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

주일강단

[주일강단]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

 2025-07-12      제1548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5~51
/박종길 목사
 
예수님은 먼저 소수의 사람들을 택해서 제자로 세우십니다. 부족하고 불충분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우십니다. 제자 삼으시고, 훈련하고 교육해서 하나님 나라 큰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주시고,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부르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분을 우리가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시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빌립이 말했습니다. ‘와서 보시오!’”(45~46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부르십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다섯 명의 제자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사도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이 다섯 명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그들을 만나고, 선택하고, 회심하는 일이 각기 다릅니다. 그 사람에게 맞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도 각 사람에게 맞게 존중해 주시고 배려해 주십니다. 안드레와 또 한 명은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베드로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부르십니다. 나다나엘은 그의 편견을 제거하고, 메시아를 확인하는 은혜로운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부르십니다. 우리도 현재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미래의 모습으로 부르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 45~46절에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분을 소개하고,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있습니까? 빌립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 전하는 자리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의 반응이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면서 출신 배경으로 그분을 판단합니다. 나다나엘도 갈릴리 출신인데 불구하고 선입견과 출신 배경으로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9장을 보면, 다윗왕과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과 자기 왕궁을 지을 때 많은 백향목과 잔나무, 금 등을 북쪽에 있는 두로왕 히람에게 빌립니다. 솔로몬 때 히람왕이 공사 대금을 요구합니다. 그때 솔로몬이 뜬금없이 갈릴리에 있는 20개 성읍을 떼어서 그 값을 치르게 합니다. 갈릴리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에 속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두로왕 히람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볼품없고 쓸모없다는 뜻으로 ‘가불’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 입장에서는 매우 불행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입니다. 언제든지 뚝 떼어서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대접을 받았고, 이스라엘에서도 그렇게 취급했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나사렛에서 선한 게 나겠냐?”며 무시합니다. 세상은 출신을 따지기도 하고, 집안이나 학벌, 직업이나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직업이나 배경, 지역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는 어부도 있었고, 가난한 갈릴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세리도 있었고, 열혈당에 있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십니다. 빌립이 배타적이고 편협적인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판단하지 않거나 제한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아시는 예수님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참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다’”(47~48절).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이 “여기 참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놀라서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표현을 랍비들의 문학에서는 ‘그가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기도하고, 명상하고, 말씀을 묵상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고, 교제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묵상하고, 찾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영적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영적인 사람인 것, 간사함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숨을 곳이 없습니다. 결국, 빌립에게 핀잔주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49절).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셨습니다. 우리도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아픔과 고민,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도와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아시기 때문에 참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제 그보다 더 큰일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예수님이 야곱의 사닥다리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했던 내용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큰 일도 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과거보다 현재,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나은 축복임을 약속하십니다. 나다나엘의 까칠한 성격, 편협한 기질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 말투, 성격, 부족한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시고 미래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나다나엘을 보시는 게 아니라 미래의 나다나엘을 보십니다. 실수나 연약함 가운데 우리를 두지 않으시고 더 나은 자리, 더 성숙한 자리, 더 건강한 자리로 인도하시면서 “삶 속에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변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과거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금 모습으로 우리를 제한하지 않으시고 “더 큰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변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내도 변하지 않고, 심지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이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아시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불러주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야곱의 사닥다리, <창세기> 28장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했던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 꿈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가다가 한 장소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야곱은 거기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머리에 베고 누워 잤습니다. 그가 꿈에 보니 사닥다리 하나가 땅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창 28:10~12). 
야곱의 사닥다리가 이제 예수님의 사닥다리가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율법 혈통을 상징한다면, 예수님은 온 세상의 복음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새로운 벧엘, 즉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보여줍니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닥다리가 예수님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닥다리이고, 중보자입니다. 이 땅에 많은 길이 있지만,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묵상했던 야곱의 새 사닥다리가 바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세 가지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율법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닥다리로 옮겨졌습니다. 둘째, 나다나엘의 삶이 자기중심적이었다면, 이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와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셋째, 묵상과 명상의 자리에서 삶의 역동적인 축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지역적이고, 폐쇄적이고, 편협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통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해 쓰임 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제자 삼으십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제자’라는 표현이 269번이나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세 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과 유대인을 분리 구별하기 위한 표현에 사용됩니다.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셔서 제자 삼으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우리를 믿어주시고, 부르시고, 아시고, 보시는 분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냉담하게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시고, 아시고, 보시는 예수님과 함께 선교의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그보다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아시고, 보시며, 제자로 초청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그분과 동행하며 승리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1,105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