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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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복음과 하나님의 의

 2022-06-04      제13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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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의 
 
로마서 1:16~17
/ 이재훈 목사
 
오늘 본문이 로마서 전체 주제입니다. 성경 전체 주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깨달으면서 종교개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역사를 뒤바꾼 말씀이요, 성경 해석의 열쇠가 되는 말씀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16절).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더 강한 긍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자랑한다는 강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확신을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로마서를 읽는 성도들을 돕고, 격려하고, 도전하고자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매우 소수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큐리어스’라는 신으로 부르는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연약함 가운데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디모데조차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권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을 확신하지 못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도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때로는 조롱합니다. 20~30년 전만 해도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진리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진리 자체가 있느냐?”를 가지고 도전합니다. 내가 느끼고, 옳다고 여기면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고, 복음이라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시대에는 복음을 더욱 부끄럽게 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과 세속적인 이념과 철학과 사상들이 곳곳에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이들이 매우 소수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능력 
 
어느 시대든 복음을 받은 자는 이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복음이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분 앞에서 과연 합당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의 완전한 법,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부합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이 온전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의로움이 없습니다. 죄는 그 의로움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어떤 의로움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가 있어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죄인 된 인간과 관계를 회복하고,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주도권, 죄인 된 인간과 바른 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법학도였는데 22살에 수도사가 됩니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고행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스스로 노력으로 부합하게 하려고 고행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행을 강조할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 멀어진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 수도원의 가르침, 로마교황청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사력을 다하는 고행을 하면서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누구보다 엄격한 수도사였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로마에 있는 ‘라테단의 성요한 대성당’이라는 곳에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 안에 있었다는 계단을 옮겨와 사람들이 그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면 면죄부를 준다는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누구보다 앞서 루터가 그 계단을 오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기도했습니다. 교황청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고생을 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그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절제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즐거움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죄가 발견됐고 평안이 없었습니다. 루터의 마음속에 계속 울려 퍼지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순간 루터는 기도를 멈추고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서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고백이 그의 여러 글에 나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바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예를 많이 썼는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 때문에 오랫동안 탐구하였고 너무 근심한 나머지 녹초가 되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해석이 되지 않아서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 속성, 하나님의 본질로서 의를 해석하니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고행과 수행을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롭고 무서운 하나님을 미워하며 불평하였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구원의 길을 차단하고 말았다. 그 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그분의 의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새롭게 태어났고 천국에 이르는 열린 문을 통과했다고 느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싫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위안을 주는 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정말 고통스럽게 보내다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그에게 천국 문이 열렸고, 이제는 그 표현이 가장 위안을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에게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2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통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다시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의로움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의 의를 나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분의 부활을 통해 의로움을 획득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의를 선물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얻으신 의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고, 부활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 그 의를 주시려고 예수님이 순종하셔야만 했습니다. 수동적으로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모든 죄 짐을 담당하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자 같이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도 변명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죄인으로서 담당해야 할 죗값을 수동적으로 담당하시는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우리의 죗값과 형벌을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모든 의를 이루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속성으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과 낮아지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이기에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 은혜를 인하여’가 원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통로, 도구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오직 통로, 도구일 뿐이고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원인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덧입힘을 받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형벌로부터 자유케 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거룩하게 성결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지 않았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요,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입니다”(16절).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조차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믿음은 나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조차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입니다. 믿어져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상이 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서 나에게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을 미리 주셨습니다. 구세주에 대한 약속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꾸준히 살펴보면 우리 마음에 믿음이 쌓입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조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의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요,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와 그리스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해답입니다. 죄로부터, 죽음의 권세로부터, 절망으로부터, 실패와 좌절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허락했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 사람에게도, 북반구 사람, 남반구 사람, 동양사람 서양사람,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만이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여전히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롭게 된 자들이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17절).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라는 말씀은 역사상 많은 해석이 있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세 가지만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첫째, 앞의 ‘믿음’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우리에게 믿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전파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에서 또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의 성장 혹은 성숙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도 믿음으로 시작했고, 우리 구원의 완성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입으로 고백하는 자들의 믿음에서 실제로 순종하여 행하는 자들의 믿음으로의 성장”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입술의 고백으로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점점 행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살리라’에 방점을 두면 또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자들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에 초점을 둘 수도 있고, ‘살리라’에 둘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세상 속에서 핍박받고 때로 죽음에 넘겨질지라도 그들은 영원토록 사는 백성이라는 확신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다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물 받았기 때문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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