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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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2023-05-06      제14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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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전 5:5~11 
/ 이재훈 목사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빌 3:10~11).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가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알고자 한다”, “이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알고자 한다’는 것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체험적인 앎입니다.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고,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지금 죽었다가 바로 부활하는 체험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현재 우리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체험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은 진노를 당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깨어 있든 자고 있든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9~10절).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분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는 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는 게 부활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단계가 이어져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합니까?”(롬 6:3). 
하나님 구원의 해결책은 개선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고치는 게 아닙니다. 성격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옛사람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주시는 약속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음을 경험하는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1~2).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엡 2:4~6). 
이미 완료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닙니다.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려고 할 때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것도 완료된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경험하는 일을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믿는 모든 자,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그분과 함께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전의 생명이 아닙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다른 차원입니다. 성육신하신 생명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완전한 죽음을 통과해 새롭게 살아나신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탄을 이긴 생명이요, 세상을 이긴 생명이요, 육신을 이긴 생명이요, 지옥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미래 우리에게 약속된 것만이 아닙니다. 현재 삶 속에서도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부활을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살리심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시제가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날 때 그 사건과 연합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세대에 걸쳐 감춰져 온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 1:26~27).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비밀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믿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 부활과 함께 우리도 부활해서 새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것만 믿는 게 아닙니다. 살아계신 그분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미래에 확실히 약속된 부활과 영광을 지금 삶 속에서 맛보고,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 살도록 하려고 영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생명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 성육신을 제외한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승천, 그분의 재림에 함께 연합하고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음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늘에 올리심을 받아 그분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함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있을 영광을 바라볼 때만 이 일이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그처럼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임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삶은 영적으로 잠자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5장 6절에서는 악한 삶을 ‘자는 삶’이라고 비유합니다. 원문을 보면 ‘곯아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무관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것은 다시 오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의 모습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에게는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깨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기에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미래에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현재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구원의 기대감만이 아니라 현재 체험하는 구원의 긴박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으로 평가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신부와 같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만남과 같은 준비를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이 어느 때 오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성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올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어서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근신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변화를 기대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무감각하게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예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예배로 간주하신다.’ 깨어서 자신을 근신하는 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셋째, 더 나아가 무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이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가슴받이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씁시다”(8절). 
엄격한 훈련을 통과한 군인만이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든, 자든, 함께하는 자신을 늘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 소망, 사랑이 나옵니다. 은혜의 세 가지 요소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제일이 사랑이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는 소망을 강조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순서를 바꿔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깨어 있도록 돕습니다. 소망은 우리가 무장하도록 돕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근신하도록 돕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장래의 부활만 약속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고, 그리스도와 함께 근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장되어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십시오.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능력을 전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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