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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만남, '청년과 멘토' 진짜 멋진 만남, ‘청년과 멘토’ 멘토는 삶으로 보여주는 스승, 경험을 나눠주는 아버지 멘토,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는 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이 꼭 듣고 싶어하는 말이 있다.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이다. 그만큼 살아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 청년들은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려고 그들의 강의를 찾아보기도 하고, 서적을 구입해서 읽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인생 선배들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봐 빼곡하게 메모도 해놓는다. 그런데 여기, 청년들이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인생 선배들과 정기적으로 그것도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대학청년부에서 활발하게 실시하고 있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 홍하영 기자 hh0@onnuri.org 살아있는 인생 경험을 주고받는 멘토와 청년들 (위 박일환 장로와 김창식 형제, 아래 신현우 집사와 안선명 형제).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절친한 친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친구 멘토에게 자신의 집안과 아들 텔레마코스를 부탁한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친구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친구이자 스승,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줬다. 전쟁에 나간 친구 오디세우스 대신 텔레마코스 왕자를 지혜롭고 현명한 왕으로 키워냈다. 텔레마코스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멘토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때마다 멘토는 그의 곁에서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멘토라는 이름이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현명한 지도자(충실한 조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멘토를 만나고 싶어 한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있는 청년들은 더욱 그렇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생 선배들에게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선배들의 인생 경험 그 자체가 그들이 찾아 헤매는 문제의 해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을 먼저 산 선배들의 경험과 진심어린 조언이 청년들에게 정말 큰 도전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도 청년들에게 도전과 위로, 사랑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다. 멘토들이다. 청년들이 멘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멘토들과의 대화에서 신앙과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가 그랬듯이 대청 멘토들도 청년들의 스승이자 부모, 상담사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나도 멘토님처럼 살아야겠다” 안선명 형제(부천드림플러스공동체)는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멘토 신현우 집사(부천드림플러스공동체 멘토)를 만났다. 안선명 형제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앙적인 어려움과 마주했다. 이 무렵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었다. 교회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신현우 집사를 만났다. 안선명 형제와 신현우 집사는 7개월 동안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대화했다. 신현우 집사는 안선명 형제와 만나는 시간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살아오면서 실수한 경험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7개월 동안의 만남이 안선명 형제의 신앙을 성장시켰다.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던 안선명 형제가 지금은 부천 온누리교회 찬양팀을 섬기고 있다. 그룹홈 사역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터를 ‘능력에 맞게 들어가 돈을 버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우회를 만들어서 동료들과 말씀을 나누고, 섬기는 신현우 집사를 보면서 일터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또한 신현우 집사의 연애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방법을 배웠다. 매일 함께 QT하면서 교제했다는 신현우 집사 부부의 이야기가 안선명 형제가 가지고 있던 연애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신현우 집사가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이 도전이 됐다. “멘토님 덕분에 제 신앙과 삶이 많이 변화 됐어요. 멘토님이 제게 해주셨던 조언들을 삶으로 직접 보여주시니까 더 와 닿고 도전이 되더라고요. 항상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시는 멘토님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멘토’ 부모는 자녀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미리 길을 닦아준다. 먼저 걸어온 그 길에 대한 경험을 아낌없이 들려준다. 멘토도 멘티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김창식 형제(요셉공동체)는 요셉공동체에서 자신의 인생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든든한 아버지 같은 멘토를 만났다. 요셉공동체 대표멘토 박일환 장로다. 김창식 형제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올바른 신앙관과 재물관, 인격을 갖춘 크리스천 CEO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CEO 출신 박일환 장로에게 도움을 받고자 찾아갔다. 박일환 장로는 김창식 형제를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줬다. 크리스천으로서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도 알려 줬다. 얼마 전에는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다. 김창식 형제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번번이 잘 풀리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이 찾아왔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운 마음도 밀려왔다. 박일환 장로는 김창식 형제에게 본인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기다리다보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조언했다. “조급하다 보면 꼭 봐야할 다른 부분을 놓치게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박일환 장로의 조언대로 김창식 형제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선택 앞에서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박일환 장로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인생은 의사결정의 연속’이라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제 선택으로 인해 결정된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해 보니까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더라고요.” 일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 신앙적인 고민, 결혼,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박일환 장로가 떠오를 정도다. 웃음 가득한 멘토들의 고백 “청년들과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하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멘토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신현우 집사는 “청년들과 삶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며 “청년들을 더 섬기고, 그들을 돕기 위해 더 노력하는 멘토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신현우 집사는 청년들과 더 가까워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청년부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일을 맞은 청년들을 챙기고 있다. SNS 카카오톡에 생일을 맞은 청년의 이름이 뜨면 잊지 않고 간단한 선물을 전달하고 마음을 표현한다. 순모임 단체 채팅방에서 은혜 받은 말씀을 나누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청년부 리더십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윷놀이를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청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박일환 장로 역시 청년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공부하고, 순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박일환 장로는 “청년들과 소통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박일환 장로가 이 시대 청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좋은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도 여러분을 보시기에 좋은 걸작으로 빚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걸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가십시오.” 박일환 장로와 신현우 집사 외에도 대학청년부에는 수많은 멘토들이 있다. 청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일대일 멘토링도 해주고 있다. 인생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한 청년이 있다면 주저 없이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2019-07-14 제1254호
캠퍼스 전도집회‘희망노트’4월 30일 시작 대학 신입생 수련회 ‘Be The Man’도 실시 대학부가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를 개최한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오전 11시와 정오에 45분씩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 60주년 채플관에서 열린다.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는 말씀영상, 찬양 및 간증,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강사는 최성민 목사(온누리교회)이며 특별게스트는 가수 이미쉘, 가수 김신의(그룹 Monni), 가수 홍이삭이다. 최성민 목사(온누리교회)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에 참석해서 교회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는 매년 열리고 있다. 한편 허브공동체와 Pole2공동체는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수련회 ‘ Be The Man’ 을 개최한다. 허브공동체는 4월 28일 토요일오후 3시 양재 온누리교회 비전홀, Pole2공동체는 5월 12일부터 5월 13일까지 1박2일 동안 경기도 가평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하늘공동체는 지난 4월 7일 홍익대학교 프리스타일 스페이스 이벤트홀에서 수련회를 실시했다. / 권찬송 기자 kcs123@onnuri.org
2018-04-24 제1192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Input’ 순예배는 ‘영적인 Output’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Input’ 순예배는 ‘영적인 Output’ 예배드릴 때는 너무 좋은데, 순예배는 자꾸만 피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순예배가 꼭 필요한가요? 예배와 순예배 사이에서 심적인 간극을 경험하는 지체들이 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주일예배에는 참여도가 높은데, 예배 이후 순예배는 잘 참여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에서 순예배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몇 가지 권면을 드리고자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공동체로 부르신 게 아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맛보고 선포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흔히 교회를 가리켜 ‘구원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교회의 온전함이 기준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이 온전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간적인 시선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은혜 아래 구원받은 불완전한 자들의 모임이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깨달은 자들이 날마다 성화의 구원을 이뤄가기 위해 힘쓴다. 내 시선에 비춰 순예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의 여느 모임이라면 참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순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엡 1:23)이라고 했다. 몸이 머리와 관계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한 몸에 연결된 기관이라면, 각각의 기관은 그 몸의 유전자와 혈액 등 신체의 모든 것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내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영적인 DNA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그것을 공급받고 있고, 누군가에게 그것을 공급하고 있음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이야기 한다. 예배(레이투르기아), 말씀 선포(케리그마), 교육(디다케), 친교(코이노니아), 봉사(디아코니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 기능이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다. 이 다섯 가지는 어느 하나에 치우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에 주일예배와 순예배가 포함되어 있다. 예배가 ‘영적인 Input’이라면, 순예배는 ‘영적인 Output’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임재 체험과 회복의 경험이 예배라면, 순예배는 받은 은혜를 나누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자리다. 순예배는 내가 받은 은혜가 단순한 감정적 감동이 아니라 진정한 은혜인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다. 신앙생활은 결코 ‘홀로서기’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만 잘 갖는다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일 수 있다. 만약 그 생각이 맞는다면 하나님이 굳이 내가 함께하는 이들, 공동체, 가정을 주실 이유가 없다.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지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건강한 관계’와 ‘나와 사람들의 아름다운 관계’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완전한 옷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간단하게 요약하신 것도, 십자가의 모양이 수직과 수평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 정한효 목사(W청년부)
2023-12-02 제1469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다!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다!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고난을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걸까요?”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신앙이다. 그래서 삶의 형편과 상황이 때로 믿음의 뿌리를 흔들기도 하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지지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난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실제적인 기도제목이다. 어쩌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현실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고난 없는 평탄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진정한 고난의 의미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단편적인 바람일 뿐이다. 눈이 많이 덮일수록 마른 땅이 물을 품게 되고, 추운 겨울이 지나야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기 마련이다. 내 삶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고난들은 믿음을 더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으며, 여전히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주시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인생을 멸하기 위해 허락하시는 것도 아니다. C.S.루이스가 이야기했듯이,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난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풍랑을 통해 듣게 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 유대인의 사도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았던 그에게도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육체의 가시’다. 그에게도 고난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육체의 가시를 고난이 아닌 축복으로 여겼다. 그 가시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부어주신 은혜와 계시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에게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닌 육체의 가시로 인해 불평하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크게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하는 축복의 통로로 삼았다. 우리는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왜’에 집중한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을까?”, “도대체 왜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의 키워드를 바꿔야 한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고난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방법이다. 상황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고난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다시 사는 축복의 통로다.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는 곳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룩한 현장이다. 고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a). / 김한국 목사(인천WEB공동체)
2023-11-25 제1468호
[멘토가 멘티에게] 청년의 때에 믿음을 지키는 방법 멘토가 멘티에게 청년의 때에 믿음을 지키는 방법 세상에 유혹이 너무 많아서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청년의 때에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유혹이 넘쳐나고,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과 정체성 혼란이 올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겨우 살아내고 있는 청년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 있다. SNS나 방송을 보면 사람들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만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믿음을 지키면서 가는 이 길이 옳은 길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은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지음을 받았으며 그 창조 목적에 따라 우리가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 속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다니엘과 같이 정결하고 보배로운 주의 청년들이 말씀과 기도, 성령 충만함으로 세상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세상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고, 우리 삶을 형통하게 이끄신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 오염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고,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해주신다. 말씀은 우리 마음의 거울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청년의 때에 믿음을 잘 지키는 방법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꿈과 비전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신 꿈과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생각보다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응답하실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고, 삶의 의미와 비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과 비전이 예수 안에서 나의 사명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끊임없이 싸우곤 한다. ‘성령을 따를 것인가?’, ‘세상의 풍조를 따를 것인가?’ 선택의 순간에 서게 된다. 신앙은 세상과 겸하여 적당히 섬기거나 회색 지대가 없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면서 미지근하면 버리겠다고 하셨다”(롬 8:5~8). 셋째, 불안한 청년의 때를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청년의 때는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다. 고난을 겪는 청년들이 있다면,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란다. 욥, 다윗 등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찬송하자.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머물면서 오직 그분만을 의지했으면 좋겠다. 내게 다가온 고난을 원망하지 말고, 오늘의 고난을 내일의 기쁨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잘 견뎌내는 영적 힘을 길러야 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울어 줄 멘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 안연환 멘토(하늘대학부)
2023-11-18 제1467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사랑을 전하는 사람!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사랑을 전하는 사람! 믿지 않는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죄의 유혹이 너무 많습니다. 이 친구들과 만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게 맞을까요? 그 친구들을 전도해야 할까요? 먼저 이 질문을 고민하는 청년에게 박수를 보낸다. 불편함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믿지 않는 친구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면 같은 뜻과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에 편하고 갈등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님 품 안에 있는 게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교제하게 됐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예수님의 품 안이나 교회에서 찾을 게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기에 힘쓰고,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하는 게 구원받은 자의 사명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파송되는 쌍방향의 역동성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잘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예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세상으로 나가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오히려 생명력을 잃고 타락할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믿지 않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라”는 역설의 답을 하고 싶다. 오히려 믿지 않는 친구들과 만남 속에서 신앙의 건강함과 순수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도전이다. 그러나 그 도전이 예수님을 더욱 붙들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위험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넘어지기를 두려워하면 자전거를 배울 수 없으며, 물을 마실 각오 없이는 수영을 배울 수 없는 법이다. 죄의 유혹이 두려워 믿지 않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신앙 태도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죄의 유혹에 노출될 것을 각오하며 예수님께 받은 사랑에 힘입어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그 사랑을 증거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태도로 살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던 예수님이 그 노력을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적극적 혹은 외향적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말씀처럼,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키는 믿음의 방패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말과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진리의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한다. 이를 위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계속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전부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 주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 노력과 수고 가운데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가 함께할 것이다(히 4:16).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고전 15:58). / 신경훈 목사(갈렙청년부)
2023-11-11 제1466호
[멘토가 멘티에게] 돈의 유.전.정.보 멘토가 멘티에게 돈의 유.전.정.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왠지 욕심처럼 느껴집니다. 물질의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괜찮을까요? “내가 주께 구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그것들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영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 하시고 내게 가난도, 부도 허락하지 마시고 오직 내게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 주십시오”(잠 30:7~8). 가난하면 도둑질할까? 부유하면 하나님을 멀리할까?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드린 아굴의 기도다. 생계와 학업을 꾸려갈 때 돈의 부족함을 느껴본 사람은 그 필요성과 귀중함을 잘 안다. ‘돈의 유.전.정.보’를 살펴보면서 돈과 신앙의 핵심사항을 나누려고 한다. ‘유’, 돈은 유용하다. 돈의 필요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태초에 물질세계를 창조하셨고, 모두가 농부나 목축업만 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각자 여러 분야에 일하면서 물건과 일을 교환하고, 화폐 경제의 발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편리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에도 물질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있다. 돈은 범사에 이용되고(전 10:19), 재물은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한 보상이다(잠 22:4). 재물과 부요를 누리게 하시고, 제 몫을 받아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전 5:19). <시편> 119편에서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도를 즐거워하였다”고 고백한다. 풍요함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이 주신다. 돈은 일상에 유익함도 주지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전’, 돈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는 삶을 기뻐하신다. 하지만 행복과 풍요함을 채우는데 돈이 전부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돈은 하나님의 가장 큰 라이벌일 수 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표현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고, 믿음을 떠나게 한다’(딤전 6:10), ‘썩은 재물이 불과 같이 너희 살을 삼키리라’(약 5:3)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 ‘정’,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 나는 직장 생활 34년 동안 돈을 다루었다. 1998년부터 벤처기업의 파트너로 일하다가 9년 전부터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VC)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투자와 투기는 다르다. 성경에서도 투자는 권유하지만, 투기는 경고한다. 성실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지만, 벼락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벌을 면치 못한다(잠 28:20). 속이는 저울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잠 11:1). 돈을 구하는 동기의 순수함도 중요하고, 돈을 버는 과정에서 정직함도 중요하다. ‘보’, 돈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이다. 돈은 쓰는 것에 따라 이 땅에서의 자랑이나 정욕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고, 영원히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보물일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여호와께서 갚아 주신다(잠 19:17). 선을 행하면서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딤전 6:18)가 된다면 천국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삭개오가 재물에 대해 회개했을 때 구원을 받았다. 돈이라는 보물을 이 땅에서 빛과 소금처럼 사용할 때 하나님 나라의 보물이 된다. 거룩한 손해는 하늘의 상급이다. ‘돈의 유.전.정.보’를 확실히 파악해서 기도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란다. 먼저 자신이 재물을 하나님 뜻대로 쓰고, 다룰 수 있도록 그릇을 키워야 한다. 그릇은 하나님 나라와 의다. 우리의 그릇이 커질 때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보물을 부어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쓰이는 선교적 재원이 늘 부족하다. 담대한 기도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갈망했으면 좋겠다. / 박기일 멘토(길공동체)
2023-10-28 제1464호
[멘토가 멘티엑에] 섬김은 기쁨, 사랑, 행복! 멘토가 멘티에게 섬김은 기쁨, 사랑, 행복! “봉사를 권유받았는데 저는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오고 싶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꼭 해야 할까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지체와 교제하고, 봉사를 권유받는다. 지인이나 친한 성도들의 권유이기에 거절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상황이 여의치 않고, 준비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봉사에 참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청년 시절 후배의 권유로 차세대 교육부서 봉사와 성가대 등 여러 부서에서 활발하게 섬겼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섬김과 봉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이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마음을 부어주신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합력하고, 선을 이뤄가는 개인의 삶과 놀라운 몸 된 교회를 알게 된다. 처음부터 각자의 은사와 달란트에 딱 맞는 봉사의 자리가 있기도 하다. 반대로 처음에는 어색하고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섬기면서 감춰진 재능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 있고 잘하는 것을 무조건적 수용하거나 잘 못하는 것이라 여기며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참 부르심 안에 거하는지를 확인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봉사와 섬김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청년이 하나님께 여쭤보고, 스스로 해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나는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났고, 성도로서의 부르심이 있는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근간이 되는 질문이다. 둘째,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이 질문도 내면과 영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신앙생활이나 섬김의 봉사는 모두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 받은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과 친밀함이 더욱 커지고, 자연스럽게 그분이 나의 삶에서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분별하게 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다스리심과 은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몸 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면서 부르심을 깨닫게 하신다. 섬김과 봉사의 콜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온 것임을 고백하게 하신다. 부르심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신다. 셋째, 나는 예수님이 피로 사신 공동체와 지체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가? 세 번째 질문은 성령 안에서 성도와의 교제에 관한 것이다. 참된 예배자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갈망하면서 경배한다. 더불어 성령 안에서의 교제와 나눔을 소홀하지 않다. 한 몸임을 인식하고, 형제자매를 돌보며,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를 힘쓰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나눔과 섬김이 예배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섬기는 일이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기쁨과 확신에 차게 된다. 섬김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섬김이 된다. ‘봉사’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따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닮아갈 수 있다. 교회 밖에서는 더 넓고 크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온 땅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놀랍고 귀한 봉사의 부르심이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세워가고, 생명이 흘러가는 통로다. 섬김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깊은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기를 축복한다.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공동체 안에서 나눔이 깊어지는 청년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섬김은 기쁨이고, 사랑이며, 행복이다. / 하갑천 멘토(인천웹공동체)
2023-10-21 제1463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는 세 가지 방법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는 세 가지 방법 기도시간마다 자꾸 딴생각이 들어서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할 때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화공이 신을 만들고 제단사가 옷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매일의 직업이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기본적인 매일의 삶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우선시해야 하는 행위다. 기도에 관한 많은 은혜와 간증을 듣는다. ‘어느 날 1시간 기도했더니…’, ‘매일 쉬지 않고 기도하니까…’, ‘기도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와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기도를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숨을 쉬듯 쉽게 기도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 기도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30분은커녕 5~10분 기도하면 더 이상 기도할 게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는 세상의 대화와는 다르다. 기도는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특별한 행위다. 사람들과의 대화에 익숙한 우리는 기도에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어색함을 넘어서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다. 어색한 관계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어색한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어색함 때문에 상대방을 피한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종료될 것이다. 어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상대방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 때 어색함이 차츰 나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일단 기도의 시간을 많이 확보한다면 잠시 다른 생각을 해도 다시 마음을 바로잡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변 환경을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정말 중요한 요소다. 깊은 기도를 하고자 한다면 시간과 장소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기도하기 좋은 환경으로 준비해야 한다. 기도를 방해할 수 있는 물건은 처음부터 시야 밖으로 치워 두는 게 좋다. 가장 멀리해야 할 물건이 스마트폰이다. 하지만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기도 BGM을 틀고 기도하기 때문에 그럴 때는 전화나 메시지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알림을 끄고 기도를 시작하는 게 좋다. 또한 침대와 같은 편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기도가 아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혼자 하는 기도가 어렵다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예배를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함께 모여서 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을 훈련할 수 있다. 훈련하면서 개인의 자리에서도 깊은 기도로 나아가기를 축복한다. 셋째, 기도제목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가 막히거나 다른 길로 새는 경우는 기도할 게 떠오르지 않아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 기도제목을 적어두고, 그것을 보면서 기도한다면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나의 어떤 기도제목이 응답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기도제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도 보면서 중보의 시간을 가진다면 긴 시간 하나님께 집중하며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깊은 기도로 나아가면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축복한다. /최재윤 목사(길공동체)
2023-09-23 제1460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닮아가기!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닮아가기!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저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죄책감에 빠지는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반복해서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습을 일방적으로 나무라고 혼내시는 분이 아니다. 더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되고자 하는 선한 열망으로 보신다. 25살에 첫사랑이었던 아내를 만나 1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연애를 시작했더니 싱글일 때는 전혀 하지 않던 고민과 갈등이 생겼다. 아내가 피아노를 전공해서 전시회와 음악회 가는 것을 좋아했고, 깊이 있는 지적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해서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한 권으로 읽는 음악사, 미술사 같은 것을 사서 읽고, 생전 안 듣던 클래식을 들었다. 하루아침에 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랑했기에 변하려고 했다. 사랑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을 위해 변하고 싶은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난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증오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롬 7:15).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면 새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원함’과 거룩을 향한 ‘지향성’이 생긴다. 그래서 작은 것까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행함’이 바로 달라지지 않는다. 원함이 바뀌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갈등이 생긴다. 한 청년이 내게 물었다. “예수님을 믿는데 아직도 중독을 못 끊어서 괴로워요. 구원받은 게 맞나요?” 나는 그 청년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없으면 고민 자체를 안 한다”고 답했다. 고민하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다는 증거다. 안 믿는 사람은 이러한 고민이나 갈등 자체가 없다. 그냥 몸이 이끌리는 대로 죄를 짓는다. <로마서> 7장 16절에서 “죄에 대해서 원하지 않는 마음, 더 나아가 증오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율법이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율법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이제는 원하지 않는 걸 행하면 율법이라는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계속 걸린 채 차가 움직이면 타는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로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죄에 또 넘어지면 허탈함, 자책감,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러면서 죄가 점점 싫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수준에 이르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전혀 하지 않던 고민을 한다. 사랑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로마서> 7장 18절에서 사도 바울도 “죄에 압도당하는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19절에서도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있다. 성경은 거룩한 사람을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도 그랬다. 자기 확신이 강하고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때는 예수님이 그를 안 쓰시다가 정말 아이러니하게 자신이 실패했다고, 보잘것없다고 고백했을 때부터 “내 양을 먹이라”면서 그를 사용하셨다. 성경은 거룩한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하고 강직한 사람이 아니라 죄에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죄를 반복해서 짓는 모습에 낙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지는 것을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 거룩하고 싶은 그 열망으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닮아가기를 바란다. / 이승민 목사(여호수아공동체)
2023-09-16 제1459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 안에 있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 안에 있다! 나의 욕심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으면 한 발자국도 불안하며 가로등 없는 밤길은 두려워진다. 이는 미지의 길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한계적 반응이다. 그렇기에 앞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진다. 삶을 살아갈 때도 동일하다.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앞을 보고 싶고 알고 싶다. 바로 그 마음이 건강한 신앙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자신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망이 생긴다. 가난한 심령 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하는 목마름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배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셨다(창 12:1, 창 26:2, 창 28:13).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할 때 양털과 이슬로 알려 주셨고(삿 6:37~40),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천사의 해석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단 7:15~16).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직접 알려주시는 것이다.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임재하심으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날마다 그때를 경험하고, 친히 알려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인생의 시간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담아내기에 작다. 때때로 사람의 눈과 귀는 어둠 속에 잠식된다. 작고 세밀한 음성일수록 명확히 듣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분별의 두 번째 방법은 곰곰이 살펴보면서 고민하는 이성이다. <잠언> 24장 후반절을 보면, 어느 날 지혜자가 누군가의 포도밭을 지나간다. 그곳에는 여기저기 가시가 있었고, 땅은 잡초로 덮여 있었다. 게다가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지혜자는 살펴본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교훈을 얻고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졸자, 조금만 더 손을 모으고 쉬자 하면 가난이 강도같이, 궁핍함이 방패로 무장한 군사같이 네게 이를 것이다”(잠 24:33~34). 지혜자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고민 끝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이성은 신앙을 배척하는 무기가 아니라 더 깊은 믿음을 돕는 하늘의 도구다. 11세기 신학자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오만이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면 태만”이라고 말했다. <잠언> 24장의 지혜자는 신앙 안에서 이성을 사용했고, 하늘의 뜻을 분별해 알 수 있었다. 분별의 핵심은 ‘신앙 안에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그 뜻을 간구한다면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성령께서 친히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 8:26~27).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서만 온전한 하늘길을 걸어갈 수 있다. 4세기 신학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심이면 그 어떤 선택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로 향할 줄 믿는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결단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빌 2:1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중심에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주셨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한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길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사는 청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 15:7). / 최종현 목사(하늘대학부)
2023-09-09 제1458호
[멘토가 멘티에게] "아버지 품 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멘토가 멘티에게 “아버지 품 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늘 걱정이 되고, 자꾸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세상을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실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익숙하게 통제하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두려움은 필요한 감정이다.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고, 죄를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게 중요하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한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두려움 없이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훈육의 길로 인도할까? 두려움을 대면해서 받아들이고, 그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 두려움을 제어하면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용기가 발현돼 성과에 도움을 준다. 나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자전거로 국토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한 구간이 공사로 폐쇄돼 어느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내 뒤를 따라오는 큰 개 한 마리를 만났다. 어릴 때 강아지를 키웠고 좋아하는데도 무섭게 짖으며 내 뒤를 따라오는 개를 보니 심장이 두근대고 겁이 났다. 그 개를 피해서 초인 같은 속도로 그 마을을 벗어났던 적이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직장, 주거, 동반자를 정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청년의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비상을 원하지만, 날아오르고 나면 더 높이 날아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두려움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움을 물리치고, 내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 것이다. 악한 영이 미혹하는 두려움은 경계하고 이겨내야 한다. 궁극의 두려움은 죽음이다. 우리는 부활 소망의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두려움에 맞서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훈련이다. 순종할 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보는 체험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 같은 사람이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바울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로마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내 평생 가는 길 평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이 찬송 가사처럼 평안하고, 담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찬양하면서 두려움을 물리쳐야 한다. 쉽지 않아도 이런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겠다”라고 고백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 인생의 경로를 오롯이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문을 여시면 용기 있게 전진하고, 닫으시면 절제하며 멈춰 서면 된다. 사탄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우리를 유혹한다. 정말 그것만 가지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욕심의 애착과 집착을 없애야 용기를 얻는다. 욕심을 버리면 얻는다. 공동체에서 사랑을 나누며 힘을 얻는다. 환경을 보고 이성을 믿는 게 아니라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샘을 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된다. 모든 청년이 믿음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 믿음의 명문 가문을 이루기를 축복한다. 많은 청년이 “내 아버지 품 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두려움을 뒤로한 채 전진하기를 바란다. / 이원장 멘토(여호수아공동체)
2023-09-02 제14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