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주일강단

주일강단 -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2019-12-29      제1276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누가복음 2장 8~20절 

 

/ 이재훈 목사

 

첫 번째 성탄이야기가 기록된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경배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방박사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예수님의 오심을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기이한 징조들을 통해 알리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멀리 동방의 사람들까지도, 베들레헴이 어딘지도 모르는 그들에게까지도, 별을 보고 세상의 징조를 알기 원했던 그들에게까지 특이한 징조가 나타났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세상에 오심을 알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이한 징조를 보여주셨다고 믿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기까지 수많은 예언과 유대 민족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유대 민족의 문화, 관습, 율법의 모든 것이 메시아로 오시는 그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은 무지했고, 무관심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는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잘 앎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관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더 많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징조를 보고 유대 땅으로 왔을 때 헤롯이 놀랐습니다. 헤롯이 놀랐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세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동방박사 세 사람 세 가지 예물 가지고’라는 찬송가 가사 때문에 동방박사들이 세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세 사람이 아닙니다. 그 먼 거리를 세 사람만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이동할 때는 큰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예물도 상자 세 개만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황금, 유향, 몰약으로 대표되는 최고의 예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체크하면 성탄절 칸타타나 드라마를 할 때는 동방박사들과 베들레헴 목자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점이 확실히 다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나이가 적어도 1~2살 사이였습니다. 헤롯이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온다고 하는데 어디서 태어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들레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2살 아래 아이를 다 죽이라고 지시합니다. 그 대학살의 명령에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던 시점은 예수님의 나이가 최대 2살입니다. 적어도 돌에서 2살 사이는 됐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

 

하나님께서 저 멀리 있는 이들에게까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소식을 전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침묵 속에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늘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므온과 안나 같이 밤낮으로 금식하며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그 예언대로 바라며 금식하고 기도했던 안나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징조와 계시로 예수님 오심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를 듣고 메시아를 찾아가서 처음으로 경배한 이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1년이 지난 후 예수님의 집으로 경배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관점으로 보면 마태복음에 동방박사들이 등장하고, 누가복음에 목자들이 등장하는 것이 너무나 정확한 분류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에 왕으로 오신 분에게 당시 신분사회에서 목자들이 경배를 했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목자들이 경배했던 그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복음서의 모든 기록을 정리하는 데도 성령님께서 지혜로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그들을 양과 같이 분류했을 것입니다. 24시간 양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돌보느라 그들의 몸에서는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피부는 거칠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성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차단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그들의 귀는 열렸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에 가까이 갔습니다. 어떤 사회든지 어떤 소식이 누구에게 먼저 전해지고, 누가 첫 번째 증인인가에 따라서 메시지의 신뢰도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도 중요하지만, 그 소식을 누가 전하는가도 중요하고, 그 소식을 누가 가장 먼저 듣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입장을 이웃 국가에 설명할 때, 아무나 가서 전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가고,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가서 그 국가에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전하지 않습니다. 소식을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셨다는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보면 목자들에게만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서기관들에게도, 왕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계시를 통해 전해졌으리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들을 마음이 없었고,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는 들어도 무시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자신의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는 것을 입으로는 말했지만 마음으로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거짓, 탐욕, 권력이 예수님이 오시면 드러나고, 폭로되고, 무너진다는 것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을 읽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러 징조를 유심히 살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이 임박한 때에도 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 징조와 계시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지진, 도처에 전쟁, 사람들의 이기심,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취해서 “세상은 별일 없을 거야. 과학기술만 발전하면 돼.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어”라고 착각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성경의 계시를 민감하게 살피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성령 안에서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주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의 열린 귀, 눈, 마음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왜 최초의 증인이자 경배자가 되었을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았고, 알아야 하며,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양 떼를 지키며 들판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열린 눈이 있었고, 귀가 있었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고통스러웠기에 오히려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는 열린 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린 눈도 있었고, 열린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계시가 임했을 때 그들은 서둘러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는 자들이 붙잡을 수 있습니다. 깨어 준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심도 분별하지 못했고, 다시 오심도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 번째 성탄의 증인이며, 예수님을 가장 먼저 경배했던 목자들처럼 열린 귀와 눈을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는 기도제목이 있어야 합니다.

 

시작은 ‘구유’  마지막은 ‘십자가’

 

성탄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진 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버리고, 소외시키고, 누군가를 배제하고,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더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 경배하러 갔을 때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늘 양떼들과 뒹구는 자신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 자신들의 처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비참함, 소외감, 좌절감을 느꼈을 목자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보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과연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가? 그들은 놀라웠을 것입니다. 자신들보다 비참한 모습으로 누워계신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의 경배를 받은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예수님은 그 누구도 기꺼이 가까이 갈 수 있는 분, 어떤 모습일지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낙인찍히고,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사람들로부터 정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또 버림받아 마땅하다고 판단 받는 흉악한 범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입니다. 바로 그 분이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구유에 누우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하심을 통해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구유에 누우신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 모두는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이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부유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태어나실 때도 다른 사람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도 다른 사람의 배를 빌려서 사역하셨습니다. 만찬을 하실 때도 다른 사람의 다락방을 빌려서 하셨습니다. 죽으신 후에 무덤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인생은 아무것도 없었던 인생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성탄 주일에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모실 때 “제 마음은 너무 더럽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구유보다 더 더러울까.” “제 삶은 너무 비천합니다”라고 하면 “구유보다 더 비천할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목자들의 경배를 구유에서 받으신 예수님은 누구의 경배도 환영하십니다. 누구의 삶에도 임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높고 높으신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이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인류가 준 최초의 선물은 구유였지만, 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였습니다. 구유가 예수님이 낮아진 마지막 자리가 아닙니다. 구유는 출발이었을 뿐이고, 마지막 낮은 자리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까닭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까지 낮아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이 그 누구를 품지 못하겠습니까?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으며, 그 누구를 변화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앞에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우리 삶 속에 모셔 들일 때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천사들이 노래했던 그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최고의 감사, 기쁨, 영광을 하나님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14절).
이 영광과 평화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입니다. 원래 우리에게 주어졌던 이 축복,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영광과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왜 평화가 없어졌습니까? 영광을 가로챈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자가 있기 때문에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올려드릴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왜 평화가 없습니까?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 마땅히 찬양받으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올려드리고, 구유에 누우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성탄은 이 평화를 맛보는 복된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구유에 누이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시기 위해서 구유보다 더럽고 추한 우리들의 마음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축복 속에 거하기를 축원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을 맞이할 때 우리 삶 속에 최고의 감사와 기쁨과 영광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안식이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아기 예수님 탄생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평화를 잃어버린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십자가까지 낮아지심으로 죽임 당하신 예수님,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참된 마음과 잃어버렸던 평화를 찾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든 심령에 찾아오셔서 임하여 주시옵시고,
예수님을 모신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900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