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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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2022-07-16      제14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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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빌 2:5~8
/ 노치형 목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르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한번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과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는 베드로가 고백했고, 우리가 고백하는 바로 그 고백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짓과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건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에 더 큰 희망이 생겼고, 우리의 목적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날마다 우리의 고백이 된다면 구원받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거짓에 매어 있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낙망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자라서 죄악으로 가고, 죄악 된 세상을 바꿔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납니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많지만, 그것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고, 들었고,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 깊이 만나야 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자의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기득권을 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한 그대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두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네 가지 이유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두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문제의 핵심은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더욱 불안하고, 초조하고, 조급하고, 쉽게 절망하는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숨기고자 하는 마음은 상처 때문에 생겼습니다. 마음이 쉽게 상처 받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 속에서 자랐는데 잘 성장했다는 것은 상처에 잘 대응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또 감정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치유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성경 인물들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잘못된 수치심’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잘못된 수치심을 가졌습니다. 육체적인 노출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가인의 ‘잘못된 인정 욕구’입니다. 가인의 잘못된 인정 욕구는 하나님이 한번 자신의 예배를 거절했다고 해서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예배는 한 번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의 거절이 가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셋째, 사울의 ‘억압된 기억들’입니다. 사탄은 사울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넷째, 요나의 ‘상한 감정들’입니다. 하나님이 본인이 원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고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다섯째, 38년 된 병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데도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여섯째, 가룟 유다의 ‘과중한 책임감’입니다. 유다의 리더들이 예수님을 잡자마자 가룟 유다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관심하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순간의 성취가 절망의 공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책임감이 겹치고 또 겹치다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러한 마음을 바르게 풀지 못하면 결국 분노로 가게 됩니다. 분노는 결국 폭력으로 이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마 3:17, 17:5). 예수님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이든 밤이든, 일이 많든 적든,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이 온전한 치유를 체험하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복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태아에게까지 침투해 있는 
죄악의 영향력을 정결하게 해주시려고
 
둘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태아에게까지 침투해 있는 죄악의 영향력을 정결하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결과가 죄로부터 온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침투력이 태아에게까지 간다고 말씀합니다. 죄는 거짓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사탄은 ‘거짓의 아비’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거짓된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녀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밖에 갈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거짓, 죄악, 죽음의 침투력이 태아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태아로 오셨고, 태아로 죽는 아이까지 죄와 거짓과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태아까지도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생명과 죽음의 무한 반복의 허무함을 
완전하게 끊어 버리기 위해서
 
셋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생명과 죽음의 무한 반복의 허무함을 완전하게 끊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8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기서 ‘멸망한다’는 것은 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음과 생명을 반복하는 허무의 공허함을 완전하게 끊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생명의 탈출구 알려주시기 위해서
 
넷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될 부활 생명의 탈출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생명은 죽음의 세력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탈출구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탈출구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가 가장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활 생명만이 탈출구입니다.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자만이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예수님과 함께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빌 2:9~11절).  
부활의 탈출구는 우리가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라고 선포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우리를 거짓과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자의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선포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요, 심판자”임을 고백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며, 태아 때부터 영향력을 받고 있던 거짓과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해방 시켜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탈출구로 인도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갈라지고 무너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명을 맡았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소망이요, 예수가 우리의 생명이고, 예수가 우리의 사랑이심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기쁨으로 안내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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