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구름
<빌립보서> 3:7~16
/ 이재훈 위임목사
흐린 날에는 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를 창조하시고, 낮을 다스리도록 명하신 이후부터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단지 그 해가 구름에 가려졌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흐린 날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무관심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시편>에도 보면 “하나님, 어찌하여 그 얼굴을 가리십니까?”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를 숨기시는 하나님”이라며 그 나라와 민족의 멸망 한복판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측면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가리는 때도 있지만, 인간 스스로 만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
“보라. 여호와의 손이 너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귀가 너무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이다. 너희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1~2).
이 말씀에서 얼굴을 가린 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녀의 신분이 끊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사귐이 흐려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분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내 머리 위에 있도록 만들고 허용한 무엇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14세기 영국의 이름 없는 수도사가 쓴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만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려고 할 때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어둠에 속한 무지의 구름이다. 단순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 식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 구름은 항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구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녀를 향하고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속죄를 완성하셨기에, 모든 죄와 허물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은 그 자녀를 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흐린 날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미워하신다. 너에게 관심이 없으시다. 너에게서 돌아서셨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신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회개하는 모든 죄인, 그분의 자녀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해에 있지 않습니다. 그 해가 우리를 비추지 못하도록 가리는 구름에 있습니다. 그 구름은 우리 스스로 놓아두고, 치우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내 것이 되면 하나님을 가린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올려놓은 구름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구름을 제거하고 나서 <빌립보서> 3장의 고백을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이 없으면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첫째, 좋은 것도 내 것이 되면 하나님을 가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섬긴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7절).
여기서 ‘유익’이라는 단어와 ‘해’라는 단어는 사업하는 사람의 회계 용어입니다. 이익과 손실이라는 칸에 적혀 있을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유익’은 여러 개를 뜻하는 복수형이고, ‘해’는 하나를 뜻하는 단수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서를 이익과 유익한 편에서 적어 내려갑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합한 순간 그 답은 바로 ‘해’, 손해였습니다. 8절에서는 그 손해가 배설물로 여겨집니다. ‘개에게 던져주는 찌꺼기’라는 풀이가 되는 말입니다. 길에다 내버리는 오물과 쓰레기를 가리킵니다. 이력서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의 혈통도, 열심도, 흠 없는 의도는 모두 좋은 것이었습니다. 죄가 아니었고, 해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해로 여길까요?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가리는 구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좋은 것이 내 것이 될 때,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을 가려버릴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가리는 첫 번째 구름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좋은 것들, 유익한 것들입니다. 내게 유익한 것들이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구름이 된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구름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과 경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름이 됩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그렇습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분이 주시는 것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래가 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 내 죄가 아니라, 내 소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내 사역이 되는 순간, 내 소유가 되는 순간 하나님을 가릴 수 있습니다. 사업도, 직분도 내 것이 되는 순간 구름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인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의, 곧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8~9절).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밤하늘의 별은 해가 떠올랐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해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던 이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찬란한 햇빛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의롭게 하신 그 의가 있어야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C&MA 교단을 시작한 A. B.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 목사님이 남긴 'Himself'라는 제목의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새찬송가에는 441장으로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이라고 번역이 됐는데, 한글 가사로 보면 원래 가사보다 조금 다른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한때는 축복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이시라네. 한때는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라네. 한때는 주님의 선물을 원했으나 이제는 그것을 주시는 주님을 원하고, 한때는 치유를 구했으나 이제는 주님 자신만을 구한다네.”
그래서 'Himself', 그분 자신을 구한다, 그분 자신에게 초점을 둔다는 가사의 내용입니다. 그 찬송가 가사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Everything is in Christ, Christ is everything.”(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릴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을 가리는 구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10~11절).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한 바울이 10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동참함을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기에 모든 것을 해로 여긴 그가 10절에서는 또다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내용으로 부활의 능력과 고난의 동참함을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이 또 알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다’는 것은 정보를 더 얻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친밀히 사귐 속에서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친밀한 부부 관계의 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동침함에’라고 할 때 그 안다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시험지에 답을 쓰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삶으로써 아는 것입니다. 사귐을 통해서 깊이 알아가는 앎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 병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앎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속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다 압니다. 그렇지만 그는 알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 순서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사도 바울은 부활부터 시작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알고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로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는 부활의 능력부터 경험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깨닫고 예수님을 알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 속에서 그분을 만나고, 그러고 나서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아가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체험이 아닙니다.
바울이 쓰는 표현들을 주목하십시오. “알고자 합니다, 얻고자 합니다, 이르고자 합니다,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모든 것이 진행형입니다. 아직 진행 중인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은 언제 사형 선고가 내려질지 모르는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는 알고자 했고, 얻고자 했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한 교회의 영성과 수준을 알려면 그 교회의 가장 오래된 분들을 보면 압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오래된 분들이 여전히 사도 바울처럼 이르고자 하고, 알고자 하고, 잡으려고 달려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이르고자 했던, 그리고 여전히 새신자처럼 달려가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 혹은 성경 지식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로막는 구름이 된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내가 아는 성경 지식, 내가 아는 교회 경험이 하나님과 나를 가리는 구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세대보다 하나님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늘어난 만큼 하나님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왔다고 여기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가려진다
셋째, 우리가 다 왔다고 여기는 순간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가려집니다.
“나는 이미 얻었거나 이미 온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이는 나도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12절).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 붙잡힌 증거가 무엇입니까? 붙잡으려고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을 다 이루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빌립보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혹시 다른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내시리라는 것입니다”(15절).
자신을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전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는데,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해 푯대를 향해서 좇아갑니다”(13~14절).
자신의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마치 결승점에서 더 빨리 가려고 몸을 앞으로 쭉 뻗듯이 달리는 주자처럼 예수님께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이 고백을 <무지의 구름>을 쓴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 무지의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 곧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듯이, 당신의 밑, 곧 당신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는 망각의 구름(cloud of forgetting)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당신 아래에 두어 당신과 당신의 하나님 사이에 있지 않게 하십시오.”
발아래 두라는 것입니다. 위에 두지 말고 아래 두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잊어버린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어둠을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낮 12시부터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심판의 어둠을 통과하시는 그 3시간, 그 어둠을 지나가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지식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발아래 두고, 구름을 뚫고 하나님의 얼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다 왔다고 여겼던 자기만족을 내려놓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자기 교만과 야망과 두려움이 망각의 구름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두지 말고, 발아래 둠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나아가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비추시고,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향하여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