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주일강단

[주일강단]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2026-01-31      제1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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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누가복음> 9:51~56, <사도행전> 12:1~3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매우 다양했습니다. 늘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의 베드로가 있었던 반면, 그의 동생 안드레는 조용히 뒤에서 섬기기를 더 좋아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지만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이 형제들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 즉 천둥번개와 같은 의미로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했으므로 요한도 그러한 성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불같이 급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우레 같이 분노가 터지는 성격을 꾸짖는 의미로 이름을 붙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시는 것은 현재나 과거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 상태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래와 비전을 미리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장래에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을 담아 주신 것입니다. 이 해석 원리를 적용하면, 야고보에게 ‘우레의 아들(보아너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의 현재 성격이 불같이 거칠지라도, 그 너머에 세상을 깨우는 우레 소리와 같은 사람으로 쓰임 받을 것을 미리 선포하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의 성품이 한순간에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건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그의 성품이 변화되어 제자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과 열정의 사람
 
먼저 그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부유한 미래를 포기합니다. 당시 ‘세베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그는 갈릴리 수산업계의 소위 ‘큰 손’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어부를 고용하고, 배들을 소유한 선주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레위 지파 후손으로 당시 대제사장 가문과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어물을 판매할 여러 상점도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의 집에도 자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출입이 가능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버지 세베대의 영향력으로 요한도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버지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이 가업을 이어받아 더 발전시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부친의 사업과 배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단호한 결단은 그들 안에 있는 때로는 불같이 급하지만 타협하지 않고 중간이 없는 강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안락함을 박차고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부유한 미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보다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뜨거운 열정과 가능성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때로 자신의 야망과 독선으로 인해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야고보가 세속적인 야망으로 위험한 불이 될 뻔 한 일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을 선발대로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투숙할 곳을 찾고 준비하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 사람들에 대한 상처와 차별로 인해 그들을 냉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라서 냉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를 냉대했던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불친절과 거절에 분노한 야고보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이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할까요?”
불같은 성격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에는 깊은 앙금과 미움, 증오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불을 내려 멸망시켜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역을 지나가고자 하셨고, 여러 차례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한 여인을 구원해 주셨으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를 넣으신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당연히 포함되지만, 땅 끝으로 가기 전에 사마리아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당시 세상이 네 지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도저히 넘고 싶지 않은, 불을 내려 진멸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선교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심판부터 생각하는 야고보의 열정은 방향을 잘못 잡으면 편협한 독선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이 없는 열정은 타인을 정죄하는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도 마땅하다고 바라보는 것은 위험한 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적대감에 대하여 동일한 적대감과 보복심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 전쟁과 종교 재판이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으니 스스로 불을 만들어 사람들을 징벌했던 모습이 야고보에게서 나타나고,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야고보의 열정은 때로 세속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 10:35~37).
야고보와 요한은 세속적인 야망으로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영광의 자리는 세속적인 힘을 가진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보신 영광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순간은 곧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영광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자리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자기의 야망과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또한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과 세속적인 야망,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에 대한 오해를 통해 자신이 위대해지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과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분노했는데, 그들도 똑같이 영광의 자리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끓어오르는 열정이 때로는 세속적인 야망에 휩쓸려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12장을 통해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이 순교의 우렛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됩니다. 

우렛소리로 쓰임 받은 첫 번째 순교자
 
“그 무렵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하려고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들을 체포했습니다. 헤롯은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이 일을 유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이어 베드로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는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행 12:1~3).
여기서 헤롯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입니다. 분봉왕과 같은 지역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 구체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려고 몇몇 사람을 체포했는데, 가장 먼저 희생시킬 사람을 골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을 먼저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먼저 제거해야 교회가 두려워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보기에 반교회적 세력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잡혀갑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가 불같은 열정으로 때로는 위험한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그를 변화시켜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에게 특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동행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순간도 함께 목격하도록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예수님이 고통 속에 기도하시는 모습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체험들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야고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 반교회적 세력이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후 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났지만,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고보는 미워하셔서 빨리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더 사랑하셔서 감옥에서 풀어주시고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게 아닙니다. 야고보는 짧은 순간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죽음의 세례를 함께 경험한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때 세속적인 욕망으로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지만, 첫 번째 순교자로서 예수님의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의 불같은 열정을 그저 지적하고 판단하고 정죄해서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우레는 짧게 울립니다. 그러나 세상을 진동시키며 사람들을 깨웁니다. 야고보의 사역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매우 짧았습니다. 우레처럼 짧게 울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렬한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깨우고, 안일했던 교회를 깨우고, 복음의 야성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권력을 탐하던 야망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과 복음 증거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거룩한 우레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으면 도리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야고보와 비슷하게 통제되지 않았던 열정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적 교만과 정욕에 휩쓸려 방황했습니다. 에너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이 하나님이 아닌 쾌락과 궤변을 따를 때 그는 마니교와 성적 타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 열정은 세상을 깨우고 교회를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이 남긴 <고백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가 없었더라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중세 시대가 아닌 짧은 시대를 살았던 어거스틴의 우레와 같은 생애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 안에 끓어오르는 열정의 동기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이름을 위한 열정인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열정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영광의 자리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내 힘과 능력으로 성격을 고치려 하지 말고, 성령의 임재와 불을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파괴적일 수 있었던 불같은 열정을 우레의 아들다운 순교의 불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고보가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야고보가 우레의 아들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도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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