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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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2024-03-30      제14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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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마가복음 11:1~11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12살 때 부모님과 함께 절기를 지키러 갔던 장면 외에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공생애를 사시지 않고, 갈릴리 주변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최후의 일주일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통해서 삼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모든 사건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예루살렘 입성 이후 최후의 일주일의 삶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고, 공생애 모든 표적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서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일어나는 사건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3년과 일주일을 비교해 보면 그 일주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예루살렘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생긴 마을입니다. 숙박과 물을 제공하는 마을들이 여러 곳 있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벳바게와 베다니입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불리는 교회력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최후의 일주일 이전의 주일을 ‘종려주일’, ‘승리의 입성 주일’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력으로 지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공생애를 사시며 보여주셨던 것과 사뭇 다릅니다. 공생애를 사실 때 예수님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늘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이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번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시고, 대중에게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면 산으로 숨으시거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등 줄곧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는 도망가실 정도로 관심을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경고하시고 막으셨던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행하셨을까요?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이 마을로부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예수님이 직접 연출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 성이 떠들썩할 정도로 군중의 환호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언약을 이루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스스로 기획하시고 연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절반 이상이 예수님이 두 명의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키는 내용입니다. 나귀를 끌고 오는 일이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건의 가장 강력한 조연은 나귀입니다. 나귀를 선택하신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디든지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나귀를 타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 두 명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그곳에 들어가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하나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끌고 와라. 만약 누가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라’”(1~3절). 
두 명의 제자들에게 누군가의 소유인 나귀를 가져오되 주인의 동의를 구하고, 빌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장소에 가면 나귀가 있을 것이고,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상세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늘과 땅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나귀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귀가 필요하시니 쓰시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신 말씀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도 나귀를 빌리고, 제자리에 갔다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빌려서 사셨습니다. 빌린 집에서 사셨고, 빌린 배를 타셨고, 빌린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빌린 무덤에서 장사되셨습니다. 여기서는 빌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린 것을 돌려놓으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빌린 것을 확실하게 갚아야겠다는 적용도 해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갖고 오게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니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구원의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겸손하시기에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모든 사역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예언만 200구절이 넘습니다. 이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출생부터 부자의 묘에 안치되는 것까지 직접적인 예언만 200개, 간접적인 것까지 하면 700~800개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예언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 오시는데, 그분은 겸손한 왕으로서 새끼 나귀를 타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고 계십니다. 
대개 왕은 무엇을 탑니까? 말을 탑니다.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말을 탑니다. 그래서 왕이 출정을 하거나 전쟁에서 돌아올 때는 웅장한 말소리와 함께 행진을 합니다. 새끼 나귀는 걷는 속도나 모양을 볼 때 왕의 품위나 권위를 상징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절 자체를 왕정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읽기가 어렵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라고 하면 왕을 무시하는 것 같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나귀는 전쟁의 동물이 아니라 평화의 동물입니다. 나귀는 싸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평화로울 때 터벅터벅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구원을 이루시는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이라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높은 깃발도 없고, 큰 나팔도 없고, 군사들의 호위도 없이 나귀를 홀로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말구유’라고 하는데, 사실은 나귀의 구유입니다. 서민들의 집에는 말이 없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말은 매우 비싼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우신 곳도 나귀의 구유입니다. 태어나실 때도 나귀의 구유였고, 마지막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군중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나귀를 타신 모습은 군중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이 공생애를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 특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기적은 군중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해줄 메시아라는 기대를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관을 가지고 환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드렸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복이 있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8~10절).
흔히 종려주일에 이 고백과 외침으로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찬양은 찬양인데 오해가 포함된 찬양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환영하는 외침이지만, 군중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가 다릅니다. 그들은 길 위에 겉옷을 깔아드리고,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고, “호산나” 주님을 환영하며 외쳤지만, 그들이 지금 외치는 구원해 달라는 노래는 영적인 구원, 죄로부터, 사탄의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구원, 즉 로마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간구의 단어입니다. ‘호산나’라는 단어가 정치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 118:25).
유대인들은 <시편>을 유대인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것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 겉옷을 깔았습니다. 세속적인 왕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것도 민족주의적인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종려나무를 지도자를 환영하거나 축복할 때 사용했을까요? 주전 175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전이 더렵혀졌습니다. 그때 유대에서 마카비우스라는 사람이 나와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이기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회복시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마카비우스로부터 시작된 왕조가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마카비우스가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영하는 도구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에서 유래해서 계속 내려온 것입니다. 그 행위를 똑같이 한 것입니다. 마카비우스를 환영할 때 종려나무가지를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능력이 로마 제국을 향해 이루어진다면 전쟁도 이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독립, 해방, 자유를 얻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마카비우스를 환영하듯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영한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유대 민족이 복음화 되었을 때 그 능력으로 로마 제국에서 독립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교회와 학교들이 없었다면 독립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앞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적은 인원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크리스천들이 민족주의와 복음적인 신앙이 하나 되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가 흡수되어서 민족주의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믿음의 신앙을 민족주의에 넘겨주지 않은 것입니다. 항일운동, 반공운동 등 민족의 저항에 크게 기여했지만,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세계 기독교사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바르게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 신앙을 이념화에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넘긴 것입니다. <시편>의 어느 구절을 읽어도 <시편> 기자가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 인용했습니다. 그 모습이 표출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셨으니 환영하자고 연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연출하신 것은 새끼 나귀를 타고 가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환호하는 군중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대중들의 환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철저하게 구약에 나타난 예언을 이루시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창과 칼, 무력, 때로는 기적으로 일으키는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평화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행위가 나귀를 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겸손한 왕’
 
“내가 에브라임에 있는 전차를 없애고 예루살렘에 있는 말을 없애고 전쟁용 활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리며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다”(슥 9:10).
세상의 통치자들은 전차와 말, 활이 있어야 합니다. 무력이 통치의 기본이 됩니다. 세속적인 왕의 모습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없어도 다스려지는 왕이 있습니다. 무력이 아닌, 힘이 아닌, 권력이 아닌 것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온유와 겸손, 섬김과 사랑, 희생과 나눔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평화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기와 미움이 가득한 대적들이 음모를 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면서 예수님의 정체가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대적들이 예루살렘에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던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몰랐습니다. 가룟 유다가 필요한 것도 누가 예수님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없을 때 잡아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제자가 밀고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준비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고, 게다가 수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했으니 확실한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닷새 전입니다. 유월절은 그달 14일입니다. 이날은 10일입니다. 율법에 유월절 양을 취하는 날로 정해놓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닷새 전에 어느 양을 죽일 지를 정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건 자체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대적에게는 표적이 정해졌고, 그때부터 명확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군중들이 외쳤던 호산나를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했던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외쳤지만,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너무 쉽게 예수님을 버리는 변덕스러운 믿음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탐욕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군중들은 옷과 가지를 깔아 예수님을 세속적인 통치자로 대접했지만, 예수님의 발 앞에 깔아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염려, 근심, 죄와 허물입니다. 그것들을 예수님 발 앞에 내어드려 모든 죄를 짓밟아 승리하신 승리자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겸손한 왕입니다.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이 이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그분이 가장 겸손한 나라요, 왕이신 분이 가장 섬기는 나라요, 왕이신 분이 가장 희생하는 나라입니다.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과 가까이 있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과 섬김이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왕과 닮은 백성이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고, 종려주일을 보내며 언약을 이루시는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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