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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파리 올림픽 개막식
특별기고
파리 올림픽 개막식
기독교인들이 ‘사단적’이라는 단어를 너무 자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 중 일부는 레코드판을 거꾸로 재생하면 사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알려진 80~90년대 기독교 청소년 집단에서 유행했던 ‘백마스킹’을 기억한다. 이것이 적의 장치였다 해도 메시지를 이해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카세트테이프의 발명으로 이 음모는 빠르게 좌절되었다. 물론 많은 노래 가사들은 제대로 플레이해도 이미 아주 나빴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강의 이름이자, 이 공연이 기념하는(죄(sin)라고 발음하는) ‘센강’을 따라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여행하는 것으로 꾸며진 2024년 올림픽 개막식은 '사단적'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사실 죄악과 충격, 변태성을 기념하는 게 이 공연의 핵심이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성한 것을 조롱하는 신성 모독을 미화한 것이었다. 사회학자 필립 리프가 ‘죽음의 작품(death work)’이라고 불렀던 그 장면이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물론 다른 종교를 겨냥한 조롱은 없었다. 확실히 이슬람에 관해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세속적인 프랑스 예술가라도 코란이나 예언자 모하마드를 주제로 삼았다면 파리는 이미 불바다가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막식 연출을 맡은 토마스 졸리가 시각적으로 선택한 내용에는 신중하게 고려했던 사항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그가 선택한 장면에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기 원했다”는 말처럼 그가 인정하고 싶었던 것보다 많은 것이 있었다. 졸리가 억압받는 국가들에 프랑스 자유의 경이로움을 알리고자 했다면, 그는 놀랍지도 않게 선별적이고 독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는 최악의 범죄자들은 무시하고 자유를 성적인 면허 수준으로 축소해서 묘사했다.
그가 묘사한 것은 최근 많은 사단적인 대중문화처럼 정확히 ‘사단주의’였다. 그는 인간성과 자유에 대한 특정 이상, 즉 성소수자로 표현되는 것을 내재하고 있지만, 실제 그 뿌리는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상을 기념하기로 정했다. 물론 그 이상은 사단적이었지만, 단순히 머리 없이 노래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소름 끼치거나 최후의 만찬에 여장한 공연자들이 등장하는 것이 불경스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사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야호!”하고 외치며 뛰어나오지 않는 것이다. C.S.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단의 일은 훨씬 교묘하고, 훨씬 위험한 것으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사실 인류에게 최악의 상황을 가져온 것은 기독교 이전의 이교 신앙이 아니라 계몽주의 세속화의 영향이었다. 신이 없는 세상을 다시 상상한다는 것은 경계가 없는 세상을 다시 상상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 대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억압으로부터 해방에 대한 외침은 곧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에 대한 의식적이고 폭력적인 모독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백과사전을 편집한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마지막 왕을 마지막 사제의 내장으로 목을 졸라 죽일 때까지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개막식 공연에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사상에 대한 찬사였다. 디드로는 진정한 자유란 모든 권위, 제한, 경계에 대한 반란이라고 믿었다. 젠더혁명가들도 프랑스 혁명가들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이를 믿었다. 토마스 졸리가 프랑스 문화와 역사를 짧게 요약해서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지 못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어디로 향했고,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다. 실패한 반란, 잔인한 폭력, 기아, 결국에는 더 심하고, 또 다른 폭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17세기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혁명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객관적인 현실과 인간, 자연,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혁명은 의식적으로 모든 종류의 표준, 특히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에 구현된 표준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이 미국 혁명과 비슷하게 들렸을지는 모르지만, 창조주가 부여한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과 ‘자유, 평등, 박애’를 향한 자유로운 외침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 둘은 극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영국의 시인이자 청교도 사상가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사단이 이렇게 외친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전하게 통치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하는 것 안에서 지옥에서라도 통치하는 것은 야망 할 가치가 있다. 지옥에서 통치하는 것이 천국에서 봉사하는 것보다 낫다.”
결국, 자유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신처럼 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을 해치는 것이 마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잘못되고, 궁극적으로 치명적이다. 이게 바로 오스 기네스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제약으로부터의 자유, 결과로부터의 자유, 설계로부터의 자유)라고 불렀던 자유에 대한 이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실천에 옮기면 개막식 퍼포먼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신에게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것이 실행에 옮겨질 때는 개막식 공연에서 묘사된 것처럼 진리, 아름다움, 자유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조롱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존 스톤스트리트, 티모시 D 패젯
2024-08-17
제15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