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 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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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 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2021-11-20      제13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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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갈라디아서 3:15~29
/ 이재훈 목사
 
죄인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무너뜨리고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이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더욱 확실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그 무엇인가를 더욱 확실하다고 느끼고 편안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실상을 깨닫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놀라운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복음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죄인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의인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합리적입니까? 영광스러운 분이 영광을 내려놓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치와 모욕을 당한 것이 어떻게 합리적입니까? 합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내어 주시면 안 됩니다. 죄인인 인간이 죄 가운데 죽도록 처벌하시면 됩니다. 죄를 지은 자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면 되고, 의로운 이는 의를 지키면 되는데, 의로운 분이 불의한 이들을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불합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바보가 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불합리한 희생을 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이루시기 위하여 많은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 인물과 하나님이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과거 문서들을 후대 사람들이 읽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인물들은 한가지 목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의 모든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먼저 부르심을 받은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이외에도 율법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이들과 싸우면서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인용합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모세의 율법과 대조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모세에게 주신 율법보다 430년 전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율법이 있지도 않았을 때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 약속과 율법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데 사용한 중요한 축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구약의 역사 흐름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율법을 계속 상기시킵니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꾸짖을 때 언제나 율법을 인용합니다. 약속이 강조되고, 또 한편으로는 율법이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선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430년 전에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약속의 출발점이 율법의 출발점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따라서 이후 주어지는 모든 관계에서는 율법이 약속을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약속을 무력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 통로이자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율법이 쓰임 받은 것입니다. 
 
율법, 약속된 자손이 오기까지만 유효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진 언약을 무효화해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7절). 
모세의 율법이 주어졌을 때 백성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삶의 패턴을 만들었습니다. 이해되는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의 천사에게 받을 당시 그런 수준의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에 주어진 법들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국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율법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부심을 느낄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서 율법의 목적을 봐야 하는데 율법에서 그들의 삶이 시작된 것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앞에 서면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미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이들이 율법 앞에 불순종해서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망하는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빛나게 하고, 그 약속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빛나게 하는 배경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일수록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이 하나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된 자손이 오시기까지 죄 때문에 더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한 중보자의 손으로 주어졌습니다”(19절). 
‘약속된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입니다. 후대에 오해가 없도록, 신학적 오류가 없도록 하나님이 단수로 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후손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별과 같이 많아질 거라는 약속은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단수형으로 썼다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약속된 자손이 오기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율법의 기능을 폐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도덕법은 그 원리가 이어지지만, 의식법, 제사법, 음식법 등 모든 법은 폐해졌습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
율법은 오직 행위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약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22절).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가두었다’는 것은 죄수를 감옥에 가둘 때를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감옥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의 감옥에서 태어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죄의 감옥 가운데 있습니다. 누구도 죄의 문제에서 ‘상관없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율법을 통해서 죄 아래 가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설 때 모든 사람이 죄인임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여 장차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23절). 
여기서 ‘매여, 갇혀 있다’는 단어는 전쟁 용어입니다. 전쟁 포로가 되어서 감시받고 자유가 박탈되어 포로수용소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죄의 포로가 되어 사탄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죄의 빚진 자가 되어서 포로로 끌려다닙니다. 포로된 자는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의 포로가 되고, 죄에 매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선생이 됐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이상 율법이라는 선생 아래 있지 않습니다”(24~25절). 
‘선생’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선생이나 교사는 아이들이 지식과 교양을 쌓도록 인도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사와 선생의 기능이 아닙니다. 특수한 기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그 기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이 힘듭니다. 당시 파이다고고스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의 자녀를 훈육하기 위해서 등하굣길에 보호자나 인도자가 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잘못을 꾸짖고, 야단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그림들을 보면 파이다고고스가 아이 앞에서 매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아니라 종인데 자녀를 훈육하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의미의 교사와 선생을 말하는 단어는 ‘디다스칼로스(διδσκαλο)’입니다. 파이다고고스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훈육관입니다.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입니다. 파이다고고스를 선생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그 기능을 준 게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기능을 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의 기능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길과 진리를 갈망하게 하고, 참된 진리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생명줄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 약속을 붙잡게 하는 기능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더 빛나게 하고, 약속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내용을 잘 요약한 존 스토트 목사님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쳐서 상하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상처를 싸맬 복음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율법이 우리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해방 시켜 주실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된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여야 비로소 우리는 칭의와 생명을 얻고자 그리스도를 부르게 된다. 율법이 우리를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몰아가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 율법이 우리를 지옥에까지 낮추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천국으로 올려줄 복음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래서 율법 앞에서 서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만으로 하나님이 이끄셨다면 그 백성은 약속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자신이 했다고 우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 앞에서 그들이 절망하고, 율법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행위만 요구합니다. 완전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일체의 타협이 없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전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믿음만 요구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선한 행위일지라도 그 안에 죄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의 행위는 오직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율법은 오직 행위만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 요구합니다. 오직 은혜로 받는 구원을 스스로 이룬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오직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롭게 된 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한 행실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로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천로역정> 저자 존 번연은 이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달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손도 발도 주지 않는다. 복음은 훨씬 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날아가라고 하며 날개를 준다.”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허구입니다. 거짓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믿음의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때를 위하여 역사하셨고, 그것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세 가지 변화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됐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26~27절).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된 우리가 타락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에 속한 죄의 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로 옷 입혔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넣어주시고, 그분으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시고, 그분의 의로 우리를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변화를 이루셨습니다. 둘째,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도 없고 그리스 사람도 없고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28절). 
율법이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죄 아래 가둠으로써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복음도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함으로 하나 되게 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회적 차별을 없애려는 수많은 법과 제도가 존재했지만, 차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모두 죄인이고, 율법 아래 죄 아래 갇힌 자였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롭게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고백만이 공동체와 사회에서 차별이 없게 만듭니다. 셋째, 우리는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른 상속자입니다”(29절).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을 따른 상속자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신약과 내가 연결됩니다. 성경의 역사가 살아있는 문서가 되고, 나의 믿음이 역사적인 계승을 이어갑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적인 유대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아브라함의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율법이 폐해졌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이 나타났습니다. 그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요, 그 약속의 권위, 가치, 능력을 부여받은 상속자입니다. 이 믿음 가운데 굳게 서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사로잡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능력 있게 하고, 영원한 나라로 이끄실 것입니다. 복음을 확신하고 더 깊이 체험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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