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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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2021-03-13      제13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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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8~16
/ 이재훈 목사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기쁨은 자신을 통해서 다른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이기심과 삶을 내려 놓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산고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또 자신을 통해 누군가 구원에 이르게 될 때 그 영혼이 참된 회개에 이르러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경험해야 하기에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통로가 되는 사람도 고난의 과정과 근심을 겪게 됩니다.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위로를 얻고, 고통가운데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 기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린도인들의 죄악, 부정, 분열, 다툼, 대적 등이 바울의 마음을 얼마나 근심하게 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져서 그들이 온전한 회개에 이르고, 또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것을 보기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라는 제자를 통해서 자신이 눈물로 쓴 고통스러운 편지를 고린도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네 번째 편지입니다. 전해지지 않는 편지가 사이사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고린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얼마간 목회를 하고 바울은 또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첫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가 두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썼던 편지에 대한 응답이 왔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바울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바울 나름의 해결책, 생각, 성경적 시각을 전해 줍니다.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는 문제, 음행하는 사람의 문제, 결혼의 문제, 다툼과 분열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이 고린도전서입니다.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온 소식은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의 분열, 다툼, 죄악, 무엇보다 바울을 부인하고 신뢰하지 않으며 공격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곧바로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됩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고린도는 유럽 쪽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면 바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매우 급한 마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된 무리에 의해서 무너지고 있고, 자신을 얼마나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조용히 에베소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세 번째 편지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참된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과정

 

“나는 큰 환난과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많은 눈물로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해 넘치는 사랑이 내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2:4).
바울이 고린도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멸시받고 공격받으면서 그들과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고린도인들의 옳지 않은 모습을 복음으로 교정해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디도라는 제자를 통해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 대한 근심 때문에 사역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사역의 문이 열렸지만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마게도냐에서도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드디어 디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모든 여정이 바울에게 얼마나 큰 근심이었겠습니까? 세상적인 근심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과 관계를 끊으면 바울의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고, 사람을 보게 하고, 계속 고린도인들에게 권면하게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바울의 노력을 사용하셨고, 그의 기도를 받으셨고, 그의 편지를 읽는 고린도인들이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들고 간 디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드디어 바울이 기다렸던 디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인들에게 올바른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감격을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편지로 인해 여러분을 근심하게 했다 할지라도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편지가 여러분을 잠시 상심하게 했다는 것을 내가 알고 후회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내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근심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 근심으로 회개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므로 결국 여러분은 아무것도 손해를 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가져오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죽음을 가져옵니다”(8~10절).
바울이 디도를 통해 이 편지를 보내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 기분 좋은 말을 하기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기분이 상할 수 있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말을 꼭 해야 합니다. 때로 그 말이 우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심을 하게 하는 것은 결국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회피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로 만날 때도 어쩌면 가면을 쓰고 좋은 모습으로만 만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쓰는 가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 만날 때 쓰는 가면, 예배드릴 때 쓰는 가면, 집에서 쓰는 가면, 혼자 있을 때 쓰는 가면, 상황마다 가면을 골라서 쓰고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관계가 세상 근심을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한다면 그 순간 기분이 상할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너무 중요한 만남이 됩니다.

 

세상 근심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바울이 믿었던 진리가 무엇입니까? 서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 새로운 힘(위로, 기쁨)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비교했습니다.
세상 근심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 근심은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게 아닙니다. 죄가 가져온 결과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죄 자체를 미워하고, 자신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 자체를 슬퍼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결과 때문에만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나쁜 결과까지 슬퍼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자신의 명의가 훼손된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불명예를 기꺼이 감당하고 책임 있는 행동의 변화를 하게 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에서의 슬픔입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가볍게 여겨서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겼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자신의 삶을 내어준 결과 동생에게 속고,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것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보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슬픔은 그가 끔찍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의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슷한 증상이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 슬픔, 불안, 염려 등의 증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세상의 근심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인지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십자가로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초개인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각자의 주장과 권리가 극대화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죄를 직면하고, 회개로 인도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여깁니다. 죄를 지적하는 것을 ‘혐오’라는 단어로 해석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 전에 나쁜 소식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받는 은혜 이전에 우리의 죄와 죄인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소식을 포함합니다. 나쁜 소식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으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지를 정직하게 알려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올바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눈물로 고통스럽게 편지를 써서 전해 주었던 것처럼 정직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주기

 

“친구의 꾸지람은 진실하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이는 것이다”(잠 27:6).
오늘 이 시대에는 진실한 친구의 꾸지람이 필요합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엡 4:1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이르도록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줘야 합니다. 사랑 없이 진실을 말해 주기는 쉽습니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죄 받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만 말해 주는 것도 잘못입니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면서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랑은 절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하고, 결국 참된 회계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의 만남에서 세상의 근심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통스럽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랑 가운데 진리를 주는 영적인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정죄하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여러분이 우리 마음에 있어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7:3).
정죄는 올바른 말은 했지만 그들과 하나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동일시, 연합입니다. 바울은 정죄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있다면 함께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신뢰와 자랑을 계속 표현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해 많은 신뢰감을 갖고 있고 여러분을 위해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우리의 온갖 환난 가운데서도 내게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고전 7:4).
“내가 여러분에 대해 디도에게 무슨 자랑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디도에게 한 자랑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14절).
바울이 디도에게 고통스러운 세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신뢰를 전하라고 했고, 고린도인들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상황에 있는 그들에게 신뢰를 표현했습니다. 심부름하는 디도에게 고린도인들을 자랑을 했다는 것이 이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도에게 고린도인들이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 했다면, 디도가 고린도인들을 그 시각으로 봤다면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장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장점이 있는 법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단호하게 지적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전하는 디도에게 고린도인들을 자랑했습니다. 그 자랑처럼 고린도인들이 돌이키고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올바른 길로 변화시킬 때 정죄와 비판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신뢰, 그들의 장점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인한 회개의 열매

 

“그러나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뿐만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대해 사모하는 것과 애통해 하는 것과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해 그의 보고를 받고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6~7절).
바울은 디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디도가 돌아왔을 때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전해온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사역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고린도인들의 변화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디도의 보고를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참된 회개가 일어났다는 확인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절
회개의 열매를 표현하는 모습 일곱 가지가 등장합니다. ‘얼마나 간절한가’ 다음에 번역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헬라어 단어로 ‘알라’인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이상 더’, ‘게다가’, ‘더욱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more over’입니다. 얼마나 간절한가 다음에 여섯 번이나 더욱이, 게다가, 또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게다가 또 얼마나 두렵게 되었는가를 편지에 써가면서 바울의 감격스러운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한가는 깊은 관심으로 일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열망하는 태도입니다. 얼마나 변증하게 하는가는 자신의 잘못됨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태도입니다. 얼마나 분하게 하는가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두렵게 하는가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모하게 하는가는 바울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있게 하는가는 잘못된 것을 고치기를 원하는 열심이고,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는 책임 있는 벌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인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디도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을 했던 디도도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살아가는 삶이요, 복음 안에 형성된 관계입니다. 세상적인 관계는 만나고 나면 세상의 근심이 가득하게 됩니다. 없던 근심이 생기고, 있던 근심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만날수록 세상 근심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됩니다.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구원의 삶으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관계가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를 통하여 얻게 되는 위로, 기쁨, 새 힘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에게 있게 하옵소서.
세상 근심은 모두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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