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

주일강단

[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

 2022-06-11      제1397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 
 
로마서 1:18~32
/ 이재훈 목사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불의함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에서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 단어입니다. 죄인을 그리스도의 의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또다시 나타나는 구절이 로마서 3장 21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3장 20절까지 내용은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가’, ‘왜 인간은 이 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값없이 주어져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인간의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이 나쁜 소식을 배경으로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는 구원받아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가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불의함을 불의함으로 여기지 못하고, 사회의 도덕 수준에 맞춰서 법과 제도에 문제가 없으면 “나는 문제 없다”고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인간 상태를 진단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그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치료할 수 있듯이 인간의 상태와 문제를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를 꺼내면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아들이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 진노의 표현이 있고, 로마서 말씀에 인간의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제사 제물이 죄의 값이 치러져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진노를 제거하는 것은 곧 복음을 훼손하려는 교묘한 사단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완전함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입니다.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스러운 사람에게만 가지 않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에게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하고, 부인하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대상에 따라 사랑이 바뀝니다. 나를 어떻게 대해주는가에 따라서 사랑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악한 행동을 하면 갑자기 분노로 바뀌고, 분노로 바뀐 마음에는 사랑이 온데간데없습니다. 또 스스로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불완전하고,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하시고,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대상에 따라 사랑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와 악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죄와 악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죄에 맞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이성을 잃고 폭발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의 진노는 수수께끼 같거나 비이성적이지 않다. 그분의 진노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예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악에 의해 그리고 오직 악에 의해서만 유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철저히 이성적입니다. 오로지 죄와 악에 대해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는 자기 자신의 죄와 악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불필요하고 과도하게 분노합니다. 죄와 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상처와 미움으로 분노를 가속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죄와 악에 대해서만 분노하십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왜 죄와 악에 대해서 분노하실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9절에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 없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잡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악에 대해서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죄와 악에 휩싸여 살아가도 부모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기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죄와 악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18절). 
첫째,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하신 신성이 명백히 나타남에도 그것을 불의함으로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채널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하나는 인간 안에 주어진 양심 혹은 도덕 관념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명백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것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알게 됐으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19~20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채널 하나는 인간 안에 주셨습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다른 점은 양심 혹은 도덕이 있는 것입니다. 도덕은 옳고 그름이 있다는 감각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싸웁니다. 가만히 보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며 싸웁니다. 기준이 다를지 모르지만, 옳은 게 있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떤 민족, 어떤 문화에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또 사람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 감정이 어디서 올까요? 파스칼은 “인간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보이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인간만이 느끼는 비참함은 마땅히 있어야 하고,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 개념이 없습니다. 인간은 도덕 개념이 있어서 법을 만들고, 질서를 만들고, 재판하고, 벌을 줍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도덕 그 이면에 있는 양심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만물을 통치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에게 도덕 개념이 있기에 만물을 통치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오묘함, 신비로움, 엄청난 질서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막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의함입니다. 비진리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불의로 의로움을 막는 것입니다. 막무가내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무신론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만 존재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아니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우연으로 시작되어서 우연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여러분, 무신론은 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인간의 죄악 이면이 더 깊은 문제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을 때 사람들은 두 번째 단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21절).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분명한 계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개미가 인간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광대하시며, 영원하신 분입니다. 시간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을 입은 자가 어떻게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알 수 있겠습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을 전부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의 상태가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어두워집니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까? 왜 그것이 명철입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예배하고, 감사할 때 우리의 지성과 판단력이 최상의 상태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이 밝아집니다. 분별력이 생기고, 지혜와 명철이 생깁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초월해 있고,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 아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분께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없을 때 어두운 마음이 되고, 그 어두운 마음이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상을 만들고 숭배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만 미련하게 돼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22~23절).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나면 우상이 반드시 출연합니다. 우상을 왜 만듭니까? 우상이 존재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보니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느낌 때문에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속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경외하지 않으면 중립 상태라고 보는데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어떤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여기에 대해 중요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진공상태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숭배해야 한다. 우리는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을 거부하면 그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경배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목적이 있는 피조물이기에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상을 경배하고 있는지 둘 중 하나입니다. 중립적인 진공상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 우리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며,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채널로 나타났습니다. 마지막 날에 궁극적으로 폭발하듯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재앙으로 나타나는 진노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진노의 형태를 오늘 본문 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버려두심의 심판’입니다. 하나님 진노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 심판하시면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속 죄를 지어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심판입니다. 그 죄 가운에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세 가지 내버려 두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니 그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 정상적인 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바꿨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며 위반하였다”(26~27절). “더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찮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28절). 
‘내버려 두셨다’는 말이 세 번 반복 됩니다. 부끄러운 정욕대로, 수치스러운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진노의 한 모습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막아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막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면 그 자체가 징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와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시고, 그 길을 치시고, 그 길을 벌하시는 것이 더 큰 은혜입니다. 악을 행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내버려 두심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타락한 마음을 내버려 두시면 성적인 불결에 처하게 되고, 동성애에 처하게 되고, 타락하고 상실한 마음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고 묵상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타락한 마음으로 인하여 온갖 죄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악독, 분쟁,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역함, 무정함, 무자비 등입니다. 악은 새로운 죄를 계속 만들어내고, 악을 행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진노를 쏟아 부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서야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불의로 진리를 막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959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