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캠퍼스] 기획_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2. 노동의 품위(땀의 가치)

기획_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 2. 노동의 품위(땀의 가치)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귀하다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직업의 귀천 따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품위’   “특별한 기술도 지식도 필요 없는데 국회의원보다 연봉이 많다.” 얼마 전 한 시의원이 자신의 월급보다 환경미화원의 월급이 더 많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인식이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짱깨, 철가방, 때밀이, 잡상인, 딴따라 등 특정 직업과 직업인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몹시 곤란하다. 미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요, 꼭 갖춰야할 진정한 품위다.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그 어떤 이유로도 비하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마저도 직업과 사회적 수준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여기, 자칭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있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보고 자칭 나쁜 부모가 말했다.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 되는 거야.” 옆에 있던 자칭 좋은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도 잘 살도록 도와줘야 해.” 누가 나쁜 부모이고, 누가 좋은 부모일까? 둘 다 잘못됐다. 자칭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 모두 환경미화원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고,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자녀가 어떻게 성장할까? 모르긴 몰라도 부모 힘 빠지면 무시하고 괄시하는 정도는 거뜬히 하지 않을까? 보고 배운 게 그래서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   수많은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재벌, 군 복무 잘하고 오라고 보낸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하인 부리듯 한 직속상관 부부, 하청기업이나 직급 상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상관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갑질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일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극을 준다는 명분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커서 저렇게 살고 싶니?”,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런 사람 된다?”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해댄다. 그런데 그 부모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거저 갖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경북 구미시에서 환경관리원 여섯 명을 모집하는데 185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30.8대 1이나 됐다. 2017년 21.7대 1, 2018년 17.2대 1을 훌쩍 넘는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지원자들의 학력이다. 대졸 이상이 52%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울산 동구 환경미화원을 세 명 채용하는데 113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무려 37.6대 1이었다. 2017년 경쟁률과 비교했을 때 약 두 배 가량 높았다. 지원자의 학력도 전문대졸 이상이 58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석사학위 소지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이 아니라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환경미화원, 이삿짐센터 일꾼, 정화조 청소하는 일, 고층빌딩 유리 닦는 일 등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 일이 볼품없다거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결코 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워서 안하는 일을 대신 맡아 해주는 감사한 사람들이다. 모두가 ‘사’자 들어가는 직업만 선택한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도 육체노동자였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인들도 소위 말하는 육체노동자였다. 엘리야에 이어 놀라운 이적을 행한 선지자 엘리사는 농부였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12쌍의 황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왕상 19:19). 아모스 선지자도 목자이자 농부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사도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이름으로는 사울, 로마식 이름으로는 바울이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행 22:25~28)이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고, 베냐민 지파인 순수 히브리인이며,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에 정통한 자라고 강조했다(롬 11:1, 고후 11:22, 갈 1:14, 빌 3:5~6). 바울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던 가말리엘 학파의 율법교사(행 22:3)이자 로마 시민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교를 공부한 신분과 지식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의 직업이 천막 만드는 것이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 유대인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허용 가능한 직업이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천한 직업이었다. “죽은 동물 가죽 만지는 것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에 열심인 자들에게 바울의 직업은 혐오와 천대의 대상이었다. 로마 시민이자 지식인인 바울이 노동을 경멸하는 로마 문화에서 스스로 육체노동자가 되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는 비천하고 혐오스런 직업을 생업으로 택한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를 위해 바울은 스스로 낮아졌다. 바울을 두고 누가 비천한 육체노동자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또한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직업이 목수셨다. 육체노동자였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역할(소명)’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직접 닦았다고 한다. 비서관이 그것을 만류하자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닦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네.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회에서조차 자신이나 배우자, 자녀의 학벌과 직업,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우월감을 갖거나 혹은 주눅이 드는 경우가 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홍범식 장로(두란노해외선교회)가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제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택시기사였던 내가 교회에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잘 해줘서 감사하다고요. 나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그분들 사이에서 자격지심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정체성은 직업의 귀천에 있지 않아요. 그 일을 주님께 하듯 열심과 성심으로 하느냐에 달려있어요.” 흘리는 땀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게 아니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직업에 따라 다른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오히려 자신이 천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사람에게서 진정한 품격이 묻어 나온다. 물질의 많고 적음, 사회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애 동안 해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서 보람을 얻는 것이 가장 선하고 분수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 5:18). “무엇이든지 네 손으로 할 만한 일을 찾으면 온 힘을 다해 하여라. 네가 가게 될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전 9:10).  

 2019-06-09      제1249호

[사역] 노인의 품격은 나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 3. 노인의 품격   다음세대에 풍부한 경험과 지혜 전수하는 일이 품격이자 사명 웰빙(Well-being), 웰에이징(Well-aging), 웰다잉(Well-dying)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다른 집 노인이라도 모셔오라”(덴마크 속담). “한 동네 노인이 죽는 것은 그 동네 도서관 하나가 불 탄 것과 같다”(영국 속담).  “노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한국 속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가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와 그 유익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노인의 연륜과 경험은 곧 사회적 자산이자 다음세대를 위한 지침서다. 특히 이 시대 한국 노인들은 6.25 한국전쟁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현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뤄낸 주축들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 노인들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틀딱충(틀니+딱딱+벌레의 합성어), 지공선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만65세 이상 노인들) 등의 말로 노인들을 비하하고 무시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인구통계학적 요인, 산업구조의 변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작용한 결과지만 표면적 이유는 일부 노인들의 무질서하고 품위 없는 행동 때문이다.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인 것 마냥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기본적인 공중도덕조차 지키지 않는 행동이 젊은이들에게 거부감이 생기게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인이 품위를 지키고, 공경 받는 존재로 회복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프랑스 작가 무사 아사리드는 그의 책 <사막별 여행자>에서 “노인은 성스러운 존재다. 후세에 전할 지식을 헤아릴 수 없이 지녔다”고 했다. 바로 그 성스러울 정도로 품위 있고, 지혜와 지식의 보고(寶庫)인 노인들이 어쩌다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부 노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노인들을 폄하하고,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요즘 젊은 것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때는 더 심했어”, “어디서 감히!”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 제 아무리 잘난 노인이라도 대화 자체를 할 수 없다.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들이 계속 불통을 이어가면 서로 귀를 닫고, 갈등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음의 사례들은 왜 요즘 젊은 세대들이 노인들을 혐오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P자매(32세, 청년부)는 노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다. “지하철을 탔는데 노약자석이 비어 있기에 별 생각 없이 앉았어요.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젊은 X이 왜 노약자석에 앉았어? 정신 빠진 X같으니라고”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어르신 오시는 것을 보고 바로 일어났는데도 계속 쌍욕을 하셨어요. 보다 못한 어떤 아주머니께서 “할아버지, 아가씨가 바로 일어났는데도 왜 욕을 하세요?”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더라고요. 그날 이후로는 노약자석에 절대 앉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노인들만 봐도 겁이 나고 싫어요.” K형제(30세)도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도 그만한 일이 있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에서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꼭 새치기 하는 노인들이 있어요. 뭐라고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욕하죠. 왜 저럴까? 질서 좀 지키지, 꼴불견이다 뭐 이렇게요.” J성도(41세, S브릿지공동체) 또한 노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흔히 하시는 말씀들이 그렇게 듣기 싫었어요. ‘나 때는 말이야’, ‘내가 왕년에 말이야’ 뭐 이런 말들이요. 그래서 어쩌란 건지 참. 지금도 ‘우리 땐 말이야’라는 말을 하세요. 노인들은 결코 안 변하더라고요.”  이처럼 요즘 젊은 세대들이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하다 못해 차갑다. 일부 노인들의 품위 없는 행동이 노인에 대한 거부감을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통계에도 잘 나타난다. 국가인권위 노인인권보고서(2018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19~39세) 80.9%가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노인 인권이 침해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 청년층 88.5%가 ‘노인들과 대화가 안 되고, 청년층 81.9%가 ‘노인과 청년 간 갈등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공경의 대상이었던 노인들이 꼰대가 됐을까?   노인이라고 무조건 존중하던 경로(敬老)시대는 분명히 지나갔다. 살아 온 세대,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가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화들이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들의 갈등을 불러왔고, 그 파급효과로 노인에 대한 혐오와 경시가 생겨났다. 노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시대에 맞게 변화할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노인이 존경받고 우대받았다. 농경사회, 대가족 제도, 유교 사상 등에 기반한 사회에서는 노인이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우대했다. 왜냐하면 꼭 필요한 정보를 노인들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자, 지혜의 상징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마을 어르신들이 풀어놓는 오랜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들을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명언이자,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였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노인을 존중하고, 공경하고 따랐다. 그 시대에는 지혜와 덕망 있는 노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품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은 구태여 나이 든 사람에게 정보를 얻을 필요가 없어졌다. 농경사회가 아닐뿐더러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매체를 이용해서 원하는 정보를 너무나 손쉽게 그것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의 지식과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시대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더 이상 “노인들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모세와 시므온이 보여준  품위 있는 노년의 삶   성경 인물 중에는 늙어서도 기품 있고 존경받은 노인들이 참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이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민족을 구원해내는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해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가장 존귀한 지도자로 평가할 정도로 그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비록 늙은 나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120살까지 활약했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전혀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을 정도로 모세는 기품 있는 노인이었다(신 34:7).   성경 인물 중에 품위 있는 노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또 있다. 바로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예언자 ‘시므온’이다. 그는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시므온은 매일같이 성전으로 출근할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육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을 추구했다. 무엇보다 시므온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지상의 삶이 아니라 천상의 삶을 추구했다. 이렇게 잘 준비된 영적 노인 시므온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내려주셨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감격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영광을 주셨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시므온은 이렇게 외쳤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앙드레 지드(소설가)는 “늙기는 쉬워도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잘 늙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노인들이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다음세대에 풍부한 경험과 지혜 전수하는 일이 곧 노인의 품격이자 사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딱 세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웰빙(Well-being), 웰에이징(Well-aging), 웰다잉(Well-dying)이다. 잘 살고(부자를 뜻하는 게 아니다), 잘 늙어가고,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노인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다. 모세와 시므온처럼 지혜롭고 영적인 노인, 아름답게 노년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노인이야말로 잘 살고, 잘 늙고, 죽음을 잘 준비하는 노인이 아닐까? 그런 노인들을 보고 이 시대 사람들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저 분처럼 늙고 싶다’고 생각하고, 존경하고, 추억할 것이다. 제 자랑과 잔소리보다는 인자한 미소를 건넬 줄 아는 노인, 호통보다는 “잘 했다”, “힘들지?”, “널 위해 기도할게”라며 칭찬과 격려의 말을 건네는 노인, 넓은 마음으로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노인, 인색하지 않고 베풀 줄 아는 노인이야말로 진정 품위 있는 노인이다.  젊은 세대들도 노력해야 한다. 일부 노인들의 무질서함을 보고 마치 모든 노인들이 그렇다고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젊은 세대들은 노년기가 곧 내게도 다가올 미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들을 폄하하고, 경시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품위 없는 모습이 없다. 자기가 한만큼 꼭 돌아오게 되어 있다.    <발문> 품격 있는 노인은 지혜롭고 영적인 노인  노년의 사명 잘 감당하는 노인 잘 살고, 잘 늙고,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 ‘저 분처럼 늙고 싶다’고 존경받는 노인 잔소리보다 인자한 미소 건넬 줄 아는 노인,  호통보다 칭찬과 격려의 말을 건네는 노인,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고 베풀 줄 아는 노인   <전문가 기고>   제2의 인생의 의미 영원으로 나아가는 최고이자 최상의 은총      성경에 나타난 노인은 그 사회에서 존대를 받았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 20:29). 성경은 노인의 백발에 대해 영광과 아름다움이라고 했고, 선한 생활의 보상이라고 했다. 또한 노인은 지혜자요, 경험의 소유자로서 성문에 앉아 상담하는 등 상류사회에서 그 자손들에게 축복하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는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오랜 미풍으로 이어오던 경로사상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들은 그 권위와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고, 빠른 변화와 새로운 정보,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젊은이들의 발랄함이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노인들은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까지 밀려나고 있다. 정책적으로 우대권을 주고 좌석을 만들어 주지만, 현실에서 노인들은 일반인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TV에서 노인을 바보스럽고 무식한 고집쟁이로 묘사하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대 노인들이 사회 혹은 가정에서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로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매우 우려된다.  사회가 여러 면에서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면, 노인들 스스로도 부정적인 자아상(自我像)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인들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런 일들이 사회로 하여금 노인들을 더욱 멸시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우리 사회는 매우 어둡고 불행한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노인들을 깊이 이해하고, 존대하는 분위기를 새롭게 조성해야 한다. 노인들은 스스로 각자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 노년을 자연현상으로 생각하고 미리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고, 멋있는 마지막 삶으로 가꾸어 가야 한다. 그 결실이 보일 때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온 사회의 축복이 될 것이다.    제2의 인생은 ‘새로운 출발’   제2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일까?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인생을 하나의 자연현상과 같은 관점에서 연구하기 때문에 노년기의 존귀한 가치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노년을 단지 육체적 노쇠 현상으로 본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노인 스스로도 제2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긴 매한가지다. 노인들이 사회에서 받는 대우가 아니라 해도, 모든 사람은 일해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는 쓸모없는 존재로 의식하거나 사회에서 멸시받는 그대로가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점차 우둔하고, 불편하며, 가난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노인들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자인해 버리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통 늙으면 편안해야 하고, 그런 자격이 이미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왜 이래야 하느냐고 크게 좌절하고 불평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습적 자아상과 부정적으로 보는 관습을 벗고, 보다 깊은 의미의 인생관을 재정립해야 할 과제가 노인 각자에게 놓여 있다. 즉, 제2의 인생으로 새로이 출발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자기를 객관화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재조명해보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제2의 인생의 의미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폴 튜니어는 젊은이들이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젊게 사십니까?”라는 물음에 “어떤 전환점이 올 때마다 나는 그것을 내 생애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여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생애에서 고통이나 혼란이 올 때마다 새로운 출발점으로 만들어가는 용기와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면 인생의 멋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인생은 여생(餘生, 남은 생)이 아니라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요 인생의 절정이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근본적으로 성경에 입각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으로 변화, 발전함으로 성장의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된다(마 5:48). 노년은 자녀와 배우자를 위해 꿈을 접고, 나를 잊고 살던 자리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주체적이고 이상적으로 이룰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다.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생의 맛과 멋을 깨닫고 느끼면서 새로운 성취감을 즐기는 시기가 바로 제2의 인생, 곧 노년의 때이다. 그래서 튜니어는 노년기를 ‘인생의 개화기(開花期)’라고 불렀다. 제2의 인생은 더 좁은 곳으로 숨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세계로 진출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제2의 인생, 숭고한 개화(開花)기   일반적으로 노년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내성적이 되며 우울증 경향이 증가하고 소외감과 고독감에 시달린다. 둘째, 조심성이 증가하고 정확성에 신경을 쓴다. 셋째, 의존성 증가하고, 가족관계에서 감정의 유대관계를 중요시한다. 넷째, 생각과 행동, 감정 자제가 불가능해진다. 다섯째, 경직성이 증가하고 융통성이 약해진다. 여섯째, 친근한 사물에 대한 애착이 더해진다. 일곱째, 노욕(老慾)이 강해진다.    제2의 인생에 있어서 개방성이 중요하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늙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 어떤 시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인격적인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보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력을 다해 사물과 인생을 보고, 보답 없는 사랑을 발휘하고, 사심 없이 조용히 다가가 삶의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람이 되어가는 성숙과 은총의 시기가 바로 제2의 인생이다.  잘 적응하는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제2의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나누며 살고자 노력한다. 파리대학의 짱도레 박사는 “육체적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늙음이란 권위의 실추이지만, 정신을 위해 살아온 사람에게 늙음은 숭고한 개화(開花)”라고 했다.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남을 돌보고 사랑하고, 모든 이의 어버이로 살아간다면 노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편견도 자연히 바뀌게 될 것이다.  제2의 인생의 의미는 섬기는 삶에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바로 사람들을 섬기고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이다(마 20:28).  제2의 인생의 의미는 영원한 세계로의 눈을 뜨는 것에 있다. 우리는 육체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더욱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채워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늙음을 통해 영원을 지향하게 되고, 육체의 노화로 이 세상 모든 것에 소망이 없어지면서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가장 값진 초자연적 생명 세계를 찾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가는 데 그 최상의 의미가 있다. 예측 불가능한 죽음에 대면하기 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찬송과 기도와 감사로 흰옷을 준비하면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최고이자 최상의 은총이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새찬송 455장).  / 주선애 권사(장신대 명예교수)      <발문>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남을 돌보고 사랑하고,  모든 이들의 어버이로 살아간다면  노인에 대한 편견이 자연히 바뀔 것이다.”   

 2019-06-16      제1250호

[사역]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귀하다

기획_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 2. 노동의 품위(땀의 가치)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직업의 귀천 따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품위’     “특별한 기술도 지식도 필요 없는데 시의원보다 월급이 많다.” 얼마 전 한 시의원이 자신의 월급보다 환경미화원의 월급이 더 많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인식이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짱깨, 철가방, 때밀이, 잡상인, 딴따라 등 특정 직업과 직업인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몹시 곤란하다. 미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요, 꼭 갖춰야할 진정한 품위다.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그 어떤 이유로도 비하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마저도 직업과 사회적 수준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여기, 자칭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있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보고 자칭 나쁜 부모가 말했다.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 되는 거야.” 옆에 있던 자칭 좋은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도 잘 살도록 도와줘야 해.”  누가 나쁜 부모이고, 누가 좋은 부모일까? 둘 다 잘못됐다. 자칭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 모두 환경미화원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고,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자녀가 어떻게 성장할까? 모르긴 몰라도 부모 힘 빠지면 무시하고 괄시하는 정도는 거뜬히 하지 않을까? 보고 배운 게 그래서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   수많은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재벌, 군 복무 잘하고 오라고 보낸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하인 부리듯 한 직속상관 부부, 하청기업이나 직급 상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상관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갑질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일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극을 준다는 명분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커서 저렇게 살고 싶니?”,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런 사람 된다?”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해댄다. 그런데 그 부모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거저 갖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경북 구미시에서 환경관리원 여섯 명을 모집하는데 185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30.8대 1이나 됐다. 2017년 21.7대 1, 2018년 17.2대 1을 훌쩍 넘는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지원자들의 학력이다. 대졸 이상이 52%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울산 동구 환경미화원을 세 명 채용하는데 113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무려 37.6대 1이었다. 2017년 경쟁률과 비교했을 때 약 두 배 가량 높았다. 지원자의 학력도 전문대졸 이상이 58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석사학위 소지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이 아니라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환경미화원, 이삿짐센터 일꾼, 정화조 청소하는 일, 고층빌딩 유리 닦는 일 등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 일이 볼품없다거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결코 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워서 안하는 일을 대신 맡아 해주는 감사한 사람들이다. 모두가 ‘사’자 들어가는 직업만 선택한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도 육체노동자였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인들도 소위 말하는 육체노동자였다. 엘리야에 이어 놀라운 이적을 행한 선지자 엘리사는 농부였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12쌍의 황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왕상 19:19).  아모스 선지자도 목자이자 농부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사도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이름으로는 사울, 로마식 이름으로는 바울이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행 22:25~28)이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고, 베냐민 지파인 순수 히브리인이며,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에 정통한 자라고 강조했다(롬 11:1, 고후 11:22, 갈 1:14, 빌 3:5~6). 바울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던 가말리엘 학파의 율법교사(행 22:3)이자 로마 시민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교를 공부한 신분과 지식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의 직업이 천막 만드는 것이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 유대인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허용 가능한 직업이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천한 직업이었다. “죽은 동물 가죽 만지는 것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에 열심인 자들에게 바울의 직업은 혐오와 천대의 대상이었다.  로마 시민이자 지식인인 바울이 노동을 경멸하는 로마 문화에서 스스로 육체노동자가 되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는 비천하고 혐오스런 직업을 생업으로 택한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를 위해 바울은 스스로 낮아졌다. 바울을 두고 누가 비천한 육체노동자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또한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직업이 목수셨다. 육체노동자였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역할(소명)’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직접 닦았다고 한다. 비서관이 그것을 만류하자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닦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네.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회에서조차 자신이나 배우자, 자녀의 학벌과 직업,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우월감을 갖거나 혹은 주눅이 드는 경우가 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홍범식 장로(두란노해외선교회)가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제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택시기사였던 내가 교회에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잘 해줘서 감사하다고요. 나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그분들 사이에서 자격지심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정체성은 직업의 귀천에 있지 않아요. 그 일을 주님께 하듯 열심과 성심으로 하느냐에 달려있어요.”  흘리는 땀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게 아니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직업에 따라 다른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오히려 자신이 천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사람에게서 진정한 품격이 묻어 나온다. 물질의 많고 적음, 사회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애 동안 해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서 보람을 얻는 것이 가장 선하고 분수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 5:18).  “무엇이든지 네 손으로 할 만한 일을 찾으면 온 힘을 다해 하여라. 네가 가게 될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전 9:10).      <전문가 기고>   일과 땀과의 관계 그리고 가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사용하던 말 중에 ‘불한당(不汗黨)’이 있었다. 불량배들이나 폭력배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한자를 잘 몰라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의 무리’라는 뜻이었다. 이 말인즉,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정상적인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 일해야 한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일과 땀과의 관계의 정립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땀을 흘리게 되고, 땀을 흘리는 사람은 곧 일하는 사람이다.    땀 흘리면 부를 이룰 수 있지만,  쉽게 돈 벌려고 하면 이루지 못한다   땀을 흘리는 일은 1차적으로 육체노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사회에서도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신체활동을 많이 하는 일을 의미한다. 잠언에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찌들게 가난하다”(잠 28:19)는 말씀이 있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면 부(富)를 이룰 수 있지만, 땀을 흘리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부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육체노동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디지털화로 인해 실제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직업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외에 정신적인 노동을 하거나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땀 흘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고가 필요한 모든 일들은 땀을 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을 때(창 1:28)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의미 있게 해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일할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는 일하면서 육체적인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은 고통과 수고의 땀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의 땀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사람이 하는 일에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일평생 수고해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다”(창 3:17).  이때부터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저주로부터 회복을 시작했지만(골 1:20), 여전히 사람들은 일하면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땀 흘리는 수고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 3:23).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21).  육체노동을 비롯해서 고통이 따르는 일들을 주께 하듯 해야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적성이 맞지 않거나 그것을 감당하기에 신체적인 한계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노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노동은 좋은 경험이 되고, 영적으로도 좋은 훈련과정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전에 율법수업을 하지 않고 ‘목수’라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   나는 7년 전부터 프랑스에 있는 ‘미션디모데’라는 공동체 교회와 교류하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면서 가장 도전이 되었던 것은 다음세대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위한 공동체 훈련을 3년에 걸쳐서 한다는 점이었다. 이 훈련과정에는 성경과 신학공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남자들은 건축이나 건물 보수, 목공 일을 하기도 하고, 자동차 정비를 한다. 여자들은 건물 관리나 부엌 일, 빨래나 재봉과 관련된 일을 한다. 훈련을 마친 후에도 그 영역의 일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고, 설교자가 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서는 목회자이거나 설교자이거나 혹은 또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가정주부로 살게 되었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데 육체노동은 필수적인 훈련으로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도 신학공부를 할 때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다양한 노동을 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했던 일이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큰 유익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훈련을 하든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든지 땀 흘리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육체노동의 영적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뷰크너는 “자신에게 있는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고 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직업이 소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소명을 찾지 못한다. 땀 흘리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는데 많지 않다. 그래서 땀 흘리는 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신 것이나 바울이 텐트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개인의 열정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 아니었을까? 개인의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곳에 더 많은 소명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경제적인 책임 때문에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일이 그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시적 소명’이었다. 그때의 육체노동 경험은 내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실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실업 문제를 다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체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일이 젊은이들에게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실업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발문>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고난이 아니라   땀 흘리는 일 그 자체가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

 2019-06-14      제12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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