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잠긴 문 너머 오신 부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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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잠긴 문 너머 오신 부활의 주님

 2026-04-10      제15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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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문 너머 오신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0:19~21
/ 이재훈 위임목사
 
부활을 마주한 제자들의 반응은 놀람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맞이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반응한 기록이 있었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에 의문을 제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며 놀랍고 두려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요, 기이한 사건이요, 두려운 사건입니다. 
구약의 여러 말씀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부활하실 것을 예언했고, 예수님도 친히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이미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못했는데, 바로 그것이 부활을 맞이하는 죄인 된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한 그들을 유대인들이 끝까지 추적해서 죽일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숨어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은 것이지만, 보다 깊은 그들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죄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절망,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등이 그들의 마음 문을 닫았고, 숨게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잠근 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잠긴 문은 그분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그분을 배신한 자책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최대한의 행동은 문을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에 보면 하나의 문이 아니라 모든 문을 잠갔습니다. 창문까지도 잠갔습니다. 조금도 빈틈없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고,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도망하는 몸짓이었습니다.
문을 잠근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깥세상이 두려울 때 우리는 문을 닫습니다. 관계의 문을 닫고, 미래를 향한 문을 닫습니다. 잠긴 방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난처인 동시에 감옥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립니다. 부활을 맞이하는 이 시간에도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이 있습니다.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고 잠근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패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서 그 누구도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설명 없이, 예고 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 전에 하나님이 항상 먼저 찾아오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이미 달려가고 있었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한 제자들이 있는 곳, 잠긴 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이 잠겼다고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죽음도, 무덤도 예수님을 막지 못했기에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잠긴 문도 그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잠긴 문을 통과하신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어떠한 장벽도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과 내 영혼 사이 어떤 문들이 있다 할지라도, 혹 그 문들이 강철판을 일곱 겹으로 대어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여시든지 통과하시든지 하여서 내 마음에 도달하실 수가 있는 분이다.”
또한 예수님이 그 문으로 들어오신 것은 단지 어떤 분이신가를 보이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문이 잠긴 것보다 굳게 잠긴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은 예수님의 상처뿐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로 그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부활하신 당일입니다. 그 하루 동안 여러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또 다른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후 내내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두 제자는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잠긴 문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증언이 하루 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무렵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제자들을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고, 마음도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문에는 빗장이 하나였지만, 마음의 문 빗장에는 여러 겹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수치심과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예수님이 물리적인 문을 통과하신 것은 부활하신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다른 방식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두려운 마음, 닫힌 마음을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종일 열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부활하신 당일에 이토록 집요하게 제자들을 찾아다니신 것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상처를 내보이신 것입니다. 도마에게만 상처를 보이신 게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한 열쇠입니다. 
왜 상처를 보여주셨습니까? 왜 설명이나 다른 교훈을 주지 않고, 상처를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잠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실패와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버렸다. 그분이 고난 받을 때 도망쳤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해도 나 같은 사람을 반기실 리 없다”라고 여기는 그들의 죄와 실패가 상처가 되어서 자물쇠처럼 그들의 마음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적적으로 예수님이 문 안으로 들어오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상처가 마음을 닫았다면,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치유하고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예수님의 상처’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상처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상처를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책감의 뿌리를 뽑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상처는 너를 위한 것이다. 이 상처로 네 죗값이 지불되었다. 이 창 자국으로 너와 하나님 사이의 담이 무너졌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의 상처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보이신 것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에 굳건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죽었고 내가 살아났다. 그러므로 너희 죄는 용서받았다. 이것이 평강의 근거다.’ 그 상처들은 영원한 중보의 증거이다.”
청교도 신학자 아이작 암브로우스도 ‘예수님이 왜 상처를 남겨두셨을까’를 두 가지로 답변했습니다. 
첫째, 앞서 칼뱅이 말한 대로 제자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분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합니다. 둘째, “그것은 그 상처와 자국들은 그리스도의 광채와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는 제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상처는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게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라는 선교사도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 상처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승리의 증표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 상처를 지우지 않으셨다. 당신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그 상처를 남겨 두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보았을 때 닫힌 마음이 기쁨으로 열렸습니다. 단지 그 상처를 보고 “아, 예수님이시군요”라는 확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심을 확인하는 걸 뛰어넘어 그들의 죄로 인한 죄책감, 수치심, 실패와 절망, 불안 등 그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상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과 상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십시오.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두 번 선포하셨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두 번 하셨습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평강 사이에 상처를 보이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두 번의 평강 선포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 번째 평강의 인사는 양심을 위한 것이요, 두 번째 인사는 마음을 위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에 관계된 것이요, 후자는 세상에서의 삶의 상태와 관계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롬 5:1)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평강’(빌 4:7)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과 하나님의 평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 번째 평강은 죄를 용서받음으로 인해 누리는 ‘양심의 평강’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한복판에 던져져서 어떠한 환경에서도 지켜질 수 있는 ‘내면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릴 수 있게 된 평강과 하나님 안에 있는 평강을 우리도 세상 가운데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특히 두 번째 평강을 선포하실 때는 파송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평강은 그저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고, 두 번째 평강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평강입니다. 
잠긴 문 안에서 그저 누리는 평강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평강이 아닙니다. 우리의 닫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 누리는 평강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활의 기쁨은 결코 내 안에 머무는 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분명히 믿는 사람들은 그 소식을 혼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갑자기 용감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훈련을 받고, 어떤 전략을 세웠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잠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잠긴 방 안에 머물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문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위협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바꿔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초월하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 평강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일하는 세상, 전쟁과 기근과 갈등으로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긴 방 안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오셨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우리의 잠긴 마음의 방 안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 가운데 서서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십시오. 그 평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부활의 사랑은 잠긴 문을 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활의 능력과 사랑으로 닫힌 문을 넘어, 
우리 스스로 잠근 문을 넘어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며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하시며,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의 잠긴 문을 넘어 찾아오시는 
그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남현영 기자 hyun0@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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