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킨 유계준 장로(187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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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킨 유계준 장로(1879-1950)

 2015-04-07      제10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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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와 유계준장로

산정현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주기철 목사(좌)와 유계준 장로(우)

 

대(代)를 이어 받은 축복 … 순교, 번성한 믿음의 가정

 

 

유계준 장로는 1879년 4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청산면 오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땅 부자였다. 그런데 유계준 장로가 13세 되던 해 아버지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여읜 유계준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상점에 취직해 연명하던 중 1895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다. 누구도 살아가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다. 유계준은 평양 교외 미림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되었다. 장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유계준은 동네 술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매일을 술로 보냈다. 그는 힘이 센 편이었다. 미림리 지역에서 주먹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 힘을 믿고 다시 평양 시내로 자리를 옮겼다.

 

술주정뱅이에서 장로로

 

평양에 온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유계준은 길거리에서 전도하며 돌아다니던 한석진과 김창식을 만났다. 한석진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조사였고, 김창식은 홀 선교사의 조사였다. 그들이 전도하는 것을 본 유계준은 그들을 관가에 고발했다.

한석진과 김창식이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포삼열 선교사가 고종을 급하게 알현했다. 평양에서 일어난 일을 들은 고종은 즉시 신하를 불러 어명을 쓰게 했고, 한석진과 김창식은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어느 날 유계준이 술에 취해 평양 서문통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 싶어 무리로 다가간 유계준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고발했던 한석진과 김창식이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서 연설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유계준은 어느 새 무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곳에서 전도지를 읽고 진리를 발견했다. 다음 날 유계준이 한석진이 머물고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을 평양 관가에 고발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유계준은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는 독실하게 믿음생활을 하다가 45세에 장로로 장립 받았다. 유계준은 장대현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 산정현교회가 설립되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섬겼다. 조만식, 오윤선과 함께 삼총사로 장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박해가 심할 때 뒤에서 순교자들의 가정을 도왔다. 그가 다니던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가정도 극진히 도왔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에 자금 지원도 했다.

 

후손들을 복 주시다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공산주의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유계준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북쪽에 남고, 가족들은 남쪽으로 보냈다. 그는 공산당 정권에 의해 수많은 탄압을 받다가 1950년 6월 24일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28일 패주하는 공산군들에게 순교 당했다. 장로로 함께 장립된 오윤선, 조만식 등도 순교 당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난 이후에 진가를 알아봤다. 유계준은 8남매를 두었는데 증손자까지 합치면 106명이다. 그 대부분이 박사다. 사람들은 “그는 끝까지 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부어 번성했다”면서 지금도 그의 믿음을 높이 사고 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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