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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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2024-03-23      제1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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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사도행전 5:27~42
/ 이재훈 위임목사
 
전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단체나 무자비한 독재자들의 출현, 그리고 거짓된 이념을 추종하는 사이비 종교들, 이 모든 악의 흐름 이면에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한 거짓된 악이 존재합니다.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신론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행위 이면에도 독이 있는 무서운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에서도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테러집단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원리는 동일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당시 유대 사회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이들을 감옥에 잡아 가두고 채찍질하고 협박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이들이 유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을 세밀하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한패인 사두개파의 당원들은 모두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7~18절).
그들의 시기심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겉으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하고, 로마 황제를 모독하며 반란을 일으킨다는 죄명을 씌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라는 사람을 시기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이유로 포장해서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많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백성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세상적인 정치권력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 초래되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다는 게 아니라 실상은 자신들의 시기심을 종교의 이름으로, 이념의 논리로 포장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절).
마지막 부분의 ‘이 사람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된 말입니까? 사도들은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라며 진실을 전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불의한 재판과 빌라도의 정치적 압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이념을 절대화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한패인 사두개인들입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이들인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는 바리새인들도 동조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시작할 때는 바리새인들이 움찔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믿음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도 전통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전하니까, 그들의 주장과 이념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를 지탱했던 것이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며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부활을 증거하니까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이념이 무너지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덮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당시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서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이념을 절대화하려고 핍박을 행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독이 있는 믿음, 잘못된 믿음, 자신들의 생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는 믿음과 대조적으로 사도들은 모든 상황에서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단순한 인간의 용기로는 당시 사탄의 종노릇하는 권력자들의 위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적인 정의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했던 시대입니다. 지도자가 곧 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악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위협 앞에서 모두 벌벌 떠는 시대에 그들 앞에서 담대할 뿐만 아니라 받는 핍박을 기쁨으로 여겼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29~32절).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핍박을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발걸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주어진 걸음이라는 것,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쓰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삶 속에서 때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로 우리가 사람 눈치를 보고, 인간관계를 고려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생명력 있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관계에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편을 선택할 때 그 관계가 올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발걸음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확신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확신이 어디서 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전해짐으로 회개와 죄 사함의 놀라운 구원이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라!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이 새 생명의 말씀을 모두 전하라”(20절). 
그들이 성전에서 새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은 새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새 생명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새 생명이 있습니까? 새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생명으로는 핍박과 환경의 어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으면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쇠퇴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겠지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구분하는 두 가지 질문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그들을 절제시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존경을 받았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감정적으로 치우쳐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인도합니다. 두 가지 역사 사례를 제시하며 절제시킵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8~39절). 
참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가말리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강압적인 폭력으로 그들을 막을 수 없고, 사람에게 비롯된 일이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실패하고 망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면 분명히 성공할 것인데 섣불리 나섰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과거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듭니다.  36절에서 ‘드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400명까지 따랐지만, 모두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냐고 하고, 37절에서 ‘유다’라는 사람이 많은 추종자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 또한 흩어지지 않았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두고 내버려두면 이것이 하나님께 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검증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버려 두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였습니다. 가말리엘의 태도가 신중하고, 다른 공회원보다는 지혜로웠지만, 그 또한 결정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성공하면 인정하고, 실패하면 해결되는 것이니 내버려두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성공이라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혜일뿐입니다. 진리에 기초한 판단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흘러가도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는 종교와 사이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쇠퇴하는 일들도 있지만, 악의 세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가말리엘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봤을 때 충분히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또한 진정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는 낫지만, 그것 또한 핑계였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압니다. 
첫째,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은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 천사가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 베드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그림자라도 닿으려고 노력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인정하고, 사도들의 말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둘째, ‘지금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핍박 받고 죽음에 처할 위기에 처해 있어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새 생명이라는 것을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그들은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만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새 생명의 역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복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서 참여하고 헌신하는 이들만 이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41~42절).
그들은 모욕과 핍박을 기뻐하고,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탁류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줄기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의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NGO 더멋진세상을 통해 이웃을 구제하는 모든 일이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열방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기쁘게 헌신하는 것이 생명의 물줄기인줄 믿습니다. 생명의 물줄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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