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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모든 것의 시작

 2023-05-13      제14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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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
 
창세기 1:1~2
/ 이재훈 목사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지는 질문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사춘기 방황의 시절에 호기심으로 한번 던져 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작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시작을 아는 게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당할 때 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을 때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기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방황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세찬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이 세상의 강물에 떠내려가듯 살고 맙니다. 깊은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했던 욥도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파헤쳐 가면서 결국 이르게 된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욥이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느냐? 네가 아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단단한 기초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2~6). 
“빛의 근원지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네가 그것들을 제자리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욥 38:19~20). 
하나님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 질문은 욥이 원하는 대답과 동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오히려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만물의 시작을 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신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고난이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사실만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부터만 알 수 있기에 자신의 시작을 스스로 능력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적 사고나 과학적 연구로도 인간은 그 시작을 명백하게 알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모든 원리 자체가 창조에 의해 생겨난 이후 결과이므로 창조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어떤 자료나 이론은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광대함과 신비함은 과학이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말씀의 증거를 통해서만 그 시작의 이유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대답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시작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절). 
성경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창조’를 의미하는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 ‘바라’라는 동사는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로 이루어집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아싸’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다른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바라’는 ‘create’라는 단어를 쓰고, ‘아싸’는 ‘make’라는 동사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우리말로는 ‘만들다’는 표현으로 쓸 수 있습니다. 또 ‘야차르’라는 동사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물질을 새롭게 조성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가장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쓰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어떤 존재나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이미 어떤 물질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하지만, 이것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훨씬 낫습니다. NIV도 ‘비어 있다(empty)’고 썼습니다. 무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을 설명할 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표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히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미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부터 우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창조를 통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만들 때 대개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만듭니다. 재료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도 재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로부터 창조하셨기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완전한 자유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아주 작은 생물, 미생물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초월적, 실제적 영역을 포함

 
모든 것이 시작된 태초(in the beginning)가 존재합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표현, 인간을 위한 표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더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시작 시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만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인간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입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창조의 정확한 시간, 연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가 구체적으로 몇 년 전에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시작이 있었다”, “그 시간의 출발이 있었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역사 너머에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게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기권과 우리가 딛고 있는 흙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모든 초월적 영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실제의 영역을 포함한 것을 ‘하늘과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초월적인 세계와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의 세계 모든 것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할 때 그 ‘하늘’과 ‘땅’은 대기권의 하늘과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적 실제, 초월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뜻이 오늘 삶 속에,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늘과 땅’이 같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이어서 ‘곧’이라고 한 것은 해석입니다. 즉, 하늘과 땅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해석을 근거해서 <니케아 신경>에서는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한 시점이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2절).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2절에서는 땅에 집중합니다. 1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나오고, 2절에서는 하늘이 언급되지 않고 땅만 언급됩니다. 1절은 모든 것의 창조에 초점을 두었다면, 2절에서는 땅의 창조에 집중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가 지구 중심의 창조를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1절의 결과로 2절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혼돈하여 공허하다’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었기에 1절과 2절에 큰 간격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많은 공백을 우리가 상상하며 해석하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그 결과가 공허하고 혼돈하다면 하나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설명 이후 2절부터 땅의 창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서술적인, 주제상의 순서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땅의 창조를 이뤄가는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3절 이하에 오는 6일 창조가 어떻게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 내용을 채우시는 창조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3절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해석하면 늪에 빠집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로힘, 성부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1:1~3). 
여기서 ‘그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부터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골로새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계셨고,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이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을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며 존재하는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의 사랑, 성령 안에서 그 아들과 누리시는 사랑, 그 사랑이 흘러넘쳐 창조하셨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 모든 것이라는 창조가 나 한 사람, 나같이 작은 존재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붙잡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창조의 신앙입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의 증언, 선언 그리고 대답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증언입니다. 창조의 유일한 목격자가 계십니다. 창조주 그분입니다. 모든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이 창조 역사를 증언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창조주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언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신론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의 존재를 당연한 사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은 유물론을 배격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범신론을 배격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는 종교, 철학, 사상, 신에 대한 관념 등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선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너는 지음 받은 존재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만 하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우연히 존재했다고 하는 막연한 대답을 하면 막연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신격화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 창조주의 솜씨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피조물 자체를 신격화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숭배를 가리켜 ‘인간의 자기기만이요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인간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두 구절의 창조 기록을 자신의 증언, 선언, 대답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창조를 분석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가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만드실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닌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된 것을 말씀하는데 단 한 절이면 충분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창조를 설명하는데 1장의 30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제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말씀이 단순한데 그 범위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런데 그 표현이 얼마나 간결하고, 과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합니까? 전문적인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입니다. 창조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이고,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고, 참된 지혜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전도서> 12장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축복된 미래를 가져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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