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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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2024-03-09      제1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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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행 4:32~37
/ 이재훈 위임목사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어떠한 위협이 오더라도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화되었습니다. 궁핍한 이들에게 기쁨으로 자신의 물질을 나눠 주는 기적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물질관이 바뀝니다. 물질에 대해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드리고 싶어지고, 궁핍과 가난 가운데 있는 이들의 필요를 돌보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의 강요나 부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33절에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고 하고, 32절과 34~35절에서는 “사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큰 권능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씀 앞뒤에 필요를 나누는 모습이 감싸고 있습니다. <신명기> 15장 4절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튼 너희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차지하라고 주시는 그 땅에서 그분이 너희를 넉넉하게 복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신 15:4).
당시 예루살렘교회 성도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사회 신분이 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저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또 한편으로 했던 일이 가난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얼마를 기부했기 때문입니다”(롬 15:25~26). 
사도 바울의 중요한 사역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로부터 은혜를 받고 빚진 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물질에 필요를 도와 그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냐”는 말씀도 다른 서신에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어떤 치유나 기적의 영역으로만 제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중요한 역사는 성품의 변화, 내면의 변화, 관계의 변화, 공동체의 변화입니다. 연약한 지체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그리고 어떤 성도에게 진정으로 성령님이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두 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와 동시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
넘어서는 공동체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됐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고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32절). 
“그들 가운데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습니다. 그러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기 때문입니다”(34~35절).
이 말씀은 공동 소유, 강제적 재산 공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사유재산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함께 모였다”는 말씀이 있고,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그것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바쳤다”고 했습니다. 개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어떤 이념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넘어선 것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기주의였습니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세우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평등’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단어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어떤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나눠 줄 수 있는 공동체, 자기중심주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념과 제도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평등이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법과 제도로 제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등한 사회는 차이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넘는 사랑,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연약함을 보듬는 일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법과 제도를 통해서 평등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 교육시스템도 평등하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자는 의미에서 평준화 정책을 했습니다. 내년이 50년 째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평준화’라는 이념이 가져온 교육 정책이 우리나라의 엄청난 잠재력을 일으키기보다 둔화시켰습니다. ‘평준화’가 아니라 ‘평둔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립학교들이 커리큘럼을 재량껏 세울 수 없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 사립학교가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종교학을 배웁니다. 종교학 교과서를 보면 불교나 이슬람에 많은 지면 할애가 되어 있는데, 기독교는 2~3페이지입니다. 모든 사립학교가 그것을 의무적으로 행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평준화라는 정책입니다. 모든 학생들을 평등하게 가르친다는 이념이 잘못 적용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잠재력이 말살될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출산율이 저하 된다고 국가에서 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가정의 중요성,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가정을 가르치도록 허용해 주면 되는데, 몇 십 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종교학을 가르친 결과 중 하나입니다. 물밀듯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가정 해체주의가 들어와서 그 속에서 자라난 다음 세대들이 가정을 잊어버리고 해체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저출산입니다. 교육 평준화가 초기에는 기여한 바가 있지만, 갈수록 우리나라를 묶고 있고,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이념을 교육에 들이댄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단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법과 제도로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게 잘못된 것입니다.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재정과 물질에 대한 시각의 변화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각자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는 공동체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재정과 물질에 대한 세 가지 시각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소유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을 뿐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하나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둘째, 독점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도 안하는 종이 있고, 시키는 것만 하는 종이 있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스스로 했습니다. 그들이 참된 청지기 입니다. 
셋째, 욕심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필요와 욕심은 다릅니다. 자신은 필요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욕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필요로 가장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와 욕심을 구분하고,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도 구분해야합니다.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필요가 아니라 욕심이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은 인간적 차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할 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함께 나눴기 때문입니다.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요,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요, 욕심이 아니라 필요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칭찬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했고 풍성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습니다”(33절). 
큰 권능과 풍성한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나눔과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였습니다. 
9월 열리는 서울 제4차 로잔대회 주제가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포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나타내는 것은 삶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
 
“키프로스 출신인 요셉이라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도 불었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36~37절). 
키프로스는 그가 태어난 지역 이름입니다. 레위는 조상이고,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바나바’입니다. 그 뜻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도들이 그를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별명을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별명이 바나바인데, 그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히브리인이었기에 ‘~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에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용사적인 표현을 할 때도 명사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형용사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며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자녀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속 썩이는 자녀가 있고, 불순종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아버지를 닮은 자녀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빛의 자녀’는 다른 사람을 비춰주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위로의 아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데 최고인 사람, 그를 만나면 누구나 위로를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명사를 통해 형용사적인 최상급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위로를 주었습니다. 격려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놓은 것만으로 그 별명을 얻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가 영광 받기 원한다면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눔을 기뻐하고, 그가 다른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가 왜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사도행전> 곳곳에 나오는데, 11장을 보면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기적
나눔 그리고 격려와 위로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됐습니다”(행 11:22~24). 
그가 안디옥에 파송을 받았습니다.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파송을 받아 기뻐하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가르쳤다’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가르침인데 어떤 사람은 책망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격려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격려하며 세우는 사람이 있고, 정죄하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행한 주된 일은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는 결이 같은 사역입니다. 바나바는 물질적인 나눔만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위로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위로의 사역, 격려의 사역으로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바울을 세운 것입니다.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 세웠습니다. 바울이 사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겨우 세워진 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이력,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이력 때문에 자책감, ‘메시아를 몰라봤다’는 절망감과 씨름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절망감과 자책감을 씻어 준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 없었다면 바울이 <사도행전> 전면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세웠기에 <사도행전> 역사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2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이름이 주로 나오지만, 바울 곁에 는 늘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물질적인 나눔만이 아니라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꼭 나눌 게 있어야 나눔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에 목마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과 낙심과 자책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가 물질의 나눔보다 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기적은 한편으로는 나눔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위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나바가 되어서 위로와 격려가 가득하고, 나눔이 가득하고, 그것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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