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오 유다: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
<마가복음> 3:16~19, <요한복음> 14:21~24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11번째 제자는 갈릴리 출신의 ‘유다’ 혹은 ‘다대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제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절의 일부 사본에서는 ‘레배오’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같은 이름이 많았고, 두세 개 이름을 가진 것이 흔했기 때문에 이것은 혼란이나 불일치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입니다.
‘다대오’는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의 단축형으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부모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또 ‘가룟 유다’처럼 그 앞에 지역 이름을 넣어서 구분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의미가 같은 다른 언어, 그리스어나 아람어 등 다른 언어의 의미가 같은 단어를 차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를 선택해서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대오’와 ‘유다’라는 이름을 당대인들은 마치 히브리어 사울과 그리스어 바울처럼, 같은 운율을 가졌기에 비슷한 발음으로 여기고 차용했습니다. ‘다대오’와 ‘유다’가 같은 발음권에 있기 때문에 ‘유다’라는 사람이 ‘다대오’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것으로 봅니다. ‘유다’라는 본명을 가진 제자가 그리스식 별명인 ‘다대오’, ‘테오도토스’의 약칭으로 불린 것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 당시 그리스 이름들, 유대인들 가운데 ‘데오’가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들어간 이름들을 유대인들도 많이 사용했는데, 거기서 ‘다대오’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다대오’의 그리스 발음으로 ‘타다이오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다대오’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발음으로는 ‘테오도토스’의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저는 ‘다대오 유다’라고 함께 불렀습니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
우리가 아니라 세상
다대오 유다가 제자들의 명단 외에 나오는 기록은 <요한복음> 14장 22절이 유일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질문을 단 한 번 던진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다른 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요 14:22절).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떠나시는 듯한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제자들 가운데 불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그 분위기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이 답변을 해주셨고, 그 답변에 또 다른 제자 도마가 질문했고,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을 또다시 빌립이 질문했고, 그 대답에 대해서 또다시 질문으로 던져진 것이 다대오 유다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의미를 알려면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도마, 빌립, 유다로 이어지는 네 명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 중반부터 14장 전체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주여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고, 빌립은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주여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한 다대오 유다의 질문과 앞서 질문한 세 명, 베드로, 도마, 빌립의 질문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앞서 질문한 세 명은 초점이 우리, 곧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들도 그곳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주께서 가시는 길을 우리가,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합니다. 알려 달라”고 질문했습니다. 빌립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질문했습니다. 초점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제자들의 염려, 알고자 하는 마음, 제자들에게 나타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초점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22절).
여기에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이 있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1세기 팔레스타인을 로마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세상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빌립에게 주신 답변의 마지막 부분에 반응하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21절).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에 반응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셨는데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십니까? 세상 한복판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시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 제국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주저하고 계십니까?”
다대오 유다의 질문, 두 가지 의미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신학적인 의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왜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분의 왕 되심을 선포하지 않으시는가? 둘째, 실존적인 좌절입니다. 예수님은 곧 떠나신다고 하는데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로마는 여전히 유대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에게만 나타나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겠는가?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불의함을 보는 눈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방식이 자신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에 이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질문이 아니라 평소에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요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도 예수님이 나타나야 하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는 온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실 거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메시아로 오셨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시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세상에도 그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셔서 통치하셔야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대한 소망,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쁜 의미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올바로 바뀌어야 된다는 건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과의 시각 차이입니다. 그는 당장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서든 아니면 교훈을 통해서든 로마 시저의 통치를 끝내주시고, 유대의 불의한 관료들을 무너뜨리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생각은 당시 열심당원들의 생각 흐름과 같은 맥락입니다. 라틴어 성경 사본에서 다대오 유다를 ‘열심당원 유다’라고 표현 한 것을 보면 그가 그들의 시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만큼은 아닐지 모릅니다. 칼을 들고 사람들을 암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맥락에서 메시아로 오신 분은 반드시 이 세상을 공개적으로 변화시켜 주셔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었던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출애굽 역사를 읽으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애굽의 바로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처럼, <신명기> 말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2의 모세가 오실 것이고, 그가 오신다면 로마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메시아 사상이요, 소망이었습니다. 다대오 유다에게도 그 소망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오해와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아버지와 내가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3~24절).
예수님의 대답은 21절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21절을 더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함께 내주하시게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다대오 유다는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왜 세상을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신 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주실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풀어 쓰면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에 무관심하신 게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한번 풀어 써 보았습니다.
“다대오 유다야, 나는 네가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기대하는 그런 왕으로 통치하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내 나라는 로마의 시저를 끌어내리고 유대를 독립시켜 세우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다. 나는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왕관을 쓰기 전에 십자가를 져야 하며 내일이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며, 나도 너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지만 나를 어떻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의 권한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버지께서 명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대오 유다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알아주면서 그가 가진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 통치 세력의 메시아로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주하심, 내적인 거주와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유다의 오해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메시아의 공개적인 나타남, 현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세상의 변혁은 내부로부터, 사랑과 순종으로 형성된 사람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처를 삼으심, 내주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 속에 나타난 선교적 관심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초점이 있었다면,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매우 올바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온 세상을 비추셔야 하는데 왜 제자들에게만 비추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 은혜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준 한계입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택함 받은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을 통해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먼저 택하신 유대인들이 바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라,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세상 속에 빛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결국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에데사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함으로써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가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다대오 유다의 질문을 기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그 답의 일부로 만드신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보면서 성도들에게도 다대오 유다와 같이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대오 유다에게 주신 답변을 기초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내 방식은 다르다. 나는 너희 안에 거처를 삼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말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나는 너희를 통해 세상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종교 문화 사회학자인 제임스 헌터가 쓴 <To Change the World>, 한글로는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세 가지 패러다임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방어적 대응’입니다. 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 반응을 취했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되찾아야 된다는 흐름 속에서 열심당원이 나온 것입니다. 메시아가 지금 당장 로마를 몰아내야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둘째, ‘문화적 관련성 추구’입니다. 메시아는 억눌린 자의 편에 계신다는 입장으로 ‘필요에 응답해야 된다’는 자유주의 여러 신학 사상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셋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분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순수성을 지켜야 된다는 분리주의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 결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에게 깔려 있는 원한과 분개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제임스 헌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 제자들의 신실한 임재, 이 세상 안에 신실하게 임재하는 것이 바로 유일한 대안이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제자들이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제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처를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세상에 들어가 신실하게 존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 나라의 많은 문제를 소수 사람들의 책임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 신실하게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가 세상 속에 신실한 주의 임재 통로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