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현상, 해석, 그리고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현상, 해석, 그리고 세계관 모든 현상은 해석의 영역이다. 현상이 먼저요, 해석은 그다음이다.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역사란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가 만나는 역사서술은 주관적 해석의 산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역사적 기록물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역사적 문헌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에게 두 가지 무거운 과제를 요구한다. 첫째, 성령의 조명을 받아 문자 이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둘째,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생산적이고, 창조적 대화를 통해 정황 속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일반 성서 해석학이다. 이는 문법적, 역사적, 문화적, 문맥적, 언어 구문적,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규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둘째, 특수 성경 해석학이다. 이는 비유, 알레고리, 모형, 예언 등 특별 장르에 적용하는 규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둘 다 성경을 거룩한 말씀으로 인정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초대 교부와 신학자의 해석을 참조해 성경을 종합적으로 해석한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학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대철학적 해석까지 사용해 성경 본문을 폭넓게 연구한다. 왜 이런 게 필요할까? 성경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경험을 언어로 기술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물론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선험적 감성, 논리, 직관이 그것이다. 이것은 경험을 담는 그릇이다.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경험이다. 주체는 반성을 통해 경험에 형태를 부여한다. 경험을 언어로 표현할 때 그것은 상징과 은유와 이야기가 된다. 살아있는 이야기, 존재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그 여백에 무한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이 성경 해석학의 영역이다. 세계관은 해석학이다. 성경뿐 아니라 역사, 정치, 문화, 예술, 교육, 경제, 종교 등 다양한 분야 이면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다. 해석학적 틀이 잘못될 때 색안경을 낀 것같이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개인주의, 젠더 이데올로기, 세속주의, 신비주의, 해체주의 등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세계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지켜가는 성경적 세계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세계관이요, 둘째, 구속사적 세계관이요, 셋째, 종말론적 세계관이다.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는 성경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째, 수레바퀴 속 수레바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그리스도 탄생까지 약 2천 년 방대한 성경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요약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세상 만민 구원과 만유의 회복이다. 역사는 겉으로 볼 때 도전과 응전,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계신 분이 있다. 그분은 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시다. 그분은 역사를 통해 역사를 이뤄 가신다. 이것을 수레바퀴 속 수레바퀴라고 부른다. 둘째, 바로 그 사람 예수다. 바울은 <시편>과 예언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예수는 온 세상의 왕이시고, 부활을 통해 자신이 왕 되심을 증명했으며, 마지막 날 왕 되신 그분은 세상을 심판할 거라고 변증한다. 겉으로 볼 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셋째, 종말을 향해 전진하는 역사다. 하나님은 우연과 필연 그 섭리의 드라마를 쓰고 계신다.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돌지만,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굴러가고 있다. 예수님은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날 역사는 완성될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첫째, 훈련 없는 성경적 세계관 정립은 없다.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누룩처럼 퍼져 교회를 무력화시키는 세상에서 바른 세계관으로 무장할 때 현상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은 삶이지 지식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지식을 탐닉하다 보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절대 진리를 잃고 만다. 성경은 순종을 통해 지혜로 삶에 체화된다. 셋째, 말씀 연구에 힘써야 한다. 성경은 100%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이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문자 이면에 하나님 음성을 듣는 일이 평생의 과제다. 지금 눈을 들면 저 멀리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는 게 보인다. 그날 온 인류는 완전한 사랑 가운데 처음 계획된 대로 완성될 것이다. 우리 모두 혼돈하고, 공허하고, 깊은 어둠이 깃든 세상에서 미혹되지 않도록 바른 세계관으로 무장해서 성경과 역사 그리고 사회를 바르게 해석하며 예수님 오실 그날까지 그분의 뜻에 더욱 순종하며 살자. 아멘 / 유현목 목사(온누리 세계관 학교 담당)
2024-07-20 제1501호
[맛있는 말씀해설] “… 엘림과 시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출 16:1) 맛있는 말씀해설 “… 엘림과 시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출 16:1)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고된 노동으로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그 부르짖음을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를 불러 출이집트의 사명을 맡기셨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고통의 땅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다. ‘홍해와 이집트 군대’라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 그들은 오직 불평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능력으로 마른 땅을 건너 광야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계셨다. 하지만 가나안은 다리 하나 건너면 나오는 이집트의 이웃 동네가 아니기에 반드시 광야를 지나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한 단순한 지명으로만 언급된 이 한 구절에는 대조적인 두 장소가 등장한다. 바로 ‘엘림’과 ‘신 광야’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동안 광야를 다녔지만, 물을 찾을 수 없었다. 기껏 찾은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마라의 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불평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하셨다. 그리고 이동한 곳 엘림은 12개의 샘과 종려나무 70그루가 있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힘겨웠던 출이집트 과정과 험한 광야를 맛보기로 체험한 이들에게 엘림은 천국을 만난 듯한 기쁨과 행복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천국 본향을 향한 나그네 인생을 걷고 있는 우리는 각자 인생이라는 광야를 걷고 있다. 때로는 복음을 듣고,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왠지 더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계획했던 일들이 잘 풀리고, 세상의 기준으로 좋은 결과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마치 엘림을 만난 듯한 기쁨과 안도감에 젖어 든다. 필자 역시 이스라엘 선교사로 실제 광야를 경험했고, 선교사로서의 탈진을 경험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푸른 초장이 펼쳐진 미국 켄터키주의 렉싱턴 선교사 회복센터는 마치 엘림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최종 종착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림에서 쉼을 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출발했다. 아마도 엘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 들은 내심 또 다른 엘림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 광야’였다. 또다시 불평이 시작됐다. 결국, 광야 1세대는 불평과 원망 속에 가나안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최종 목적지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신 광야는 그냥 ‘환승역’이었다. 매일 아침 서울의 출퇴근 시간, 소위 지옥철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난다는 것은 꿀맛 같은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목표로 하는 최종 종착지를 가기 위해 도착한 환승역에서는 아쉬움을 털고 반드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을 떠나 도착했던 신 광야에서 비록 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본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잠깐 도착하는 그곳이 엘림일 수도 있고, 또다시 신 광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은 환승역일 뿐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우리를 책임져 주실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을 믿고 감사와 찬양으로 또 다른 광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보는 게 어떨까? / 제치윤 목사(영종온누리교회)
2024-07-20 제1501호
[맛있는 말씀 해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출 14:16) 맛있는 말씀 해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출 14:16) 성경에는 무수히 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홍해와 같은 출애굽 사건일 것이다. 그 기적 사건을 읽다 보면 마음속에 궁금한 점이 떠오르기도 한다. ‘정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기적이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기적 경험을 위해 간구한다면 잘못된 기도를 하는 것일까?’ 성경적 관점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기적을 구하거나 성경의 기적을 나도 체험하게 해달라는 간구는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경의 모든 기적은 언제나 구원과 하나님의 성품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성경은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기적 이면에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그것을 성경에서는 ‘표적’이라고 말한다. 즉,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에도 모세와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의 기적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은 천하보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기에 온 세상에서 구원을 베풀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기적이 모세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만 나타날 필요는 없다. 각 시대와 문화에 알맞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는 홍해의 기적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홍해의 기적이 그리스도인의 구원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동일한 구원의 기적이 빛의 스펙트럼처럼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의 사건 앞에서 기적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기도 한다. 바울은 “구약의 홍해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기적과 초월적 사건이 전도대상자에게 매일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단, 주의 사항이 있다. 기적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 기적의 수여자인 하나님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기도다. 진짜 기적중의 기적이란 내가 구원받고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전 12:3). 반대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보기 원하는 기적을 보여주지 못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큼 자기 우상숭배의 죄악이 심각했다. 그들은 이방인의 압제에서 자신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를 추구했지, 하나님의 관심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신앙을 고집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초월적인 기적은 좋은 것이지만, 기적을 경험한다고 항상 우리의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참된 기적은 십자가이며, 모든 보화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골 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분명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기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구원을 위해 홍해와 같은 기적을 베푸실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구원의 기적을 성령 안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맛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시 34:8).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2024-07-13 제1500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젠더이념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는 지식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젠더이념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는 지식 미국이나 유럽으로 자녀들을 유학시킨 가정 중에 “우리 아이가 성전환을 고민하는데 어쩌면 좋아?”, “기숙사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성전환하려는 경우 어떻게 해?”, “단체여행에 동성애자 룸메이트와 같은 침대를 사용해야 하는데 보내야 하는가?” 등의 구체적인 질문을 받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강조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젠더주의가 큰 권력이 되었다. 입학, 취업, 승진, 기관의 대표가 되는 모든 일에 성소수자인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핍박받아 온 성소수자에게 사회 정의, 즉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우대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교육환경도 급격히 그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이 환경에서 교육받아 온 자녀들에게 적절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정의는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는 진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첫째, 생물학적으로 성은 남성과 여성밖에 없다. 젠더주의자가 말하는 몇십 개, 몇백 개의 젠더가 있다는 것은 생각일 뿐 실재적으로 불가능하다. 성의 결정은 수정할 때 성염색체가 XX인가, XY인가에 의해 결정되며 이후 변할 수 없다. 성인 육체의 100조 개에 가까운 세포들은 하나의 수정란에서 DNA를 똑같이 복제해서 2개의 세포로 분열하기 때문에 모두 같은 유전정보를 가지며, 성염색체 정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은 남녀 양성밖에 없다. 둘째, 성전환은 불가능하다. 반대 성호르몬을 계속 투여하거나 생식기 성형수술을 통해 겉모습은 바꿀 수 있지만, 기능적 전환은 불가능하다. 반대 성호르몬으로 각 세포의 성염색체가 가진 정보를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반대 성호르몬 요법을 끊으면 대부분 원상으로 복귀한다. 성전환 치료를 먼저 시작했던 영국은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치료를 시행해 오던 런던의 ‘타비스톡 클리닉’을 2023년 폐쇄했고, 정신과 상담 치료를 우선하도록 수정했다. 미국에서도 젠더확인치료(gender affirming therapy)를 권유한 의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고, 천문학적인 배상금이 청구되고 있다. 셋째, 젠더확인치료를 거절하면 자살 위험이 커진다는 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그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자살 위험이 훨씬 크다. 성전환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자살할 거라고 젠더주의자는 부모들을 협박하고 있는데, 그 주장의 근거가 없다. 반대로 젠더확인치료 받은 사람들을 장기간 추적한 스웨덴의 연구에서 그들이 일반인보다 수명이 짧고, 자살 위험이 19배 이상 높음을 보고한 바 있다. 이는 성전환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결국 기능적 성전환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상 복귀도 불가능함을 나중에 알게 될 때 더 큰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젠더확인치료가 오히려 수명을 줄이고, 자살 위험을 높인다는 게 진실이다. 넷째, 젠더확인치료의 수요가 급증하는 것은 젠더주의에 영향을 받은 교육과 미디어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진보성향 교육감들이 선출되면서 젠더주의를 앞세운 학생인권조례가 10년 이상 공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성과 관련된 모든 것에 성적자기결정권을 강조함으로써 아이들의 조기성애화를 조장하고, 동성애나 젠더주의가 좋은 거라고 공교육에서 미화하고 있다. 또 이들은 이 내용의 자료들을 양산해 SNS를 통해서 흩뿌리고 있다. 우리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을 진보라 미화할 수 없다. 이는 분명한 윤리적 퇴보이며,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젠더확인치료를 조장하는 배후에 이익을 보는 여러 세력이 있다. 젠더주의의 배후에는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집단이 있다. 첫째, 급진적, 자기중심적, 선정적 자아관에 초점을 맞추고, 가정 파괴라는 문화의 폭풍을 일으키며, ‘클릭’과 ‘좋아요’로 돈을 버는 미디어 집단이다. 둘째, 젠더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라는 이념의 폭풍을 일으켜 집권하려는 정치 집단이다. 셋째, 반대 성호르몬 생산 판매와 성전환 수술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약 집단이다. 이익을 좇는 강력한 집단들에 의해 취약한 청소년들을 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 주변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칠 것인가? 취약한 청소년들과 그 배후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 어려움에 빠진 청소년들은 대체로 자기 정체성과 주장이 약하고, 착해서 남에게 잘 휘둘리는 공통점이 있다. 자녀들이 말씀과 기독교 세계관으로 준비되어 있다면, 강도 만난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줄 것을 권고해야 한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서 조종하는 배후 집단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단계까지 이끄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자녀들이 말씀과 세상을 분별하는 힘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들과의 접촉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를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도록 전심으로 가르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 시대를 동시에 이해하는 사람이 다른 형제들을 이끌 수 있다고 성경(대상 12:32)은 말한다. / 류현모 교수(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7-13 제1500호
[주일 강단]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힘을 얻다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힘을 얻다 <사도행전> 15:1~21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 15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복음에서 벗어난 진리를 전하는 이들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 총회입니다.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모세가 가르친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오랜 토론과 논쟁 끝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다뤄서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복음에 기초한 진리인지를 명확하게 하자’고 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과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회의를 시작으로 교회 역사적으로 많은 회의가 있었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회의 끝에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는 결정을 교회가 함께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회의가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이방인들도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한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선택해 이방 사람들도 내 입술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이방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7~11절). 베드로가 하나님이 율법을 폐지하셨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하던 모든 기능이 성취되었기에 더는 조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고백했습니다. “온 회중이 조용해지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이야기했습니다”(12절).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한 구절로 요약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의 발언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권위를 인정받던 야고보가 구약 <아모스> 말씀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상관없이 이방인들도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임을 설교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씀도 이것과 일치합니다. 기록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을 것이다. 폐허가 된 것을 내가 다시 짓고 내가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 사람들이 주를 찾을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게 해 주신 여호와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모세의 율법이 각 도시에 전해져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것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15~21절). 하나님이 율법에 근거해서 세워진 다윗의 장막은 무너지게 하셨지만, 다시 일으키시는 다윗의 장막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시는 장막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모스> 말씀이라고 야고보가 강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 짐을 지게 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확하게 첫 번째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관계를 고려한 ‘배려’와 ‘전통’과 ‘정통’을 구별 야고보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피를 멀리하자고 편지하자’는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야고보가 금하도록 권고한 것은 네 가지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원칙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율법에 익숙하게 살아왔던 유대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네 가지는 지키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자유하다. 먹을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원칙은 자유지만, “만일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써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면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칙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고려한 배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가 제시했던 안과 통하는 결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동시에 배려할 수 있는 것들은 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역이 원칙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도 어떤 때는 할례를 하지 말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할례를 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할례가 조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을 상대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걸림돌을 제거하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례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차원에서 누군가에게는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틈에 들어갈 때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관계 때문에 원칙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고, 원칙 때문에 관계를 무너뜨리는 때도 있습니다. 원칙과 관계가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정에 이르게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이 전해짐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교회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통과 정통을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오랜 시간이 흐름으로써 고착된 것입니다. 전통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모든 전통이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통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들어 봤습니다. “정통(orthodox)이 전통(tradition)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전통이 정통을 변질시킵니다.” 교회의 오랜 습관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라는 이유로 옳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전통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익숙해질 뿐입니다. 전통이 정통에 합당하다면 계속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전통은 버릴 수 있게 되었는데,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데 장애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라는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놀라운 결정이고,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결정입니다. 단지 오래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성이 있는 것이라면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갈 5:4). 율법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짐을 벗게 하고, 은혜의 힘을 얻게 하는 결정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최초의 종교개혁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국한된 유물이 아니라 정통입니다. 중요한 원칙입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것은 교회의 어떤 결정보다 성경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오직 은혜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교회가 제대로 붙잡았을 때 바로 서게 되었고, 이 진리를 버리거나 오해했을 때 심각한 배교와 어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둠에 빠진 결과가 중세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들이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와 똑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되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는 것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사도 바울도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정통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제적인 의로움이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세 가지 전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인 상태에서는 우리 안에 그 어떤 의로움이 없고, 스스로 의롭게 될 수도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을 때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는 제물을 바치는 자의 죄가 전가되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되는 날이 올 것을 예언하는 제도였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 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외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선한 행실이나 공로나 의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의 결정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결정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결정이어야 합니다.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고 은혜의 힘을 얻는 결정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가 누리는 자연은 모두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행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시는 분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것을 명확하게 결정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7-20 제1501호
[주일 강단] 죽도록 돌에 맞고도 죽도록 돌에 맞고도 <사도행전> 14:8~20 / 이재훈 위임 목사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고난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마땅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여덟 번째 복이 임한 것입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복입니다. 세상은 아무런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을 복이라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기쁘게 감당하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복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는 이유를 ‘시기심’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로 인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을 중단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 했습니다”(행 13:52). 그들은 모욕과 핍박 속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이요, 복음의 능력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으로 옮겨서 사역합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고산 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현재는 튀르키예의 ‘콘야’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튀르키예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이고니온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 회당을 찾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유대인의 회당에서 핍박을 받았다면, 다음 도시에서는 유대인을 찾지 않을 법도 한데 그들은 또다시 유대인 회당을 먼저 방문합니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깨닫는다면, 그들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된다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더 능력 있게 전파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 동일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선교적 확산성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방 지역에 있는 유대 회당에는 이방인들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어느 정도 준비된 이들이기에 복음 전파에도 효과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수의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됐습니다. 그러나 믿기를 마다하는 유대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 형제들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 했습니다”(1~2절). 이고니온에서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동시에 유대인들의 반발과 핍박도 일어났습니다.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복음을 들었는데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부하고 대적하며 심지어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교롭게 믿는 사람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핍박하고 내ㅤㅉㅗㅈ고, 심지어 죽이려는 이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먼저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야 할 이들이 더 완악한 마음으로 복음을 대적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를 의지해 담대히 말씀을 전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주의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3절). 첫째,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속히 떠나려는 게 아니라 가능한 오래 머무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둘째,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담대함은 순수함과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이들과 하나님이 표적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험을 또다시 맞이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인지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말씀을 듣는 청중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그 사람 안에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선포했습니다. “당신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남달리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남달리 사모하며, 말씀이 나를 사로잡는 것 같은 체험이 바로 성령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수천 명이 있어도 남달리 귀를 기울이는 사람과 남달리 거부하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지식과 달리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는 귀가 열리는 것이 성령님 역사의 시작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임할 때 치유와 회복도 일어납니다. 마음과 정신의 회복이 일어나고, 때로는 육신의 치유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한 장애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자신들이 믿고 있던 신들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이 전설로 믿고 있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온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오해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 “사람들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황소들과 화환들을 성문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11~13절). 그들은 전설이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지만, 신이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역사적 사건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생각하고 떠받들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우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며 우상숭배를 막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는 담대하게 자신을 내던지며 복음을 전하던 이들이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속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의 잘못된 원인은 이 한 가지 원칙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을 사람들이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십계명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노동력이 필요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외로워서 동반자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결핍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봉사, 예배, 찬양이 하나님 되심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때문에 하나님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충해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신론자가 되어도 하나님 되심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전히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십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원하는 대로 될 때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사람들이여,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14~15절).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면 옷을 찢으며 분노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떠받들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옷을 찢어야 할 순간은 스스로를 떠받드는 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행동을 말릴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설교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 <사도행전> 15~17절을 보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를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본 비디시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구약 역사를 요약하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고,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회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역사를 아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유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회중에 맞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스드라는 회당이 아닙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왜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증거해야 하는지가 여기에 나옵니다.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을 인용할 수 있지만, 성경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G.K 체스터턴이라는 분이 쓴 <영원한 사람>(The Everlasting Ma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진화론이 막 등장하기 시작할 때 쓴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오래된 구석기 시대의 동굴에 들어가 보면 벽화가 있습니다. 사슴도 있고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도 그림을 그립니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뿐입니다. 고대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고, 현대 사람은 못 그립니까? 아닙니다. 현대에도 석기 시대 사람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있고, 고대인이라도 그림의 은사가 있으면 잘 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석기 시대 사람도 사람이고, 이 시대 사람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진화론을 무너뜨렸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고, 유일하심을 보여주며,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시작하고,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인간에게 이르러서 셋째, 진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른다. 그래서 루스드라에서는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비디시아 안디옥에서는 구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대상에 따라 다른 설교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상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탁월함으로 사역 주도권이 바나바아게서 바울에게로 자연스럽게 이동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는 바나바보다 바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바나바가 사역의 주도권을 바울에게 넘겨주고 “당신이 앞서 가라. 내가 뒤따라가겠다”는 성숙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믿음의 문이 열렸는지 보고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기적과 변증, 전도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있던 반대자들이 따라와서 바울을 모함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고, 여러 모함과 음모로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가 맞아 죽을 만큼 돌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진리를 전하면 그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옳은 지도자를 싫어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지도자를 좋아합니다.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지도자를 도리어 인정하지 않고, 자신처럼 어둡게 살아가는 지도자를 내치지 않습니다.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을 감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지도자가 세워지면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어둠에 가까운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올바른 진리를 전했지만, 그들을 돌로 쳤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돌을 던져서 시체인줄 알고 밖으로 끌어내 버렸습니다. 바울이 그때 살아난 것은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돌을 맞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존하신 것입니다. 죽도록 돌에 맞고도 바울은 다시 일어나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훗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사건을 언급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고후 11:24~25). 바울의 많은 고난 중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역지를 ‘더베’라는 곳으로 옮깁니다. 더베에서는 핍박이 없었고, 오랫동안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얻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사역을 중단했다면 더베에서의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파송을 받은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빨리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사역했던 지역들을 다시 방문하는 코스를 잡습니다. 죽을 고생을 했으면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텐데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서 간 이유는 그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믿음에 머물러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21~22절). 많은 새신자를 믿음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그 힘들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고, 장로와 리더십, 성도들을 세운 것입니다. 그 뒤에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2년에 걸친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친 것입니다. 시리아 안디옥에 돌아와서 이른바 ‘선교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이 은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서 교회 신자들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 보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27~28절). 보고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이고,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입니다. 그들이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믿음의 문이 열렸는지를 보고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고생한 이야기는 먼 훗날 바울이 죽음을 앞둔 때 <디모데후서>에서 말합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핍박과 고난을 함께 겪었다. 그러한 핍박을 내가 겪었으나 주께서 이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핍박을 당할 것이다”(딤후 3:11~12). 바울과 바나바는 죽도록 돌에 맞고도 다시 일어나 기뻐하며 소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복, 고난과 핍박도 기뻐하며, 이길 수 있는 복을 누리게 합니다. 어떤 핍박과 죽음조차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귀한 삶을 본받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7-13 제1500호
[주일 강단] 땅 끝까지 전해지는 복음 땅 끝까지 전해지는 복음 <사도행전> 13:42~52 / 강부호 목사 사도 바울이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성경에 순간순간 등장해서 위기를 극복하게 했던 인물들은 모두 한계가 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전히 구원하는 일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온전한 인물의 등장을 기다렸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온전한 인물은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 주셔야 합니다. 메시아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은 구원의 말씀 “아브라함의 자손인 형제들이여!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 사람들이여!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행 13:26).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말씀 그 약속대로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 주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 지도자들은 예수를 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정죄해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을 선고할 근거를 전혀 찾지 못했음에도 예수를 죽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고 예수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대로 행한 뒤 예수를 나무에서 끌어내려 무덤에 묻었습니다”(행 13:27~29).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해로운 인물,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 시도하는 설명의 핵심은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까지 했던 머리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이 눈앞에 등장해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정체성입니다. 그들을 증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고,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행 13:30).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활동이 없으면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시고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넘겨주었던 하나님이 처음 보내신 그 메시아, 예수님이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삶 모든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삶을 이끌기 시작하셔야 성경에서 약속하신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죄로부터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답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이 이뤄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2편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행 13:32~33).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이 이뤄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신 좋은 소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취된 약속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썩지 않게 하셨는데 이것은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복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주의 거룩하신 분을 썩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행 13:34~35절).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되새기면서 그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예수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여러분에게 선포되고 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것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38~39절). 예수님이 그토록 중요한 분이시고, 그토록 중요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율법 안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될 수 없었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바른 관계 회복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기 시작할 때,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신뢰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구원도, 망하는 일도 성경 그대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말한 것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보라. 너희 비웃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하겠다. 누군가 그 일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다’”(40~41절). 사도 바울이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다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인데, 좋은 약속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신뢰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구원이 아니라 망하게 되는 일도 그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설교 마지막에 이르러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응답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소홀히 여기고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졌는데, 구원의 길을 우습게 여기면 망하는 길에 대한 약속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좀 더 해 달라며 부탁했습니다. 집회가 다 끝난 후 많은 유대 사람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거의 다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42~44절). 사도 바울의 설교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말씀을 더 해달라고 했습니다. 또 한 부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반대하며 모욕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됐습니다”(48절). “그 무리를 본 유대 사람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바울이 말하는 것을 반대하며 모욕했습니다”(45절).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설교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어떤 유대 사람들은 시기심이 가득 찼습니다. 반대하고 모욕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동안 그들이 알고 주장해 왔던 것과 완전히 달라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기분도 나빴을 것입니다. 그들은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지 못하도록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지도자들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했고 결국 그 지방에서 그들을 강제로 내쫓았습니다”(50절).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도록 간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할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지방에서 강제로 내쫓았습니다. 복음에 관련된 말씀에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라면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에게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먼저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 말씀을 거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 눈을 돌립니다’”(46절).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 말씀보다 내 입장을 우선해서 주장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보내주신 진리의 말씀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갑니다. 진리는 우리를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즉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일깨우기를 중단하고 소멸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52절). 여러분, 우리에게 합당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면 다른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는 것은 증거함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기쁨과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그 일과 관련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말씀이 그 지방 전체에 두루 퍼졌습니다”(49절). 사도 바울 일행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 사회에 복음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새로운 물결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아는 자들이 말씀을 부지런히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확실히 아는 자들이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전보다 명확하게 알고,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것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할 때 이 땅의 많은 흐름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7-06 제1499호
[주일 강단] 참된 선교적 교회 참된 선교적 교회 < 사도행전> 13:1~12 / 이재훈 위임목사 안디옥교회 출현은 세계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생각했던 고정관점을 깨트리고, 온 세상을 향해서 주어졌으며, 전해져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정착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졌는데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구속의 은혜가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여겼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수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안디옥에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리아 안디옥은 3십만 명 정도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고, 여러 민족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끼리, 같은 민족끼리 모이기 좋아하고, 거기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그것을 뛰어넘어 여러 민족과 인종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모범입니다. 안디옥교회 ‘예언자들과 교사들’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된 바나바가 다소에 있었던 사울을 교사로 초청합니다. 사울이 다소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예루살렘교회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그를 배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것을 뛰어넘어 사울을 부르신 하나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사울을 안디옥교회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세계 교회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사도행전> 13장 이후부터 사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울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사울 외에도 여러 지도자가 세워졌습니다. 그들도 사울처럼 바나바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습니다”(1절).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일컫는 명칭이 ‘예언자들과 교사들’입니다. 바나바가 명단에서 가장 먼저 나오고, 사울이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헬라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가장 앞과 맨 뒤에 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배열합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와 사울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명단이 다양한 배경을 보여줍니다. 먼저 인종을 초월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에서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유대인입니다. ‘니게르’는 로마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 이름입니다. 북아프리카, 로마, 유대 등 여러 출신 사람들이 함께 지도자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초월했습니다. 흥미로운 이름이 나오는데,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입니다. 분봉왕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것은 친족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자랐다는 것은 그가 로마 제국 시대에 분봉왕으로 임명된 친족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특별한 귀족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흥미를 끄는 이름이 ‘니게르라는 시므온’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이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인종 등 많은 것을 초월하는 세상 사람들끼리만 모이라고 한다면 절대 모일 수 없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모일 이유도 없습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함께 이득을 보기 위해 모인다면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닌 이유로 이 사람들이 함께 모였고, 그들이 함께 리더십을 형성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와 다른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더 넓게 쓰임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유대 민족 중심의 교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나 장벽이 없는 교회입니다. 단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교회, 사역을 많이 한 교회를 일컫는 게 아닙니다. 먼저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란 안디옥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아무리 많이 파송하고, 후원할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 내부에 벽이 생기고, 갈등이 깊어지고, 계파가 생기고, 그룹별로 갈등하고 다투면 선교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 됨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연합하는 것이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졌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도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을 증오하고, 정치사회적으로 공격했던 ‘열심당원’이라고 하는 사람 출신 시몬도 있었습니다. 마태와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며 삶을 나눠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또 가룟 유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같은 사람은 어부 출신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첫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 사람들을 모으신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달라서 힘든 게 아니라 다르기에 멋있게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화음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공동체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요 17:21).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은 죄인인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처럼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 인격의 차이, 선호도의 차이, 방식의 차이는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 안에서 참된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 듣고, 순종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온 교회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주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2~3절). ?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학자들이 선교적 교회의 시초라고 하지 않고, 안디옥교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교회가 선교 사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룻다와 욥바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적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핍박에 의해 흩어져 수동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배 가운데 금식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능동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만일 스데반의 핍박이나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없었다면 흩어졌을까요? 결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긴 했지만 외부적 요인에 의해 흩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흩어진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선교적 교회’란 말을 사용하면 ‘정신없이 사역들로 꽉 차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십시오. 예배와 금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경건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의 두 기둥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순종했습니다. 선교사 조성록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길 장로님이 1990년 일본에서 열리는 창조과학세미나 통역자로 조성록 목사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때 창조과학자들이 “아니, 그렇게 일본어를 잘 하시는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성록 목사님이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조성록 목사님을 일본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1994년 3월 30일 조성록 목사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일본이었다. 그러나 내가 머지않아 생을 마치는 날을 생각하면서 일본인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일본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일본에서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후의 사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조성록 목사님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사역하신 교회가 지금 일본 비전교회가 되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성수 장로님은 치과 의사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는 자서전에서 이런 내용을 고백합니다.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만 있었지 정작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막상 떠나려 하니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20여 년 동안 번창해 마련한 강남의 좋은 저택. 10여 년 동안 가꿔온 경기도 광주의 농장 등을 비롯해 집착하며 붙들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포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체험한 것 같다.” 그때 최성수 장로님 가족들이 농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가족들의 팔 다리가 부러지고, 장로님도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병실에 누워 말씀이 갈급해 성경을 펴셨는데 <누가복음> 12장 20~21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네게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너를 위해 장만한 것들을 다 누가 갖게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최성수 장로님은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떠나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파송을 받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성도들은 안디옥교회가 터전이고, 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선교적 교회의 모델로 역사에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다 그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서로 싸우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믿지 않는 영혼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란 언제나 영적 싸움에 직면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보냄을 받습니다. 첫 번째 보냄을 받은 지역은 지중해 ‘키프로스’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1~3차 여행이 나옵니다. 지명도 많이 나옵니다. 키프로스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고향이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강력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는 로마의 한 도시로서 지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특히 구리가 많았습니다. 광산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키프로스 지역을 관통할 때 해안선을 따라 가면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산을 넘어 건너갔습니다. 그 이유는 광산이 많아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 지역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의 수도였던 바보(파포스)는 비너스를 숭배하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정치가들이 마술사들을 의지하고, 자신의 미래와 국가의 운명을 마술사에 맡기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 지역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도 엘루마라는 마술사를 의지하고 많은 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술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키프로스 섬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변화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역사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담대하고 순전하게 전하면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다른 무기는 방어 무기입니다. 방패, 허리띠, 투구 등은 방어 무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검입니다. 이것이 전해졌을 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당시 키프로스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까지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루마라고 하는 마술사가 서기오 바울이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축되고 밥그릇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엘루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너는 갖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구나. 주의 바른길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쳤고 그는 이리저리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9~11절). 바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선포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일을 본 서기오 바울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보자 총독이 믿게 됐고 주에 관한 가르침에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12절). 바로 이것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키프로스의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키프로스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될 때 그 영향력은 더욱 클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안디옥교회가 복음 안에서 서로 하나 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때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이 후에 뒤집어 진 것은 바로 서기오 바울과 같은 총독이 예수 믿었던 일이 출발점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 어떤 민족, 어느 인종의 사람들에게도 진리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만 진리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역사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동양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서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서구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동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인 까닭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서 습관과 문화는 약간 상이할 지라도 동일한 복음을 믿고, 교회가 형성되고, 복음이 계속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역사를 우리가 확신하고, 체험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가 참된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6-29 제1498호
[2024 마리아행전]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 3,600여 명 참석 용서와 간구,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에 참가한 마리아들이 쏟아낸 간증이자 큰 은혜다.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이 지난 6월 12일(수)부터 14일(금)까지 양재온누리교회, 각 캠퍼스에서 막 올랐다. 순백의 마리아 3,600여 명이 모였다. 집회 첫날에는 찬양사역자 송정미 사모 특순,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합심기도회가 열렸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용서하는 영혼에게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부어주신다”면서 “용서의 엎드림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회개와 용서의 기도도 이어졌다. ‘타인을 향한 용서의 엎드림’, ‘하나님께 대한 용서의 엎드림’, ‘나라를 위한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마리아들이 뜨겁게 부르짖었다. 전해옥 성도(양재온누리교회)는 “뜨겁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사람을 생각나게 하시고, 나를 묶고 있는 부정적 생각에서 자유롭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집회 둘째 날에는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 설교, 합심기도회 등이 이어졌다. 이인호 목사는 ‘미스바의 엎드림’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사무엘 한 사람을 통해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뤄졌다”면서 “우리도 사무엘처럼,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광자 권사(영등포구로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에게 우상이 있는지 통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연합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집회 셋째 날에는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성도들이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 모여 함께 예배드렸다. 이한영 부총장(아신대) 설교, 합심기도회, 세리모니 등이 이어졌다. 이한영 부총장은 ‘탄식에서 예배로’를 주제로 설교했다. 이 부총장은 “엎드림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자로 승화시켜 주신다”면서 “엎드림의 기도가 일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북 상주교회 성도들도 집회에 참석해 더욱 뜻깊었다. 김영미 권사(상주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부르짖는 마리아행전에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 김다애, 홍하영 기자 마리아들의 고백 나라를 위한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은 한마디로 수많은 위기 앞에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엎드려 부르짖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행전’ 같은 기도운동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행전에 참가하면서 ‘하나님과 첫사랑을 회복하는 엎드림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마리아행전은 말씀을 회복하고, 엎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우상이 세워지고, 내 마음이 세상에 이끌리게 되기에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올해 9월 로잔대회를 통해서 또 한 번의 선교 운동이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이숙현 집사(S브릿지공동체) 회복을 위한 엎드림 저는 이번 마리아행전 ‘엎드림’ 봉사자로 섬겼습니다. 봉사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마리아행전을 준비하면서 은혜는 준비하는 과정과 중보기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엎드릴 때 옆 사람도 엎드리게 되고,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옆 사람도 함께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배웠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저로 인해 옆 사람이 회복되고, 옆 사람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김용곤 집사(동대문중랑공동체) 갈망을 위한 엎드림 마리아행전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저는 4기 암환자입니다. 오늘 CT를 찍는 날이었는데 하나님이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마리아행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서산온누리교회에서 참여한 마리아행전 집회도 정말 좋았지만, 모든 캠퍼스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니까 더욱 감사했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그동안 저의 기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할 때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갈망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몸이 아프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서 자녀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양육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만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 편은정 성도(서산온누리교회)
2024-06-15 제1496호
[러브소나타]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5월 15~16일 러브소나타 효고 ‘회복’ 현장 2,635명, 온라인 3,917명, 일본인 643명 결신 한국과 일본이 함께 나라와 교회, 가정과 복음을 위한 회복의 노래를 불렀다. 34번째 러브소나타 효고가 지난 5월 15일(수)과 16일(목)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회복’을 주제로 열렸다. 러브소나타 집회에 현장 참석자 2,635명, 온라인 참석자 3,917명이 참가했고, 일본인 참가자 64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러브소나타 효고의 포문은 지난 15일(수) 고베동부교회에서 진행된 회복 세미나가 열었다. 일본 러브소나타 실행위원, 일본 교회 성도, 한국 목회자 및 리더십 등 130여 명이 참석했다.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 ‘목회 케어와 회복’,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몽골 키즈홈 서포트팀 대표)가 ‘성경 안의 나’를 주제로 강의했다. 이기원 목사는 “성도들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통합적 방법으로 돌봐야 한다”면서 “성도들이 고통의 자리에서 감사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는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쓰여 있다”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받은 사랑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같은 날 저녁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는 러브소나타 전야제 ‘가스펠 나이트’ 집회가 있었다. 일본 교회 성도 1,066명, 한국 성도 632명, 온라인 1,732명이 참석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무코노소 메구미교회, 청소년 사역자)가 설교하고, LOVE OBI, 잇삐 재팬, CCM 가수 지미선, 옹기장이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는 ‘Re!!’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면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가 회복을 경험하고, 그 회복의 경험을 나누고 전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16일(목) 오전에는 고베 메리켄파크 오리엔탈 호텔에서 리더십 포럼이 진행됐다. 한국과 효고 각 분야(정재계, 교육, 언론, 의료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리더십 90명(한국측 40명, 일본측 50명)이 참석했다. 이인용 장로(당회서기), 가네코 미치히토 목사(일본 참의원, 사회복지법인 ‘굿사마리안’ 이사장)가 강의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러브소나타 효고 집회가 막 올랐다. 온누리 사랑챔버 오케스트라, 개그우먼 조혜련, 가수 범키, 팝페라 가수 신델라,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 가스펠보컬밴드 CRUX, Lalo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의 희생을 치르셨다”면서 “그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의 회복을 경험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코이와 레이나 자매는 “한국 성도들이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주시고, 러브소나타를 열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러브소나타를 통해 일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관련 기사 4-5면>. / 홍하영, 김다애 기자
2024-05-18 제1492호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일본은 경제력도 좋고,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의 영혼이 메마르고, 큰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산다. 일본의 온전한 회복을 소망하는 러브소나타 효고가 울려 퍼진 이유다. 고베 문화홀을 찾았다. ‘GOD Bless you’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안내팀이 보였다. 스태프와 눈이 마주쳤는데 활짝 웃으며 맞아줬다. 그 덕분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김정희 권사(한강공동체)는 러브소나타 효고 안내팀으로 섬겼다.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서도 안내팀을 섬겼는데, 올해도 안내팀에 배정됐다. 그녀가 안내팀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안내팀은 러브소나타 참가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환영합니다. 참가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매번 안내팀을 섬기고 싶습니다. 올해도 안내팀에서 섬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참가자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다는 게 큰 감격입니다. 일본 땅을 짓누르고 있는 아픔과 어둠이 걷히고,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 현장도 찾았다. LOVE OBI, 잇삐 재팬, 지미선, 옹기장이의 찬양이 이어졌는데, 그 찬양을 들으면서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함께 박수하며 찬양하는 성도들도 보였다.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한국 봉사자들이 일본인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눈물로 기도하던 김재란 선교사(경배와찬양)가 고백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에 오기 전에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큰 아픔이 있는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꼭 안아주고 왔는데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그 자매처럼 큰 아픔을 가진 일본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한일연합기도회에도 참석했다. 기도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의 봉사자들이 함께 일본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다. 기도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황상윤 장로(송파B공동체)는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꿈을 꿨다. “사람들의 마음이 걱정과 우울 등으로 묶여있습니다.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을 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은 좋지 않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기를 싫어했던 요나처럼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러브소나타 본 집회 시작 전부터 참가자들이 북적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부픈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챔버, 신델라, CRUX, 범키, 개그우먼 조혜련,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의 특순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의 함성이 고베 문화홀을 가득 메웠다.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메시지를 선포했다. 참가자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소망하며 결신서를 작성했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형광봉을 들고 회복의 세레모니도 이어졌다. 장수정 성도(오사카온누리교회)는 러브소나타는 비신자는 물론이고, 일본 크리스천들에게도 위로와 회복 그 자체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일본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갈급함이 있었는데, 그 갈급함을 러브소나타가 채워줬다고 고백했다. “러브소나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시간이지만,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러브소나타를 통해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에덴으로’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가사처럼 일본이 에덴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이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홍하영, 김다애 기자 기도하는 사람들 청년이 일본 청년들을 위해 저는 청년의 때 누군가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만난 이 좋은 예수님을 일본인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일본 청년들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일본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 은혜로 깨어지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한일봉사자가 연합으로 기도하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청년들과 일본의 청년들이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승리의 자리로 초청해 주시는 부르심에 응답해서 각 나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 이태리 자매(여호수아공동체) 한국 성도가 일본 교회를 위해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 참석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자리에 섰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먼저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일본 땅과 일본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의 작은 섬김을 통해서 일본이 변화되고, 일본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사역에 함께 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 ‘효고’에도 참석했습니다. 러브소나타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일본을 회복시키기를 기도합니다. 일본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일본의 크리스천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러브소나타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결신자들이 가정과 일터, 사회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고,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 / 김윤희 성도(영종온누리교회) 교사가 일본 다음세대를 위해 일본의 복음화율이 1%가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다음세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미전도종족’이라 불리는 한국의 다음세대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사라지는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나고 자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은혜의 자아’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자아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은혜의 자아가 인생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길러주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줍니다.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일어설 용기를 줍니다. 일본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자아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만날 수많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을 책임지고, 일본을 회복시킬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본 교회에 다음세대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박혜연 교사(양재 차세대)
2024-05-18 제1492호
[러브소나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 “교회를 지켜주소서. 일본을 구원해 주소서. 세계에 평화를 허락하소서.” 이 기도는 평생을 전도자로 살았던 어느 남자의 유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이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1888년 7월 10일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아버지와 게이샤(술자리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이듬해 1월 죽었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된 가가와 도요히코는 아버지의 본부인(미치)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양모의 학대와 의붓형제들과 친구들의 놀림, 온갖 천대를 받으며 지냈다. 외로웠던 소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혼자 숲과 들판, 창고 등에 숨어 종일 책을 읽곤 했다. 그때의 경험이 외로움과 상실, 혐오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공감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중학생 시절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타야마학교에서 만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찰스 로건 선교사에게 예수의 생애를 배웠고, 마이어스 선교사 부부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자라면서 받은 사랑이라곤 부모 생전 짧게 받은 게 전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은 제2의 부모 같은 존재였다. 선교사들에게 신앙과 지식, 가정과 가족의 의미, 감정의 교감, 이웃사랑 등을 깊이 배운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학비를 대주던 숙부에게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여러 분야 책을 빠짐없이 읽었다. 그를 가르친 라이샤워 박사는 “메이지가쿠인대학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신학예과를 졸업한 가가와 도요히코가 1907년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고베신학교(후의 고베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고베에서 사역하면서 목회자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며 전도자로서 성장했다. 그때부터 대중집회와 거리 전도에 시간을 쏟으며 전도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학교 2학년 때 결핵에 걸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어느 날 깊은 산골에서 가네자와교회 나가오 목사를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는 가가와 도요히코를 나가오 목사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나가오 목사의 자비로운 성품을 보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고아, 학대, 천대받았던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대학에서의 영적, 지적, 사회적 각성 그리고 고베신학교 시절 전도자 경험과 사선(死線)을 넘나들게 만든 병고가 그를 모든 경험이 뛰어난 전도자이자 헌신자로 만들어 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1909년 병고로 인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베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를 얻어 방화범, 도박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 등과 함께 살았다. 굴뚝 청소하면서 번 푼돈을 빈민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눠주고, 자신의 옷도 벗어줬다. 불량배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를 주었다. 자신의 집에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다.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1914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학했다. 미국의 슬럼가와 노동 운동에서 시사를 얻어 1917년 귀국한 그는 고베 빈민가로 다시 돌아가 전도와 노동 운동을 펼친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농민 협동조합, 보통 선거권 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치며 일본의 사회 회복과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사선을 넘어>, <새벽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 <빈민 심리 연구>, <우애의 경제학>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10억 엔의 인세 소득을 사회운동을 위해 모두 기부하기도 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문학가, 학자, 저술가, 빈민운동가,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로서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일평생 자신이 전도자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는 1960년 별세할 때까지 빈민촌에서 헌신적으로 전도하며 이웃들을 돌봤다. 일본의 변화와 회복을 꿈꾸며 빈민촌에서 평생을 바쳤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은 기생들이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 그를 통해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분명 평생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었다. 가가와 기념관(Kagawa Memorial Center) 주소: 5 Chome-2 20 Azumadori, Chuo Ward, Kobe, Hyogo 651-0076 홈페이지: core100.net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고베개혁신학교 평소 일본에 대한 내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생각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역사적 사건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일부에서의 차별적 시선과 이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러브소나타 효고에 참석하게 되었다. 권사님들과 함께 러브소나타와 일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지속되며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채워주셨다. 그 사랑의 마음을 안고 효고에 왔다.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가 방문한 곳은 ‘고베개혁신학교’였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교정이 우리를 반겼다. 고베개혁신학교는 1947년 4월 일본 기독개혁파교회에 의해 개교했다. 요시다 타카시 교장 외 4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고, 강사 16명이 강의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사보다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11명이 전부였고 올해는 신입생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보니 신학교에도 학생이 많이 없다. 어느 권사님은 “크고 멋진 고베개혁신학교의 건물과 대비되는 작은 인원이지만, 그만큼 신학교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선물과 찬양 특순 등을 준비했다. 선물은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와 물품들로 꾸러미를 만들었다. 찬양은 ‘GOD Bless You’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받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감사가 밀려왔다. 특순 시간이 감동이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일본어로 부르고, ‘GOD Bless You’를 한국어로 부르는데,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이 같은 찬양을 화답가로 준비해 왔다. 화답가를 한국어로 준비해 와서 마지막 찬양은 서로를 축복하며 합창했다. 고베개혁신학교의 비전은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교사, 사상과 품행이 방정해서 모든 것에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부끄러울 것 없는 목자, 박해와 유혹, 빈곤에 굴하지 않고 겸허히 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학교의 비전처럼 많은 젊은이가 교사와 목자, 전도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고베개혁신학교를 통해서 일본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다음세대가 더 많이 양성되기를 소망한다. / 김지희 권사(서빙고 권사회장)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 나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비즈니스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일본은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러브소나타 참석을 위해 방문한 일본은 조금 특별했다. 사업적 시선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측면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싶었다. 함께 러브소나타에 참석한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과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방문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는 1950년 2월 16일 ‘히가시나다신아이기독교회’로 개척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세워져서 선교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청각장애인들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회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일본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감동이 있었다. 한 성도님이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할 텐데 열심히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일본은 종교가 많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나라다.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갈급하고 메말라 있다. 이 나라에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한 일본 교회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공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러브소나타가 일본 교회에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갈급함을 느끼는 한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 김화동 성도(영종온누리교회)
2024-05-18 제1492호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아주 특별한 경험과 고백 발달장애인을 위한 예배공동체 사랑부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이하 행복한 부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진새골 사랑의집에서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가 개강했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장애인 자녀를 둔 사랑부 가정이 성경적인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부와 가정이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사랑부 부모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사랑을 다시 누리고, 자녀와 부부를 위한 아름다운 가정으로 회복되는 거룩한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겪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자녀의 주돌봄자 80% 이상이 부모인데, 그에 따른 부모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이 매우 크다. 여기에 장애가 있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보호자 사후 자녀 돌봄에 대한 막막함도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이 사회적 고립마저 발생시키고 있다.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 소식을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가 그래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열린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한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눈물과 고백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정말 힘들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으로 회복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축복의 통로 최난숙 성도(서초C공동체)는 장애가 있는 자녀가 하나님 축복의 통로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장애를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했었다. 25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터라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장애를 자연스레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장애가 있는 아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행복한 부부학교가 이 사실을 재확인 시켜줬다. 특히 강미향 목사가 전한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는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회복을 도왔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와 자녀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억하게 하셨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했다. 장애인 자녀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장애인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더욱 힘써 양육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또한 행복한 부부학교를 섬기는 목사, 장로, 조장 부부, 교사들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자신도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겸손한 섬김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언약결혼식’이었다. 결혼 30년이 지나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해야겠다고 계획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언약결혼식을 하고,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무척 행복했다.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 박동희 성도(양재 사랑부)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배움이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다. 장애가 있는 아이는 스스로 의사결정하거나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모가 매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은데, 주변에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것과 내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통로라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동안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수없이 고백했지만, 결국 내 중심으로 자녀를 바라봤기에 괴롭고 힘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존귀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그래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배움이 특별하고 고마웠다. 늘 자녀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석하면서 부부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자녀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희 성도는 ‘언약결혼식’에서 아주 특별한 고백도 했다.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이뤄서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부부 십계명을 함께 적고, 부부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 되기로 기도했다. 자녀 양육보다 먼저 부부관계를 아름답게 형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에게 하나님 축복의 통로이자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김혜숙 성도(서빙고 꿈사랑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선물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더 인정해 주고, 세워주는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름다운 변화를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경험했다. 사실 김혜숙 성도는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남편과 함께 교육을 듣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부 모두에게 의지가 있어야 하고, 바쁜 남편을 교육에 참여시키는 게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 십계명을 만들고, 함께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롭게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부부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큰 변화였다, 김혜숙 성도 부부는 벽에 걸린 부부 십계명을 한 번씩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혜숙 성도의 자녀는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늦다.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네 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늘 도와줘야 한다. 그 때문에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는 아이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세상에도 장애 아동을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행복한 부부학교처럼,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쉼을 얻고, 부부가 함께 온전히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는 돌봄 프로그램이 더 많이 필요하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의 모든 중심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고, 결국 장애인 자녀를 돌보다가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숙 성도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아이에게는 온 신경을 쓰고, 예쁘게 말하면서 정작 남편에게는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인정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더욱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로 다짐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결국,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은 부부가 장애인 자녀에게서 조금 벗어나 서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회 자체가 회복이다. 아이에게만 모든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선물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의: 010-8567-1808
2024-07-06 제1499호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온누리교회 사회선교본부가 출범 1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이 지난 5월 25일(토) 온누리청소년문화센터 소극장에서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막 올랐다. 사회선교본부 리더십 및 성도 231명이 참석했다.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은 사회선교 역사 소개,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 결과 발표, 이재훈 위임목사 특강, 임희국 교수 특강, 패널 토의,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가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역사’를 주제로 지난 10년 동안 걸어온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발자취를 나눴다.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11개 팀이 참가했다.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SNS청년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싶은 마음에 공모전에 참가했다”면서 “앞으로도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특강했다. 이 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비전은 국내외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선교’를 주제로 강의했다. 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시대와 상황의 요청에 응하는 사회선교는 두 바퀴의 수레처럼 항상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선교의 실천 방안을 구체화하고, 사례를 나누는 패널 토의도 이어졌다. 임희국 교수, 정운오 장로, 박순길 장로, 박승호 선교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는 서빙고온누리교회 S브릿지공동체, 마포공동체,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인천온누리교회 북누리공동체가 발표했다. 구경용 성도(도곡공동체)는 “다락방 지체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을 찾아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면서 “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장로(사회선교본부 다문화팀)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가 10년 동안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준비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뜻깊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회선교가 더욱 확장되고, 더 많은 성도가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 당선작 문턱 낮추고, ‘사회선교 대학청년부’ 세우기! 온누리교회 청년들은 사회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청년 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사회선교를 들어본 적 있다’가 70%, ‘들어본 적 없다’가 30%였는데, 70% 응답도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과 이기훈 목사님의 리더십 특강 때 처음 들어본 청년들이었다. 둘째, 청년들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어한다. 설문에 응답한 청년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87명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선교에 접근하는 방법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사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거나 신청 과정에 문턱이 높다고 답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춰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SNS청년부 아웃리치가 떠올랐다. SNS청년부 국내외 아웃리치 신청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사회선교 접근성을 높이는 데 차용하려 한다. 첫째, 예배 시간에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사회선교 리더십들과 지속적인 교제 시간을 마련한다. 더불어 사회선교를 경험한 지체들의 간증을 나눈다. 사회선교를 지속적으로 노출해서 더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둘째, 사회선교 교육과정을 개설한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는 말씀을 기반으로 한 여러 교육과정이 있다. 사회선교도 바이블아카데미, 기독 OTT 퐁당 등을 활용해서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면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셋째, SNS를 활용한 소통 채널을 확대한다. 사회선교에 대한 정보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사역별 최신 현황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캘린더를 활용해서 사역 신청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활성화하고, 카카오톡 등 SNS를 개설해 신속하고 활발한 소통을 돕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학청년부 사회선교팀’을 세워서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섬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 영역에서 은사를 쓰임 받도록 달란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둘째, 청년들의 마음이 가는 사역을 제안해서 운영한다. 셋째, 유튜브, 인스타 등을 미디어에 좀 더 친숙한 청년들에게 운영을 맡겨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마음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흘려보내는 청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팀브링)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도곡공동체의 이웃 향한 사랑 그리고 섬김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는 희락다락방, 긍휼다락방, 화평다락방, 소망다락방, 은혜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곡공동체 모든 다락방이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사회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희락다락방은 하나공동체, 정선 동강교회, 우리들학교를 섬기고 있다.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하나공동체 예배를 섬기고 있다. 북한에 쌀을 보내고, 탈북민 청년들이 지내는 기숙사에 반찬을 전달하는 봉사도 했다. 2018년 이후 쌀을 보내는 사역이 정부의 제재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농촌교회를 새롭게 섬기게 되었다. 코로나19 기간에는 정선 동강교회를 도왔다. 봄에는 밭을 경작하고, 여름에는 블루베리를 소출하는 일을 도왔다. 희락다락방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섬기기도 했다. 희락다락방에서는 탈북민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들학교 봉사도 하고 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 탈북 학생들이 교회와 사회의 일꾼 되기를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 긍휼다락방은 굿윌스토어에서 장애인들의 자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굿윌스토어를 찾아가 물건을 분류 및 선별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돕는다. 1년에 두 번은 장애인 100명에게 간식과 선물을 준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화평다락방은 서울농아교회를 섬긴다. 농아교회는 국내 및 해외 선교사 파송 사역을 하고, 유튜브로 수어 설교 방송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서울농아교회를 방문해서 수어로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한다.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소망다락방은 양평 덕수교회와 송파구 거여동 임마누엘집을 섬긴다. 양평 덕수교회로 아웃리치를 가서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교실’을 운영했다. 거여동 임마누엘집에는 쌀, 과일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직업 재활 작업을 지원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 교제도 했다. 은혜다락방은 재한몽골학교를 섬기고 있다. 재한몽골학교는 학생 16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이주민 학생 350명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나섬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을 도와서 몽골뿐만 아니라 인도와 필리핀 등지에 온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급식 봉사와 설거지, 청소 등을 한다. 앞으로도 도곡공동체가 사회선교에 앞장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기대한다. / 구경용 성도(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2024-06-01 제1494호
[특집]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을 찾아라!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우정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독거노인들에게 따듯한 정(情)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다. 그들은 때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집수리도 해준다. 그들의 얼마나 정성스럽게 섬겼는지 꽁꽁 얼어 있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렸다. 지금은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뜨거운 우정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박온유, 이지영, 이희정, 김차영, 김현수, 김태현, 진병수, 공혜진, 김호영, 황명진, 정다영, 방유석, 노창우, 강원조.’ 독거노인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이름이다. 청년과 노인이라는 단어 옆에 ‘우정’이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굉장히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은 세대 간 갈등이 세계 1위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영국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갈등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28개국 시민 2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12개 갈등 항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7개 항목에서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중에서 빈부격차와 성별, 세대 갈등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28개국 평균 40%대인데, 우리나라는 80%에 달할 정도였다. 비율이 2배 가까이 높았다. 2018년 영국 BBC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전 세계 27개국 시민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개 갈등 항목에서 우리나라가 남녀갈등 1위, 세대갈등 2위, 빈부갈등 4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세대갈등이 세계 최고라고 공인받을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인데, 청년과 노인의 우정이라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세대갈등을 넘어서게 만들었을까? 청년과 노인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예수님 사랑으로 연결되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결성된 건 4년 전이다. 전에는 브릿지33+공동체와 산마루교회 성도들(노숙인 포함)이 함께 서울역 청소를 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사역이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멈춰 섰다. 아쉬운 마음에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다른 사역을 찾고 있었는데, 서빙고온누리교회 이웃사랑팀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로 지내며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는 어르신들의 사연이 브릿지33+공동체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브릿지33+공동체는 양재온누리교회 소속 청장년 공동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기꺼이 매월 서빙고동을 찾기로 했다. 마음이 맞는 청년 6명이 모여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의 태동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지역상품권을 들고 서빙고동, 동빙고동, 보광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분기별로는 생필품과 반찬 등이 담긴 ‘사랑의 상자’를 들고 찾아간다. 추수감사절 사르밧프로젝트에서 쌀 나눔을 할 때도 있다.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사역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만들어진 이후 4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동안 팀원이 늘어서 현재 14명이 동역하고 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만나는 어르신 대부분 홀로 지내신다. 무엇보다 정(情)이 고픈 분들인데, 웬일인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찾아갔을 때도 몇 번 오다 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다. 청년들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어드리고,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어르신들의 생일잔치를 열어드리기도 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4년 동안 꾸준히 이어지는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일까? 어르신들이 하나둘 마음의 문을 여셨다. 청년들이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품권만 주고 갈 거면 오지 말라”고 문전박대 하던 어르신들이 청년들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안부를 묻고, 준비한 선물을 나누고 일어서는 청년들에게 “나랑 같이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할 정도다. 귀가 잘 안 들려서 대화가 쉽지 않지만, 청년들의 전화만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청년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손자들이 집에 오는 것처럼 깔끔하게 단장하고 맞아주셨다. 한 어르신은 청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90세, 몸이 많이 아픈 어르신을 위해 청년들이 찾아갈 때마다 따듯한 국수나 부드러운 죽 등을 챙겨갔다. 그 어르신의 식사를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다. 청년들의 사랑이 그 어르신의 마음 밭을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복음의 씨앗이 금세 심겼다. 그 어르신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쁘게 고백하면서 청년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사랑과 섬김 덕분에 어르신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 청년들은 복음 전하는 기쁨과 조금씩 마음을 열고, 변화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다. 박온유 자매(브릿지33+ 이웃사랑팀장)가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뜨거운 우정을 쌓은 비결을 소개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면 나이를 떠나 정(情)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애틋하고, 그분들께 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어르신들도 저희의 마음을 잘 아시고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십니다, 손을 한 번 더 잡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합니다. 더 많은 어르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드디어 꿈꾸던 일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어르신들 댁에 갈 때마다 열악한 환경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 않는 현관문,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 타일이 깨지고 곰팡이 핀 화장실, 다 벗겨진 벽지, 얼음장 같은 바닥 등 어르신들의 주거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자매들이 어르신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방유석, 김태현, 강원조, 황명진 형제를 보내주셨다.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인데, 안전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따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팀원 대부분 자매들이라 가구나 장판을 교체하고, 수도관과 전기 배선을 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귀한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 댁을 드디어 수리할 수 있었다. 고장 나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화장실 환풍기를 고치고, 전등 스위치 배선 정리와 전등 교체를 해드렸다. 온수가 안 나와서 제대로 씻을 수 없던 어르신을 위해서 보일러를 수리해드렸다. 안방 전등 전기 점검, 현관문 닫힘 조절기 설치 및 페인트칠, 주방 양념통 선반 설치, 청소 및 물건 정리, 모기장 교체, 커튼 달기 등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대신해서 심부름도 하고 있다.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청년들이 자비량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어르신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뜨거운 우정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아름답고 귀한 헌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더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과 동역자가 필요하다. 문의: 010-2024-4220 기도제목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복음이 전해지도록, 어르신들이 영육이 강건하도록 2. 보일러 비용이 비싸서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사용하는 어르신들에게 난방비가 지원되도록 3. 문두현 어르신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눈과 치아 진료를 제대로 못 받는데 치료 받도록 4.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건강과 물질의 어려움 없이 어르신들을 계속 섬길 수 있도록
2024-05-04 제1490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더 사랑하고픈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하여” 만나고 싶었습니다 “더 사랑하고픈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하여”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 펴낸 김숙경 소장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면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으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부부들이 너무 많다. 힘들어하는 이 세상 모든 부부를 위해서 ‘김숙경 사랑연구소’ 김숙경 소장이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펴냈다. 부부관계와 결혼 생활에 대한 명쾌한 솔루션이 담겨있다. 김숙경 소장은 15년 이상 ‘가족치료사’로 사역하고 있고, <온누리신문>에 ‘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다음은 김숙경 소장과의 일문일답.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가 화재입니다. 소개해 주십시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사랑이 메말라 버리고, 시들어 버린 부부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힘들어하는 부부들이 다시 사랑을 꽃피우고, 관계 회복과 갈등을 해결하도록 돕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부부 만족도 검사를 통해 부부의 현재를 알아 어느 영역에 성장이 필요한지를 보게 될 것이고, 부부 애착 검사를 통해 서로의 애착유형을 알고 안정된 관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부부에게 ”즐겁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서적 즐거움, 성적 즐거움, 영적 즐거움 등을 부부가 함께 누리면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신간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열심히 준비해서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준비는 부족합니다. 또한 크리스천 부부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책이 많지 않습니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 친밀한 부부관계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위기 상황이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 모든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고, 친밀한 부부관계를 누리도록 돕기 위해서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많은 부부가 사랑을 주고받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제가 부부 생활 혹은 결혼 생활을 주제로 강의하고, 부부상담을 하면서 정말 많은 부부가 친밀해지는 방법과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어떻게 친밀해질 수 있는지,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부부상담을 하다 보면 비슷한 고민이 있는 부부들을 정말 많이 만납니다. 부부들이 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고 싶은 게 제 마음이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교회에도 제자 훈련이나 신앙생활을 돕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부부 관계 회복을 돕는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부부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게 최우선순위라는 것을 꼭 알려줘야 합니다.” 독자들이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를 읽고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에서는 부부들이 결혼 생활에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갈등을 세분화하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관계 회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책 내용을 삶에 적용하면 부부의 친밀감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부부들이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지식을 얻도록 돕는 쳅터도 있습니다. 부부의 성생활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활용해서 부부 소그룹 모임도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또래, 유사한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부들이 이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은 독자들이 있습니까? “제 소망은 이 세상 모든 부부가 이 책을 필독서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배우자와 더욱 친밀하게 지내고픈 분들, 건강한 부부관계를 하고픈 분들, 특히 사랑이 식었다고 여기는 부부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부부가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덮어두는 게 아니라 부부 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읽으면서 날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부부가 어떻게 친밀함을 유지하고, 성장해야 하는지를 매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넌크리스천이 읽어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결혼을 준비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랑은 성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성장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가 자녀들에게는 많은 투자를 하는데, 부부관계에는 투자를 하거나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관계보다 중요한 게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건강하고 친밀해야 자녀들에게 그 정서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부부의 사랑과 소통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따듯한 언어로 쓴 책이기에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부부들이 친밀감을 반드시 회복할 것입니다. 날마다 건강한 부부, 친밀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추천의 글 ‘사랑’, 이 단어의 익숙함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사랑은 참 쉽다’는 태도를 갖게 했다. 사랑을 쉽게만 생각한 우리의 교만과 사랑에 대한 무지가 개인의 삶과 부부의 관계, 가정과 사회, 온 나라를 병들게 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을 얼마나 몰랐는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문제를 지적하고 깨닫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 이미 오랫동안 사랑을 해왔고, 사랑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 새로운 사랑을 찾고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 이지웅 목사(더바이블미니스트리 대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아는 것만큼이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자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혼 생활은 더욱 그렇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칫 전문가의 도움을 얻고자 비성경적 가치관을 가진 분에게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부르심과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될 수도 있다. 김숙경 소장은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랑과 결혼, 부부 생활에 대한 대안을 알려준다. 성경적이면서도 사역 현장에서 쌓인 풍부한 처방 가이드는 반드시 부부로 부르신 이유를 깨닫게 하고, 변화되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부부들은 결혼 생활을 성숙하고 성화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담임) 이 책에는 오랜 시간 부부들의 속마음을 다독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가정을 건강하고 바르게 세워 가도록 카운슬링해 오신 김숙경 소장의 전문성이 담겨있다. 현장에서 만나 온 부부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함께 담겨있다. 이 책을 통해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서로의 속마음을 몰라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부부,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로 상처 주고 괴로워하는 부부,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휘둘리는 부부들에게 꼭 맞는 진단과 처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해서 아파하는 당신이, 사랑해서 더욱 행복한 당신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 주영훈 작곡가(방송인)
2024-05-04 제14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