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8)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요한일서> 1:3~7
/ 이재훈 위임목사
우리는 공동체에 기대하며 참여합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다르거나 기대가 무너지고 때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열심을 내어서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고,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대화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로 생각하지만, 때로는 더 악화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늘 말씀에 근거하면, 사귐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귐의 근본적인 방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올바른 공동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깊이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 깊이가 관계 속에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관계만이
‘진정한 공동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3~4절).
요한이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그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끼리의 사귐, 곧 수평적인 사귐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귐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모양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가로축부터 절대 세울 수 없습니다. 세로축부터 세워진 다음에 가로축을 덧붙이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의 뿌리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평적 사귐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단순히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공유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때로 물질을 공유할 때도 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성도에게 헌금을 요청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함께 참여할 때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복음 증거에 함께 참여하는 것에도 쓰였습니다. 무엇을 함께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함께 가지고 있는가가 그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귐은 비교할 수 없는 더 깊은 사귐을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모시고, 그분을 함께 공유한 자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귐의 본질, 이 사귐의 방향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공동체는 힘을 잃어버리고, 시험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서로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회한 친밀함은 아무리 따뜻해 보여도 결국 위태롭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관계만이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우리를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참된 사귐의 조건 ‘빛’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함께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9).
위에서부터 내려온 이 사귐은 우리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 예수님을 통한 사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5~6절).
요한이 사귐을 말하다가 ‘빛’을 말씀합니다. 참된 사귐의 조건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지 아니하시고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에서 시작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거룩, 곧 빛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곧 빛 앞에 설 때에야 우리가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 선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만큼 우리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빛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더러움이 드러납니다. 어둠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사귐은 과연 이 빛 가운데 여전히 견딜 수 있는 사귐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귐은 빛 가운데서의 사귐인가, 아니면 어둠을 함께 나누는 사귐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에 함께 참여하면서 서로의 죄를 덮어주고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닙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직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설 때 연약함, 허물, 죄를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귐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서면서 자신의 허물과 죄가 그 거룩하신 빛 앞에서 드러나게 될 때 정직하게,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서로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은 빛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에게는 서로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7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빛 앞에서 드러난 죄를 깨끗하게 해 주는 사귐입니다. 빛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면 서로 부끄러워 등을 돌릴 거라는 생각은 오해요, 착각입니다. 도리어 빛 가운데 행하면 진정한 사귐이 가능합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사귐, 공동체의 비밀이 있습니다. 빛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지만, 빛 가운데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고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드러나지만, 예수의 피로 정결함을 입고 서로 용서를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공동체에서 때로 상처를 받고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 참여할 때 마음속에 이상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상이 깨지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환상이 깨질 때 우리 눈앞의 진짜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점투성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충분히 깨끗해서 사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에 들 만큼 괜찮은 사람이어서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서가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더럽고 추한 죄인이지만 그 피로 씻음을 받은 이들이 서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으로 출발해서
빛 가운데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
만일 공동체에서 외롭다면 그 외로움의 뿌리를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혹시 나는 사람에게서 채워지기를 바라며 옆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이 채워줄 수 없는 자리를 요구하면 모두가 지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부터 출발해서 빛 가운데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공동체라는 사귐의 뿌리가 분명할 때 수평적 사귐이 올바로 갈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순예배는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함께 빛 가운데로 걸어가기로 약속한 작은 공동체입니다. 순예배가 살아나는 길은 재밌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함께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에 서는 데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고, 서로를 용서하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이 사귐이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되었을 때 그 자체가 세상에 증거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서로에게 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 올라갈 때 닿습니다. 서로가 그 빛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같은 빛 아래서 나란히 걷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간 사귐은 세상 그 무엇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향해 다시 걸어가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위를 보고, 그다음 옆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