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생각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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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생각의 전쟁

 2021-03-20      제13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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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전쟁 / 고후 10:1~6 / 이재훈 목사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 공격이 부당한 공격이든 정당한 공격이든 상관없이 공격 앞에 섰을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과 신앙, 인격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전체 주제가 바울의 자기변호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교만한 의로움을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며 스스로 변호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더 큰 공격이 주어질수록 복음의 향기가 계속 났습니다. 고린도후서 전체에서 복음의 가치가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 앞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누리는 것이기에 고난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원리와 가치를 분명히 새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 은혜, 능력, 기쁨인지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공격당할 때마다 복음으로 응답했습니다. 더 심한 공격을 받으면 더 깊은 복음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10장부터 바울의 어조가 바뀝니다. 지금까지 부드럽고 유순한 태도로 대했던 바울이 매우 강경하고 엄한 어조로 교훈합니다.  

 

육체의 본성과 타락한 습성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유순하나 떠나 있으면 여러분에 대해 강경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단호히 대처하는 것같이 여러분을 강경한 태도로 대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1~2절).
이 방법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세 번째 방문할 때 편지에 쓰인 어조처럼 그들을 강경하고 단호하게 대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로 변화되어야 바울이 그들과 마주할 때 강경하고 단호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경고도 합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여러분의 순종이 온전하게 됐을 때 모든 순종치 않는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6절).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징계와 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이 바울을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육체대로’라는 말은 헬라시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행한다는 표현입니다. 대적자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행 계획을 변경한 것을 비난합니다. 바울은 신뢰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여러 환경 변화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계획을 변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여행 계획을 바꾼 것을 가지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둘째, 추천서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무자격자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추천서가 그 사람을 보증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개인의 이력서보다 추천서가 더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그 추천서는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추천서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의 추천서를 근거로 영적 권위를 내세우고, 교회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바울을 공격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기에 추천서가 필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무슨 추천서가 필요합니까? 
셋째,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헌금모금 때문에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익을 취하려고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간교한 속임수라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넷째, 대면하여 볼 때는 유순하지만 편지로는 강경한 것에 대해 이중인격자라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인격, 일, 계획 등 모든 것을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육체를 따라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라는 단어는 옛사람의 타락한 습성입니다. 타락한 죄로 말미암는 죄가 만든 무서운 영적 실체이자 습성입니다. 보이는 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각에까지 스며있는 죄악 된 습관입니다. 육체의 본성과 타락한 습성이 바로 육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성이 만든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린다

 

“우리가 가지고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궤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해서 스스로 높아진 모든 주장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4~5절).
바울은 겉으로 나타난 자신에 대한 공격보다 그들이 매사에 시비를 걸고, 문제 삼고, 불의하게 공격하는 생각의 틀이 영적인 위험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큰 타락의 증거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대로 한다는 것은 생각에서부터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 생각이 견고한 요새가 되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체대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생각의 견고한 요새가 무너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이 생각인 줄 압니다.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고 하고, 공상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장 갇혀 있는 것이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몸은 물리적인 제한을 받지만, 정신과 생각은 자유롭다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매여 있습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견고한 요새에 갇혀 있습니다. 그 생각의 요새는 수많은 이론과 사상으로 흘러 내려왔는데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모든 주장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생각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생각입니다. 대표적인 생각이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서운 믿음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무신론은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무신론의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연히 형성됐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에 근거한 진화론에서 나오는 궤변입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소중함을 말살시켜 버리는 물질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은 말할 가치도 없는 궤변입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회의론이라는 궤변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인 고민과 갈등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귀찮은 것입니다. 고민 자체가 귀찮은 것입니다. 이 심각한 회의론이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적해서 생겨난 궤변이자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아닙니다. 역사상 일어난 모든 생각의 일관된 흐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닙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견고한 요새 뒤에는 이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참된 이성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는 것이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진짜 박사님은 자신이 아는 것이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간 지성 최고의 가치는 자신이 아는 것은 진리의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기능입니다. 진짜 이성은 겸손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아는 것, 과학으로 증명된 것, 경험한 것, 자신이 생각한 것만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견고한 요새에 갇혀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이성과 사상으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이자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이성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모든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처음에는 요새가 무너집니다. 그 다음에는 사로잡고, 복종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의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대 도시 한 성에 반역자들이 있는데 그 성의 주인이 와서 다시 성을 정복합니다. 요새가 무너집니다. 그러면 그 요새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왕의 포로가 되는 게 당연합니다. 정복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성으로 생각하면 요새가 무너지면 끊임없는 우리의 생각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신 이후 완전한 복종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마 수없이 많은 반항, 의심, 부정,  불순종,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많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 모든 생각들이 바로 견고한 요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 하나하나를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죄의 포로 된 생각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한 가지 권위 아래 있을 때만 자유롭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 아래 있을 때만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 어떤 권위가 진정한 권위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느냐 아니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진짜 권위냐 아니냐가 증명됩니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권위자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진짜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참된 권위인 것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진짜 권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권위를 잘못 대항해서 스스로 독립하고자 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도록 하시면서 중앙에 있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한 가지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무한대의 자유와 한가지 규칙이 있다면 그 규칙은 너무 쉽게 지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 규칙이 자신들을 얽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에게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중앙에 있는 실과나무 열매를 먹을 것이 없어서 따 먹은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먹을 것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탄의 꼬임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규칙이 존재하는 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하다면 규칙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북돋게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탄입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창조한  천사였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하나님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 생각이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고 말하면 십중팔구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예수님 믿고 구속받기 싫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인간에게서 이어지는 끊임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간다는 것이 자유를 박탈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이 타락의 증거입니다. 이 생각이 견고한 요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셔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분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생각의 견고한 요새가 무너지고,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분의 권위 아래 복종하게 될 때 참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참으로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포로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 참으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영혼들이 얼마나 자유합니까?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유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입니까? ‘~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진정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하지 않고, 멈추고, 그만둘 수 있고, 버릴 수 있느냐를 보면 됩니다.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이 많아도 절제할 수 있어야 자유입니다. 먹고 싶은데 먹지 않을 수 있어야 자유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있지만 그 탐욕을 버릴 수 있어야 자유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멈추고, 버리고, 그만둘 수 있어야 진짜 자유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생각의 전쟁에서 멈출 수 없다면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중지시킬 수 없다면 생각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각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전쟁에서 성을 정복한 사람에게 포로가 되듯이 우리의 생각이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포로가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것을 ‘복된 포로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진짜 자유롭게 됩니다. 모든 생각이 머리를 숙이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하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권세를 가져도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생각의 포로가 되어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셔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통해 주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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