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셋째주 메시지)
12월 23일(토)
환난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7~12
이승민 목사
오늘 본문은 동행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동행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7절 ‘보여주려는 것입니다’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능력이 내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하나님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말하면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를 세워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능력을 보여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둘째, 동행은 잘 당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당해야 합니까?’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질그릇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질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란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환란은 하나님이 우리를 짓누르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답이 없는 것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문제는 하나님만이 푸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풀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하면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립니다.
또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 비난, 모욕, 모함을 받습니까? 여러분이 잘 가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나 다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당하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평강이 있고,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에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 동행은 잘 죽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자존심을 꺾고, 내 생각대로 판단하지 않고,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으면 반드시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찾아옵니다. 내가 죽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합니다. 우리 삶에서 ‘잘 죽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함으로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이 반드시 회복됩니다.
여러분, 잘 죽는 것은 또한 ‘사과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 아내, 남편, 아들, 딸에게 사과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동행은 ‘보당죽’입니다. 잘 보여주고, 잘 당하고, 잘 죽는 것입니다.
12월 25일(월)
Why Christmas?
<요한일서> 4:7~12
이기훈 목사
이번 주 새벽기도회 주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히 (세상을) 거절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떻게 성탄절을 이해하고 지켜야 합니까? ‘Why Christmas?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의 답을 사도 요한의 메시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줄 프로젝트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구원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뻐하며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내려놓는 헌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할 일은 어떤 이유로든 메말라진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도록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신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받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고, 인정할 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할 일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1절)”라는 말씀 속에는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관계를 회복시켜 주려고 오셨습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사랑을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이웃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가족들을 먼저 사랑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탄절에 관계 회복이 시작되는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계 회복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관계 회복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먼저 이해해 주고, 용납해주고, 용서해주고, 공감해 주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관계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복해야 할 관계가 있습니까? 더는 지체하지 마십시오. 그 어그러짐 때문에 지옥 같은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고, 관계 회복을 시작하는 2023년 성탄절 되기를 축복합니다.
12월 26일(화)
폭풍 속에서 만난 예수님
<마가복음> 4:35~41
조호영 목사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리리 호수 건너편으로 떠납니다. 그날 밤 제자들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광풍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됐는데 모른 척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믿음의 성장은 거친 풍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풍랑처럼 찾아올 때 믿음의 현주소가 드러납니다. 나는 믿음이 없고,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만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폭풍은 위기가 아니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넉넉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늘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두려움이 멈출 줄 믿습니다. 41절에서 제자들의 두려움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따랐던 분이 이렇게 크신 분이었구나’하며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렇게 크신 분입니다.
여러분, 담대히 세상을 거절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무기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자에게 상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매일 고백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담대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이 “고요하라! 잠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를 매일 두렵게 만들고, 걱정과 염려 속으로 이끄는 마귀에게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경험한 다음에 더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임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이 세상과의 영적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줄 믿습니다.
12월 27일(수)
동행을 위하여 거절해야 하는 것들
<갈라디아서> 2:15~21
최성민 목사
이 시대에는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바로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모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거절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5~16절은 사도 바울이 율법에 매여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베드로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왜 베드로가 당당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까? 자신을 인정하고 옹호해 줬던 사람들이 떠날까 봐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과 성도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타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믿기에 더는 세상의 상대적 가치에 얽매여 두려워하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의롭다’ 인정하셨기 때문에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가치로부터 당당하고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 앞에 위선과 가식, 자존심으로 위장한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의 자존감과 당당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교회는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받는 자의 당당함으로 세상 가운데 서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사단이 주는 두려움의 멍에를 거절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성도들이 자꾸 율법으로 돌아가서 다시 인정받으려 하는 모습을 지적합니다(17~19절). 십자가 은혜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자꾸 율법을 내세우게 됩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는 느낌을 받으려 합니다. 의미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죄책감이 차오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율법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음과 완전히 이별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에 따른 자기 증명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감격하고,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과 나의 친밀한 동행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이들에게 죄의 멍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육신의 욕망을 거절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20절). 육신의 욕망은 결국 우리를 사단의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동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욕망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여정이 나의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동행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를 세상의 노예로 만들었던 육신의 욕망을 떠나보내십시오. “내 안에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 성령을 따라가는 삶, 그로 인하여 예수 바보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12월 28일(목)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요한복음> 13:15
이기복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과 성품을 배우고,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까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13장부터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곳곳을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맞아 최후의 만찬이 될 그 자리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었고, 무조건적인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섬김과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이유는 그분이 행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살았던 3년 반 동안 쉬운 삶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평안함과 안전함을 모두 거절하시는 삶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계시려고 스스로 높은 자리를 거절하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 있기에 세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고통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그리스도께 속한 가치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부활의 증거로 고난의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줘야 할 증거입니다. 집단의 이기심, 거대한 야망, 세속화된 성공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것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온전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선택했고,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겼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아픔의 흔적이 세상에 보여줄 진정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살아야 할까요? 조정희 목사님의 저서 <인생 선물>에서는 “내 고난은 남의 고난을 돕게 하고, 내 슬픔은 남의 슬픔을 품게 하고, 내 장애는 남의 장애를 배려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본을 우리도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유혹을 담대히 거절하고, 예수님을 영원히 얻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2월 29일(금)
붙잡힐 각오, 죽을 각오
<사도행전> 21:7~14
신동식 목사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제자들, 형제들, 동료들, 주변 환경이 모두 반대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가는 바울의 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담대히 거절하게 하소서’입니다. <사도행전> 21장 4절을 보면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위해 담대하게 거절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나 중심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믿음 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위해 거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고, 동행했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거절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실 때 거절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의 사람입니다.
둘째,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담대하게 거절하게 하소서’입니다. 11절을 보면 “예루살렘 유대 사람들이 이 허리띠 주인을 이렇게 동여매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예언 때문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울면서 바울을 막았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붙잡힐 것은 물론이고, 죽을 각오도 돼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다시 내려갑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이 이미 알려주신 고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사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역사들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기를 축복합니다. 능력 있고, 권세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고난을 결심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입게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구약의 담대한 믿음의 거절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깨끗해지기를 결심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행동했습니다.
여러분, 결심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결심하면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반드시 입게 해 주십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결심하십시오. 붙잡힐 각오, 죽을 각오, 담대한 거절함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하는 작은 결심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해 담대히 거절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담대히 거절하십시오.
2023-12-30
제14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