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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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2024-03-16      제1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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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사도행전 5:1~11
/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은 때로 충격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각성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모습에 있다 할지라도 버리지 아니하시며 사랑하십니다. 그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일깨우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충격적 사건이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경 역사 속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다른 불을 분향했을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가나안을 정복하러 갔을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 중 일부를 도둑질 했을 때 그의 족속이 모두 멸망당합니다. 다윗 시대에 법궤를 모셔올 때 웃사라는 사람이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음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들, 하나님의 엄한 징계가 임하는 일들이 역사 속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백성들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거짓도 들어오지 않고,
거룩을 일깨우려는 ‘충격적인 일’ 
 
초대교회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으로 인해서 공동체가 거룩하고, 순결하고,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최대한 거룩을 지키며,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하기에 조그마한 거짓도 들어오지 않도록 거룩을 일깨우려고 충격적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 부부가 땅을 팔아서 헌금을 했는데, 판값의 일부를 감추고 그것이 전부라고 교회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의 대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헌금한 부부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거짓의 대가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충격적인 사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경우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루시지는 않습니다. 헌금으로 거짓말 한 대가로 죽는 일을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다루신다면, 역사적으로 각 교회에서 헌금 시간에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샘플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주일학교 때 헌금으로 과자를 사 먹고 헌금을 내지 않는 사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일을 한 번 이상 저지른 분들은 모두 이 본문에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릴 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 외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살펴본 <사도행전> 4장에서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헌신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랬다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 헌신된 이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는 헌신된 가정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참여한 것은 일종의 특별헌금 성격이었습니다. 4장 후반부를 보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필요를 따라 함께 나누고, 때로 땅이나 집을 팔아서 헌금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소개하는 한 인물이 바나바였습니다. 레위족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바나바가 헌신한 사건을 <사도행전> 4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한 것은 그의 헌신이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헌신이며, 그러한 영적인 물결을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 이후 <사도행전> 4장 마지막 구절에 바나바의 헌신과 대조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장절을 다시 구분한다면 저는 <사도행전> 5장 1~11절도 4장에 넣겠습니다. 그러면 바나바의 헌신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가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이것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람직한 모델로서 바나바의 헌신을 기록하고, 모두에게 충격을 주고 각성을 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사건도 있었지만, 충격을 주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책망하는 두 가지 이유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자기 것으로 숨겨 두고는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바쳤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1~2절).
부부가 함께 결정했습니다. 일부를 떼어 숨겨 두고는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떻게 네가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네 것으로 몰래 숨겨 놓았느냐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소유였고 또 팔고 난 뒤에도 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마음에 품었느냐?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3~4절).
베드로가 책망하는 것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해서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동시에 이 일은 아나니아 스스로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전부를 내지 않고 일부는 자신이 가졌다고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왜 전부를 안 넣느냐?”가 아닙니다. “전부를 내지 않고 왜 일부를 내었느냐?”가 아니라 “일부를 냈으면서 왜 전부를 넣었다고 거짓말하느냐?”입니다. 베드로가 전부를 헌금하지 않았다고 책망했고, 하나님이 전부를 안 냈다고 그들을 죽음으로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에게 헌금하라고 강요했느냐? 아무도 강요한 적 없고, 하나님은 강요하신 분도 아니다. 바나바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자진해서 기쁨으로 헌신했고, 기쁨으로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다. 당신도 그렇게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얼마를 헌금하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도 아니고, 땅을 판 것도 당신 소유의 재산이요, 그중에 아주 작은 일부만 냈어도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문제는 당신이 일부를 내놓고 전부라고 부풀려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베드로의 책망입니다.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소유였고, 또 팔고 난 뒤에도 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하신 분도 아니요,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당신의 자유에 맡기신 것입니다. 팔아서 일부만 헌금해도 되는데, 그것이 전부인 듯 포장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속인 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보다 동기를 보신다 
 
아나니아가 책망을 듣는 순간 쓰러졌고, 죽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아나니아가 그렇게 된 것을 모르는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남편에 관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땅을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네. 이뿐입니다.” 
그 순간 삽비라 역시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의 상황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삽비라가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면, 그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삽비라에게 기회를 주고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삽비라도 거짓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왜 이 부부가 일부를 내면서 전부를 냈다고 거짓말하는 결정을 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마음을 사탄이 이용하도록 내어줬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 바나바의 헌신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부에게 비교의식이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순수한 헌신을 통해서 모두에게 위로를 주고, 존경받고,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바나바처럼 재산의 전부를 내놓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를 내놓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서 전부를 내놓은 사람이 되려니 거짓말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바나바의 헌신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신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실제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위선’입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영적으로 헌신하고,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처럼 인정받고 싶었던 위선의 죄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를 내놓는지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행위인가보다 어떤 동기인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사탄의 역사에 경각심
 
“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시 139:1~3).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위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엄하게 다루시고, 충격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교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첫째,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에 대해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1절).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하셨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새롭게 시작한 이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시작할 때 나답과 아비후를 엄하게 다루신 것처럼, 다윗 왕국이 새롭게 시작할 때 그를 엄하게 다루신 것처럼, 새롭게 행하시는 시기에 매우 엄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엄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이 든다면 “내가 하나님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맞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 결과 사탄의 역사에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거짓 없는 진리 위에 세워지고 성장해야
 
둘째, 교회는 거짓 없는 진리 위에 세워지고 성장해야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후반부를 보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청결한 마음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벧전 1:22). 
진리에 순종함으로 거짓 없는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짓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교회가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이 그 교회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것처럼 포장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믿음의 영역에서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온전한 것처럼, 믿음이 좋은 것처럼 포장할 때 그 거짓 속에 세워진 신앙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순에서 자신의 연약함, 때로는 불신과 의심 등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리에 함께 순종해 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은혜
 
셋째,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처분이 가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않도록 먼저 데려가신 것입니다. 유다와 같이 심각하게 망가진 영혼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었다면 영원한 죽음은 피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 땅에 오래 있는 것보다 빨리 데려가는 게 그 영혼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실 때 하나님이 또 다른 형태의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조차 사탄의 공격을 받았다면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령공동체에는 얼마나 많은 영적 공격이 있겠습니까? 외부의 공격은 우리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선, 거짓, 속임수는 우리를 사탄의 먹이로 내어줍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처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식할 필요 없이 하나님만 의식하면 됩니다. 하나님만 의식한다면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고,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면 사탄이 공격할거리가 없어집니다. 온누리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 없는 사랑, 진리 위에 세워지는 견고한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탄이 틈타지 못하고, 사탄이 공격할거리가 없는 강건한 교회가 되어서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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