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손 내미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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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손 내미시는 하나님

 2022-11-26      제14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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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미시는 하나님 
 
로마서 10:14~21
/ 이재훈 목사
 
로마서 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살펴봤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인간의 책임, 곧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선택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에 응답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울의 소원이 로마서 9~11장 초반부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인간의 책임이 ‘이율배반’(antinomy)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판단으로는 은혜와 진리가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 없는 진리, 진리 없는 은혜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습관이며, 모든 것이 충만하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모순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하나 되듯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하심과 인간의 책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다면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심판받아 마땅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받지 못한다면 인간의 책임입니다. 스스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며 나간다면 의에 이르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너무 쉽고 단순한 진리임에도 사람들에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은 자기 의가 마음속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면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것과 부르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믿음은 지적 동의 그 이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의지하고, 신뢰하고,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부르는 것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행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모두 이해해야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영역도 많습니다. 많은 진리들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면 이해가 됩니다. 내가 이해해서 믿는 것 같지만, 믿고 따라가기에 이해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음으로 따라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는지를 주목해야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 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라는 말씀에 감춰진 의미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령한 음성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책에 빨간색으로 강조해서 표시한 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말씀을 믿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이 다 중요하지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쓴 전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관찰해서 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사상으로 체계화한 내용도 아닙니다. 복음서 내용 대부분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상황과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지만, 핵심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대할 때는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하신 말씀 앞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예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직접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철학 체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17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경외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할 때 살아 계신 예수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전해 주고,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지도록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전파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우리가 책임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우리가 좌우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전하는 책임입니다. 말씀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는 사람이 전파하면 구원의 역사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사자, 메신저, 대사란 자기 스스로 임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느냐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분별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확인해 주고,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는 일이 교회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현대선교운동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가 청년 시절 교회선교위원회를 찾아가 인도 선교사로 가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때 어느 원로 지도자가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인도의 이교도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실 때는 자네 도움 없이도 하나님이 하실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 대답에 굴복할 사람이었다면 인도 선교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정하심과 인간의 믿음과 헌신이 하나될 수 있기에 윌리엄 캐리가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전해지는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들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보냄 받은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믿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책임은 보내시는 하나님, 전파하시는 하나님, 선교하시는 하나님, 구원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통로로서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복음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누군가 말씀을 전해 주는 이가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스스로 무엇인가를 깨닫고 구원받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복음의 말씀이 들렸기 때문이고, 그 말씀을 전해준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해준 이를 보내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헌신, 어느 공동체의 파송, 누군가의 전파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지금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출애굽 기적의 역사,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사, 만나와 메추라기 역사 등 초자연적인 역사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었느냐 이 말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 불신앙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기적과 표적으로는 믿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 누군가의 전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계속 전해지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을 통해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너무 정확하고 신비합니.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죄악으로 빨리 달려가는 발이 있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고, 땅과 인접해서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부분이 발입니다. 하나님은 그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위로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장차 일어날 회복의 말씀을 미리 전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이 멸망하고, 그들이 승리함으로 자유와 평화가 임하고, 구원이 임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입니다. 승리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기억하는 경기입니다. B.C. 490년 그리스 군대가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전투가 벌어졌던 마라톤이라는 지역에서 아테네까지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와 “우리가 이겼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하고 그 병사가 탈진해서 죽었습니다. 그 죽은 병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탈진하고, 목숨을 잃어버리면서도 그 소식을 전했던 병사를 기억하는 경기입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세상에 구원이 임했다는 승리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복음의 마라톤에 참여하는 선수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선교사들이 복음의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CGNTV 후원행사에서 태국 CGNTV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선교사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해 141명이 태국 CGNTV에 전화를 걸어서 “예수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해서 직원들이 결신을 시켰다고 합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는데 결신한 사람들이 141명이라고 합니다. 올해는 11월 18일까지 결신자가 370명이라고 합니다. CGNTV를 보고 스스로 전화를 걸어서 “내가 예수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결신한 사람들입니다. 결신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CGNTV 직원들이 결신을 시키고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지 못한 것은 전적인 인간의 책임
 
복음이 전해지지만 모든 사람이 믿고 순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전파되는 복음을 들음으로 믿음이 이루어지는데 왜 동족 이스라엘은 불신앙 가운데 있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째,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 달려있는데,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당연히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합니다. “그들이 음성이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음성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불신앙의 원인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들어도 믿지 않는 완악함이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유대인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들려졌어도 완악함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현상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네 개의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길가 같은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돌밭으로, 어떤 사람은 가시덤불, 어떤 사람은 좋은 밭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좋은 밭도 있고, 가시밭도 있고, 돌밭도 있고, 길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데, 어떤 영역에서는 돌밭 같고, 가시덤불 같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돌밭, 길가, 가시덤불을 끊임없이 살피고, 묵은 땅을 기경하고,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부숴야 합니다. 끝까지 말씀의 역사를 거부하는 완고한 마음의 땅도 있습니다. 마귀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죄가 말씀의 씨앗을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불신앙은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의지적으로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는가?” 이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고, 이방인보다 많이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불신앙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는 자기 의, 인간 죄악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 너희를 시기하게 하고 내가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분노하게 할 것이다”(19절).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됨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신다는 맥락입니다. 
“또 이사야가 아주 담대하게 말하기를 ‘나를 찾지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내게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내가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라고 했습니다”(20~21절). 
‘나를 찾지 않는 자들’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않고, 찾을 마음도 없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데, 수없이 많은 계시와 기적과 표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고 했습니다. ‘온종일’은 하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손 내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진노와 심판 앞에 처해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손 내미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손을 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구원의 손을 잡지 않고 있는 인간의 완악함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택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책임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를 보여 주셨음에도 완악함으로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인간의 책임입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손을 계속 내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들에게도 그 손이 계속 펼쳐져 있습니다. 언제 그 손이 거두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지 않고 태어나는 영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에 처하기로 작정되고 태어난 영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고, 후원할 때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일에 더욱 헌신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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