걸었다. 동네에 있는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 했던 1년 6개월 동안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고 말한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직접 보고, 생각하고, 배운다. 셋째, 자녀와 함께 의논해야 한다. 자녀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정보를 얻는 일에 어른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부모는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절대 강요하지 말고, 자녀가 주도성을 가지고 찾아보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녀와 끊임없이 의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넷째, 자녀와 함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눠야 한다. 사람은 경험한 대로 살아간다. 부모가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자녀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경험하며 그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부모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자녀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의 진로를 지도할 때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라 사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치 있게 느끼는 걸 나도 가치 있게 느끼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부모가 인생에서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녀들도 안다. 또 부모는 자신의 삶과 일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과 환경에 감사하고 만족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 하느냐가 중요하다. 자녀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 최은영 교수(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 이 글은 기독 OTT ‘퐁당’ 프로그램 ‘[청소년 감정 코칭] 자녀 마음을 읽어주세요 2편 진로·꿈’을 요약 및 정리했습니다. 자세한 강의는 기독 OTT ‘퐁당’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세대 아웃리치 간증 “믿음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고등부 아웃리치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전도사님과 친구들의 연락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 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아웃리치 첫째 날 저녁예배를 드리면서 바뀌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갈 즈음 “예수님을 믿으라”는 전도사님의 말씀이 저에게 와 닿았습니다. 집에 와서도 그 말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대체 왜 그 말이 자꾸 떠오르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게 당연했고, 예수님 믿는 것도 매우 당연했습니다. 나의 의지라기보다 부모님을 따라가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한편에 여전히 걱정과 불안, 의구심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왜 교회를 매주 가야 할까?’, ‘교회 간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들이 저를 둘러쌌습니다. 그제야 왜 전도사님의 말씀이 계속 떠올랐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의무적으로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전도사님의 말씀이 계속 제 마음을 찔렀던 것 같습니다. 이번 고등부 아웃리치를 다녀와서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믿음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교회를 다녀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를 가고, 믿음을 찾기 위해서도 교회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교회를 단순히 누구를 따라서 가거나 누군가에게 이끌려서 가는 게 아니라 제 의지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고등부 국내 아웃리치에서 믿음에 대한 욕심을 생겼습니다. / 임지윤 학생(대전 파워웨이브)
2023-09-16 제1459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는 세 가지 방법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는 세 가지 방법 기도시간마다 자꾸 딴생각이 들어서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할 때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화공이 신을 만들고 제단사가 옷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매일의 직업이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기본적인 매일의 삶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우선시해야 하는 행위다. 기도에 관한 많은 은혜와 간증을 듣는다. ‘어느 날 1시간 기도했더니…’, ‘매일 쉬지 않고 기도하니까…’, ‘기도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와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기도를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숨을 쉬듯 쉽게 기도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 기도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30분은커녕 5~10분 기도하면 더 이상 기도할 게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는 세상의 대화와는 다르다. 기도는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특별한 행위다. 사람들과의 대화에 익숙한 우리는 기도에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어색함을 넘어서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다. 어색한 관계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어색한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어색함 때문에 상대방을 피한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종료될 것이다. 어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상대방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 때 어색함이 차츰 나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일단 기도의 시간을 많이 확보한다면 잠시 다른 생각을 해도 다시 마음을 바로잡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변 환경을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정말 중요한 요소다. 깊은 기도를 하고자 한다면 시간과 장소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기도하기 좋은 환경으로 준비해야 한다. 기도를 방해할 수 있는 물건은 처음부터 시야 밖으로 치워 두는 게 좋다. 가장 멀리해야 할 물건이 스마트폰이다. 하지만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기도 BGM을 틀고 기도하기 때문에 그럴 때는 전화나 메시지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알림을 끄고 기도를 시작하는 게 좋다. 또한 침대와 같은 편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기도가 아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혼자 하는 기도가 어렵다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예배를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함께 모여서 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을 훈련할 수 있다. 훈련하면서 개인의 자리에서도 깊은 기도로 나아가기를 축복한다. 셋째, 기도제목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가 막히거나 다른 길로 새는 경우는 기도할 게 떠오르지 않아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 기도제목을 적어두고, 그것을 보면서 기도한다면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나의 어떤 기도제목이 응답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기도제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도 보면서 중보의 시간을 가진다면 긴 시간 하나님께 집중하며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깊은 기도로 나아가면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축복한다. /최재윤 목사(길공동체)
2023-09-23 제1460호
[주일 강단]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창세기 15:1~6 / 박종길 목사 오늘 본문은 롯을 구한 이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을 찾아오는 하나님,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그 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임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니 네가 받게 될 상이 아주 클 것이다’”(1절). 아브라함이 북쪽 그돌라오멜과 연합했던 군대를 한밤중에 기습해서 조카 룻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드리며 큰 영적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가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엄청난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사실 북쪽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네 명의 왕이 연합했던 군대가 막강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전열을 다시 갖춰서 아브라함을 공격해 온다면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고, 자신이 위험하고 사악한 지역 한 가운데 있는 걸 보면서 아브라함이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니 네가 받게 될 상이 아주 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 등장하는 ‘두려워하다’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이 명령은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고, 우리가 듣기 원하고 사모하는 말씀입니다. 여러 상황과 이유로 우리 삶에도 걱정과 염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을 믿고, 염려와 근심,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침묵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이 두려움에 떠는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원수와 적들의 화살이 쏟아져 내려도 방패 되신 하나님이 막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고 네가 받게 될 상이 아주 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형편 속에서 근심과 걱정, 염려와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 아브라함이 듣고 만났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둘째,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자식이 없으니 제 재산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주께서 제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난 하인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네 몸에서 나온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2~4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신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를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약속하셨던 말씀을 기대하고 자식이 있기를 소망했지만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하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입양하겠다는 계획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 하나님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주께서 제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점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에서 점점 멀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아주 강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고민, 서운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고,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0년은 굉장히 절망하고, 낙담하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아서 걱정이고 염려 되는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이 10년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연단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낙담하는 상황, 걱정과 염려로 근심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과 염려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고,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뜻을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우리의 생각 시간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조급함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달라고 때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과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뜻과 계획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의 시간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10년 넘도록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신 이유는 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더 나아가 먼 훗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날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라가 약속의 자녀를 낳은 것처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태어날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8~9). 우리의 길보다 높으신 하나님,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의 계획을 맞추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 앞에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아뢰십시오.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세어 보아라. 과연 셀 수 있겠느냐?’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그런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5~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아라. 네 자손을 이와 같이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하수 자체가 강같이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세어보아라. 셀 수 있겠냐? 네 자손을 이와 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3장 16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먼지같이 많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롯이 떠나간 이후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걸어 보아라. 내가 이 땅의 먼지 같이 네 자손을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제는 하늘을 보여 주시면서 “저 수많은 별들처럼 네 자손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의 먼지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이 많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게 될 구원의 영광과 영역이 땅과 하늘을 망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조금 전까지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는다’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믿는다’는 단어가 ‘의’라는 단어와 함께 처음 등장하는데,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로마서> 4장 3절, <갈라디아서> 3장 6절, <야고보서> 2장 23절에서 인용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합니다”(롬 4: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 믿음으로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도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이 사건을 통해서 증명합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의로움은 믿음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이나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믿음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 믿음은 구원을 얻는 열쇠입니다. 믿음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실보다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념이나 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 거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의로움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덕분에 그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처럼,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복음의 핵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외롭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예수님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그분을 필요로 할 때 오셔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방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는 시간도, 능력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겪는 한계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우리의 시간과 계획, 뜻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향한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소유하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낙심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일어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9-23 제1460호
[주일 강단] 새로운 역사를 향한 부르심 새로운 역사를 향한 부르심 창세기 11:27~12:9 / 이재훈 목사 <창세기> 12장은 성경 역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장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두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성경 지면의 분량으로도 이 두 사람의 생애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등장과 함께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전 인류의 역사에서 그 폭이 좁아집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전 인류의 역사, <창세기> 12장부터 <사도행전> 2장까지는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중심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후손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다시 전 인류의 역사로 바뀝니다.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하거나 유대중심주의, 유대특수주의라는 시각으로 세상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마치 본연의 인류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부속적인 존재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 인류,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나머지 세상 민족들은 불필요하거나 부속적인 것으로 여긴 게 아닙니다. 유대 민족만 본연의 인류거나 새로운 인류로 간주하신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역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전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그 이후 족보가 나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데라를 택하시고, 데라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벨에 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 인류를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인간의 죄는 무서운 심판으로도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심판이라는 무서운 형벌이 임했으면 사람들이 죄로부터 떠나야하는데, 심판을 받아도 인간의 죄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홍수 심판 이후 역사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흩으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합니다. 셈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친밀한 교제를 하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 데라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으심으로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신다는 노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케 하신다는 말씀은 이미 노아에게 주신 말씀, 셈의 장막을 창대하게 하셔서 함과 야벳, 모든 족속이 셈의 장막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그 예언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류를 심판하셔서 세상에 흩으셨지만,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벨에서 인간의 타락과 정반대로 하나님은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부르심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이 바벨에서 탑을 쌓아 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자신들의 능력으로 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그들의 이름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인가?’라는 이유를 그 이전에 나오는 족보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27절 이하를 보면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가정환경, 형편, 배경에서 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나오는 “너를 창대하게 하고, 너를 복 되게 하여 너의 이름을 높임으로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일단 아브라함의 가정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르에서 주로 달을 신으로 섬기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계기로 만났을까요? 그 힌트가 형제 하란의 죽음입니다. 부정적 사건 이면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함께 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원하지 않는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을 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일어난 일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야 할 하란이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계기가 되었던 게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신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은 거라는 왜곡된 인식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은 그들이 믿는 달의 신, 그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섬겼던 신으로부터 어떤 저주를 받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부터 시작해서 이방신을 섬기는 가정이었고, 자녀를 낳지 못하는 가정이었습니다. 형제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겪은 가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왜 아브라함인가?’라는 부르심에 대한 배경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입니다. 많은 자손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면 노아와 셈과 셈의 후손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인물을 뽑으라면 욥이 될 것입니다. 욥의 시대가 <창세기>입니다. 욥은 경건한 노아의 후손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었습니다. 자녀도 많이 낳는 가정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경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 주시고, 구원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 택하는 조건에서 욥보다 좋은 조건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뽑으라면 욥이 뽑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따른 것은 전능하신 분의 힘이 그와 함께 역사했었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그의 마음을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의 선택보다 큽니다. 나의 능력보다 큽니다. 부르심이란 내가 하고 싶은가, 싫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어떤 제약 가운데서도 이루어집니다. 부르심이 아니라면 모든 풍족한 환경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된다면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포기되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갑니다. 어떠한 제약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해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1~3). 이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어떻게 전 인류를 구원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이후 모든 성경 역사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항상 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까지 이 말씀에 비춰서 역사를 해석할 때 하나님이 이 말씀 그대로 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류의 조상처럼 대하십니다.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을 주셨고 복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이 약속됩니다. 아담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3절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복’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반복됩니다. 타락 이후에는 11장까지 ‘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판’, ‘하나님의 저주’, ‘형벌’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등장합니다. 인간의 타락인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저주’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나오는 저주라는 단어를 12장 이 짧은 구절에 다섯 번 등장하는 ‘복’이라는 단어로 씻어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어느 학자가 개인적으로 번역할 것을 구조적으로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합니다. 한글 성경 순서가 아니라 거의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구조가 이렇게 보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나가라. 너의 본토로부터 너의 친적으로부터 너의 아비 집으로부터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도록 그래서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도록 그리고 축복이 되게 하도록 그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도록)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에 아브람이 갔고 롯도 갔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이 갔습니다. 그 안에 ‘무엇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본토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점점 더 가까운 순으로 옵니다. 본토라는 넓은 나라의 영역, 그리고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정은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가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이 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두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크고 강대한 민족으로 복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먼저 복을 받는 수요자가 되어서 크고 강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이제는 복의 전달자가 되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을 정도로 타락한, 홍수 심판으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하나님이 노아의 후손 가운데 셈의 후손,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 데라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케 복을 주셨습니다. 역사가 그들이 창대케 되는 것을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해서 부르신 사람들을 창대케 하고 복을 주심으로써 너희에게도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먼저 부르신 자가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아브라함과 후손 편에 서서 싸우시고, 축복하시고, 창대케 하는 걸 보고 일반 역사가들이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생활 법칙을 연구해서 유대인처럼 사는 법을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탁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탁월했기 때문에 번성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유대 민족이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완악함을 배웁니다. 복의 통로가 되는 목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 두 번째로 반복되는 단어가 ‘내가’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1인칭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을 고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원문을 보면 ‘내가’를 강조합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으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훌륭하기 때문에 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목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신비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렸던 이들이 나라를 되찾고, 짧은 기간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 구약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역사가 근현대에도 일어났습니다. 완강히 그들을 압박하는 틈바구니 속에서도 생존했고, 다른 민족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택하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 때문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정반대로 그 목적에 합당하지 않게 복을 받았음에도 전달자가 되지 않으면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심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잊어버리고,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만 해도 받아들일 텐데 성경을 읽지 않고 율법을 해석한 탈무드와 미드라시, 또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만들고 성경에서 떠났습니다. 그들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말씀을 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고, 그들이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망각하는 것을 돌이켜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많아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내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좋은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하지만, 동쪽으로는 바벨론, 페르시아가 있고, 남쪽으로는 이집트가 있고, 서북쪽으로는 그리스, 서쪽으로는 로마 등이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작은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끼어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땅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순종하는 자에게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모든 역사의 청사진을 보여 주시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해지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부르심과 함께 여행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부르심이 임하고, 그 부르심과 함께 여행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9-16 제1459호
[주일 강단]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다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다 창세기 11:1~9 / 이재훈 목사 홍수 심판 이후 역사는 인간의 죄가 심판으로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 11장에 이르러 인류 전체의 타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과 마찬가지로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한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는데, 인류는 또다시 홍수 심판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1장 2절을 보면 인구가 다시 크게 증가해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메니아 고산 지대에 머물렀고, 고산 지대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평지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부만 이동한 게 아니라 당시로 보면 인류 전체가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 이동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하나였고, 단일 민족처럼 함께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성경에서는 ‘시날 평원’, ‘시날 평지’라고 밝힙니다. 이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넓은 평야로서 과거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은 훗날 바벨론으로 알려질 지역입니다. 그들은 이 평지에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았습니다. 단지 탑만 쌓은 게 아니라 도시와 성을 건설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살 때는 주로 나무를 사용했지만, 평지로 내려왔기 때문에 벽돌을 이용해서 건축했고,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 “그리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성을 쌓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우리를 위해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4절). 이 고백 속에 세 가지 죄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했습니다. “자, 우리가”라는 표현은 그들이 하나 되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하나 됨이 아니라 죄로 인한 잘못된 하나 됨입니다. 당시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 죄의 무서운 힘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죄도 인간을 하나 되게 합니다. 죄가 연합해서 하나 되는 힘을 이루면 사탄이 인류 가운데 역사하는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거하고, 온 인류를 무신론의 공동체로 묶고자 하는 무서운 죄의 연합입니다.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진화론으로 창조를 부정하고, 거짓된 이념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죄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이념과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독일에서 성을 개인이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어떤 수술 없이, 일주일 간격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신고만 하면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독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 유럽 나라가 그 흐름으로 간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의 질서, 양성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있었던 동기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또다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죄의 힘을 빌려 하나님을 대항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창조주를 기억 속에서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확신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대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성취, 주어진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줄 것을 자꾸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바벨탑을 쌓고, 거대한 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탑과 의도적인 불순종 둘째,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한 것은 창조주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계속해서 바벨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기업, 어느 도시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는지를 경쟁합니다. 그러나 위성사진으로 보면 모두 그게 그것입니다. 땅에 있는 인간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를 가지고 문명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기술력이자 능력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는 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한국에 있다고 해서 “나는 행복해”라고 합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감을 줄까요? 고층 건물에 올라가면 더 불안할 것입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 더 불안할 것입니다.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도가 달의 남극에 접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참 위대한 일이고, 성공적인 업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달에 오르고, 화성에 오르고, 목성에 오른다고 그곳에 하늘이 없을까요? 계속 올라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입니다. 하늘에 어떻게 닿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결의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하신 명령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흩어지기를 거부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의 약속을 통해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믿지 못했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지기보다 하나로 존재하고자 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평원으로 내려올 때도 같이 움직이고, 흩어지기보다 거대한 성을 쌓고 흩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인간들이 향하는 모습을 보고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 우리가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라고 했고,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쌓아 올리는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내려오셨다’는 표현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시기 때문에 내려오셔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려오셨다’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도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보셔야 할 만큼의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탑을 쌓아도 진정한 하늘로부터는 정말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제어하고 중단시키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바벨의 꿈을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을 흩어지게 하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한 민족으로서 모두 한 언어로 말하고 있어 이런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이 하고자 꾸미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하게 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그곳에서부터 온 땅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들은 성 쌓는 것을 그쳤습니다”(6~8절). 인류가 흩어진 결과로 언어가 혼란해진 게 아닙니다. 언어가 혼잡해진 결과로 인류가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바벨에 탑을 쌓는 그들의 꿈을 깨뜨리기 위해서 언어를 혼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점차 분열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위대한 성취나 도전도 하나님께 결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또 다른 심판을 하셨습니다. 죄로 결속된 하나 됨을 깨뜨렸습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발랄’입니다. 그 뜻은 ‘어지럽혀지다’, ‘뒤범벅이 되다’, ‘혼란스럽게 되다’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발랄’에서 앞에 ‘ㄹ’이 탈락하면서 ‘바벨’로 축약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혼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내용이 없을까 해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남승호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언어학에도 ‘단일언어 기원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나라의 언어를 추적하면 약 7천 개가 있는데, 모든 언어의 밑바탕이 되는 하나의 일반 원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어학에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가설입니다. 또 7천 개나 되는 언어를 사람들이 노력하면 학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혀 다른 언어인 것 같지만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하나의 언어였고, 그것이 흩어짐으로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언어는 하나였다는 보편 문법 가설도 주류 언어학에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일반 언어학에서도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언어마저 진화론을 갖다 붙여서 하나의 단어 혹은 발음이 진화해서 문법적인 체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발생부터 언어로 체계화되는 모든 것에 진화론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오랜 세월 동안 진화론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발전한 것입니다. 함경도에서 ‘ㄱ’이 나오고, 전라도에서 ‘ㄴ’이 나오고, 점차 발전해서 한글이 나온 게 아닙니다. 언어학에서도 진화론을 대입해서 진화로 언어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고, 인간들이 문법을 만들어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흩어지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 방법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들이 흩어짐으로써 온 인류가 7천 개 가까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종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며 언어를 혼잡케 하신 사건과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할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여러 나라와 민족 사람들, 바데 사람, 엘림 사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행 2:1~12). 여러 가지 해설이 가능합니다. 실제 그들의 체계화된 언어를 외국어로 듣게 되었다는 측면이 있고,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원래 하나였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도 했습니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는 보편적인 문법 지식에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써 자기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것을 ‘방언’이라는 이름으로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역사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다시 성령의 역사로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벨탑에 내려진 심판을 회복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빠른 시일 내에 전파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흩어진 인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의 심판을 받아 바벨의 꿈은 깨어졌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은 죄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안티(Anti) 바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혼잡과 분열, 타락한 질서를 질서와 거룩한 하나 됨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바벨탑을 쌓듯이 끊임없이 이 땅에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의 성을 쌓고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끊임없는 바벨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스스로 성을 규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바벨의 꿈입니다. 바벨의 꿈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 성령의 능력으로만 깨뜨려집니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로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인이 된다는데 무슨 말인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한다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말합니다.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가 전 세계에서 제2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흩으시는 하나님 심판의 일종이었습니다. 죄의 힘으로 함께 모여 있던 인간들을 하나님이 거리두게 하셨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시대 바벨의 꿈을 저지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징계였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시 바벨의 꿈을 이어가는 인간의 꿈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바벨탑을 만들어가는 인류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바벨의 꿈과 하나님 나라의 꿈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기회를 주셔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벨의 꿈이 아닌 성령의 꿈을 좇아 살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9-09 제1458호
[주일 강단] 축복을 상속받는 인생 축복을 상속받는 인생 창세기 9:18~29 / 이재훈 목사 하나님이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 후손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으신 까닭은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을 노아에게 되풀이해 주심으로써 아담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끔찍한 홍수 심판이 세상에 임했지만, 인간 안에 있는 죄악은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이 생존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 심판의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은 것뿐입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도 여전히 죄가 살아있었습니다. 심판으로도 죄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형벌이 죄를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각심을 줘서 죄를 회개하게 하고, 뉘우치게 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의 뿌리, 원죄, 죄악의 본성은 무서운 심판이 임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 인간의 모습을 보면 지옥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형벌의 무서움이 죄 자체를 없애주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을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벌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 목적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 이후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심판으로도 벗겨지지 않는 죄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창세기> 9장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는 후손들의 계보가 나오는데, 바벨탑과 홍수 심판 사이에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역사를 보여 주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일어날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구원받았던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음으로 자녀들에게 수치를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심판으로도 벗어지지 않는 인간의 죄성을 보여 줍니다. 세 자녀에 대한 노아의 예언 성경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성품을 오랜 시간 보였던 사람일지라도 그들 속에 숨어 있던 죄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성경이 일반 역사가나 사람들이 기록한 거라면 이 정도 사건은 그냥 넘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노아의 수치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홍수 심판 이후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에게도 죄가 다시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밭에 잡초를 다 뜯어 놓아도 어느 순간 다시 자라듯이, 심판 이후 노아의 마음에 어느덧 죄악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 수치스러움을 드러냈습니다.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사탄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들들에게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그 광경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22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발견하고 알렸다는 뜻이 아니라 속으로 즐기면서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말했다’는 단어에도 ‘매우 즐겨하면서 말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함의 모습에서 타락한 뱀 후손의 성품이 발견됩니다. 반면 노아의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셈과 야벳에게는 노아의 그 모습이 결코 즐거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여기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이후 자녀들에게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 자녀에 대한 노아의 예언’입니다. 놀랍게도 그 예언은 역사 속에 실제로 성취됩니다. 신약의 역사를 통해,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노아의 가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 같은 한 사건이 어떻게 역사의 운명을 결정지울 수 있는가 싶습니다. 또 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의 후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출발점에서의 사소한 차이나 방향의 전환이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철도를 보면 철로가 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갈리는 지점에서는 두 철로가 바로 옆에 있지만, 가면 갈수록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군대에서 포탄을 쏠 때 각도가 조금만 오르거나 내려가도 탄착지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지는 것처럼,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차이가 세월이 흐를수록 어떤 차이를 가져오게 될지를 아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를 일으키는 선택인지 아니면 축복을 상속받는 선택인지를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 야벳에게 일어난 사건이 그들을 통해 번성하는 수많은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자손들에게 축복을 상속해줄 것인지 아니면 저주를 상속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우리의 사소해 보이는 행동과 사건이 한 가정의 미래, 더 나아가 역사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큰 가족의 조상일수록 작은 가족의 조상보다 큰 책임을 집니다. 고대 조상일수록 책임이 작다고 보는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더 큰 가족의 조상일수록 더 많은 자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반역과 불순종이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인류의 조상으로서의 행동이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큰 것입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일들의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더 큰 책임, 더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노아의 예언, 영적인 계보의 역사 “그래서 노아는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나안은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돼 그의 형제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아가 다시 말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5~27절). 노아의 예언은 민족의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계보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셈, 함, 야벳이 어떤 혈색이나 혈통으로 민족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셈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 아들이 축복과 저주를 받는데, 모두 셈을 중심으로 받습니다. 26절을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의 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켜 주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이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셈이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부수고, 하나님을 반역한 반역자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노아의 후손 중에서 셈과 셈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경 역사도 셈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이 나오고, 유다가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의 후손으로 세상에 보내실 지를 아주 오랜 역사를 통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을 역사 속에 예언하셨고,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셈을 축복하며 찬송합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셈에게 열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셈에게 임해서 그의 계승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셈의 모든 자손은 아닙니다. 노아의 자손 중에서 셈에게 초점을 맞춘 것처럼, 셈의 후손 중에서도 아브라함,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서도 이삭, 이삭의 후손 가운데서도 야곱, 야곱의 후손 가운데서도 유다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축복을 상속받고 나누는 영적인 계보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자손 중에서는 셈, 셈의 후손 중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는 하나님 선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예언의 약속 그대로… 함의 후손에게는 저주가 주어집니다. 25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를 조롱했는데, 왜 함의 막내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자 장 칼벵이 해석한 것입니다. 함이 받은 형벌의 가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후손을 저주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극심하게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후손들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번영하느냐 혹은 가난한가가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나안이 셈이나 야벳보다 좋은 땅을 차지한 역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은 이 땅에서의 번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가나안이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되어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 특히 기드온 족속들이 여호수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종이 되지 않습니까? 또 그 땅이 진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예언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함의 행동에 나타난 죄의 씨앗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하나님이 아셨기에 노아를 통해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 예언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야벳도 셈처럼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7절). 야벳은 셈과 함께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야벳에 대한 축복도 셈의 장막 안에서의 축복입니다. 셈의 후손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의 장막에 열리고, 셈의 장막이 창대하게 되어서 야벳도 그 장막 안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역을 통해 셈의 장막이 열려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으로 들어오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셈의 후예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은 모두 야벳의 후예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셈의 장막이 확장되어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 안에 축복의 상속자로 함께 참여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노아가 왜 셈을 축복했습니까? 하나님이 셈에게 초점을 두신 것은 셈만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나만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얼마나 많은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이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라”는 고백은 셈만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셈을 통해서 세상을 축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셈을 축복하셔서 그의 장막이 넓게 펴짐으로 수많은 사람이 그 장막에서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축복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까지도 셈의 장막에서 다스림을 받고, 축복의 장막을 떠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스스로 내버려 두면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나안을 셈의 장막에 종으로 붙잡아 두심으로써 그 축복의 장막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창세기> 11장 후반부에는 데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가 상징하는 것은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셈의 장막이 넓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축복하셔서 열방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초청하는 약속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택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남들보다 나은 성품을 가져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보면 비열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셈의 후손 중에 영적 계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셈의 장막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것을 말씀했습니다. “장막 터를 넓히고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활짝 펼쳐라.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네가 좌우로 터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네 자손이 뭇 나라를 차지하고 버려졌던 성읍들에 살게 될 것이다”(사 54:2~3). 셈족의 위대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셈의 장막이 넓어짐으로써 종의 신분인 가나안이든, 창대하게 된 야벳이든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종적인 구별과 차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 더 뛰어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택하셔서 그 민족만 축복하신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장막을 넓게 하심으로 더 많은, 모든 민족이 축복으로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만의 축복은 없습니다. 나만 누리는 복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장막을 넓게 하실 때마다 더 많은 영혼이 축복을 함께 상속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노아를 통해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시고, 셈을 축복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인생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홍수 이후 역사의 흐름을 이처럼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는 역사가가 세상에 있습니까? 온 세상의 역사를 이처럼 간결하게 말씀할 수 있는 분은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의 흐름을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주의 대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축복을 상속받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나안이든 야벳이든 먼저 택함을 받은 자의 영적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을 넓게 펼쳐 주실 때마다 열방을 축복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3-09-02 제1457호
"그들을 사람들은 크리스천이라 부른다" “그들을 사람들은 크리스천이라 부른다!” 삶으로 드러나는 크리스천의 삶 그리고 정체성 요즘은 어디 가서 교회 다닌다는 말만 해도 시선이 따갑다. 전도는 말할 것도 없이 괴롭고 힘든 일이 됐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크리스천,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예수 믿는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크리스천이라고 불림을 받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천이라 불릴 수 있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하나님 말씀 따라 순종하고,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대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빛을 발하면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소외되고, 외롭고,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자 정체성이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어!”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어떤 사람이 좋은지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교회와 크리스천의 이미지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디 이뿐일까? 교회와 크리스천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모른다. 국민일보와 코디연구소가 1천 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종교호감도’ 불교 66.3%, 천주교 65.4%, 기독교 25.3% 순으로 나타났다. 불교가 가장 호감도가 높았고, 기독교는 불교와 천주교 호감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얼마나 낮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과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회와 크리스천의 호감도를 떨어뜨린 이유 말이다. 미디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와 크리스천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추는 드라마가 너무 많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수리남’, ‘더 글로리’, ‘마스크걸’ 등에서 교회와 크리스천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다. 드라마에 겉으로는 신실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인이거나 위선과 가식이 가득한 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단순한 설정을 넘어 미디어에 비친 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드라마 설정과 실제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위선과 가식, 거짓으로 각인된 교회와 크리스천의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 크리스천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결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와 크리스천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결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를 찾을 이유조차 찾지 못한다. 당연히 전도를 거부하고, 피하기 바쁘다. 심지어 크리스천들조차 교회를 버리는 실정이다. ‘2023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신앙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종교가 있는지를 조사했더니 있다 37%, 없다 63%였다. 2012년 조사에서는 있다 55%, 없다 45%였다. 탈종교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과거에는 교회를 다녔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35%),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9%),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서’(20%) 등의 순이었다. 2017년 조사보다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 7%,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 6% 증가했다. 교회와 크리스천에 대한 무관심과 실망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비슷한 연구 결과가 또 있다. ‘무종교인의 종교 필요성 인식 조사’에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응답 31%,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 69%를 차지했다. ‘종교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2017년 조사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종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상황에서 교회와 크리스천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실망까지 더해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희망이 별로 없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삶으로 참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어떻게 하면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부정적인 이미지와 실망을 벗고, 사람들이 더는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 다시 그리스도 품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삶으로 참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사람들이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실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서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참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주변에 이름도, 빛도 없이 섬김과 나눔을 삶으로 실천하는 참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최근 포털사이트에서 한 여성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그 여성은 비를 맞으며 빈 수레를 끌고 가던 노인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자신의 어깨가 흠뻑 젖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에게 우산을 기울였다. 노인과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걷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 여성의 선행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금을 봉투에 담아 노인에게 건넸다. 어느 언론사에서 수소문 끝에 그 여성을 찾아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전하면서 끝내 거절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인천 예수이룸교회의 ‘얼굴 없는 문고리 반찬 섬김’이 그것이다. 예수이룸교회는 매달 첫째 주와 셋째 주 일요일에 학생 10여 명 집에 반찬 배달을 한다. 주로 한부모가정과 조손가정 아이들이 대상이다. 한번 갈 때마다 일주일 이상 먹을 반찬을 가져간다. 문고리에 반찬 꾸러미를 걸어두고 조용히 다음 장소로 향한다. 그 도시락 어디에도 교회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힘내’, ‘너는 소중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적어뒀다. 예수이룸교회는 폐지 줍는 어르신이나 택배기사들에게 음료수를 대접하기도 한다. 그들은 삶으로 예수의 섬김을 실천하고 있다. 온누리교회에도 그 아름다운 사람이 참 많다. 얼마 전 방영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철수 리’ 편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故 유재건 장로다. 유재건 장로(당시 변호사)가 1973년 미국에서 인종 차별에, 살인 누명까지 쓴 한인이민자 이철수 씨의 변호를 맡았다. 당시 이철수 씨는 두 번의 살인 누명을 쓰고 캘리포니아주 사형법에 따라 사형수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유재건 변호사를 비롯한 한인 교회 성도들, 이경원 기자와 이철수 씨의 친구 란코 야마다가 한마음으로 연합해 그의 결백을 밝혀냈다. 당시 유재건 장로는 본인의 집을 담보로 맡기면서까지 이철수 씨를 헌신적으로 도왔다. 유재건 변호사의 희생과 헌신이 한 영혼을 살렸다. 그 일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더는 소수민족이 억울한 일을 겪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바로 이것이 참된 교회와 크리스천의 삶이자 정체성이다. 크리스천은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손 내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조금 희생하더라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크리스천’이라 부른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그날을 소망한다.
2023-09-16 제1459호
[열린새신자예배] 다시 새롭게, 언제나 뜨겁게! 열린새신자예배 1. 그들의 전도 이야기 2. 다시 새롭게, 언제나 뜨겁게! 다시 새롭게, 언제나 뜨겁게! 전도 빙하기 녹이는 ‘초대적 사역’과 ‘경험적 예배’ 이 시대를 ‘전도 빙하기’라고 한다.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누리교회 열린새신자예배가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있다. 매주 새롭고, 언제나 뜨거운 예배를 드리면서 전도 빙하기를 녹이고 있다. 열린새신자예배 담당 조준목 목사에게 전도의 빙하기를 녹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초대적 사역’과 ‘경험적 예배’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복음 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우면 ‘전도 빙하기’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 사람들은 왜 이토록 교회를 미워하고, 오해하게 되었을까? 조준목 목사(열린새신자예배 담당)가 그 이유를 진단했다. “이 시대 영적 상태를 보면 ‘전도 빙하기’라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그만큼 복음 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2020년 12월부터 열린새신자예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당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본당에는 스태프 스무 명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텅 빈 본당에서 얼굴도 알지 못하는 회중을 향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비어있는 본당의 모습이 앞으로 한국 교회가 만날 현실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기독교가 많이 위축되고, 교회 이미지가 악화했습니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탈기독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습니다. 이제는 완연한 ‘후기 기독교사회(Post-Christendom)’로 접어들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교회가 문을 열어둔다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질문을 들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변화와 크리스천들의 본이 되지 못하는 모습들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시대에 맞는 전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조준목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기감이 들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인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시대적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전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초대자(전도자)’의 존재와 역할입니다. 2015년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친한 친구가 교회 가자고 하면 갈 의향이 있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응답자 36.8%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저는 그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 젊은층 복음화율을 3~5%로 보는데, 응답자 36.8%가 ‘교회에 가 보겠다’고 했다면 정말 높은 비율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도 유사한 설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새신자 93%가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 교회에 왔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저도 열린새신자예배를 섬기면서 교회를 처음 온 사람들 곁에는 반드시 ‘초대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도대상자 곁에는 그들을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하고, 하나님 앞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0년 넘게 기도한 끝에 어머니를 전도한 딸이 있고, 오랜 시간 기도하고 준비해서 여동생을 전도한 오빠도 있습니다. 열린새신자예배에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지인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게 전도의 첫걸음입니다. 전도에서 초대자의 존재와 역할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초대자의 존재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온누리교회 열린새신자예배는 초대자의 존재와 역할을 제대로 알고, 그들과 동역하고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열린새신자예배를 ‘초대자들과 동역하는 예배공동체’라고도 부른다. “열린새신자예배에서 전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두 가지입니다. ‘초대적 사역’과 ‘경험적 예배’입니다. ‘초대적 사역’은 초대자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1:5’ 비율을 강조합니다. 한 명의 초대자에게 다섯 명의 스태프들을 붙이는 것입니다. 다섯 명의 동역자들이 전도대상자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섬깁니다. 초대자가 전도대상자와 관계 속에서 전도하듯이, 열린새신자예배 스태프들이 초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동역하는 것입니다. 초대적 사역에서 반드시 기억할 게 있습니다. 전도자인 초대자만 전도대상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한 영혼 한 영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초대자이십니다. 열린새신자예배 스태프들은 한 영혼을 향한 초대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함께 품고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적 사역’입니다. ‘경험적 예배’는 새신자가 교회와 예배에 대한 좋은 경험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객관적 사실조차 개인의 주관적 의견으로 해석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이 더욱 짙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득으로 전도하는 방법의 효과가 덜 할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중요한 가치는 ‘경험’입니다. 실제 경험해보고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수용합니다. 그래서 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느끼고 돌아가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열린새신자예배에서는 교회에 처음 온 분들이 좋은 경험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새신자들이 예배에 들어오는 교회 로비에서부터 전략적으로 준비합니다. 이 시대 문화에서 이해하고 선호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열린새신자예배에서는 환영도 새신자 각 개인에게 맞춰서 합니다. 새신자의 성향이나 정보를 초대자들과 먼저 소통해서 파악합니다. 그 덕분에 환영 인사가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열렬하게 환영하기도 하고, 담백한 인사말로 환영하기도 합니다. 가벼운 눈인사만 하기도 합니다. 열린새신자예배 설교와 구성은 물론이고, 예배 순서와 진행방식, 무대 꾸밈과 영상 등도 세심하게 준비합니다. 새신자들이 교회와 예배에서 좋은 경험을 얻어가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귀한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준비하고, 시도하는 열린새신자예배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앞으로 열린새신자예배의 사역과 비전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온누리교회 열린새신자예배는 1997년 시작되었습니다. 30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린새신자예배는 비전을 새롭게 정립하고, 언제나처럼 뜨겁게 사역할 것입니다. 열린새신자예배에서는 2천 명의 초대자와 1만 명의 새신자가 함께 예배드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사역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 열린새신자예배에서 ‘각별한 복음 수업(약칭 ‘별복음반’)’이라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경험적 예배를 드리면서 복음에 더 깊은 관심이 생긴 전도대상자들을 모아서 복음의 교리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과정입니다. 초대자와 전도대상자가 함께 와서 스태프들과 식사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듣습니다. 지난해에는 파일럿 버전, 올해 초 1차 정식버전으로 실시했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초대자들을 위한 ‘초대자의 밤’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도대상자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초대자들을 격려하고, 중보기도하며, 동역하는 시간입니다. 간증을 나누고, 전도방법 교육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열린새신자예배가 비전을 완수하고, 사역을 더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예배를 함께 만들어 갈 동역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본당을 꾸미고 안내하는 역할부터 중보기도, 무대 기획, 예배 기획, 촬영, 영상제작, 디자인 등 수많은 영역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께 초대하는 이 귀한 사역에 많은 성도님의 관심과 기도, 동역을 기다립니다.”
2023-09-09 제1458호
[열린새신자예배] 그들의 전도 이야기 그 예배에 가면… 1. 그들의 전도 이야기 2. 다시 새롭게, 언제나 뜨겁게 “열린새신자예배 덕분에…” 유일권, 성주영 성도가 가족 전도한 사연 이 시대를 ‘전도의 빙하기’라고 한다.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그 마음을 녹이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전도 방법을 모르기도 하고, 전도할 용기도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란다.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라 했다(딤후 4:2).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과 예배가 귀하다. 온누리교회 열린새신자예배 예배는 전도에 특화된 공동체다. 한 영혼을 전도하려고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준비하고, 전도대상자를 끊임없이 하나님께 초대하기 때문이다. 그 열심 덕분에 유일권 성도가 여동생을, 성주영 성도가 어머니를 전도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열린새신자예배 덕분에 여동생 유수안 성도를 전도한 유일권 성도. 유일권 성도(성동광진공동체)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어린 시절 그도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교회는 다른 세상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만 해도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믿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였다. 전도하려는 사람을 만나면 치를 떨고 피해 다녔다. 유일권 성도는 누구보다 교회에 마음이 닫힌 사람이었다. 잠겨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유일권 성도는 회사 일과 공부를 하느라 중국에서 오랜 시간 있었다. 하나님이 그곳에 전도자들을 보내셨다. 주변 유학생들이 유일권 성도를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함께 교회 가자”는 전화를 정말 많이 받았다. 성경책도 한두 권 받은 게 아니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예배에 몇 번 참석했는데,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전도자들이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복음의 씨앗을 유일권 성도의 마음밭에 심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유일권 성도가 하나님을 만났다.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고 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만난 하나님 덕분에 유일권 성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북경에서 세례받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온누리교회에 정착했다. 신앙생활 하면서 과거에는 몰랐던 행복과 기쁨, 평안을 경험했다. 자신이 만난 그 좋은 하나님을 하루빨리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5년 동안 기도하며 가슴앓이할 뿐이었다. 하나님이 지난해 유일권 성도의 오랜 기도에 응답하셨다. 가족을 전도할 기막힌 방법을 알려 주셨다. 유일권 성도가 우연히 드린 열린새신자예배에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이토록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예배가 또 있을까 싶었다. ‘이런 예배라면 가족을 데려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가족들을 열린새신자예배에 데리고 올지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몇 개월 뒤, 서빙고온누리교회 근처에서 여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하게 됐다. 별 기대 없이 “저녁 7시에 드리는 정말 좋은 예배가 있는데 한번 가볼래요?”라고 물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흔쾌히 수락했다. 바로 그날이 유일권 성도의 여동생 유수안 성도(성동광진공동체)가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날이다. 당신을 하나님께 초대하는 바로 그 예배 유수안 성도는 지금도 처음 교회에 온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예배드리는 내내 이유를 알지 못하는 눈물이 쏟아졌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를 듣는데 벅찬 감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선뜻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 흘리는 모습을 누가 볼까 부끄러웠다. 그날의 이상한(?) 경험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교회와 예배에 대한 기억을 잊을만하면 오빠 유일권 성도에게 연락이 왔다. 어느 날은 좋은 찬양을 보내주고, 또 어느 날은 설교 영상을 보내줬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오빠가 보내준 영상을 하나씩 꺼내 봤다. 아주 조금씩 마음이 열릴 무렵 유일권 성도가 ‘별복음반’(열린새신자예배에서 운영하는 새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 및 교회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했다.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이고, 하나님이 누구기에 오빠가 이렇게까지 권유하는지 알고 싶어서 참여했다. 유수안 성도는 별복음반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도 놀랐다. 별복음반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안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한 영혼을 향한 열린새신자예배의 뜨거운 사랑도 만끽했다. 새신자 눈높이에 맞춘 말씀 강해와 찬양 인도, 새신자 다섯 사람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스무 명 남짓 스태프들, 쉬지 않고 들려오는 중보기도 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유수안 성도는 별복음반을 수료하고, 올해 초 열린새신자예배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약속했다. 얼마 전부터는 일대일제자양육도 시작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일상을 살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제 마음에 평안이 가득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남편도 저의 변화를 느낄 정도입니다. 이 좋은 하나님을 소개해준 오빠와 열린새신자예배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남편과 아들, 딸에게도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전할 것입니다.” 열린새신자예배 덕분에 엄마 김정남 성도를 전도한 딸 성주영 성도. 바로 그때, 열린새신자예배가 떠올랐다! 성주영 성도(동작공동체)도 열린새신자예배 덕분에 엄마를 전도했다. 성주영 성도는 20대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 친가와 외가 중에 교회에 다니는 가족이 한 명도 없었다. 친구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대학교 후배의 전도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기도해주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 온 가족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가정이 몹시 부러웠다. 그런데 가족들을 전도할 용기가 없었다. 가정에 복음을 전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아셨는지 상황을 열어주셨다. 마흔 넘어 출산한 딸을 위해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했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면서 딸과 사위가 매주 주일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는 것을 보게 됐다. 자연스럽게 교회에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성주영 성도가 용기 내 엄마에게 “교회에 한번 가볼래?”라고 말했다. 하지만 칠십 평생 교회에 한 번 가보지 않은 엄마에게 예배가 너무 무겁고 어려울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몇 년 전 드렸던 열린새신자예배가 떠올랐다. 열린새신자예배라면 엄마의 전도를 도와줄 것 같았다. 다시 엄마를 교회에 초대했다. 그때부터 일사천리였다. 성주영 성도의 어머니 김정남 성도(열린새신자예배)가 지난해 9월 열린새신자예배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김정남 성도는 열린새신자예배에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친절한 스태프들, 극진한 섬김, 은혜로운 설교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이 정말 아쉬웠다. “제가 이 나이에 어디서 대접을 받겠어요? 따듯하고 친절한 열린새신자예배 스태프들의 섬김에 늘 감동합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새신자들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주시는 조준목 목사님의 설교도 정말 은혜입니다. 열린새신자예배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김정남 성도는 요즘 성경일독에 도전하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 네 장씩 읽고 있다. 성주영 성도가 열린새신자예배에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제 마음에 품고 있던 가족 구원이라는 소원을 열린새신자예배 덕분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고, 챙겨주시고, 전도의 동역자가 되어주신 열린새신자예배 모든 스태프에게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열린새신자예배에서 배운 대로 엄마의 전도 동역자가 되겠습니다.”
2023-09-02 제1457호
[특별 인터뷰] 온전한 복음을, 온 교회가 연합해서, 온 세상에 전하자! 2024 제4차 로잔대회 기도로 준비한다 1. ‘714 기도대성회’ 함께 갑시다! 2. 이재훈 목사(한국로잔위원회 위원장, 공동대회장)와 함께 온전한 복음을, 온 교회가 연합해서, 온 세상에 전하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 14:6) 자고 일어나면 놀랍게 변해 있는 세상이다. 여전히 전쟁, 기아, 분열이 가득하다. 세상은 더욱 “절대적 진리는 없다”며 자신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의 십자가로 죄가 가득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했으며, 값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음을 말이다. 혼란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럴 때일수록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복음이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한국 땅에 복음 전하러 왔다가 순교했다. 그 이후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렸고, 하나님 은혜로 부흥했다. 이제 한국은 ‘세계복음운동’ 중심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다. 2024년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시작된 복음주의 선교운동인 ‘로잔운동’이 일어난 지 50년 되는 해다. 세계 복음주의 선교운동을 선도해 온 로잔운동이 개최하는 ‘제4차 로잔대회’가 2024년 한국에서 열린다. 복음의 은혜를 입은 나라가 세계 복음을 위한 운동을 통해서 그 은혜를 전하게 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이다. 이 시대를 청년들에게 로잔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한국로잔위원회 위원장이자 제4차 로잔대회위원회 공동대회장인 이재훈 목사에게 들었다. ‘로잔운동’에 대해 처음 들어본 청년들이 많습니다. 로잔운동이 무엇이고, 가장 중요한 비전이 무엇입니까? “로잔운동은 1974년 시작된 복음주의 선교운동입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전 세계 선교사들이 모인 적이 있습니다. 세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신을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이 자유주의 신학 등으로 잘못 흐르고, 많이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또 1970년대 세계가 격동의 시대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마주했습니다. 독재, 빈곤, 가난, 전쟁 이후 사회적 혼란 등을 겪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복음이 이 세상 속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사회의 소음과 대조되고,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질 때는 분명한 사회적 변혁이 일어납니다. 복음과 사회 변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진정한, 온전한 복음이 전해질 때 언제나 건강한 사회 변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로잔운동은 온전한 복음을 강조합니다. 로잔운동은 흔히 말하는 개인 구원의 복음과 사회 변혁의 복음을 구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복음만이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고, 우주적 구원이고, 온 세상의 구원이기 때문에 ‘온전한 복음’을 강조합니다. 로잔운동은 온전한 복음을 온 교회가 함께 연합해서 온 세상에 전하자는 비전으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로잔운동’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 주는 영향력이 무엇입니까? “로잔운동의 영향력은 ‘복음’입니다. 로잔은 ‘복음만이 모든 세상의 어떠한 세계관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진리이자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기쁜 소식이며, 이 세상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를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확신을 가진 운동입니다. 세상에 치우친 이념적 운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흐름도 아닙니다. 오직 복음만을 향합니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념에 치우친 운동이 아니기에 가장 복음적인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한국로잔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1989년 2차 로잔대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는데, 그 이후 ‘한국로잔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1세대 조종남 박사님을 비롯해 한철하 박사님, 조동진 박사님 등 선교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주도해서 한국로잔위원회를 결성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로잔위원회 의장을 맡게 된 시점에서 4차 로잔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회위원회 공동대회장을 겸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 세계 복음주의 네트워크가 이루어지도록 국제 대표들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시아에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리는 만큼 아시아 지도자들의 연합을 이끌어서 아시아가 함께 섬기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게 어떤 의미가 있고, 온누리교회, 특히 청년들이 이번 대회에서 어떻게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세계 복음주의 운동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1차 스위스 로잔, 2차 필리핀 마닐라, 3차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습니다. 4차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영어권 중심의 선교가 아시아권 중심으로, 북반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교회가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서구 교회가 중심(majority)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가 중심이 됐고, 그 중심에 한국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큰 대회를 유치하고 섬기는 교회가 이제는 한국 교회밖에 없다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코로나19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시점에서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다시 연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4차 로잔대회를 계기로 한국 교회가 복음주의 운동을 위해 다시 연합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는 한국 복음주의 교회 중심에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마음으로 섬기는 촉매제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온누리교회 이름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촉매제같이 자신이 녹아서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기대합니다. 이 귀한 일에 온누리교회 청년들이 많이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 청년들이 미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어 갈 주축이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해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로잔의 정신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십시오. “로잔의 정신이란 내규처럼 정해진 것은 없고, 대회 때마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로잔은 운동(movement)이기에 누군가 중심이 되어서 규칙적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사회의 문제들을 복음과 성경적 안에서 해결하고, 고민하는 운동이기에 대회마다 선언과 서약을 발표합니다. 지금까지 ‘로잔의 정신’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내용은 3차 로잔대회에서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HIS’인데, 겸손(Humility), 정직성(Integrity), 단순성(Simplicity)입니다. 이 세 가지가 로잔의 정신입니다. 담대하고 겸손(Humility)한 마음으로, 복음을 구현하기 위해서 정직(Integrity)하게, 예수 그리스도(HIS)의 길을 따라 걷는 검소한(Simplicity)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정신(Spirit)을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로잔운동 모임 가보면 모두 겸손한 태도로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섬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대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특징과 흐름을 아는 게 필요합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기에 그 물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호흡하기 때문에 지금 사는 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 시대 흐름 속에서 살기 때문에 흘러가는 조류가 정말 옳은지, 옳지 않은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 있는 존재이기에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는 영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자기를 절대화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 시대 모든 청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방황하지 않으려면 기준을 명확하게 아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출발점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주의 자녀입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 글 허소원, 사진 문혁훈 *이 글은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서 제작한 <카운트다운 매거진>에서 전재했습니다.
2023-07-08 제1450호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새 꿈과 비전 선물하는 ‘온소미(溫笑美)’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새 꿈과 비전 선물하는 ‘온소미(溫笑美)’ ‘온소미 장학생’ 박정환 학생, 한리아 학생, 강예성 학생 따뜻할 온, 웃음 소, 아름다울 미, ‘온소미(溫笑美)’는 ‘따뜻한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온누리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장학사업의 이름이다. 온소미 장학사업 덕분에 오늘 또 한 명의 청년이 새 꿈을 꾸고,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온소미 장학금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군 복무 중인 박정환 형제, 홍익대학교 한리아 학생, 한동대학교 강예성 학생이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온누리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장학사업인 ‘온소미’는 소외된 이웃들의 생활 지원부터 불우한 청소년과 탈북민의 학업 및 자립을 돕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섬기고 있다. 그 따뜻한 관심과 사랑 덕분에 위기가정 청소년에서 멋진 꿈을 꾸는 청년으로 성장했고, 탈북민과 선교사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발견했다. 온소미 장학금 주인공들의 꿈과 비전을 향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진다. 위기가정 청소년에서 ‘치기공사’ 꿈꾸는 멋진 청년으로 군 복무 중인 박정환 형제는 위기가정에서 자랐다. 2020년 10월 가정폭력으로 아동보호전문기관을 통해 온누리복지재단이 운영 중인 군포남자중장기청소년쉼터 ‘하나로’(이하 하나로)에 입소했다. 처음 경험하는 단체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고, 자신이 위기가정에서 분리된 청소년이라는 생각에 위축감과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도와주시고 아껴주시는 하나로 교사들 덕분에 쉼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어느덧, 박정환 형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로 교사들이 박정환 형제와 함께 진로 탐색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손재주를 활용할 수 있는 ‘치기공사’라는 꿈을 키우도록 도왔다. 그해 수시전형으로 지원해서 동남보건대 치기공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진학 이후에도 1년 동안 하나로에서 생활하다가 입대를 앞두고 퇴소했다. 하나로에서 자동차운전면허증과 건설기계조정사면허를 취득한 게 기회가 돼 강원도 전방 부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다. 사실 수시전형 입학 원서를 쓰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대학에 합격해도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요원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고민이 많았다. 그때 온누리복지재단이 박정환 형제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온소미 장학생으로 추천해서 입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했다. 온소미 장학금이 참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꿈이 있으면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온소미 장학금 덕에 학비 걱정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성적장학금도 받았다. 박정환 형제는 이 모든 변화가 온소미 장학금과 온누리복지재단 덕분이라며 그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온누리복지재단을 만나서 꿈을 꾸게 되었고, 저의 생각을 표현해도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치기공사’가 되어서 온누리복지재단처럼 저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 온소미 장학사업 후원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로 선생님들과 온누리복지재단 대표이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삶이 버겁고 힘들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생겼다!” 한리아 학생은 2019년 탈북했다. 10년 전 먼저 한국에 온 삼촌과 연락이 닿아 엄마와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엄마와 헤어졌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한리아 학생 혼자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10년 전 탈북한 삼촌을 만났다. 몇 개월은 삼촌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여러 문제로 인해 독립했다. 낯선 한국 사회에서 혼자 사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막막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버거운 시간이었다. 외로운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부모님이 계시는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자꾸 비교하면서 우울감이 더욱 깊어졌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어려웠다. 하루빨리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한국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한국 문화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혼자 눈물 흘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가족들이 더욱 그리웠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힘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한리아 학생에게 “내가 너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할 따뜻한 위로이자 감동이었다. 다시 힘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서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비와 생활비가 문제였다. 학교에서 만난 교수님이 그녀의 사정을 듣고 온소미 장학생으로 추천하셨다. 그 교수님이 온누리교회 장로님이셨다. 온소미 장학금 덕분에 부족했던 생활비가 채워졌다. 또 비용 문제로 포기하고 있었던 독일에서 열린 ‘통일 비전트립’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통일을 잊고 있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통일을 먼저 경험한 독일에서 어떻게 통일을 했는지를 배웠다. 그러면서 통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전에는 삶이 버겁고 힘들기만 했는데. 통일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삶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북한을 위해 기도했다. 통일 비전트립에서도 남한 청년들과 북한 청년들이 함께 기도하고, 아픔을 나누면서 우리는 한민족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한리아 학생은 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북한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전공을 살려 통일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새 꿈도 생겼다. “개성공단이 다시 열린다면 거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지금 공부하는 패션 디자인을 활용해서 북한과 남한의 스타일을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고 싶습니다. 온소미 장학금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저와 같은 사람들을 정성껏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도 누군가의 삶에 선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강예성 학생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신다. 부모님과 함께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지냈다. 국제학교에 다니다가 중국 현지 학교로 전학 갔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떨어져서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언어도, 환경도 적응해야 할 게 참 많았지만, 묵묵히 견뎠다. 강예성 학생이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일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모른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신이 엄마 역할을 해야 했다. 사역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기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학업 포기를 고민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때 하나님이 돕는 손길들을 붙여주셨다. 현지 교회 성도들의 도움으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한국에 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기에 부모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아버지가 한국에 오지 못했다. 강예성 학생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했다. 한국에 함께 온 동생들도 챙겨야 했다. 선교사인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기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비도 직접 벌었다. 문제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느라 도무지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장학금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학생처 직원이 온소미 장학금을 소개해줬다. 1년 동안 온소미 장학금을 받았다. 그 덕분에 생활비가 해결됐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온소미 장학금을 받은 이후 성적이 많이 향상됐다. 폴란드로 봉사활동을 다녀올 기회도 생겼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 온소미 장학금 덕분에 봉사활동을 다녀올 수 있었다. 폴란드 현지 NGO 기관들과 미팅도 했다. 전공 관련된 일이라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난민 수용소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제도 나눴다. 이 특별한 경험이 강예성 학생에게 구체적인 비전을 선물했다. 강예성 학생은 건축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집과 학교, 교육센터를 지어주는 하나님의 꿈을 꾸고 있다. “저는 개발도상국 아이들이나 난민들을 위해 집과 학교, 교육센터를 설계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려웠던 때에 많은 분의 도움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의 삶에 선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온소미 장학금 덕분에 하나님의 비전도 발견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온소미’ 장학사업 절차 1. 후원자가 기부하면 온누리복지재단에서 지정기부서 발급. 2. 장학생을 추천받은 이후 장학위원회에서 선정 심의, 3. 대상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후원자에게 사업 결과 보고. 후원 문의: 02-3215-3413 후원 계좌: 하나은행 573-910015-23605 (복)온누리복지재단
2023-09-23 제1460호
[NGO 더멋진세상] "더 멋진 세상 함께 만들겠습니다!" “더 멋진 세상 함께 만들겠습니다!” NGO 더멋진세상 새 홍보대사 김영우, 이정민 NGO 더멋진세상에 새로운 식구들이 생겼다. 지난 9월 19일(화)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 위촉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가수 김영우(스윗소로우)와 아나운서 이정민(전 KBS 아나운서)이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이들은 앞으로 NGO 더멋진세상의 귀한 사역을 교회와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 김영우(이하 김)와 이정민(이하 이)은 “더 멋진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로 위촉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과 NGO 더멋진세상 후원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김: “반갑습니다. 스윗소로우 김영우입니다. 정말 귀한 사역을 하는 NGO 더멋진세상의 홍보대사로 쓰임 받게 되어 정말 큰 영광입니다. 전 세계 이웃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마음이 뭉클하고 감격스럽습니다. 홍보대사로서 NGO 더멋진세상의 멋지고 귀한 사역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홍보에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음악이라는 달란트를 활용해서 NGO 더멋진세상과 함께 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더 멋진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인 NGO 더멋진세상의 홍보대사를 맡게 된 전 KBS 아나운서 이정민입니다. NGO 더멋진세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는데 함께 일할 기회를 얻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 이름대로 더 멋진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정으로 사역하는 NGO 더멋진세상과 한 가족이 되어서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부족한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NGO 더멋진세상을 열심히 알리겠습니다.” NGO 더멋진세상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저는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의 내레이션을 했습니다. 내레이션을 하면서 NGO 더멋진세상이 하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튀르키예 지진 등 다른 나라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도왔고, 전 세계 굶어가는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세하고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 어느 곳이든 달려가는 NGO 더멋진세상을 보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NGO 더멋진세상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대가 큽니다.” 이: “저는 NGO 더멋진세상의 오랜 후원자입니다. 7년 전 온누리교회에서 비전헌금 봉헌과 정기후원 행사에서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오지에 마을을 만들어주고,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먹이고, 어려운 이웃들이 자립하도록 도와주는 등 NGO 더멋진세상이 하는 귀한 사역들을 보면서 큰 은혜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NGO 더멋진세상 후원자가 되어 이웃 사랑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로서 7년 전 제가 받았던 은혜를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도록 힘쓰겠습니다.” NGO 더멋진세상의 많은 사역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역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 “NGO 더멋진세상의 긴급구호가 가장 중요한 사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긴급’이라는 단어는 ‘아주 급하고 중요하다’는 의미 아닙니까? 지구촌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꼭 필요하고,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도움을 주는 단체가 NGO 더멋진세상인 것 같습니다. 골든타임에 의술로 생명을 살리는 의사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는 특공대처럼, NGO 더멋진세상의 긴급구호 사역이 정말 귀한 일인 것 같습니다.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이 감동이고, 좋은 점은 모든 구호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구호 활동을 하면서 종교를 드러낼 순 없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가고, 돕고, 일하는 그 자체가 정말 귀한 일인 것 같습니다. 사역 보고를 할 때도 성과나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보면서 정말 멋진 NGO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제가 엄마이다 보니까 NGO 더멋진세상이 전 세계 어린아이들을 돕는 활동에 마음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먹지 못해 쓰러지는 영양실조 아동들을 돕고, 가난한 아이들이 멋진 꿈을 꾸도록 교육하고,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NGO 더멋진세상에게 참 감사합니다.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온누리교회와 후원자들을 연결해주는 멋진 통로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튀르키예 지진, 아이티 지진 등 다른 나라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온누리교회에서 NGO 더멋진세상을 통해 돕는 방법을 알려줘서 참 좋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활동하는 단체라는 점이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을 더욱 풍성하고 멋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NGO 더멋진세상 홍보대사로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혀주십시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도 한 말씀 부탁합니다. 김: “요즘 세상 살기가 참 퍽퍽합니다. 내 삶을 챙기기에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웃들을 한번 떠올려 봐주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인 또 다른 가족들에게 손을 뻗어주십시오. NGO 더멋진세상이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겠습니다. 혼자 하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힘이 들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NGO 더멋진세상이 하는 일이 혼자 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합니다. 한 사람의 관심,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후원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해주십시오.” 이: “더 멋진 세상, 이름 자체가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NGO 더멋진세상과 함께라면 더 멋진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봉사를 어렵게 생각하십니다. 구호 활동을 부담스러워서 하십니다. 많은 금액이 있어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랜 기간 해외에 나가 직접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돕는 일에는 큰 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아주 작은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한 달에 천 원, 만 원 소액으로도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마실 깨끗한 물이 나오는 우물을 파줄 수 있습니다. 말라리아 감염을 막기 위한 모기장을 줄 수 있습니다. NGO 더멋진세상과 함께라면 작은 관심과 후원으로도 모두가 행복한 더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멋진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아름다운 사람들을 기다리겠습니다.”
2023-09-23 제1460호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온 누리가 모이는 작은 집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온 누리가 모이는 작은 집 ‘Acts29 하우스’ 섬기는 조호정 집사 ‘온 누리가 모이는 작은 집’이 있다. 조호정 집사(수원온누리교회)가 운영하는 해외 파송 선교사 전용 숙소 ‘Acts29 하우스’다. Acts29 하우스는 오랜 사역으로 지치고 피곤한 선교사들에게 쉼과 위로, 격려를 선물하는 공간이다. 조호정 집사의 아름다운 희생과 섬김 덕분에 선교사들이 진짜 쉼과 회복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 조호정 집사,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조호정 집사가 해외 파송 선교사 전용 숙소 'Acts29 하우스'를 청소하고 있다. 20년 전 MBC에서 방영한 ‘만 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시대 스타들과 시민들이 일주일을 1만 원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담았다. 식비는 물론이고, 교통비와 통신비까지 만 원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 시절에도 만 원으로 일주일을 버티기가 정말 어려웠다. 요즘은 더 힘들다.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밥 한 끼 해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Acts29 하우스’(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30번길 16) 하루 이용료가 1만 원이다. 그 1만 원에 시설 사용료, 공용 전기료, 공용 청소료, 인터넷, 수도, 난방요금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정말 싼 가격에 놀라서 당장이라도 예약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무나 묵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Acts29 하우스는 해외 파송 선교사 전용 숙소이기 때문이다. Acts29 하우스는 오랜 사역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해외 파송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마련했다. 4층으로 된 다세대주택인데, 층마다 선교사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호는 4인 가족실, 2호는 2인실, 3호는 3인실이다. 인원별로 객실을 구성한 이유는 싱글 선교사, 선교사 부부, 자녀가 있는 선교사 가정 등 선교사들의 사정을 세밀하게 고려했기 때문이다. Acts29 하우스가 특별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선교사들의 일정에 따라 최대 일 년까지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안식년에 본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이 매월 숙소를 옮겨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Acts29 하우스 4층에는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실 ‘시나클룸’과 교제 공간 ‘마가의 다락방’이 있다. 그곳에서 선교사들이 언제든 기도하고, 나눔을 할 수 있다. 24시간 찬양이 끊이지 않고, 기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그 공간을 선교사들이 가장 좋아한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도실은 시간별 예약제로 운영한다. 선교사들이 기도실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다음 사역을 준비할 힘을 얻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마음을 이토록 잘 헤아리고, 그들의 사정을 배려하고, 개인의 신앙 성장을 돕는 공간까지 마련해 둔 숙소가 또 있을까? Acts29 하우스 곳곳에 선교사를 향한 사랑과 존중, 섬김이 묻어있다. 그래도 기쁘고, 감사했다! Acts29 하우스는 조호정 집사(수원온누리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조호정 집사의 선교와 선교사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 문을 열게 했다. 선교사를 진심으로 섬기고 싶은 조호정 집사의 진심이 가장 값지고, 큰 감동을 준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대한민국 집값이 폭등했다. 당시 이사를 준비해야 했던 조호정 집사의 눈앞이 캄캄했다. 집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는 조호정 집사에게 하나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음을 주셨다. “집 문제로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는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안식년에 한국으로 들어오셨는데 집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으시는 선교사님 가정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도 집을 구하는 게 어려운데, 선교사님들은 더 어렵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우리 집보다 선교사님들이 지낼 공간을 먼저 마련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했다. 우리집 마련보다 먼저 Acts29 하우스를 마련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조호정 집사는 그래도 기쁘고, 감사했다. 하나님이 조호정 집사의 마음에 선교사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준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선교, 선교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Acts29 하우스를 열었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객실에 넣을 침대와 식탁, TV, 에어컨, 밥솥, 전자레인지, 옷장, 신발장, 욕실용품 등을 모두 자비로 채워야 했다.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껴서 채워 넣었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아껴서 선교사들이 덮을 이불을 마련하고, 교제 공간에 놓을 간식거리를 샀다.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조호정 집사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자신이 언제가 지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헌신을 모른 체 하실 리 없었다. 조호정 집사의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이 지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하심을 보여주셨다. Acts29 하우스 운영이 버거워서 눈물로 기도만 하던 조호정 집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최숙현 권사가 Acts29 하우스를 위한 기도를 하려고 방문했다. 숙소 계단을 오르던 그 권사가 “이곳은 갈렙공동체가 2009년부터 7년 동안 선교관을 세우기를 바라면서 땅 밟기하며 기도했던 바로 그 자리”라고 고백했다. 조호정 집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이미 Acts29 하우스를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공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음속 불안과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Acts29 하우스가 진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들도 보내주셨다. 주변 성도들이 Acts29 하우스에 청소기, 이불 세트, 옷, 김치, 라면, 간식거리 등을 필요 때마다 넉넉히 채워줬다. 선교사 숙소를 청소하다가 낡은 베개를 보고 “하나님, 선교사님이 쓰실 베개를 바꾸고 싶어요”라고 기도하면 누군가 베개를 후원했다. 더운 나라에서 사역하다가 겨울에 한국으로 들어와 옷이 없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면 외투 후원이 들어왔다. 얼마 전에는 선교관 기도 제목이었던 ‘Acts29 4호(3룸, 24평형)’를 열어주셨다 .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들어온 은퇴 선교사가 임차했다. 한국에서 살 집을 구해야 했는데 가진 돈으로는 도저히 계약할 수 없었다. 그때 Acts29 하우스와 인연이 닿았다. 임대 계약이 끝나 비어있던 객실을 전세 계약했다. 그 덕분에 Acts29 하우스 운영 경비도 마련할 수 있었다. “Acts29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준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Acts29 하우스의 꿈, 선교사들에게 힘을 주는 공간 조호정 집사의 귀한 헌신 덕분에 Acts29 하우스가 온 누리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열방의 이야기를 가지고 Acts29 하우스로 모여든다. Acts29 하우스 첫 번째 손님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K 선교사 가정이었다. 중앙기독초등학교(CCA)에 재학 중인 자녀가 있어서 학교 주변에 숙소를 구해야 했는데, 선교사 부모와 5남매까지 7인 가족이라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안양에 선교사 숙소를 구하고, 매일 수원까지 왕복 3시간을 통학하고 있었다. 다른 선교사 숙소들은 지낼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5개월 동안 이사를 6번이나 했다. 조호정 집사는 지칠 대로 지친 K 선교사 가정을 위해 Acts29 하우스에 공간을 마련했다. 3인실과 4인실 두 객실을 내어주고 그들이 편하게 지내도록 도왔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온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에버랜드 나들이 지원했다. 조호정 집사의 따듯하고 세심한 배려 덕분에 이 가정은 Acts29 하우스에서 7개월을 머물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인도네시아 K 선교사 가정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가 Acts29 하우스에 머물며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 선교지에서 추방당한 50대 싱글 선교사가 위로를 받았고, 에티오피아에 교회 개척을 한 노부부 선교사도 쉼을 얻었다. 레바논으로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 신혼부부는 Acts29 하우스에 머물며 파송교회를 구하고, 선교를 위한 지혜와 용기를 얻었다. Acts29 하우스의 비전은 ‘모든 선교사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는 집’이 되는 것이다. 조호정 집사가 그 비전을 온누리교회 성도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Acts29 하우스가 로뎀나무 아래서 지쳐 쓰러져 있던 엘리야의 모든 필요를 채워줬던 하나님을 전하는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광야를 걸어갈 힘을 얻은 엘리야처럼, 선교사님들이 선교 사역을 이어갈 힘을 주는 공간이 되고 싶습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문의: 010-8361-0028, 010-3796-0635 홈페이지: acts29house.modoo.at
2023-09-15 제1459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 되도록' 만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 되도록’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 송영범 장로의 다짐 온누리복지재단이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 온누리복지재단 설립 24주년에 맺은 열매라 더 탐스럽고 풍성하다. 지난 8월 25일(금) 온누리복지재단 대표이사 송영범 장로가 ‘제6기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으로 위촉됐다. 서울특별시 명예시장은 교육, 환경, 복지 등 16개 분야에서 한 사람씩 위촉하는데, 송영범 장로는 복지 분야 명예시장으로 위촉됐다. 앞으로 송영범 장로는 서울시 복지 분야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제안 및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송영범 장로에게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 위촉의 의미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그 계획을 들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으로 위촉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으로 위촉된 것은 개인의 경사가 아닙니다. 지난 24년 동안 이어진 온누리복지재단의 아름다운 섬김이 인정을 받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헌신적으로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의 설립 목적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온누리복지재단은 이 비전과 사명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으로 위촉되면서 더 많은 섬김과 나눔의 기회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은 서울시의 복지정책을 함께 고민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미 서울시의 행정 내용을 전달받았고, 복지정책 실장님과 면담도 했습니다. 서울시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 채널도 생겼습니다. 저는 이 소통 채널을 활용해서 복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할 계획입니다. 살아 있는 복지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 좋은 정책과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특별시 복지 명예시장 위촉은 24년 동안 이어온 온누리복지재단의 아름다운 섬김과 나눔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의 어떤 점이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온누리복지재단의 핵심 가치는 사랑, 정직, 섬김, 그리고 전문성입니다. 언제나 기독교법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고, 우리의 핵심 가치를 실현해 나가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온누리복지재단 임직원들은 복지대상자들을 직업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청소년들과 장애인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고 섬깁니다. 복지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온누리복지재단을 만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한 온누리복지재단은 꾸준한 교회와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온누리요양센터의 경우, 일부 발생하는 수익도 환경 개선 등을 위하여 전액 재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누리복지재단 17개 산하 시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온누리복지재단 임직원들은 복지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섬기고, 나누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온누리복지재단만의 특별함입니다. 아마도 이를 높이 평가한 것 같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을 만나고 삶이 아름답게 변화된 사람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에서는 가정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돌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쉼터에서 생활하도록 돕고, 꿈을 찾도록 섬기고 있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 소속 사회복지사들이 그들의 영적 멘토가 되어줍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삶의 방향성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일들이 열매 맺는 사례가 정말 많습니다. 한 청소년이 1년 반 동안 온누리복지재단 산하 시설에서 생활했는데, 그곳의 선생님들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비로소 삶의 이유와 방향을 되찾았습니다.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에서 그 청소년이 공부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온소미장학사업’을 통하여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소년은 학기 내내 우수한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 청소년처럼 꿈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온누리복지재단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이유를 깨닫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되찾은 비전을 이루도록 돕는 일이 온누리복지재단의 또 다른 사명입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이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섬기는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하나님 은혜 아니면 흉내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 큰 사랑이 온누리복지재단의 원동력입니다. 사회복지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전문성과 섬김의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온누리복지재단 임직원들은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전도의 사명을 덧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전문성, 섬김의 자세, 전도의 사명이 결합 돼 지치지 않고, 더 큰 섬김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꾸준한 후원과 지원도 있습니다. 관심과 후원, 사랑과 기도 덕분에 온누리복지재단이 24년 동안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힘은 이재훈 담임목사님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입니다. 교회와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에 아름다운 섬김과 나눔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에서 함께 섬기는 임직원들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힘차게 도약할 온누리복지재단의 계획과 비전이 궁금합니다. 기도제목도 나눠주십시오. “온누리복지재단의 비전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이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입니다. 이 비전을 완수하면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은 가족,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과 사회, 건강한 청소년 자립, 장애인의 사회일원으로서의 행복한 삶,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실현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산하 시설들을 통해 각 분야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복지 실현을 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실효성 있는 맞춤 복지 실현’입니다. 이 일을 온누리복지재단이 잘 감당해내도록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십시오. 온누리복지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고,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방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더욱 헌신적으로 섬기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온누리복지재단의 섬김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온누리복지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고,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방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더욱 헌신적으로 섬기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023-09-09 제14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