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 길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목자의 마음 맛있는 말씀 해설 길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목자의 마음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2절과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자신을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로 비유하셨다. 그리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물으신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마 18:12). “너희 중 누가 100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눅 15:4).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물음표라기보다는 느낌표에 가깝다.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기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부의 말이기 때문이다. 양 무리에서 이탈한 양은 생명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다. <양과 목자>의 저자 필립 켈러는 수년 동안 양을 치는 목자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저자는 양의 수가 한두 마리 모자랄 때면 가장 먼저 ‘내 양 중 한 마리가 어딘가에 뒤집혀 있겠구나. 빨리 찾아 일으켜 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고 고백한다. 필립 켈러의 ‘뒤집힌 양’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다. 뒤집힌 양은 등이 땅에 닿고 네 발이 허공을 향한 채 스스로 일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버둥거리지만 혼자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처음에는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매에”하고 소리 내어 울어보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상태에서 그 울음소리는 오히려 맹수의 표적이 된다. 결국, 양은 두려움과 좌절감 속에서 심하게 발버둥 치다가 지쳐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게 된다. 만일 목자가 빠른 시간 안에 그 현장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 양은 십중팔구 죽게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뒤집힌 양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네 발을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는데 버둥거리는 동안 양의 흑위(되새김질 동물의 첫 번째 위) 속에 가스가 차 오르기 시작한다. 가스가 차오르면 몸의 말단, 특히 사지부터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게 되다가 순환이 멎어버리게 된다. 날씨가 덥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쬘 때에는 뒤집힌 양이 몇 시간 내에 죽을 수도 있다. 독수리와 들개, 이리, 표범 같은 맹수들에게 뒤집힌 양은 쉽게 사냥할 수 있는 먹잇감일 뿐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표적으로 삼고 주시한다. 이처럼 길을 잃은 양은 뒤집혀 무력해진 채 죽거나 맹수의 공격으로 죽기 쉽다. 그렇기에 이 사실을 아는 목자에게 길 잃은 양의 문제는 무엇보다 급하다. 목자는 최우선 순위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게 된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성경의 비유에는 이처럼 생명을 놓고 벌어지는 시간적 긴박함에 대한 자각이 담겨 있다. 바로 그 시간적 긴박감에서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목자의 뜨거운 열정이 생겨나고, 마침내 찾아낸 양을 데리고 돌아올 때의 무한한 기쁨이 생긴다. 예수님은 자신을 잃은 양을 서둘러 찾아 나서는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시간에 대한 긴박함을 품을 것을 권면하셨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십시오”라고 드렸던 우리의 고백이 길 잃은 한 영혼을 향한 긴박한 마음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뜨거운 열정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박철웅 목사 (강남B공동체)
2026-03-21 제1581호
[맛있는 말씀 해설]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맛있는 말씀 해설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 8:2a 개역개정).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너희를 어떻게 이끄셨는지, 어떻게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를 시험해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고 하셨음을 기억하라”(신 8:2). <신명기>는 모세가 약속의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2세대에게 전한 마지막 설교다. 그 핵심은 바로 “기억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 40년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다. 단순한 과거 회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현재의 삶과 연결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근거로 삼으라는 영적 메시지다. 나약한 인간은 평안하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는다. 그러므로 “지난 광야의 길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겠다는 결단을 확인시키는 메시지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광야 길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모든 것이 나의 힘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기억하는 감사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첫 번째 목적은 ‘너희를 낮추시고’에 있다. ‘낮춘다’는 말은 고통을 겪게 한다거나 겸손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광야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자리한 의와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처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이집트와 홍해의 기적을 체험했지만, 광야의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베푸신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교만을 보시고, 그들을 낮추셔서 오직 당신만 의지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광야의 길은 세상의 헛된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늘의 양식인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영적 훈련소였다.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신 두 번째 목적은 ‘너희를 시험해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려고 하신 것’이다. 광야 길의 고난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시험하는 장소였다.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연단해서 정금처럼 순수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광야라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환경이 시험이 아니다. 그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는 반응이 바로 시험의 본질이다.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고,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즉, 광야에서의 시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자격과 능력을 갖추게 하는 시험대였다. 창립 40주년을 지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온누리교회의 지난 40년 광야 여정을 다시금 돌아본다. 그 여정은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신 연단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길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고, 감사를 발판 삼아 새롭게 펼쳐질 광야의 여정, 약속의 땅을 향해 순종으로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걸어가자. / 제치윤 목사(영종온누리교회)
2026-03-07 제1579호
[맛있는 말씀 해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맛있는 말씀 해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면접을 앞두고 이 말씀을 붙든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투자설명서를 내밀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마라톤 출발선이나 운동경기에서 유니폼에 이 말씀을 새기기도 하고,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녀의 수능시험이나 유학 준비를 앞두고 이 구절을 붙들고 기도한다. 이 모든 장면은 한 가지 공통된 인식을 보여준다. <빌립보서> 4장 13절이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성공’과 ‘자기 성취’를 위한 응원 구절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아름다운 고백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일에서 성공하게 해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성공 신앙’의 근거로 사용되기엔,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훨씬 더 깊고 오히려 정반대의 맥락에 서 있다. 본문을 담고 있는 빌립보서 4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지금 어떤 외적인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핍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족하는 삶의 태도를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11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하며, 풍요나 궁핍, 배부름이나 배고픔에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안을 말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 그러고 바로 이어지는 고백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원하는 바를 다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바울은 단지 ‘불편한 상황’을 이겨냈던 것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그는 매를 맞고,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 빠지고, 굶주리고, 헐벗고, 강도와 동족 및 거짓 형제의 위험에 시달리며, 죽을 뻔한 일을 여러 번 겪는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주어진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고백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영웅적 성공이 아니라, 고통과 결핍, 실패의 현장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의 외침인 것이다. 본문의 중심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다. 핵심은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약함 속에서도 주시는 은혜의 힘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은 바로 그 능력 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오늘의 괴로움도, 내일의 불확실함도 감당해낼 수 있다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 역시 본문을 ‘성공의 보증서’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시련과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외울 때 그 고백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해주소서”라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 어떤 상황이든 제가 믿음으로 살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무엇이든 이룬다’가 아니라, ‘무엇이든 감당하게 하신다’는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의 이 고백이 힘들고 지친 일상 속에서 우울하거나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길 바란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5-06-21 제1545호
[임직소감[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청지기 되겠습니다!" 2024 명예권사, 권사, 안수집사 임직 소감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청지기 되겠습니다!” 명예권사 6명, 권사 143명, 안수집사 504명 임직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청지기 653명이 세워졌다. 지난 11월 30일(토) 오후 4시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서 ‘2024 권사·안수집사 임직예배’를 드렸다. 이날 권사 149명(명예권사 6명, 권사 143명), 안수집사 504명(남 170명, 여 334명)이 임직됐다. 엄정숙 명예권사(양천공동체), 나미경 권사(신용산공동체), 이승우 집사(송파B공동체), 배윤숙 집사(인천온누리교회)가 임직 소감을 보내왔다. / 편집자 주 명예권사 ‘명예권사’라는 새 이름 선교사 자녀들(MK, Missionary Kids)은 얼굴은 한국인이지만 그들의 문화는 선교지와 똑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초록 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노랑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초록색입니다. 그들은 청소년 시절 정체성 혼란을 크게 겪습니다. 저는 약 17년 동안 MK들의 왕엄마 사역을 마치고 2017년 선교사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4년 동안 선교 본부(GPTI)에서 간사로 자원봉사를 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내려놓았습니다. 선교 비전이 분명한 온누리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여전한데도 점차 속도가 느려지고, 나의 소속감과 정체성, 사명감이 점점 흐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예배에도 나가고, 여러 성경 공부에도 참석해봤지만, 내가 초록 아이가 된 것처럼 낯선 상황이 늘 혼란스럽고 불편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는 다양한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데,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데서 저 스스로 한정하고, 자신 없어 머뭇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대일제자양육을 해보겠냐는 전화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동반자와 양육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계속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면서 이제는 온누리교회의 한 지체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섬김의 자리가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습니다. 무슨 섬김을 할 수 있을지 기도로 아뢰고 있을 즈음 명예권사 제도가 있음을 알고 신청했습니다. 제가 명예권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역부족하겠으나 온누리교회 명예권사로서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생겼습니다. 저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니까 저절로 새 힘과 용기가 났습니다. 인생의 경주에서 바통(baton)을 새로 받고 앞을 향해 달려가려는 선수가 되어 마음을 정비하고, 임직 안수를 받을 때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덧입혀주셔서 잘 달려갈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이제 선교사 호칭이 사라지고 온누리교회 ‘명예권사’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겸손과 사랑으로 공동체를 화목하게 세워가라”는 권면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온누리교회 명예권사로서 책무 수행에 힘쓸 것을 다짐합니다. / 엄정숙 권사(양천공동체) 권사 추수할 일꾼 서원! 2006년 안수집사 임직을 받고,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주위 분들이 임직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전이 됐지만,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체 리더십에게 여러 차례 권사 직분을 받으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직 부족하다며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너는 언제까지 섬김을 받는 자로 있으려고 하느냐”는 울림이 있었고, 떨리는 심정으로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임직대상자 교육에 참여하면서 권사 직분이 나의 자랑과 명예가 되지 않고, 더 낮은 자리에서 주위를 돌아보며 섬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에도 불구하고 임직스쿨 계획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필수 과제와 봉사 시간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과연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과제 중에 가장 부담이 큰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기상 시간이 힘들고 피곤했지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말씀으로 은혜받고, 오랜 시간 마음을 짓누르던 자녀에 대한 기도제목이 응답받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새벽기도회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큐티는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조원들과 나누고 삶에 적용하며 풍성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큐티와 성경통독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임직스쿨에서 건강한 영성과 리더, 행복한 가정, 전도 등을 배우면서 교회와 가정,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특히 온누리교회의 비전과 5가지 영성을 배우면서 말씀 공동체와 성령 공동체를 통해 받은 은혜를 선교와 사회참여로 실천해야 한다는 임직자의 책임과 사명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교회 봉사도 많은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러빙핸드와 주차봉사, 성찬 섬김 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는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협력해 선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됐습니다.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숙제하듯이 빨리 하나씩 해치우려고만 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음을 고백합니다. 교육과 봉사를 통해 주신 새로운 비전은 제가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훈련과정을 함께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아직 미숙하고 부족하지만 주신 직분 기쁨으로 잘 감당하겠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그러므로 추수할 주인에게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마 9:37).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서원합니다. / 나미경 권사(신용산공동체) 여자 안수집사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성되게 안수집사 임직을 권유받았을 때 고민이 되었지만,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임직받아야만 할 수 있는 봉사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정말 섬기고 싶은데 임직받지 못해서 섬길 수 없다면 매우 안타까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지난해 제 몸이 많이 안 좋았는데, 그나마 임직 과정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믿음 상태로는 나는 정말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임직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가 아닌데 형식적으로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고, ‘지금 하는 섬김으로도 벅찬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재훈 위임목사님의 책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를 읽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봉사와 헌신의 영역이 있다면 절대 하지 마십시오.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헌신은 억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유는 소중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나의 성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결코, 잃어버려질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간직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라는 말씀도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이후 모든 일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었고, 교회 각 처소에서 보이지 않게 섬기는 분들의 헌신과 노력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많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자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마음으로만 짧게 하고 넘기던 큐티에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루는 경험을 했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제 입술에서 떠나게 하셨고, 하나님 안에서 감사와 평안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10주 동안 이어진 임직스쿨은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서빙고온누리교회에서 믿음의 싹을 틔웠고, 양재온누리교회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인천온누리교회에서 열매 맺고 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성장했기에 이 좋은 교육을 당연하게 누리기만 한 것 같은데 이 지면을 빌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임직 과정에서 온누리교회의 살아있는 비전과 목표를 다시 한번 바라봤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건강한 영성을 키우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교회의 부르심에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각자의 일터에서 하나님께 하듯 신실하게 섬기며, 더 나아가 세계를 품고 땅끝까지 전도에 힘쓰는 온누리교회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습니다. 온누리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며 달려가는 여러 사역에 한마음으로 동참하고, 일꾼으로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온누리교회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며, 각 공동체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는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성되게 섬기기를 소망합니다. / 배윤숙 집사(인천온누리교회) 남자 안수집사 대적자에서 예수의 제자로! 저는 하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무례했고, ‘내가 왜 죄인이냐?’며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나이가 많았던 대학원 입학 동기 형은 저를 처음 볼 때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하며 전도했습니다. 넉살 좋고 성격 좋은 형이었는데, 그 형마저 결국 포기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타로 나간 미팅에서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와 교제하며 저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고난이 밀려와 위로하고 싶었는데 위로가 되지 않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아내에게 아무것도 아닌 저를 보며 교만했던 저는 좌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궁금해졌습니다. 우연히 故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제 발로 교회에 갔습니다. 그때 대학원 동기 형은 있을 수 없는 일어났다는 듯 저를 한참 바라봤습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과 등지고 살았던 저에게 성경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교회에서 진행하는 성경통독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믿고 싶어하는 저를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나눴더니 믿음의 선배들이 놀라며 “말씀을 부어 주신다”는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던지신 “네가 낫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네가 믿고 싶으냐?”로 들렸고, “그게 믿음”이라며 예수님이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적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극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됐지만, 신앙의 성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처음 소속된 순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변하지 않는 숨겨진 모습과 죄를 하나님께서 오래 다루셨습니다. 50년 가까이 안고 살았던 상처도 발견하며 치유됨을 순예배에서 경험했니다. 불의한 자를 막으려 싸우면서 분노로 힘든 나날을 보낸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목사님, 방장님과 대화하면서 그 짐을 벗어 던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 한 몸을 이루는 지체 공동체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대적자였던 제가 온누리교회에서 안수집사 직분을 받았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로 살지 않게 저를 건져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저를 돌보시는 세심함도 경험했습니다. 저는 아들이 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아들을 내어줘야 한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제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그 사랑 앞에 서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오후 5시 50분에 들어온 품꾼입니다. 사랑이신 포도원 주인을 위해 오후 6시까지 감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 이승우 집사(송파B공동체)
2024-12-07 제1519호
[주일강단] 잠긴 문 너머 오신 부활의 주님 잠긴 문 너머 오신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0:19~21 / 이재훈 위임목사 부활을 마주한 제자들의 반응은 놀람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맞이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반응한 기록이 있었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에 의문을 제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며 놀랍고 두려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요, 기이한 사건이요, 두려운 사건입니다. 구약의 여러 말씀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부활하실 것을 예언했고, 예수님도 친히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이미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못했는데, 바로 그것이 부활을 맞이하는 죄인 된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한 그들을 유대인들이 끝까지 추적해서 죽일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숨어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은 것이지만, 보다 깊은 그들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죄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절망,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등이 그들의 마음 문을 닫았고, 숨게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잠근 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잠긴 문은 그분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그분을 배신한 자책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최대한의 행동은 문을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에 보면 하나의 문이 아니라 모든 문을 잠갔습니다. 창문까지도 잠갔습니다. 조금도 빈틈없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고,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도망하는 몸짓이었습니다. 문을 잠근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깥세상이 두려울 때 우리는 문을 닫습니다. 관계의 문을 닫고, 미래를 향한 문을 닫습니다. 잠긴 방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난처인 동시에 감옥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립니다. 부활을 맞이하는 이 시간에도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이 있습니다.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고 잠근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패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서 그 누구도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설명 없이, 예고 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 전에 하나님이 항상 먼저 찾아오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이미 달려가고 있었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한 제자들이 있는 곳, 잠긴 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이 잠겼다고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죽음도, 무덤도 예수님을 막지 못했기에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잠긴 문도 그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잠긴 문을 통과하신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어떠한 장벽도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과 내 영혼 사이 어떤 문들이 있다 할지라도, 혹 그 문들이 강철판을 일곱 겹으로 대어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여시든지 통과하시든지 하여서 내 마음에 도달하실 수가 있는 분이다.” 또한 예수님이 그 문으로 들어오신 것은 단지 어떤 분이신가를 보이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문이 잠긴 것보다 굳게 잠긴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은 예수님의 상처뿐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로 그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부활하신 당일입니다. 그 하루 동안 여러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또 다른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후 내내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두 제자는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잠긴 문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증언이 하루 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무렵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제자들을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고, 마음도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문에는 빗장이 하나였지만, 마음의 문 빗장에는 여러 겹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수치심과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예수님이 물리적인 문을 통과하신 것은 부활하신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다른 방식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두려운 마음, 닫힌 마음을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종일 열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부활하신 당일에 이토록 집요하게 제자들을 찾아다니신 것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상처를 내보이신 것입니다. 도마에게만 상처를 보이신 게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한 열쇠입니다. 왜 상처를 보여주셨습니까? 왜 설명이나 다른 교훈을 주지 않고, 상처를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잠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실패와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버렸다. 그분이 고난 받을 때 도망쳤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해도 나 같은 사람을 반기실 리 없다”라고 여기는 그들의 죄와 실패가 상처가 되어서 자물쇠처럼 그들의 마음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적적으로 예수님이 문 안으로 들어오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상처가 마음을 닫았다면,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치유하고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예수님의 상처’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상처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상처를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책감의 뿌리를 뽑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상처는 너를 위한 것이다. 이 상처로 네 죗값이 지불되었다. 이 창 자국으로 너와 하나님 사이의 담이 무너졌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의 상처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보이신 것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에 굳건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죽었고 내가 살아났다. 그러므로 너희 죄는 용서받았다. 이것이 평강의 근거다.’ 그 상처들은 영원한 중보의 증거이다.” 청교도 신학자 아이작 암브로우스도 ‘예수님이 왜 상처를 남겨두셨을까’를 두 가지로 답변했습니다. 첫째, 앞서 칼뱅이 말한 대로 제자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분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합니다. 둘째, “그것은 그 상처와 자국들은 그리스도의 광채와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는 제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상처는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게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라는 선교사도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 상처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승리의 증표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 상처를 지우지 않으셨다. 당신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그 상처를 남겨 두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보았을 때 닫힌 마음이 기쁨으로 열렸습니다. 단지 그 상처를 보고 “아, 예수님이시군요”라는 확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심을 확인하는 걸 뛰어넘어 그들의 죄로 인한 죄책감, 수치심, 실패와 절망, 불안 등 그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상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과 상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십시오.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두 번 선포하셨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두 번 하셨습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평강 사이에 상처를 보이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두 번의 평강 선포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 번째 평강의 인사는 양심을 위한 것이요, 두 번째 인사는 마음을 위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에 관계된 것이요, 후자는 세상에서의 삶의 상태와 관계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롬 5:1)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평강’(빌 4:7)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과 하나님의 평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 번째 평강은 죄를 용서받음으로 인해 누리는 ‘양심의 평강’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한복판에 던져져서 어떠한 환경에서도 지켜질 수 있는 ‘내면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릴 수 있게 된 평강과 하나님 안에 있는 평강을 우리도 세상 가운데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특히 두 번째 평강을 선포하실 때는 파송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평강은 그저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고, 두 번째 평강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평강입니다. 잠긴 문 안에서 그저 누리는 평강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평강이 아닙니다. 우리의 닫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 누리는 평강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활의 기쁨은 결코 내 안에 머무는 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분명히 믿는 사람들은 그 소식을 혼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갑자기 용감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훈련을 받고, 어떤 전략을 세웠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잠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잠긴 방 안에 머물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문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위협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바꿔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초월하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 평강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일하는 세상, 전쟁과 기근과 갈등으로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긴 방 안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오셨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우리의 잠긴 마음의 방 안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 가운데 서서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십시오. 그 평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부활의 사랑은 잠긴 문을 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활의 능력과 사랑으로 닫힌 문을 넘어, 우리 스스로 잠근 문을 넘어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며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하시며,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의 잠긴 문을 넘어 찾아오시는 그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4-10 제1584호
[주일강단]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이재훈 위임목사 열두 제자 중에서 마지막 제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 가장 마지막에 항상 나오는 제자,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30절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밤이러라’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문장에 유다라는 제자의 비극적인 인생을 압축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가 대조됩니다. “그가 조각을 받고 나갔더니 밤이다”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 표기가 아닙니다. 유다의 영적 상태와 운명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유다의 퇴장과 어둠의 시작을 연결함으로써 그의 악행이 어둠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더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유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을 선택했습니다. 정반대 인생도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로 그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으면서도 빛이 아닌 어둠을 사랑해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라는 이름 앞에 붙여진 ‘가룟’은 지역 이름입니다.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의 가룟은 ‘이스카리옷’, 히브리어로 ‘이쉬 그리옷’입니다. ‘그리옷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유다 지파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유대 지방입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모두 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만 유대 지방 출신입니다. 이것조차도 그가 다른 제자들과 깊이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일 거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제자들보다 훨씬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바라본 이유로 여기기도 합니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돈을 맡았던 회계였습니다. 이 직책은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아무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절에 쓸 것을 사라”고 하시는 줄로 알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겉모습은 완벽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였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에 선택한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유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배웠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도도 했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 행함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의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시작이 아니라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대답이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은 삼십 냥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인데, 매우 부족한 대답입니다. 그것은 거대하게 쌓여 있는 마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배신의 유일한 동기라고 복음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가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아서 배신한 거라면 스승을 그 작은 돈에 팔아넘기는 것보다 계속 돈궤를 맡고 있는 게, 그래서 도둑질하는 게 더 큰 수익 아닐까요? 또 그의 주된 관심이 돈을 모으는 일이라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분명 돈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어느 정도 포기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면 그가 후회하며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은 양심도 팔아넘기기 때문에 후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불을 붙인 계기는 되었지만, 그보다 깊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잘못된 메시아 사상 그리고 탐욕과 위선 적어도 다섯 가지 뿌리가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메시아 사상입니다. 정치적 왕국을 꿈꿨던 그의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의 메시아관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룹에서 세 번째 나오는 다대오, 유다, 시몬의 공통점은 모두 ‘열심당원 같은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마다 유다는 신났을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보이신 분이라면, 이런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면, 이렇게 거룩하고 순수한 분이라면 유대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제2의 모세가 되어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독립시켜 주기에 충분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가 몰려올수록 피하셨고, <마가복음>에서 여러 차례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다는 계속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로마를 비판하고, “저 가이사를 끌어내려야 된다. 유대가 독립돼야 된다”라고 선포만 하시면 유대 민족이 하나가 되어서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예수님은 관심 없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온 것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다의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유다에게 계속 실망으로 누적되고, 분노로 발전되었고, 결국 배신에 이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탐욕과 위선의 모습입니다. 3년 동안 그는 위장 생활을 했고, 점진적으로 그 위선이 깊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유다가 비판했습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은 것을 비판했습니다. 얼마나 의로워 보입니까? 그러나 위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 그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합니다. ‘훔쳐갔다’는 것은 미완료 시제로,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탐욕은 하루아침에 사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작은 합리화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인 자기기만을 거쳐 그 사람 전체를 삼켜버립니다. 유다는 완벽하게 자신을 위장했습니다. 3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먹고 기도하고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놀라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연이어 질문합니다. 놀랍게도 유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탐욕과 위선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었습니다. 과정 중에 점점 탐욕과 위선의 지배를 당했습니다.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 셋째,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로 바뀐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유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제자들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며 지적하셨습니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책망을 받을 때마다 돌이켜서 점점 변화되어 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의 눈길과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반대로 갔습니다. 이것이 악한 자기 보호 본능입니다. 게다가 유다는 매우 상황 파악이 빨랐던 사람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사람, 돈 계산을 잘하는 사람, 상황 파악이 가장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당국이 예수님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가장 먼저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써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배신자는 살려줄 것이다’라는 자기 보호의 본능을 보입니다. 야비한 본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넷째,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가룟 유다에 대한 사단의 개입을 두 단계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13장 2절에서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넣었다’는 단어를 씁니다. 27절을 보면, “유다가 빵을 받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라고 합니다. 생각을 넣는 것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유다의 탐욕과 위선이 사단에게 기회를 주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마귀가 그를 지배해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한순간에 우리를 통째로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들어오고, 그 생각이 우리의 의지를 사로잡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단을 내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용하면 결국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 다섯 번째,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라는 표현을 ‘유다까지’라고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발도 씻기셨고, 식사하는 가운데 빵 조각 하나를 떼어 주셨습니다. 최고 중요한 손님에게 주는 행위였습니다. 빵 조각을 떼어 건네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사랑까지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 닫혀 있었고, 그 순간 마귀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마음을 닫는 만큼 사단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활짝 열지 않으면, 마귀가 활짝 들어온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만큼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유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유다의 최후의 모습을 기록하는데, 그가 ‘뉘우쳤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 삼십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며 뉘우쳤고, 자살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은 감정적 후회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 돌이킴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그냥 후회한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회개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을 때이고, 또 하나는 겟세마네에서 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배반하느냐”라고 하셨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은 삼십을 돌려주며 가책을 느꼈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기회 모두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심령이 몹시 괴로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몹시 괴롭다고 하신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십자가를 내다보시며, 그리고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괴로우신 것은 배신감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수많은 영혼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배신을 촉구하신 게 아닙니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 예수님의 친구가 메시아를 배신할 것이 예언되었다면 누군가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하는 것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 예정의 희생자가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다복음>이라는 위경에서는 유다를 미화합니다. 그가 원치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행했던 ‘비운의 운명’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반과 죽음이 예언되어 있다고 해서 유다가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예언을 이루고자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악한 마음 때문에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죄 짓는 것을 예정하지 않으십니다. 죄란 철저히 인간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자기 의지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유다가 먼저 갑니다.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 넘겨줄지를 먼저 제안합니다. 그가 제안을 받은 게 아니라 먼저 제안했고, 먼저 주도적으로 의논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원치 않은 악역을 맡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악인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내버려 두심으로 이용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하셨고,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지만, 그가 끝까지 거부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을 뿐이며,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은혜를 거절한 것은 유다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악한 선택을 아셨고, 그의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악인으로 규정하며 이 사건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죄 역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유일무이한 죄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도 유다 같은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유다의 배신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배신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단의 먹이와 표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제자마저 탐욕과 위선으로 회개하지 않음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탐욕과 위선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유다가 잘못된 신앙의 동기를 가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작은 타협의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유다의 배신도 작은 탐욕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뒤에 숨어 있는 내면을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후회가 아닌 회개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유다의 비극은 죄를 지은 것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돌아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넘겨준 행위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유다의 배신을 보면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줌으로써 배신한 것이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말로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끝맺는 말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나가는 길이 빛의 길인가? 아니면 어둠의 길인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완전한 어둠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며 배신의 뿌리를 끊임없이 끊어내고,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4-04 제1583호
[주일강단] 다대오 유다: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 다대오 유다: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 <마가복음> 3:16~19, <요한복음> 14:21~24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11번째 제자는 갈릴리 출신의 ‘유다’ 혹은 ‘다대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제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절의 일부 사본에서는 ‘레배오’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같은 이름이 많았고, 두세 개 이름을 가진 것이 흔했기 때문에 이것은 혼란이나 불일치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입니다. ‘다대오’는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의 단축형으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부모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또 ‘가룟 유다’처럼 그 앞에 지역 이름을 넣어서 구분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의미가 같은 다른 언어, 그리스어나 아람어 등 다른 언어의 의미가 같은 단어를 차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를 선택해서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대오’와 ‘유다’라는 이름을 당대인들은 마치 히브리어 사울과 그리스어 바울처럼, 같은 운율을 가졌기에 비슷한 발음으로 여기고 차용했습니다. ‘다대오’와 ‘유다’가 같은 발음권에 있기 때문에 ‘유다’라는 사람이 ‘다대오’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것으로 봅니다. ‘유다’라는 본명을 가진 제자가 그리스식 별명인 ‘다대오’, ‘테오도토스’의 약칭으로 불린 것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 당시 그리스 이름들, 유대인들 가운데 ‘데오’가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들어간 이름들을 유대인들도 많이 사용했는데, 거기서 ‘다대오’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다대오’의 그리스 발음으로 ‘타다이오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다대오’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발음으로는 ‘테오도토스’의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저는 ‘다대오 유다’라고 함께 불렀습니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 우리가 아니라 세상 다대오 유다가 제자들의 명단 외에 나오는 기록은 <요한복음> 14장 22절이 유일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질문을 단 한 번 던진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다른 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요 14:22절).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떠나시는 듯한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제자들 가운데 불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그 분위기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이 답변을 해주셨고, 그 답변에 또 다른 제자 도마가 질문했고,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을 또다시 빌립이 질문했고, 그 대답에 대해서 또다시 질문으로 던져진 것이 다대오 유다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의미를 알려면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도마, 빌립, 유다로 이어지는 네 명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 중반부터 14장 전체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주여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고, 빌립은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주여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한 다대오 유다의 질문과 앞서 질문한 세 명, 베드로, 도마, 빌립의 질문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앞서 질문한 세 명은 초점이 우리, 곧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들도 그곳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주께서 가시는 길을 우리가,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합니다. 알려 달라”고 질문했습니다. 빌립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질문했습니다. 초점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제자들의 염려, 알고자 하는 마음, 제자들에게 나타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초점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22절). 여기에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이 있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1세기 팔레스타인을 로마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세상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빌립에게 주신 답변의 마지막 부분에 반응하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21절).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에 반응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셨는데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십니까? 세상 한복판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시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 제국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주저하고 계십니까?” 다대오 유다의 질문, 두 가지 의미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신학적인 의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왜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분의 왕 되심을 선포하지 않으시는가? 둘째, 실존적인 좌절입니다. 예수님은 곧 떠나신다고 하는데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로마는 여전히 유대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에게만 나타나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겠는가?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불의함을 보는 눈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방식이 자신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에 이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질문이 아니라 평소에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요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도 예수님이 나타나야 하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는 온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실 거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메시아로 오셨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시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세상에도 그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셔서 통치하셔야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대한 소망,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쁜 의미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올바로 바뀌어야 된다는 건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과의 시각 차이입니다. 그는 당장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서든 아니면 교훈을 통해서든 로마 시저의 통치를 끝내주시고, 유대의 불의한 관료들을 무너뜨리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생각은 당시 열심당원들의 생각 흐름과 같은 맥락입니다. 라틴어 성경 사본에서 다대오 유다를 ‘열심당원 유다’라고 표현 한 것을 보면 그가 그들의 시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만큼은 아닐지 모릅니다. 칼을 들고 사람들을 암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맥락에서 메시아로 오신 분은 반드시 이 세상을 공개적으로 변화시켜 주셔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었던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출애굽 역사를 읽으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애굽의 바로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처럼, <신명기> 말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2의 모세가 오실 것이고, 그가 오신다면 로마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메시아 사상이요, 소망이었습니다. 다대오 유다에게도 그 소망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오해와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아버지와 내가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3~24절). 예수님의 대답은 21절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21절을 더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함께 내주하시게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다대오 유다는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왜 세상을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신 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주실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풀어 쓰면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에 무관심하신 게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한번 풀어 써 보았습니다. “다대오 유다야, 나는 네가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기대하는 그런 왕으로 통치하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내 나라는 로마의 시저를 끌어내리고 유대를 독립시켜 세우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다. 나는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왕관을 쓰기 전에 십자가를 져야 하며 내일이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며, 나도 너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지만 나를 어떻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의 권한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버지께서 명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대오 유다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알아주면서 그가 가진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 통치 세력의 메시아로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주하심, 내적인 거주와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유다의 오해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메시아의 공개적인 나타남, 현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세상의 변혁은 내부로부터, 사랑과 순종으로 형성된 사람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처를 삼으심, 내주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 속에 나타난 선교적 관심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초점이 있었다면,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매우 올바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온 세상을 비추셔야 하는데 왜 제자들에게만 비추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 은혜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준 한계입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택함 받은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을 통해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먼저 택하신 유대인들이 바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라,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세상 속에 빛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결국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에데사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함으로써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가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다대오 유다의 질문을 기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그 답의 일부로 만드신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보면서 성도들에게도 다대오 유다와 같이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대오 유다에게 주신 답변을 기초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내 방식은 다르다. 나는 너희 안에 거처를 삼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말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나는 너희를 통해 세상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종교 문화 사회학자인 제임스 헌터가 쓴 <To Change the World>, 한글로는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세 가지 패러다임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방어적 대응’입니다. 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 반응을 취했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되찾아야 된다는 흐름 속에서 열심당원이 나온 것입니다. 메시아가 지금 당장 로마를 몰아내야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둘째, ‘문화적 관련성 추구’입니다. 메시아는 억눌린 자의 편에 계신다는 입장으로 ‘필요에 응답해야 된다’는 자유주의 여러 신학 사상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셋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분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순수성을 지켜야 된다는 분리주의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 결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에게 깔려 있는 원한과 분개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제임스 헌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 제자들의 신실한 임재, 이 세상 안에 신실하게 임재하는 것이 바로 유일한 대안이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제자들이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제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처를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세상에 들어가 신실하게 존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 나라의 많은 문제를 소수 사람들의 책임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 신실하게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가 세상 속에 신실한 주의 임재 통로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3-28 제1582호
[주일강단] 시몬: 칼을 버리고 십자가를 들다 시몬: 칼을 버리고 십자가를 들다 <누가복음> 6:12~16, <사도행전> 1:12~14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살펴보면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동일한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전후 500년 동안 유대인들의 이름을 모은 <고대 후기 유대인 이름 사전>이 2002년 발간됐는데, 이 사전에서 분석한 내용을 살펴 보면, 당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이름이 ‘시몬’이었습니다. 그다음이 요셉, 엘르아살, 유다, 요하난, 여호수아 등의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유대 남성 중에서 18.2%가 시몬 혹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여성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은 ‘마리아’와 ‘살로메’였습니다. 당시 여성 38.9%가 마리아 혹은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이 같은 이름을 사용한 이유 왜 이 이름들이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많이 사용되었을까요? 같은 이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이름을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리차드 보컴(Richard Bauckham)이라는 저명한 신학자가 이것을 잘 분석했습니다. 당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남성 이름 아홉 중에서 여섯은 하스몬 가문의 아들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즉,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의 이름이었습니다. 여성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마리아와 살로메도 역시 하스몬 가문의 가족의 이름이었습니다. 여러분, 하스몬 가문은 어떤 가문입니까? 주전 2세기에 독립을 쟁취하고, 국가를 이룬 마지막 유대인 정권 통치 가문이었습니다. 이들 가문의 구성원 이름이 로마 통치 시대에서도 계속 인기를 얻고,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스몬 가문의 애국심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습니다. 하스몬 가문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게 된 계기는 ‘마카비 혁명’ 때문입니다. 주전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제사장이 맛다디아였습니다.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인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이 봉기를 일으킵니다. 특히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는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에서 승리해서 성전을 탈환하고 다시 정결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절기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큰 축제로 지키는 ‘하누카’라는 수전절입니다. 그 이후 100년 동안 유대인들은 하스몬 가문을 통해서 다윗 왕조 이후 처음으로 실질적인 독립 자치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스몬가를 존경했습니다. 그들의 자립정신과 독립 정신, 그리고 실제적으로 독립 자치 국가를 이루었던 것에 대한 존경이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제2의 하스몬 가문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스몬가의 가족들과 후예들의 이름을 자녀들에게 붙이기 시작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이름을 자주 사용하고 불렀던 것입니다. 열심당원이었던 ‘시몬’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됐던 ‘시몬’이라는 남자 이름은 하스몬 가문의 2대 통치자였던 시몬 타시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시몬이라는 남자 이름을 많이 지은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에 저항하고, 로마에게 승리하기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 나옵니다. 베드로도 시몬이었고, 오늘 살펴볼 열심당원도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 영어로는 젤롯(Zealot)인이라고 합니다. 과거 영어 성경을 번역할 때, 킹제임스 번역에서는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표기해서 마치 그가 가나안 출신 사람인 것처럼 여겼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정확하게 번역해서 ‘열심당원’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나 옛날 한글 성경에서도 ‘가나안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의 킹제임스 버전 번역을 가져온 것인데, 히브리어의 ‘깐나나’, 즉 ‘열정’이라는 뜻을 지역 이름으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서나 성경 번역에서도 ‘가나안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정확하게 열정이라는 뜻을 가진 ‘젤로스’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젤로인’이라고 표기합니다. 영어의 젤롯(Zealot)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인데, 한국어 번역에서는 ‘열심당원’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열심, 열정이라는 원래 단어의 의미와 같습니다. 칼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검을 든 하나님 나라 군사로 열심당원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자들을 창으로 찔러 심판했습니다. ‘비느하스의 열심’이 열심당원들의 모델이었습니다. 그 열심을 이어받은 하스몬 가문이 당시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고, 투쟁했던 것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은 주전 6년 가말라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의 인구 조사에 저항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유대인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신앙과 애국심으로 인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열심당원 활동은 제1차 유대 로마 전쟁 마사다 요새 전투에서 비극적인 절정에 다다릅니다. 주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도시 전체를 함락했을 때, 유대인들이 유다 광야 절벽에 있는 해발 400m 높이의 마사다 요새로 피합니다. 그곳에서 3년을 버팁니다. 967명이 완전히 로마군에 의해서 포위된 마사다 요새에서 3년을 기적적으로 버팁니다. 주후 73년 1만 5천명의 로마 군인들이 거대한 흙을 쌓아 올려 경사로를 만들어서 성벽을 돌파했을 때, 그들은 로마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선택을 해서 960명이 자결합니다. 그곳이 지금도 성지순례 가면 꼭 방문하는 ‘마사다 요새’입니다.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타협 없는 신념, 민족을 위한 열정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열심당원이라는 글자는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목숨을 건 이념과 신념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유대 사회에 한편으로는 존경, 또 한편으로는 공포를 가져다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칼’이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로 여겨졌고, 가이사에게 절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열심당원 중에서도 핵심 분파가 있는데, ‘시카리’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카’라는 것은 작은 칼, 중동 지방의 곡선형 단검입니다. 늘 품에 작은 단검, 곡선형 단검을 가지고 다니면서 암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스몬 가문이 칼을 들어 싸워 성전을 청소했듯이, 열심당원들도 칼을 들어 로마를 청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시몬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칼로 여겼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됩니다. 이제 칼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검을 든 하나님 나라의 군사가 된 것입니다. 시몬이 경험한 세 가지 변화 이념을 뛰어넘는 복음 열심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경험한 구체적인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이념을 뛰어넘는 복음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의 눈에는 예수님이 돋보였을 것이고, 그분께 이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권세 있는 말씀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분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나 쉽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당원 중에 여러 사람이 예수님이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열심당원들이 추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겼던 열심당원과 달리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당원들이 추구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셨고, 칼을 사용하는 무력적인 행위를 책망하실 뿐이었습니다. 시몬이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는 언젠가 열심당원들이 꿈꾸는 대로 로마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의 독립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몬이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한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면 행복한 나라,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믿었지만, 로마의 압제보다 근원적인 죄의 압제에 사로잡힌 영혼들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념으로도 고칠 수 없었던 귀신 들린 자들이 자유케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 앞에서 생명의 능력,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이념을 뛰어넘는 복음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념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외부적인 환경 혹은 법과 제도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과 단절된 죄에 있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법과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그 사랑의 바다에 감격해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세상이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념은 사람의 겉모양만 변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본성을 재창조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이념을 뛰어넘는 복음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극단을 뛰어넘는 화해 둘째, 극단을 뛰어넘는 화해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는 열심당원들이 증오할 뿐만 아니라 암살하려고 했던 세리 출신 마태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시몬의 입장에서 볼 때 마태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반역자와 그 반역자를 처단하는 암살자가 같은 밥상에 앉아 있는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이 두 사람을 12제자 일원으로 부르신 이유는 갈등이 아니라 화해를 만드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서 만나서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당시 사회 분위기로 봐서는 이 두 사람이 계속 문제를 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복음서에 기록될 법도 한데 두 사람이 다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다툼의 주인공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좌우편에 앉겠다고 함으로써 다른 제자들과 늘 다툼의 주인공이었습니다. 1942년 인종 차별이 매우 심했던 미국 사회에서 특히 조지아주에 흑인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많았던 주였습니다. 그때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이라는 한 목사가 코이노니아 농장을 만들었는데, 그곳은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게 노동하고 수익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의 많은 협박과 테러, 보복 속에서도 꿋꿋하게 흑인 농부들을 보호하고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과 하나 됨을 이루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가 훗날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운동의 모태가 됩니다. 클라렌스 조던이라는 목사의 제자로 함께하게 된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라는 백만장자가 당시 어렵게 살고, 집이 없는 흑인들을 위해서 집을 만들어 주는 사역을 했는데,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서 해비타트 사역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적대적이었던 두 인종이 하나가 되는 일은 복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시몬과 마태가 같은 공동체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극단을 뛰어넘어서 하나 되게 하는 역사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다양함 속에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열정을 뛰어넘는 성화 셋째, 열정을 뛰어넘는 성화입니다. 열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될 때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열정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하스몬가의 열정을 이어받은 열심당원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열정은 소멸하지 않고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열정을 소멸시키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교정하는 것입니다. 로마를 향한 분노, 그 엄청난 에너지가 복음을 전하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정은 때로 잘못된 도구를 사용하게 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일했다고 했습니다. 그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 믿는 이들을 핍박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이 복음을 온 열방에 증거하는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매우 열정이 많았고, 마니교에도 심취해 탐욕의 노예로 살던 그가 변했습니다. 지적인 열정도 많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열정으로 바뀜으로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이자 신학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열심당원의 전사에서 다락방의 기도자, 전도자로! 시몬이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시몬은 다락방의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순절 사건 현장에도 있었고, <사도행전> 제자들의 명단에서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을 경험한 이후 그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기도가 되었습니다. 로마를 향한 저항 대신에 성령님을 향한 갈망으로 그의 열심이 채워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성화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온도를 낮추는 게 아니라 불꽃을 옮기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칼을 드는 힘이 선교에 자신을 드리는 힘이 된 것입니다. 유대 민족만 사랑하는 국수주의자, 민족주의자가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시몬이 열심당원의 전사에서 이제 다락방의 기도자, 전도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가졌던 열정은 누군가를 죽이는 열심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살리는 열심이 된 것입니다. 여러 전승의 의하면, 그는 에티오피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처럼 우리 안에 있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열정이 하나님 나라의 열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자의 열심으로 변화되어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3-21 제1581호
[News] “크리스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회복사역본부, ‘2026 정신건강 세미나’ 개최 참가자 모집 시작 … 하단 QR코드로 신청 2026 정신건강 세미나 ‘크리스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불안과 우울에 대한 통합적 치료와 돌봄’ 참가자를 모집한다. 5월 10일(일)까지 하단 QR코드로 신청하면 된다. 참가비는 5만 원(식사, 간식비 및 교재비 포함). 회복사역본부 계좌(하나은행 573-910004-30205)로 입금하면 된다. 이번 정신건강 세미나 참석자는 전문상담사 자격 취득에 필요한 공개사례발표회 참석 1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정신건강 세미나 ‘크리스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불안과 우울에 대한 통합적 치료와 돌봄’은 5월 19일(화)부터 21일(목)까지 서빙고온누리교회 비전홀에서 열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다. 온누리교회, 한국기독교 상담심리학회, 한국교회 상담사역 네트워크가 주최하고, 회복사역본부가 주관한다. 1일차 ‘정신’, 2일차 ‘정서’, 3일차 ‘통합’을 주제로 다양한 강의가 이어진다. 1일차(5월 19일)에는 채규만 교사(한국 및 미국 임상 심리전문가) ‘불안에 대한 뇌 과학적 근거 기반 치료 기법’, 김성진 진료부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불안도 병일까’, 권수영 교수(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 ‘불안은 죄가 아닙니다: 몸과 신경계로 이해하는 신앙의 회복’, 채정호 교수(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불안의 스펙트럼 치유: 영성챙김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강의한다. 2일차(5월 20일)에는 이헌주 교수(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불안을 도전으로 바꾸는 자기효능감’, 장석연 원장(그로웨이브 심리상담센터) ‘우울과 불안 다루기’, 유현주 교수(Soh 심리영성센터 소장) ‘애착과 불안: 안정애착으로의 여정’, 안해용 목사(목회자마음돌봄센터 센터장) ‘우울과 자살의 경계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주제로 강의한다. 3일차(5월 21일)에는 남윤영 박사(국립정신건강센터 의료부장) ‘공동체의 우울증 환자 돌봄’, 최용일 장로(청담경희한의원, 청담경희한방연구소 원장)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인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지키자’, 정주호 대표(한동대학교 글러벌 리더십학부 겸임교수) ‘몸은 마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 ‘크리스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불안에 대한 통합적 치료와 돌봄’을 주제로 강의한다.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는 “우리는 불안을 안은 채로 여전히 사랑하고, 예배하며, 내일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서 “불안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과 그들을 돕고 싶은 모든 성도가 정신건강 세미나에 참석해서 참된 자유와 회복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문의: 02-3215-3532 / 홍하영, 남현영 기자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 4월 19일까지 … 의류·생활용품 등 기증 온누리교회와 굿윌스토어가 함께 ‘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양재온누리교회와 인천, 양지, 평택 4월 19일, 대전과 세종 4월 19일과 26일, 강동은 4월 19일까지 상시 진 행한다. 부천은 기증함이 따로 있어 상시 수거한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 페인에는 캠퍼스별 지정된 장소에 의류, 생활용품, 소형 가전제품, 주방 용품, 도서 등을 가져다 두는 방식으 로 참여하면 된다. 성도들이 기증한 물품은 장애인 및 취약계층의 일자 리 창출을 위해 재판매된다.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굿윌스토어는 장애인이 일할 능력을 키워서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삶의 질과 존엄성 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소매 유통 중심의 직업 재활 시설이다. 문의: 1533-0091 / 남현영 기자 이재훈 위임목사, 4월 15일까지 미국 방문 동아시아 기독교 컨퍼런스 강의, 맞춤전도 특강 이재훈 위임목사가 강의와 설교 등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지난 4월 9일(목)부터 11일(토)까지 Gordon-Conwel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기독교 컨퍼런스(The East Asian Christianity Conference)에서 ‘사도행전에 기반한 선교적 교회론 (An Acts-Shaped Missional Ecclesiology: Onnuri Church and Crit ical Contextualization)’ 을 주제로 발표했다. 4월 12일(일)에는 뉴저지온누리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4월 13일(월)에는 TIMA(미주 두란노국제선교회) 20주년 감사예배를 드 린다. 4월 15일(수)에는 필라델피아 소재 Westminster Theological Semi nary에서 ‘맞춤전도(The Cal to Contextualize)’ 특강을 한다.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4월 30일까지 참가자 모집 CGN 기획 K-CCM 글로벌 오디 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 참가자 를 모집한다. 참가신청은 4월 30일 (목)까지 이메일(cgnhealingvoice@ daum.net)로 지원서와 무반주 가창 영상(자유곡 1곡, 지정곡 1곡), 사진 파일을 제출하면 된다. 가창 영상은 스마트폰 기본 카메라로 촬영해야 한다. 이미 데뷔한 프로 가수와 찬양 사역자 등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 힐링보이스’ 공식 홈페이지(healin gvoice.cgnkorea.net)에서 더 자세 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 이스’는 9개월에 걸친 장기 프로그 램이다. 예선과 본선, 결선을 거쳐 최종 우승자를 선정한다. 최종 우승 자에게는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하 고, 결선에 진출하는 TOP 7인에게 는 CCM 음원 발매, CGN 국내∙외 투어 콘서트 참여, CGN 후속 프로 그램 출연 등의 특전이 주어진다. 문의: 02-3275-9333 / 남현영 기자 ‘미주두란노국제선교회’ 창립 20주년 감사예배 미주두란노국제선교회(TIMA) 창 립 20주년 감사예배를 4월 13일(월) 오후 7시 뉴저지온누리교회에서 드 린다. 미주 두란노국제선교회 창립 20주년 감사예배에서는 특순 ‘하나 님의 부르심(선교사 일동)’, 이재훈 위임목사 말씀 선포, 한필연 선교사 (과테말라 선교사) 간증, 도육환 목 사(TIMA 창립 본부장, 영종온누리 교회) 축사 등의 순서가 이어진다. 사회는 마크 최 목사가 맡는다. / 남현영 기자 4월 비전헌금, ‘도쿄 그리스도교 대학’ 후원 4월 11일(토)과 12일(일) 봉헌하는 4월 비전헌금은 ‘도쿄 그리스도교 대학’을 후원하는 데 사용한다. 도쿄 그리스도교 대학은 ‘무너진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를’이라는 교 육 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 다. 일본 복음주의 신학교 중에서 문 부과학성 인가를 받은 유일한 4년 제 대학이다. 목회자를 양성하고, 학 생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훈 련해서 교회와 사회로 나가도록 돕 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공동체, 국적을 가진 학생들이 한데 어우러 져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 남현영 기자
2026-04-11 제1584호
[News] 죽음을 이기신 그 사랑··· 죽음을 이기신 그 사랑··· 4월 4~5일 ‘부활주일’ … 칸타타 등 행사 이어져 차세대 ‘부활절 문걸이’, 강동 ‘2026 행복이음 축제 4월 4일(토)과 5일(일)은 부활주일이다.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부활주일 예배 를 드린다. 서빙고온누리교회 토요주일 1~2 부 예배에서는 버금미션콰이어 ‘I AM’, 일요 주일 1~4부 예배에서는 워십콰이어 ‘나를 구 원하신 예수’를 주제로 칸타타를 한다. 양재온누리교회 토요주일예배에서는 양재 토요챔버팀이 ‘완전한 사랑’, 양재 일요주일 1~4예배에서는 주기쁨찬양사역팀 ‘그 어린 양’을 주제로 찬양한다. 도곡교육관 일요주일 1~2예배에서는 주경배찬양사역팀이 ‘모든 것 이루셨네’를 주제로 칸타타를 한다. 다른 캠퍼스에서도 부활주일 예배를 드린다. 차세대사역본부에서는 각 가정에 ‘부활절 가정예배 문걸이’를 나눠준다. ‘부활절 가정 예배 문걸이’에는 가족예배 가이드와 부활절 기도문이 적혀 있다. 각 부서에서는 부활절 기 획예배 및 부활절과 관련된 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한다. 강동온누리교회는 지역 주민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눈다. ‘2026 행복이음 축제’가 4월 5 일(일) 오후 1시 30분 강동구 천호로데오거리 나비쇼핑몰 1층 광장에서 열린다. 이번 축제에서는 부활절 달걀 나눔, 창조질 서회복 캠페인 부스, 평강 캘리그라피, 부활절 찬양, 공감소비운동 등을 한다. 지역 예술가와 단체들이 참여해서 색소폰 연주회, 태권도 퍼 포먼스 등을 선보인다. 공감소비운동에는 손 수레 양말(대표 곽호걸), 네일인(대표 송인아), 그랑프리 베이커리(대표 박성천) 등 지역사회 가게들이 참여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 장애인주일 전후, 의류∙생활용품 등 기증 온누리교회와 사회복지법 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굿윌스토어가 협업해 ‘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양재 4월 12일과 19일, 부천 상시 수거, 대전, 세종 4 월 19일과 26일 진행한다. 캠퍼스별 지정된 장소에 의류, 생활용품, 소형 가전제 품, 주방용품, 도서, 화장품 등을 기증하면 된다. 사회복 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굿윌스토어는 장애인이 일하는 능력을 키워서 자립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그 들의 삶의 질과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소매 유통 중심의 직업 재활 시설이다. 문의: 1533-0091 / 남현영 기자 hyun0@onnuri.org ‘좁은 길, 좁은 문’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마무리 2026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40일 새벽기도회) ‘좁은 길, 좁은 문’이 지난 2월 23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국내 온누리교 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됐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 의 보혈을 기억하며 침묵 가운데 참회의 기도 를 드렸다. 이어 온누리교회 로비에 설치된 ‘ 회개의 십자가’에 자신의 죄와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못 박고 회개와 결단의 시간을 보냈다. 정승숙 권사(성동광진공동체)는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산상수훈 말씀 을 들으며 어렵고 힘든 길일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는 도전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세경 성도(한강공동체)는 “날마다 나를 십 자가에 못 박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 박지혜 기자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종료 7주 동안 디지털 디톡스, 생태 회복 등 실천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보시기에 좋았더라: 자기 부인의 제자도’가 막을 내렸다. 지난 2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 이어진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에 국내 온 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참여했다. 7주 동 안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디지털 디톡스, 건강한 식습관, 생태 회복, 바른 언어생 활, 절제와 성실, 겸손과 순종 등을 실천 했다. 김우용 성도(S브릿지)는 “창조질 서회복 캠페인 기간에 디지털 미디어를 멀리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실천하면서 몸과 마음의 긍정적 변화를 경험했다” 면서 “사순절 이후에도 가정과 일터, 생 활 속에서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삶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참가자 소감을 모집한다. 묵상한 내용과 실천 사항, 실천 사진, 소감문 등을 문자메시지 (010-5395-2319) 또는 이메일(onnuri.l ent@gmail.com)로 제출하면 선정해서 소정의 선물을 보내준다. 소감문을 제출 할 때는 ‘이름, 소속 공동체, 연락처’를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문의: 02-3215-3434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4월 30일 목요일까지 참가자 모집 K-CCM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힐 링보이스’ 참가자를 모집한다. 4월 30 일(목)까지 지원서와 무반주 가창 영상, 사진 파일을 이메일(cgnhealingvoice @daum.net)로 제출하면 된다. 무반주 가창 영상은 자유곡 1곡과 지정곡 20곡 중에서 1곡을 선택해서 각각 1분 이상 부르고, 그 영상을 스마트폰 기본 카메 라로 촬영해서 제출하면 된다. 이미 데 뷔한 프로 가수나 찬양사역자도 참가 할 수 있다. 지원서와 지정곡 리스트 등 더 자세한 사항은 공식 홈페이지(heal ingvoice.cgnkorea.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 최종 우승자 1인에게는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하고, 결선에 진출한 TOP 7 인에게는 CGN 프로그램 출연, CCM 음원 발매, CGN 월드투어 콘서트 참여 등의 특전이 주어진다. 문의: 02-3275-9333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 홍하영 기자
2026-04-04 제1583호
[News]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주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각 캠퍼스 본당 3월 30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고난주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기간이다. 이 기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40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성도들은십자가목걸이를걸고, 예배 전후 침묵으로 기도한다. 매일 한 끼 이상 금식기도하고, TV와 인터넷, 스마트폰, 영화, 게임 등 불필요한 미디어 사용을 자제한다. 온누리교회 로비에는 ‘회개의 십자가’가 설치된다. 자신의 죄와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나무 십자가에 못 박고 회개하는의식을하면된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 주제는 ‘십자가의 길’ 이다. 3월 30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오전 5시 30분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된다. 온누리교회 유튜 브 채널과 CGN으로도 참여할 수 있다. 3월 30일(월) ‘십자가의 길’ (막 15:16~25), 31일(화) ‘ 십자가의 용서’ (눅 23:33~38), 4월 1일(수) ‘ 십자가의 절규’(마 27:45~49), 2일(목) ‘십자가의 완성’(요 19:28~30), 3일(목) ‘ 십자가 밑에서의 고백’ (마 27:50~54)을 주제로 해외비전교회 담당목사들이 설교한다. 4월 3일(금)에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설교하고, 온누리교회 전체 교역자가 특순한다. 조은정 권사(고양은평공동체)는 “365일 중 40일의 새벽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 매해 참여하고 있다”며 “주시는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그 말씀을 더욱 붙들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CGN 개국 21주년 감사예배 임직원 및 관계자 223명 참석 글로벌 선교 미디어 CGN이 개국 21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지난 3월 27일(금) 오전 10시 서빙고온누리교회 경찬홀에서 드렸다. CGN 임직원과 온누리교회 리더십, 교계 인사 등 223명이 참석했다. CGN 개국 21주년 감사예배는 김용기 장로(실행위원장) 대표기도, CGN 임직원 특순, 이재훈 위임목사(CGN 이사장) 메시지, 전진국 대표(CGN) 감사 인사, 함태경 본부장(CGN) 장기근속자 감사패수여등의순으로진행됐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사 43:18~21)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 목사는 “<이사야> 43장 말씀처럼,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CGN의 21년 역사와 같다”면서 “앞으로도 CGN이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세우는 놀라운 사역에 쓰임받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전진국 대표는 “CGN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복음의 핵심을 시대에 맞는 언어와 방식으로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겠다”면서 “문화를 통한 복음 전파에 기도와 후원, 응원으로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다<관련 기사 6면>. CGN 개국 21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4월 5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CGN TV편성 기준), ‘ 소년이 어른이 되어’ , ‘ 땅끝의 증인들’ 이 방송된다. 기독 OTT 플랫폼 ‘ 퐁당’ 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 박지혜 기자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4월 30일까지 참가자 모집 CGN 기획 K-CCM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 참가자를 4월 30일(목)까지 모집한다. 이미 데뷔한 프로 가수와 찬양사역자도 참가할 수 있다. 참가를 원하는 지원자는 지원서와 가창 영상(자유곡 1곡, 지정곡 1곡), 사진 파일을 이메일(cgnhealingvoice@daum.net)로 제출하면 된다. 가창 영상은 스마트폰 기본 카메라로 촬영해야 한다. 지원서 양식과 지정곡 리스트 등 자세한 사항은 ‘힐링보이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가자 모집이 끝나는 5월에는 심사를 통해 예선 진출자를 선발하고, 7월부터 예선과 본선, 결선을 통해 최종 우승자를 선정한다. 최종 우승자 1인에게는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하고, 결선에 진출한 TOP 7인에게는 CGN 프로그램 출연, CCM 음원 발매, CGN 월드투어 콘서트 참여 등의 특전이 주어진다. 문의: 02-3275-9333 / 박지혜 기자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7주차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보시기에 좋았더라: 자기 부인의 제자도’ 가 마지막 7주 차(3/30~4/5, 고난주간)에 돌입한다. 성인공동체와 대학청년부 7주 차 주제는 ‘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다. 지난 40일 동안 가장 도전이 되었던 실천 사항 한 가지를 정하고, 일상에서 지속하며 간증을 나 눈다. 캠페인 기간에 묵상한 내용과 실천 사항, 실천 사진, 소감문을 문자메시지(010-5395-2319) 또는 이메일(onnuri.lent@gmail.com)로 제출하면 우수작을 선정해서 소정의 선물을 보내준다. 소감문을 제출할 때는 ‘ 이름, 소속 공동체, 연락처’ 를 반드시 기입해야 한다. 차세대는 ‘ 겸손, 순종’ 을 주제로 실천사항을 이어간다. 30일(월) 부모님이 부탁하신 일을 즉시 실천하기, 31일(화)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간식비 일부를 저금하기, 4월 1일(수) 학교나 교회에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하기, 2일(목)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기, 3~4일(금~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미디어 금식 동참하기를 실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4월 5~18일‘온누리 모자이크 주간 온누리M미션이 오는 4월 5일(일)부터 18일(토)까지 국내 온누리교회 전 캠퍼스에서 ‘2026 온누리 모자이크 주간’ 을 진행한다. 모자이크 주간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외국인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는 ‘모자이크 교회’ 의 정체성을 나누기 위해 마련됐다. 이 기간 동안 온누리M미션 소속 외국인 성도들이 각 캠퍼스를 방문해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며, 이를 통해 성도 간 교제와 연합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문의: 031-491-9650 / 홍하영 기자
2026-03-28 제1582호
[News] 창조질서 회복, 예수 제자의 길! 창조질서 회복, 예수 제자의 길! 4월 5일까지‘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이어져 성인과 대청‘절제와 성실’, 차세대‘디지털 미디어’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이 한창이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실천하며 예수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은 오는 4월 5일(부활주일)까지 이어진다. 성인공동체와 대학청년부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5주 차(3월16 ~21일) 주제는 ‘ 절제와 성실: 운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삶’ 이다. 최근 과도한 주식 및 코인 투자 등에 몰입하며 요행을 바라는 문화 속에서 영적 무기력증을 경계하고, 성실한 노동의 가치를 되새기자는 의미다. 월요일(16일) 무의미한 TV 및 유튜브 시청이나 잡담 시간 줄여 기도 시간 확보하기, 화요일(17일) 주식 및 코인 차트 확인 등 과도한 몰입에서 벗어나기, 수요일(18일) 일터에서 남을 이기기보다 서로 돕는 협력자 되기, 목요일(19일) 감각적인 즐거움보다 영적인 평안에 집중하기, 금요일(20일) 가상 세계나 환상보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 보내기, 토요일(21일) 디지컬 기기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창조주 묵상하기 등을 실천한다. 차세대는 ‘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회복하기: 디지털 미디어’ 를 주제로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실천한다. 월요일(16일) 영상 보기 전 성경읽기, 화요일(17일) 게임과 영상 보지 않고, 기분 좋지 않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 수요일(18일) 식사시간에 영상 보지 않고 가족과 대화하기, 목요일(19일) 잠들기 30분 전 모든 미디어 끄기, 금요일(20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기억하고 감사하기, 토요일(21일) 조용히 1분 동안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짧게 기도하기 등을 실천한다. 오는 고난주간(3월 30일~4월 4일)에는 ‘ 겸손과 순종: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를 주제로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실천한다. 이 기간에는 궂은 일을 먼저 하고 이웃을 섬기며, 성금요일에는 미디어 금식과 한 끼 금식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을 실천한다. 부활주일이 든 8주 차에는 ‘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가 주제다. 지난 40일 동안 가장 도전이 되었던 실천 사항 한 가지를 정하고, 일상에서 지속하며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문의: 02-3215-3434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4주차 오전 5시 30분 각 캠퍼스 본당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40일 새벽기도회)가 벌써 4주 차를 맞이한다. 올해 40일 새벽기도회에서는 ‘ 좁은 문, 좁은 길’ 을 주제로 산상수훈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4주차 주제는 ‘ 기도의 길’ 이다. 3월 16일(월)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마 6:10),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 6:10), 17일(화) ‘오늘 꼭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마 6:11), ‘용서한 것 같이 용서해 주소서’ (마 6:12), 18일(수) ‘악에서 구하소서’(마 6: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마 6:13), 19일(목) ‘아버지께만 보이는 금식’ (마 6:16~18), ‘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19~21), 20일(금) ‘분별의 눈을 가지라’(마 6:22~23), ‘하나님과 재물’(마 6:24)를 주제로 설교가 이어진다. 매주 금요일에는 대학청년부와 차세대가 예배를 주관한다. 40일 새벽기도회는 오는 4월 3일(금)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5시 30분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된다.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과 CGN에서 새벽기도회 실황을 중계한다.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에서는 성도들의 40일 새벽기도회 참여를 독려하는 특별영상 ‘2026 40일 새벽예배 브이로그’ 를 업로드하고 있다. 이은옥 권사(강서공동체)는 “내 의지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여하고 있다”며 “딸과 아픔을 겪고 있는 차세대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려 한다”고 고백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 개강 6월 12일까지 매주 금 오전 9시 30분 사랑홀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가 개강했다. 오는 6월 12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사랑홀에서 진행된다. 참가신청은 전화(010-5603-5500)로 하면 된다.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말씀과 신앙 서적을 읽고 나누며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모임이다. 이번 학기 신앙 서적은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강신익 장로는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듣고 읽으며 배우는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에 주저하지 말고 함께하길 바란다”고 참여를 독려했다<관련기사 10면>. / 박지혜 기자 <빛과소금> 2026 우수콘텐츠잡지 선정 두란노서원에서 발간하는 월간 <빛과소금>이 ‘2026년 우수콘텐츠잡지’ 로 선정됐다. 우수콘텐츠 잡지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받아 (사) 한국잡지협회가 국내 정기 간행물 중에서 콘텐츠 우수성을 기준으로 매년 선정 및 발표한다. <빛과소금>은 1985년 창간했다. 42년째 세상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하는 문서사역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1993년 공보처 우수 잡지 선정을 시작으로 2000년, 2018년, 2019년, 2021년, 2022년, 2024년, 2025년, 2026년 우수콘텐츠잡지로 선정됐다. / 박지혜 기자 시니어아카데미 참가자 모집 양재와 부천온누리교회 ‘시니어아카데미’ 참가자를 모집한다. 양재는 3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드림홀, 부천은 3월 28일부터 6월 20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비전홀에서 진행된다. 참가신청은 당일 접수하면 된다. 회비는 양재 5만 원, 부천 3만 원. 시니어아카데미는 성경 속 시니어의 믿음과 삶을 배우고, 하나님 안에서 남은 생애를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문의: 양재(010-7347-3473), 부천(010-5334-8413) / 홍하영 기자
2026-03-14 제1580호
[예수를 따르는 사람] 여기가 선교지! 내 달란트는 선교 도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여기가 선교지! 내 달란트는 선교 도구! ‘캠퍼스 복음화’ 꿈꾸는 백은희 교수의 확신 “나를 따르라”(마 16:24). 2026년 온누리교회 표어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전제한 그리스도의 엄중한 명령이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기로 결단한 모든 이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온누리신문>에서‘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고 뜨겁게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의 삶과 고백을 듣는다. 그 일곱 번째 주인공은‘국립공주대학교 백은희 교수(양재온누리교회)’다. 그녀는 캠퍼스를 선교지로 여기고, 자신의 달란트와‘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라는 선교 도구를 사용해 캠퍼스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캠퍼스 복음화를 꿈꾸는‘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현장 이른 아침, 아직 캠퍼스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인데 강의실 불이 하나둘 켜졌다. 그리고 전공 서적 대신 성경책을 든 예배드리는 사람들, 교수와 학생, 지역 교회 성도들이 모였다. 국립공주대학교 신우회 소속 교수들, 기독동아리 학생과 간사, 지역 교회 성도들이다. 그들은 무릎부터 꿇었다. 그리고 학교와 학생들, 캠퍼스 복음화를 간구하며 뜨겁게 부르짖었다. 그들은 매주 수요일 오전 8시 교단과 소속을 넘어 기독교 공동체 이름으로 하나 된다. 그들의 기도와 예배는 특별하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선교지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선교 도구”라는 고백을 일상에서 증명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 갈망이 캠퍼스 복음화라는 엄청난 비전을 완수하는 원동력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지난해 KUPM(전국교수선교회)과 CCC연합평창대회에서 백은희 교수의 발표로 전국 대학 기독 공동체에 소개되며 점차 더 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국립공주대학교 교수신우회와 기독동아리가 함께 드리는 ‘ 국립공주대기독연합예배’ 다. 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는 2010년대, 국립공주대학교 음악교육과 백기현 교수가 교수신우회 회장을 역임할 당시 캠퍼스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로 시작했다. 기독동아리 학생들과 간사, 교수들이 함께 모여 ‘ 복음 전도’ 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드린 연합예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지경이 넓어졌다. 지금도 ‘CCC(Campus Crusade for Chris), JDM(Jesus Disciple Movement), DFC(Disciples For Christ), SFC(Student For Christ), ESF(Evangelical Student Fellowship), IVF(Korea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비전선교단’ 등 주요 기독동아리 구성원들과 간사, 교수신우회 소속 교수들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장로와 권사, 선교사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매주 적게는 70명, 많게는 100명 이상의 인원이 모인다. 캠퍼스와 지역 교회가 연결되는 통로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 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의 특징이 뚜렷하다. 교수신우회, 기독동아리, 지역사회 교회와 함께하는 연합예배는 개강 및 공강 감사예배만 드리는 게 아니다. 매 학기 약 11주 동안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주 수요일 오전 8시부터 8시 50분까지 진행된다. 예배는 기독동아리 학생들의 찬양을 시작으로 교수신우회 교수들의 기도, 간사 및 지역사회 목회자들의 말씀 나눔으로 이어진다. 또한 국립공주대학교 학부 및 대학원생에게 문이 활짝 열린 예배다. 이 지속성과 개방성은 학생들이 복음을 더욱 쉽게 접하는 환경을 만든다. 기독동아리에 가입한 대부분 학생은 이미 크리스천이다. 신앙을 가진 학생들을 돌보고 신앙 안에서 굳건하게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연합예배는 신앙공동체를 넘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학생들이 친구 초대로 왔다가 부담 없이 예배드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복음은 관계에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연합예배의 핵심은 ‘ 연합’ 에 있다. 국립공주대학교 6개 기독동아리, 교수신우회 소속 교수들이 늘 그 자리를 함께한다. 모든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이 주신 캠퍼스 복음화라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다. 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가 국립공주대학교 캠퍼스 복음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선교 도구인 이유가 바로 그것 이다. 말로 전하는 것보다‘삶으로 보여주는 신앙 “최근 대학가는 상대적 가치관의 혼란과 영적 황폐함, 갈수록 교묘해지는 이단 및 사이비 단체의 포교로 인해 복음화가 더욱 어려워지는 실정입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에서 크리스천 교수님들이 예배의 자리를 지켜주시는 것은 학생들에게 큰 힘과 영적 귀감이 됩니다. 말로 전하는 것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이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수들에게 이 여정이 쉬운 길은 아니다. 치열한 연구 성과와 업적 평가가 생존과 직결되는 대학에서 매주 시간을 내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작지 않은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백은희 교수의 생각은 분명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는 게 훨씬 큰 축복이고, 영향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백은희 교수는 그래서 국립공주대 기독연합예배를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의 자리’ 라고 고백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이 영향력을 전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그들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교수들이 학생들과 함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말로 전하는 그 어떤 메시지보다 큰 울림을 준다고 믿습니다. 저와 같은 믿음과 확신을 가진 교수님들이 교수신우회에서 활동하고, 기독동아리와 학생들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드리는 연합예배는 그 존재만으로도 전도의 파급력이 대단합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이어지는‘제자도 실천’ 백은희 교수가 생각하는 ‘ 예수를 따르는 삶’은 특별한 환경이나 특정 순간에만 드러나는게 절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곧 일상의 자리에서 이어지는 제자도 실천이 핵심이다. “제가 서 있는 이 자리, 국립공주대학교 캠퍼스는 저의 선교지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달란트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예수 전하는 일을 함께하며 선교 도구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 교수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하며, 캠퍼스 복음화의 꿈을 이뤄내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제자도 실천이라고 확신합니다.” 특수교육과 교수로서 장애 학생을 가르칠 교사를 양성하는 백은희 교수는 일과 업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고 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 또 다른 하나는 ‘ 이 일이 장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 기준에 모두 부합하면 비록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고 시간을 내어야 하는 힘든 선택일지라도 기꺼이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순종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일을 할 때에는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을 상기한다고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백은희 교수가 대학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크리스천 교수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당부가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맡기신 선교지입니다. 특별한 사역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강의실과 연구실, 학생들을 만나는 모든 장소가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2026-04-10 제1584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엄학실 성도가 압록강 건너 예수 따르기까지 “나를 따르라”(마 16:24). 2026년 온누리교회 표어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전제한 그리스도의 엄중한 명령이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기로 결단한 모든 이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온누리신문>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고 뜨겁게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의 삶과 고백을 듣는다. 그 네 번째 주인공은 엄학실 성도(부천한사랑공동체)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제가 배운 역사 교과서 속 미국 선교사들은 '하느님을 전한다면서 사과를 훔쳐먹어 이마에 도적이라 새긴 자들'이었습니다.” 엄학실 성도에게 하나님은 첫인상이 아주 나빴다.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고, 선교사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두메산골에서 자란 엄학실 성도에게 신이라는 개념은 삶의 영역 밖에 있었다. 국가가 곧 절대였고, 김일성 일가는 신을 넘어선 존재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를 담은 <혁명역사도록>을 줄줄 외우며 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은 스쳐 지나는 왜곡된 이야기 속 인물, 나쁜 사람으로만 남아 있었다. 엄학실 성도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뜨린 끔찍한 경험이 있었다.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던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삶의 방향을 잃었다. “생계를 책임지던 남편이 떠나고 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막막함뿐이었습니다. 손주들 밥을 축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차피 죽을 거라면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심은 곧 국경을 향한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압록강으로 향하던 길 위에서 엄학실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을 찾았다. “3월의 압록강은 녹지 않은 얼음과 불어난 물로 가슴 높이까지 차올라 있었습니다.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느님, 하느님, 내가 압록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른 채 드린 저의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압록강에 다다른 그녀의 눈앞에 믿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강 위로 쓰러져 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 한 구절이 나를… 중국에서의 삶 역시 쉽지 않았다. 공안의 단속을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겨야 했다. 이전보다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함께 중국으로 건너온 딸은 가사도우미, 엄학실 성도는 농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마음 한편에는 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엄학실 성도의 입술에서 다시 같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하느님, 우리 딸과 손자가 공안에 잡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게 해 주십시오.” 그때도 여전히 그것이 기도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절박한 순간마다 무심코 부르게 되는 이름이었다.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딸이 한국으로 떠나자고 제안했다. 점점 자라는 손자를 위한 선택이었다.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그날 밤 꿈이 엄학실 성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미 중국으로 도망쳐온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려니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너희가 먼저 가서 좋으면 나를 데리러 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꿨습니다. 넓고 길고 곧은 길 위에 큰 개 세 마리가 죽어있는 꿈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꿈에 나온 개가 경찰을 뜻합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아, 안전하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딸에게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터에 거짓말하고 나온 딸과 손자와 함께 밤 11시에 창문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엄학실 성도는 여러 경로와 재판을 거쳐 한국대사관 방콕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성경책을 봤다. “방콕 수용소에는 한국 영화와 책 그리고 성경책 등이 있었습니다. 문득 ‘북한은 왜 그렇게 성경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핍박했을까?’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일하려고 국경을 넘나들던 시절 성경책을 겉옷에 숨겼다가 공안에 붙잡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성경책이 무엇이길래 그렇게까지 할까?’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성경 읽기가 곧 ‘통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한 구절이 마음에 남았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이 한 구절이 엄학실 성도의 마음을 붙잡았다.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한 엄학실 성도는 하나원에서 만난 동기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인도받은 곳이 부천온누리교회 한사랑공동체다. 그곳에서 엄학실 성도의 신앙이 비로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말씀과 사랑이 그녀를 감쌌고, 김혜경 목사와 한사랑공동체의 돌봄 덕분에 하나님 앞에 서는 믿음이 조금씩 생겼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마다 하나님께 말을 걸었고, 새벽과 밤을 기도로 채웠다. 그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던 어느 날, 또 한 번 놀라운 경험을 했다. "평소처럼 새벽에 혼자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레위기> 11장 45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경책을 펼쳐서 확인해 봤더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명령이라고 느꼈습니다. 연약한 저는 매일 넘어지고 또 엎어지겠지만, 하나님의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엄학실 성도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말씀 앞에 서는 삶, 말씀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이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이 그녀가 이해하는 예수 제자의 모습이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면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뜰만 밟듯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것을 붙들고 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가지를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삶의 모든 순간에 기도하며, 예배의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곧 선교지가 되어야 합니다." 엄학실 성도는 복음 통일을 바라보며 그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어떤 경로로든 하나님을 만나고, 부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복음 통일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가족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도록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고, 훈련받으며, 준비해야 합니다.”
2026-03-21 제1581호
[2026 선교헌금 작정을 앞두고] 그들은 왜 오래도록 선교헌금을 할까? [2026 선교헌금 작정을 앞두고] 1. 그들은 왜 오래도록 선교헌금을 할까? 2. 그들은 왜 평생 선교를 했을까? 그들은 왜 오래도록 선교헌금을 할까? 황재숙 명예권사, 노국자 권사, 채현석 집사에게 묻다 “그냥.” 세 사람에게 ‘왜 오래도록 선교헌금을 하는지’를 물었더니 공통으로 돌아온 대답이었다. 아무 의미도, 뜻도 없다는 의미의 말이 결코 아니다. 선교는, 선교헌금은 숨을 쉬듯이, 밥을 먹듯이 아주 자연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그 특별함을 ‘그냥’이라는 말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년 선교헌금을 작정하고 있다. ‘온누리교회는 선교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선교는 온누리교회의 심장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그 주인공은 황재숙 명예권사, 노국자 권사, 채현석 집사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사실, 질문 자체가 식상해서 물을지말지를 고민했었다. 그렇다고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처음 선교에 관심을 두고, 선교헌금을 작정한 계기가 무엇입니까?" 세 사람 모두 각자 삶의 모양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데 세 사람에게는 공통된 대답과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선교와 선교사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사랑이었다. 그들 마음의 뿌리부터 분명 선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황재숙 명예권사는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표현에 깊이 감동하고, 선교헌금 작정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다른 교회를 다니다가 온누리교회에 와서 교육받으면서 신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마음에 쏙 와닿았습니다. ‘내가 선교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선교사님들의 선교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선교헌금을 시작했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노국자 권사는 선교사들의 어려운 현실이 담긴 <선교사의 편지>를 읽고 기도와 후원을 결심했다. “2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파송한 어느 선교사님이 후원이 너무 절실해서 금식하며 사역하고 있다는 편지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낼 때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축복했는데, 보내고 나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매일 밤 9시에 동역자들과 함께 그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매년 선교헌금 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채현석 집사는 젊은 시절 동료 선교사를 돕던 경험이 선교헌금 작정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몸담았던 선교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던 분들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그분들을 위해 조금씩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온누리교회에 와서 매년 새해 첫 주와 둘째 주일에 선교헌금 작정 행사에서 틀어주는 선교사님들의 영상을 보고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온누리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겠구나, 선교사님들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헌금은 저에게 선교사님들과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선교헌금을 향한 마음을 오랜 세월 지키는 것이다. 사실 오래도록 한마음을 지키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고,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다. 채현석 집사는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린 마음과 헌신을 무겁게 받아들이시고, 삶 가운데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의미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는 ‘이 상황에서 계속 선교헌금을 해도 괜찮을까?’ 걱정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산하지 않고 믿음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직장이 달라지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것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채 집사는 “보상이 반드시 물질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으로, 어떤 이에게는 평강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삶의 안정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가 믿음으로 선교헌금 작정 행사에 동참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황재숙 명예권사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 고백을 듣는 내내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들이 주는 생활비로 지내고 있었는데. 코로나19가 터졌습니다. 그 시기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이럴 때일수록 선교헌금은 절대로 줄이면 안 된다’였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덕분에 더 큰 믿음으로 선교헌금을 작정했습니다.” 그날 이후 나타난 변화를 떠올리면서 황 명예권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날 이후 아들의 사업이 조금씩 안정되었고, 겪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도 하나둘씩 해결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고치신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감사였습니다.” 중요한 건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뎌 보려는 마음 노국자 권사는 선교헌금 작정을 앞두고 성도들에게 “망설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선교헌금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예수님이 두 엽전을 가장 큰 헌금으로 받으셨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후원을 권할 때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께 우리가 커피 한잔 대접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느냐?’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직접 대접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으로 마음을 조금씩 나눠서 동참하자는 뜻입니다” 채현석 집사는 노국자 권사의 제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했다. 그는 각자의 형편에 맞게 시작하되, 그 안에서 믿음을 조금씩 넓혀갈 것을 권면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조금 부담되지만 해볼 수 있겠다’는 지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뎌 보려는 마음입니다.” 채현석 집사는 이 마음과 다짐을 훈련에 비유했다. “내가 1미터를 뛸 수 있는데, 늘 1미터만 뛰면 성장이 어렵습니다. 익숙한 수준에 머무르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성장을 이끕니다. 선교헌금 작정 역시 믿음의 성장을 위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은총, 관심, 하트 풍선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선교헌금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세월 선교헌금을 이어오며 깨달은 본질이 그 한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황재숙 명예권사는 선교헌금을 ‘은총’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시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고 보장해 주신 것도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노국자 권사는 선교헌금을 ‘관심’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내가 드린 선교헌금이 어느 나라로, 어떤 선교사에게 전달되는지를 알면 부담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깁니다. 그 관심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사랑이 되어서 선교헌금으로 이어집니다.” 채현석 집사는 선교헌금을 ‘하트 풍선’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기도 모임에서는 기도를 선교지를 향해 쏘는 미사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선교헌금은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들께 따듯함과 위로, 힘을 전하는 하트 풍선 아닐까요?”
2025-12-20 제1569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들은 희망 그 자체!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들은 희망 그 자체! 우크라이나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 “엄마가 배고프면 안 되잖아요.”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부차의 한 마을. 두 소년이 구호품으로 받은 통조림을 엄마의 무덤가에 내놓으며 말했다. 두 소년의 엄마는 폭격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몇 날 며칠을 지내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다가 굶주림 속에 세상을 떠났다. 국경에서 이 소식을 접한 어느 선교사 부부가 두 소년을 찾아갔다. 함께 식사하며 어린이 성경을 전달했고, 2년 동안 그 가정을 지원하고 있다. 그 참혹한 절망의 땅, 눈물의 땅에서 한 줄기 빛을 발하며 희망의 꽃을 피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NGO 더멋진세상 협력 선교사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가 그들이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사실 처음부터 우크라이나를 마음에 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선교 역사를 알고 싶어서 던진 ‘왜 우크라이나인가요?’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가 처음부터 우크라이나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청년 시절, 영락교회에서 봉사하던 두 사람은 선교 비전을 품고 부부가 되었다. 하나님과 선교, 목회를 더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와 일산 세광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며 목회에서 얻는 보람과 기쁨에 선교의 소명을 잊을 뻔했다. 그러다 우크라이나 신학교에서 강사로 초청받았다. “일주일 동안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준비를 하는데, 학장님이 함께 사역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낯선 땅, 우크라이나에서 사역이 시작됐다. 40대 황금의 시간 10년을 드리고자 시작한 사역이 벌써 20년이 되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면서 늘 ‘왜 우크라이나일까?’라는 질문을 품었다. 20여 년이 지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터지고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난민들이 국경을 넘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아픔이 제 눈물이 되었을 때 그제야 ‘하나님이 바로 이때를 위해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40장 1절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질문의 답으로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면 충분합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자신들을 ‘우크라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곳의 언어와 문화, 정서가 한국보다 익숙해졌다. 그곳에서 세월이 20년이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교회 개척, 지도자 훈련, 한글학교, 묵상집과 신앙 서적 보급(약 19만 권), 심장병 환아 수술 지원 등의 사역을 했다. 사람을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들 곁에 문영기 장로와 황명덕 권사 부부(이촌공동체)가 이끄는 ‘선의재단’이 있었다. 문 장로와 황 권사의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이 사역에 큰 도움이 됐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비영리법인 선의 우크라이나’를 설립하고, 문서사역을 했다. 묵상집과 신앙 서적 19만 권을 우크라이나 곳곳에 보급했다. 수천 권의 책을 직접 분류하고 발송하는 고된 육체노동의 연속이었지만,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질 때면 힘이 났다. “고된 작업으로 몹시 지쳐있었는데, 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큰 범죄를 저질러서 12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23세 청년 레오니드가 묵상집을 읽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이 주신 소망과 사랑이 있습니다’라는 그 청년의 고백을 읽는 순간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사역이 힘든 날이면 ‘주님, 레오니드 한 사람의 변화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힘을 얻습니다.” 심장병 환아 수술비 지원을 받은 한 엄마의 편지도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그 엄마는 “어린 제 아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희 가정에 머물던 재앙이 사라졌습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절망 속에 좌절하던 가족이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편지와 소식은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에게 사역을 이어갈 힘이자 기쁨이 됐다. 난민이면서, 난민을 돕는 사역자 기쁨과 감사, 보람이 가득했던 20년이 잿빛으로 변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 교민 철수 명령을 내렸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도 인근 국가인 루마니아로 피신했지만, 마음은 항상 국경 너머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경으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국경 근처 도시로 향했다. “엄마들이 한 손으로는 아이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을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가족과 생활 터전을 모두 잃었으니 그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도움의 줄 손길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자기도 난민이면서 동시에 난민을 돕는 사역자가 된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난민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가족과 마을, 집을 잃은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그 무렵, NGO 더멋진세상과 동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NGO 더멋진세상과 2019년부터 ‘더 멋진 마을 개발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연되던 프로젝트가 다시 시작될 무렵 전쟁이 터진 것이다. NGO 더멋진세상과 온누리교회가 난민들을 위해 지체없이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중보기도는 물론이고, 후원금과 긴급구호 물품을 빠르게 보냈다. 긴급 구호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우크라이나로 구호 물품을 보낼 통로가 필요했다. 그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전쟁 피해가 심각했던 부차에 사는 성도 미꼴라이, 나타샤 부부에게 연락이 왔다. 연락이 끊겨 생사조차 알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목사님 저희 살아 있어요!”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 문자를 받고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기쁨의 통곡을 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생존한 미꼴라이, 나타샤 부부에게 회복할 시간을 가지라고 권면했지만, 그들은 주변에 더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며 부차에 머물렀다. 우크라이나 입국이 금지되었던 기간에 그 부부를 통해 부차와 체르노빌 인근 지역 등 피해가 심했던 지역에 구호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거센 부흥의 불길이 불고 있다. 전쟁 전후를 비교한 통계를 보면, 우크라이나 교회 예배 참석률이 17%에서 42%로, 기도 생활은 19%에서 48%로, 자원봉사 참여율은 5%에서 26%로 급증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는 10%에서 85%까지 치솟았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영적으로 목말라 있습니다. 평일에도 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합니다. 고통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난민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먹을 것이나 잠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라는 말씀 한 구절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품고 용기 얻고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지금 체르노빌 원전을 포함하는 이반키우 지역의 전쟁고아 77명을 위한 사역에 힘쓰고 있다. 전쟁 중 부모가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극심한 트라우마를 가진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위탁가정의 주거지 마련, 아이들이 꿈을 키우며 공부할 수 있는 컴퓨터실,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작은 극장, 맘껏 뛰놀 수 있는 풋살 경기장 같은 시설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페도립브카 마을의 오염된 식수 해결, 시도로비치 마을의 선교회관 복구, 모자원 및 조손가정을 위한 센터건립 등 해야 할 사역이 많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지원이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 선교 주자를 세우는 거룩한 나눔’이라고 강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제 그 빚을 갚을 때입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리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성품이 선하고, 받은 은혜를 잊지 않으며, 고난을 통해 더욱 단단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그들의 손을 잡아준다면, 믿음으로 일어서서 자신들을 침공한 러시아, 쇠퇴한 유럽의 교회, 더 나아가 이슬람권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연일 포탄이 날아드는 우크라이나에서 지금도 많은 한국 선교사가 현장을 떠나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두려움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울고 있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고 있다. 김태한, 윤수정 선교사 부부도 7월 말 다시 우크라이나로 간다. 그곳에서 예배를 회복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그들은 희망 그 자체다. 이제 우리가 그들과 함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때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166101-04-021656 김태한(UKR 복음주의신학교)
2025-07-19 제15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