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평범함 속의 비범함
<고린도전서> 10:31
/이재훈 위임목사
한 해를 돌아보면 특별한 사건이나 충격적인 사건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한 해의 99% 이상은 매우 평범한 일상입니다. 또 다른 한 해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너무 평범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전 10:31).
먹고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일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은 거룩함에는 예외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의 영역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와 세상, 주일과 평일을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순간은 어느 한 순간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생활할 때뿐만 아니라, 잠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훨씬 넓혀줍니다. 화란 자유대학교를 설립할 때 개교 연설이 명문장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인치도 없다.”
과학과 예술, 정치와 비즈니스, 교육과 가정,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것,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 친구를 만나는 사소한 만남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모든 삶의 영역이 거룩함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동기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동기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질 때 가능합니다. 17세기 시인이자 목사였던 조지 허버트는 많은 신앙시를 남겼습니다. 그분의 시가 많은 찬송가 가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한 찬송시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범사에 주를 보게 하시고 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자의 눈, 유리에 머물 수도 있으나 원한다면 그 너머로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 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은 없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비범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 어떤 일이건 그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임을 의식할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거룩한 예배의 제단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 ‘영적 허영심’입니다. 영적 허영심이란 큰일을 할 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처럼 보이는 일은 내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오만입니다. 모든 삶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는 것은 평범한 행위지만 그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음식이 만들어질 때까지 수고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도 감사하고, 그 음식을 통해 누군가와 화해하고 화목하며, 누군가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비범한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이 똑같은 식사지만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죽음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을 받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늘 우리는 먹고 마십니다. 우리의 먹고 마심이라는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과 우리의 연합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생존을 위한 본능에 머물지 않고 그 힘으로 섬기고 나누고 베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동기와 목적을 품을 때 비범한 행위가 되는 겁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은 노동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업과 거래를 통해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공의를 나타내고자 일한다면 그것은 선교입니다.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도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면 선교 행위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비즈니스 활동이지만 세속적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목수가 나무로 작품을 만들고, 주부가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자녀를 잘 양육하는 모든 일상적인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분은 그 모든 행위를 예배로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쓴 로렌스 형제는 학자 수도사가 아닙니다. 그가 하는 수도사의 일은 요리사였습니다. 그 전에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지극히 작은 일, 요리하는 일, 설거지하는 일, 누군가의 신발을 고쳐주는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묵상하며 쓴 책이 수백 년 동안 영적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비범한 일을 이루어야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 동기와 목적이 그것을 가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덕을 세우는 일”
둘째, 다른 사람을 위해 덕을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언급하는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거대한 상업 도시였고, 그만큼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육류 대부분은 신전에 바쳐졌던 제물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지식이 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올바른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고, 그러므로 그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영적으로 내가 오염되는 것 아니다. 그 우상의 어떤 세력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사실 정답입니다. 올바른 지식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지식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시장에서 고기를 자유롭게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믿음이 약한 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음과 양심이 약한 이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힘들어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실족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모든 교회가 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먹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나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절제하고,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 지식에 사랑이 없을 때는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자유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로운 일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곧 덕을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든지 그리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의 교회에든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에 모두를 기쁘게 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32~33절).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수평적으로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내 곁에 있는 성도들이 나의 행동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헬라어 ‘오이코도메’는 ‘집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거대한 집, 공동체라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들, 우리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 직장에서의 사소한 행동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 건물을 짓는 벽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고전 10:23~24).
이중적인 생활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덕을 세우는 행동’이라는 기준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왜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하고 제한을 받아야 됩니까?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하면 되는데, 왜 나의 감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적을 받아야 됩니까?” 그 대답이 31절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31절).
먹고 마시는 건 자유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것으로 인해 시험 드는 이가 있다면 하지 않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는 먹을 수 있지만, 누군가 시험 드는 일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범함이란 지식으로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세워주기 위해 기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공동체의 화평을 위해 침묵하는 인내가 모여서 하나님의 집,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드려지는 삶입니다.
세기의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그리스도인은 움직이는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일상을 읽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듯이, 우리 삶의 단 1분 1초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상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가 있다는 하나님 섭리의 관점을 가져야합니다. 나의 자유와 권리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 이웃에게 덕을 끼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배려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결단하십시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비범한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