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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7      제13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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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고후 10:12~18

/ 이재훈 목사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것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나쁜 통화가 좋은 통화를 내쫓는다는 의미입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재정 고문관이었던 토마스 스레셤이 여왕에게 드린 서한에 담긴 내용입니다. 당시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자 여왕이 실제 가치와 명목 가치가 동일한 은화만 유통하지 않고 실질 가치가 떨어지는 동화까지 함께 유통시켰다고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은화가 점점 자취를 감춰버리고 가치가 떨어지는 동화만 유통되면서 결국 화폐량이 또 다시 줄게 되고, 경제가 또다시 악화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가치를 평준화시키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악화가 영화를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만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정직하고 의롭고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도태되고, 능력 없으면서, 진실하지 못하면서, 부정을 일삼으면서도 자기를 포장하고, 정치적인 술수로 자리를 차지하고 득세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고,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한 사람들이 교권을 차지하고, 자리를 차지함으로 교회 전체 권위가 떨어지고 영향력이 약화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개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다가도 한순간에 추락하고,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졌던 문제와 갈등도 그 현상이었습니다. 겸손과 온유, 진실한 태도, 희생적인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영향력을 끊어버리고, 바울을 거짓되고 무능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대적하는 모습이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적합합니다. 바울은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세워주신 교회이며, 장차 유럽 대륙의 복음화를 위해서 너무 소중한 교회가 거짓된 무리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고 책망하면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교훈하기 위해 쓴 책이 고린도후서입니다.

 

자기를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싸움에서는 순결해서만은 안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좀처럼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사회적 이력이나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복음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공격하면서 바울이 믿을 수 없는 사람, 실력 없는 사람, 무능한 사람, 속이는 사람으로 매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표적으로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않았다고 공격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추천서에 대한 이슈가 나옵니다. 유대로부터 온 거짓된 무리는 아마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추천서를 가지고 온 것 같습니다. 당시는 개인의 이력서보다 저명한 사람의 추천서가 더 인정받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도 없는 바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천서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어눌한 것도 공격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요, 로마서와 같은 서신을 쓸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변이 어눌했습니다. 또 바울이 여행계획을 변경했더니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바울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모금하는 것을 가지고도 ‘사익을 취하는 위선자’라고 공격했습니다. 바울이 특이한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공격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표적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바울이 참다못해 자신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14년 전 바울이 셋째 하늘을 체험했습니다. ‘셋째 하늘’은 우리에게 예비 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본 것입니다. 그런데 왜 14년 동안 침묵했을까요? 말하는 순간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훼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위대해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할까 봐 침묵한 것입니다. 그 체험을 고난을 참는 인내의 자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14년 동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거짓으로 포장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셋째 하늘을 본 체험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실력 없고, 주님이 부르지도 않고, 위선적이고, 속이는 사람으로 매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과 대적하기 위해서 부득불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자기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과 대적자들의 ‘자랑 대결’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꼭 나를 용납해 주십시오”(1절).
“내가 다시 말합니다. 아무도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못하겠다면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받아들여 나로 하여금 조금 자랑하게 하십시오”(16절).
“우리의 약한 모습 그대로 내가 욕을 하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무엇을 자랑한다면 나도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자랑 좀 하겠습니다”(21절).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 개역개정)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이들의 거짓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들을 따라가는 고린도인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춰 대답해 주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도 그와 같이 돼 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춰 대답해 보아라. 아마 스스로 지혜로운 줄 알 것이다”(잠 26:4~5).
바울이 대적자들과 자랑 대결을 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힘 있는 사람은 자기 힘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부자는 자기 부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라. 자랑하는 사람은 오직 이것을 자랑하게 하라. 곧 그가 나를 깨달아 내가 이 땅에 인애와 정의와 의로움을 행하는 여호와임을 아는 것을 자랑하게 하라. 이것들을 내가 기뻐한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9:23~24).
바울은 이 말씀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 하십시오”(17절).
바울은 복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나라를 자랑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대로

 

첫째, 오직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 안에서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 이상으로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의 범위 안에서 자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곧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정도입니다”(13절).
“그래서 결국 여러분의 지역 너머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영역에 이미 마련된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16절).
“우리는 여러분에게 가지 못할 사람들로서 스스로 과신해 나아갔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까지 갔던 것입니다”(14절).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대로 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분량’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준입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합의된 사명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언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한 다른 문화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가 능통한 바울은 헬라어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사도들과도 합의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 디모데, 디도 같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구획을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분량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영적 권위는 바울에게 있습니다. 유대에서 와서 고린도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그들이 범위를 넘어서서 혼란하게 하고, 훼방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분량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거짓된 일꾼들의 기회를 끊기 위해서
 
둘째, 거짓된 일꾼들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여러분이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해 받지 않은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여러분이 받지 않은 다른 복음을 받게 해도 여러분은 잘도 용납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위대한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4~5절).
이것은 책망입니다.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끓는 열심히 느껴집니다. 그 간절한 마음이 고린도후서 11장 10~12절에 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안에 있는 한 내 이 자랑은 아가야 여러 지방에서 중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아십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와 똑같은 일을 한다고 자랑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의 기회를 끊어 버리려는 것입니다“(10~12절).
사탄은 끊임없이 기회를 엿봅니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대화 속에 거짓이 틈탈 기회 말입니다. 그래서 말을 바꿔 전합니다. 단어를 몇 개 빼거나 덧붙입니다. 우리가 듣는 소식 중에서 과장되거나 축소되고, 왜곡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전해 듣는 말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곡된 정보가 참 많습니다. 의도적으로 거짓을 퍼뜨리는데 도구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말을 바꿔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사회,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사탄이 틈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바울이 나서고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을 무기로 삼는 사람들이 득세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때로 자신을 자랑해야 한다면 해야 합니다. 정말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서야 합니다. 바울이 거짓된 이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나서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회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거짓으로 소식을 전하고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짓의 기회를 끊어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다

 

셋째,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거짓된 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거짓된 사람들은 언제나 잘난 척만 합니다. 자신이 위대하다만 말합니다. 탁월함만 자랑합니다. 여러분, 진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만나는 사람 중에서 자기 자랑, 세상적인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기도제목으로 나누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십시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수 있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
바울은 세상적인 자랑으로 대결하지 않고, 복음 안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3번 채찍으로 맞았고, 1번 돌로 맞았고, 3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숫자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고난을 받는데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돌을 던지면 그냥 맞는 것입니다. 돌이 갑자기 부서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신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고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영적 신비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떠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자신의 체험도 고백합니다. “다메색에서 왕의 관리가 자신을 체포하려 할 때 성에서 광주리를 타고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서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영원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자랑하십시오, 무엇을 자랑하는지가 그 사람의 인격이요 신앙입니다.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아야 하나님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이 연약한 줄 알아야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야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서 자랑하기를 원했던 바울의 믿음과 헌신을 본받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복음이 전파되기만을 소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원했던 바울의
그 순수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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