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다섯째주 메시지)
1월 6일(토)
하나님 나라의 도전
<마태복음> 13:31~33
김상수 목사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 왕이 되시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과거 기독교 역사를 보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잘못 해석할 때가 많았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본질보다 크게 성장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는 모든 일은 무조건 성공하고, 크기, 숫자, 세력, 힘을 강조하는 해석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을 자세히 보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말씀이 크기와 성장, 힘의 논리라면 <마태복음> 11장과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은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왜 성장하지 않고, 힘이 생기지 않으며, 도리어 박해와 환란, 어려움이 생기겠습니까? 사실 겨자씨는 나무가 아니라 잡초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실 때 과장, 역설, 모순적인 기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진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문학적인 기술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고, 통치가 시작되면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운동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능력과 기름 부으심이 하늘로부터 임합니다. 그래서 겨자씨 비유는 크기나 세력보다, 힘과 어떤 숫자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시면 크고 우람한 나무와 같은 엄청난 운동력으로 발전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누룩의 비유는 보이지 않는 영역, 오랜 시간이 걸리는 속성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십니다. 소량의 이스트를 발효시키면 처음에는 볼품없고 초라해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점점 부풀어 올라 엄청난 크기의 발효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시간이 흐르면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과 비밀성입니다.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인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자기희생입니다. 썩어 없어지고 존재가 사라져야 ‘촉매적 리더십’이 발휘됩니다. 효모가 없어져야 주변 세계를 부풀립니다. 겨자씨도 밀알이 죽어야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십자가 사역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힘과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부르심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고, 겸손하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자리에서 십자가 능력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질서를 변혁시키고, 전복시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월 8일(월)
순종을 통한 축복
<요한복음> 9:1~7
박종길 목사
<요한복음> 9장 1~7절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어두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눈먼 사람과 어떻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선택하시고,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소망 없는 삶에도 찾아오십니다. 각 사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말씀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나주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소망 없는 인생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찾아오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성경에 눈먼 사람이 고침을 받은 이야기가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보여줍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둘째, 고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셋째, 순종이 기적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눈먼 사람의 눈에 붙여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상하게 예수님은 눈먼 사람이 더 보지 못하게 눈에 진흙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달랐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먼 사람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눈먼 사람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었더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종이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순종할 때 축복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실로암에 가서 씻는다고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실로암이 기적을 일으키는 생수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순종할 때 풀리지 않던 인생의 문제가 풀리고,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 보지 못한 채로 사명을 잃어버린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빛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순종하십시오. 그 순종을 통해서 축복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순종을 통한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월 9일(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순종
<사도행전> 4:18~29
박철웅 목사
복음이 예루살렘 전역으로 확산하는 배경이 오늘 본문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성령의 권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땅에서의 영적 전쟁은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선택 싸움입니다. 순종이란 내 생각, 내 욕심,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세상의 방식, 세상 사람들의 말을 따르라고 유혹합니다. 이 땅에서 말씀 가운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담대한 용기는 성령의 권능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협박합니다. 세상에서는 협박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첫째, 그 협박에 굴복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중단합니다. 둘째, 자신들을 협박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힘으로 대응합니다. 지극히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령의 권능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되고 담대하게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협박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변화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여러분도 성령의 권능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선택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성령의 권능은 실패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협박 앞에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담대히 믿음의 고백이자 승리의 선언을 합니다. 요한은 몰라도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과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에게는 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변화가 가능했겠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권능이 베드로에게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실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더이상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겠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의 권능이 임했을 때 교회가 함께 담대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자마자 다른 사도들이 있는 장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간증합니다. 그러자 교회의 모든 성도가 소리 높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핍박 가운데에도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이 막히지 않도록 교회가 함께 큰 소리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말씀을 새롭게 깨닫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기도공동체가 되십시오.
1월 10일(수)
순종을 위한 담대함
<여호수아> 1:6~9
강부호 목사
오늘 본문에서 “강하고 담대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담대할 이유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큰 맥락에서 보면 큰 임무를 수행할 때 형통의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이 담대함입니다. 그다음은 임무를 수행할 때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입니다.
신약에서 보면 구약의 ‘담대함’이 가지고 있는 기본 뜻 외에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4절을 보면 ‘분명하게’라는 번역이 ‘담대하게’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밝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담대함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담대함은 혼자 묵상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3장 12절을 보면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이시고, 그분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명백해지면 담대함과 확신이 생깁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을 보면 “예수의 피로 인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도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만 전파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든지 좋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에게는 엄청난 담대함이 임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말할 때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성령으로 늘 충만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이 새롭게 충만하게 하시는 경험도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갑자기 담대함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성령 충만해지고,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안에서 담대함이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안의 담대함을 점검해야 합니다.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동안 점검해보십시오. 담대함이 부족하다면 하나님 앞에 요청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행할 일은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사도행전> 14장 3절 같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실 것입니다. 담대히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확신할 때 내면이 진동할 것입니다. 과거에 없던 새로운 담대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 일이 계속될 때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고, 변화의 핵심이고,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1월 11일(목)
담대한 순종, 보리빵이 칼이 되다
<사사기> 7:13~18
도육환 목사
오늘 본문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 이야기 중 일부분입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열등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되지 못한 기드온을 세워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적진을 파악하기 위해서 부하 하나와 깊숙이 정탐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야간 경비를 서는 두 군인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한 병사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하나가 굴러와 미디안 막사를 덮쳤고, 미디안의 모든 부대가 무너졌다는 것이었습니다(13절). 놀라운 것은 다른 병사의 해몽입니다. 이 병사가 해몽하기로는 “그 보리빵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14~15절). 숨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드온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이스라엘 막사로 돌아와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막사를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고 선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보리빵 같은 우리 인생을 들어 위대한 당신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기드온을 들어 쓰신 하나님이 우리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사람을 통해서 전능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용기를 얻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계획을 세웁니다. 전투 장비는 나팔과 횃불, 빈 항아리였습니다(16절). 전쟁에 결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 싸움은 여호와께 속했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전쟁과 방법이 달랐습니다. 전쟁 준비를 마친 기드온이 먼저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용사들에게 “나를 지켜보고 그대로 하라”고 선포합니다(17절). 저는 이 시대에 앞서서 목소리 높일 교회와 성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진정한 생명이고, 능력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삶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기드온이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기드온은 미디안의 침략 가운데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천사가 방문해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기드온에게 무슨 용사의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지도자로 내놓을 만한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께 “저는 제일 작은 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들어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거룩한 하나님의 초청 앞에 기드온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매긴 평점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도 “너는 용사다. 너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과 부르심 앞에 담대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이 일평생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1월 12일(금)
무명의 선교사들
<스가랴> 8:22~23
노규석 목사
온누리교회는 30년 전부터 이주민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이주민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영적 갈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외국인 근로자가 오는 것을 거절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민족주의가 선교의 역사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국 교회가 모든 민족이 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스가랴> 8장 22절에서 “많은 백성들과 강한 나라들이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기도하러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이주민이 한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맞이해야 합니다. 23절에서는 “그날이 이르면 다른 언어를 가진 다른 민족 열 명이 와서 한 명의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붙잡았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실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임마누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는 이주민에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모든 곳으로 흘러갑니다. 이주민들도 복음 전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온누리M센터에 계시는 외국인 목사님들이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문화 청년들도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무명의 선교사가 될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기적, 선교가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이주민들에게 나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 임마누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게 될 때 이주민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선교가 온누리교회를 통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주민들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이 드러날 때 이주민들이 예수님의 제자, 무명의 선교사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명의 선교사를 통해서 크신 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2024-01-13
제14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