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인 죄목 중 하나는 ‘무신론자’, 신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시 종교로 인정받으려면 신전과 제물, 제단이라는 세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세 가지가 없는 종교는 그리스도인들뿐이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평가입니다. 새벽마다 목숨을 걸고 예배하던 사람들이 예배가 없다는 조롱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까?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박해가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제단이요, 그들의 인생이 곧 살아있는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지혜, 그분의 지식,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판단을 찬양합니다(롬 11:33). 그다음에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1절).
산에 비유하면 11장까지 정상에 오르는 것이고, 12장부터 내려오는 길입니다. 정상에서 본 것을 가지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교리와 삶은 한 산의 두 비탈입니다. 복음은 삶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 삶이 흘러나오는 근원과 동력을 말씀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도덕과 철학은 충고와 권면만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해 줍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만듭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비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바로 응답하게 합니다. ‘은혜’라는 헬라어 단어 ‘카리스(Charis)’에서 감사라는 말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가 나왔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하심 위에서 오늘 본문의 중심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드리라’는 단어도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산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모순입니다. 원래 제단에서 죽어야 제물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살아서 제단에 올라가는 제물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히 10:14).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로 죄의 값이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사는 죄를 씻는 제사가 아닙니다. 속죄제가 아니라 감사제입니다. 값을 치르는 제사가 아니라, 값을 치러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제물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제사장과 제물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곧 제사장이요, 곧 제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제물이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제단을 쌓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드려졌기에, 그분이 제물이 되셨기에, 이제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도 제물이 되는 것이고,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과한 생명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되었기에, 십자가를 통과해서 다시 산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진 자가 산 제물이라는 것입니다(롬 6:13). 살아있는 제물,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만이 이 제단 위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 제물’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업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입니다.
산 제물의 유일한 문제는 자꾸 제단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죽은 제물은 내려오지 못하는데, 산 제물은 다리가 있기 때문에 자꾸 내려옵니다. ‘살아있다’는 또 다른 의미는 ‘계속된다’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아침마다, 매일 순간마다 우리는 제단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여러분의 몸을 드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헬라 시대 세계관으로는 있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것도 모순이지만, ‘몸을 드리는 것이 거룩하다’는 것도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시대 이원론은 영은 선한 것이요, 몸은 악이라고 생각했던 플라토니즘(Platonism)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악하게 여겼고, 몸을 무덤으로 여겼던 시대에 몸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몸은 하나님이 지으신 작품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입으신 몸이요,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될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받으십니다. 마음은 숨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몸이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는가가 곧 그 사람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과 혀가 축복하면 축복의 통로가 되고, 우리의 손이 드려지면 이웃을 돕는 사랑의 손길이 되고, 발이 드려지면 복음을 증거하는 필요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의 눈을 드리면 사람의 허물보다 아픔과 연약함을 먼저 보게 됩니다.
드림, 변화, 그리고 분별
몸으로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물을 또 ‘영적 예배’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영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이성’ 혹은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이성에 합당한 예배, 말씀에 합당한 예배입니다. 그리스도로 임하신, 그리스도가 입으신 육신에 대해서 말씀에 합당한 몸으로 드려지는 것이 곧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섬김과 봉사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한 주간은 168시간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예배하며 보낸 시간은 한두 시간입니다. 나머지 시간 전체가 제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곧 삶이 예배이며, 예배가 곧 삶입니다.
2절의 ‘이 세대’는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대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 자체, 보이는 세상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 정신, 철학, 가치관, 세계관입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이 시대가 만들어낸 틀에 우리가 들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시대정신’이라는 말로 그 틀에 사람들을 찍어내듯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교육 제도와 내용까지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틀은 힘이 셉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부어지고, 부어지면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이 ‘변화’의 의미는 본질 형태의 변화입니다. 본질이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틀에 갇히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성된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1절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드린 사람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드림이 먼저이고, 변화가 그다음에 일어나고, 세 번째가 분별입니다. 분별은 제물로 제단에 드려진 자가 얻는 시야입니다. 지혜입니다. 지식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 자들에게는 분별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2000년 전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제단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신을 따르는 자들이요, 무신론자들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진정 제단에 드려진 산 제물임을 보고 계셨습니다. 제단이 없다던 그들의 예배가 마침내 로마 제국을 바꾸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도 제단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우리가 일하는 삶의 현장이 제물이 드려지는 제단이라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 제단에 몸을 드리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변화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그 길을 앞서 걸어가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의 남은 평생이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