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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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2024-04-13      제14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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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사도행전 6:1~15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에는 교회 밖으로는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불평이 일어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으로 인해서 생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성도들의 숫자가 많아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정적인 문제입니다. 6장 1절에서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누락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는 뉘앙스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로든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지고,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될 대상이 누락이 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관계 문제, 영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둘째,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생기는 문화적 긴장입니다. 구제 명단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파 유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파’, ‘히브리파’라는 단어를 쓴 것은 교회 안에 정당처럼 파가 나눠졌다는 게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주로 누락이 된 사람들이 그리스파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문화적 긴장 혹은 갈등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우선순위 재정립,
성령과 지혜 충만한 리더십 세우기
 
사도들은 이 갈등을 그냥 덮으려 하지 않고 해결했습니다. 이 갈등이 도리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첫째,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사도들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분배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러면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2~4절).
갈등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각자가 올바른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구제와 봉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공동체의 영적 생명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선순위를 더욱 명확하게 한 것입니다. 갈등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우선순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공동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5~6절). 
사도들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제안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권위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제안하고 대화하는 수평적 권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일곱 사람을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은 사도직과 집사직으로 구분해서 완벽하게 직제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사도들을 돕는 보조사역자로서 일을 분담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이들 가운데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뚜렷하게 지혜와 능력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혜’란 현실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판단력을 통해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 판단력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을 사용해서 성령 안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령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혜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믿음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도 이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롭게 할 때도 믿음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을 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예”, “아니오”, “기다려라”입니다. 이 외에 두 가지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믿을테니까 네가 잘 판단해서 결정해 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판단을 존중해 주시는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에게 이미 주어진 지혜를 활용해서 결정하면 내가 밀어줄게”라는 응답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손 떼”입니다. “너는 이제 그만 생각해”라고 믿음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명이 믿음과 지혜가 충만해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섬기는 사람으로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신실한 리더들,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리더들이 계속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열매인 지혜와 믿음은 교회 리더십으로 세움을 받는 중요한 자질입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다
 
셋째, 그들은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앞서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일곱 사람들의 명칭이 모두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면류관)입니다.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안디옥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이 완전히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종한 니골라를 새롭게 리더십을 뽑았습니다. 유대인, 예루살렘 출신, 익숙한 문화권에 있는 이들이 아닌 사람 가운데 리더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가 있고, 불평이 있었던 문화권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도 함께 리더십으로 참여하는 다문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 온누리교회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M미션이나 이주자들이 와서 이제는 다문화 공동체가 익숙해졌습니다. 많은 다문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오래 거주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도 온누리교회 리더십으로 세워 드리고, 넓은 다문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인종, 같은 문화 사람들끼리만 어울립니다. 사실 그것이 편합니다. 사회는 다문화 사회인데 교회는 단일문화가 지속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의 결정을 보십시오. 당시 유대문화 중심적인 공동체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결정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일곱 명을 모두 그리스파 사람들로 세웠다는 것이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한국인만 생각한다면 교회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인 교회가 된다면 한국 교회가 선교적인 공동체로 쓰임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누락되고 갈등이 생겼지만, 그리스파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리더십을 세우고, 서로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초대 교회에 갈등이 일어났지만 그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많이 늘었고 더욱이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게 됐습니다”(7절).
말씀이 계속 퍼져나갔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심지어 제사장들도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던 갈등이 심각해져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실한 일곱 명이 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입니다. 사도들의 영향력보다 스데반의 영향력이 더 컸습니다. 이분에게 꼭 붙여지는 별명이 ‘충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이분을 통해 표적과 기적이 나타나고, 그분이 말씀을 전할 때 수많은 영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심문받은 것처럼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누명을 쓰고 공회원들 앞에 섭니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자신을 잡아먹을 듯 고소하고, 억울하게 몰아세우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해치려고, 공격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충만입니다. 충만이란 흘러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러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담대한 증인이자 온화하고, 평화롭고, 대적하는 이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충만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에 갈등이 있었지만 갈등을 녹여내고,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고, 올바른 사람들을 세우고, 서로의 차이를 끌어안았을 때 갈등이 오히려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에 때로는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공동체가 서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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