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모두에게 빚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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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모두에게 빚진 인생

 2022-05-29      제13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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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빚진 인생 
 
로마서 1:8~15
/ 이재훈 목사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변화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로마가 제국의 중심이자 가장 발전된 도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전도하고자 하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고, 교회가 견고하게 믿음 가운데 성장하기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믿음에 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먼저 내가 여러분 모두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됐기 때문입니다”(8절). 
참된 믿음은 전파되고 전염됩니다. 당시는 오늘날 같은 매체가 없는 시대였기에 믿음의 소문이 진짜였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동일한 믿음의 소문이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온 대륙에 믿음의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홍보가 필요 없습니다. 부흥 그 자체가 홍보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규모가 작든 크든 부흥이 일어나면 소식이 퍼지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저절로 알려져 믿음의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소문을 들으면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교회를 위해 계속 중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이기 전에 위대한 중보기도자였습니다. 믿음의 소문을 들었던 교회 성도들이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기도의 습관이 묻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소식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하며 여러분으로 인해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엡 1:15~16).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를 위해 항상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합니다”(빌 1:3~4). 
“우리가 기도할 때 여러분을 말하며 여러분 모두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살전 1:2). 
사도 바울의 기도에는 늘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도 있고, 소문만 들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와 빌립보교회는 그가 직접 관련된 교회이지만, 로마 교회는 한 번도 방문해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기도제목 중심에는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언제나 1장에 그가 그 교회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가 요약되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의 기도가 나머지 서신서에 영향을 줍니다. 그는 놀랍게도 앞서 나온 기도를 풀어서 서신서에 썼습니다. 특히 에베소서가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향하여 기도했던 내용을 서술하고, 뒤에 그 기도의 내용을 해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늘 그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지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들, 하나님께 드렸던 소원들을 서신서에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서들은 단순한 인간의 편지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타문화권 선교사로 쓰임 받았던 이면에는 그의 위대한 기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신데 나는 항상 여러분을 기억하며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든지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9~10절).  
사도 바울의 모든 기도와 사역 중심에 있었던 고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섬겼습니다. 모든 세계관과 가치관과 결정의 기준이 하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어떤 형식이나 의무가 아니라 소명감이었습니다. 그의 존재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음의 섬김이었습니다. 이 ‘섬김’이란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모든 사역과 내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같았습니다. 바울의 중심에는 소명감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았다. 골수에 사무쳐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명감입니다. 소명감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불붙는 것이 들어있어서, 뼈에 사무치는 것이 있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삶을 움직이는 것이 소명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체험은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었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환경이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 있고, 환경은 열려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사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 ‘과연 나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들을 견고하게 세우기 원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23장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이별할 때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준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확신을 얻으면 로마에 가고자 했던 세 가지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줘서 견고하게 세우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여러분을 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격려를 받기 위함입니다”(11~12절).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강하고, 견고하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은사입니다. 복음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예수님을 믿고, 믿음이 견고하게 되는 데 은사가 사용됩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믿음의 확신, 섬김, 전도, 말씀을 가르치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견고히 믿음을 세워가는 일에는 반드시 신령한 은사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체험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복음의 지식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신령한 은사입니다. 때로는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 섬김의 은사, 믿음의 은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은사를 나눠준다고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오해할 수 있게 번역되어 있는데, “너희와 함께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한다”가 정확합니다. ‘내가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격려를 받기 위함입니다.” 헬라어에서는 두 구절이 서로를 보완하는 병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서로의 믿음으로 격려를 받는다’는 말씀으로 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에게 이런 은사가 있는데 너희에게 가서 나눠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람이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오직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눠 주시는 은사를 함께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령님이 은사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함께 교제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눔으로써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 만남으로써 은사가 공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데 필수는 은사입니다. 여러 신령한 은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은 믿음으로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홀로 믿음이 견고해질 수 없습니다. 신령한 은사가 함께 나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섬김의 은사를 통해서, 누군가의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은사가 서로의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목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열매를 추구하기 원했기 때문에
 
둘째, 그들 가운데 열매를 추구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곧 나는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처럼 여러분 가운데서도 열매를 맺기 위해(거두기 위해) 여러분에게 몇 번이나 가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습니다”(13절).    
괄호 부분은 제가 삽입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들이 모두 ‘열매를 맺기 위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거두기 위해,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맺으신 열매를 거둘 뿐입니다. 우리는 씨를 주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통로가 될 뿐이고, 하나님이 맺으신 열매를 거둘 뿐입니다. 은사가 나눠짐으로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열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맥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믿음의 열매로서의 순종, 인격적인 성숙, 성령의 열매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사가 있고, 참된 은사가 온전히 발휘되었다면 성령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은사가 제대로 활용되었는지, 올바른 목적대로 활용되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분명히 성령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사람인데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은사가 잘못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은사가 소멸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 열매는 전도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 인구는 백만 명 정도고, 로마에 있던 가정 교회는 몇십 명에서 몇백 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많은 영혼이 있기에 로마 교회를 통해서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빚진 인생이라는 심정 때문에
   
셋째, 사도 바울이 로마를 간절히 방문하기 원했던 이유는 모두에게 빚진 인생이라는 바울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이든 미개한 사람이든,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그 모두에게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4~15절).  
여기 그리스 사람, 미개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당시 사람들을 구분하던 카테고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왜 바울은 모두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면 하나님께 빚을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 빚을 졌다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은혜는 조건이 없는 것이고,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갚아야 한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갚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도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내가 어떻게 다 갚겠습니까?”하는 고백도 있지 않습니까?(시 116:12) ‘갚았다’는 고백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못 갚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도 자녀들이 못 갚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하나님께 빚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빌려주거나 갚거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 빚진 자가 아닙니다. 그 은혜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동일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통로가 되기를 거절한다면, 전해주지 않아서, 말해주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아서 그 은혜가 전달되지 않은 상태라면 모두에게 빚진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받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아직 이 은혜를 모르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준 은혜를 나에게 갚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선교의 근거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이 땅에 와서 수많은 선교사가 고통과 아픔과 죽음을 겪으며 복음을 전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선에 빚을 진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도 않았고, 한 번도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왜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한 은혜를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압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빚진 마음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의 은혜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사마리아성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성 안의 사람들이 기근과 포위로 인하여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성 문 앞에 있었던 네 명의 나병 환자가 “성안으로 들어가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으니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면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지만, 받아주면 살길이 있다. 아람 군대에게 가는 것이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생각으로 아람 군대 진영으로 갔습니다. 놀라운 일이 펼쳐졌습니다.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로 아람 군대 진영이 비어 있었습니다. 황급히 도망간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배고픔을 달래고, 그들이 평소 입어보지 못했던 옷을 입고, 즐기면서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다가 나병 환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자코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바로 가서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자.’ 그리하여 나병 환자들은 가서 성문지기들을 큰 소리로 부르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람 사람들의 진영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과 나귀들만 매여 있고 천막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성문지기들은 이 소식을 큰 소리로 외쳤고 왕궁에도 보고했습니다”(왕하 7:9~11). 
기쁜 소식, 자유롭게 된 소식, 우리를 변화시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마음이 빚진 마음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사마리아성 사람들에게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아람 군대의 진영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전해야 할 소식을 안 사람들이 되었기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을 깨닫고 누리고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빚진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이고,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5절).
로마에 복음을 들은 사람이 전혀 없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이미 믿는 성도들에게 전한 서신이었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충격 앞에 떨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복음과 상관없이 세상적인 가치관, 자신의 경험을 따라 살게 됩니다. 겉은 신앙생활인 것 같은데 내면은 복음과 상관없는 율법적이고 기복적이고 삶입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기쁨을 잊고, 선교적 헌신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내면이 복음화되어 있는지,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지, 내 삶이 얼마나 복음에 합당한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빚진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우리는 모두에게 빚진 공동체요, 빚진 인생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전하지 않으면 수치스럽고,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복음 앞에 다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늘 복음을 상기하고, 복음의 진리가 우리 삶을 움직이는 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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