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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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2019-12-01      제12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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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 이재훈 목사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을지라도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자랑하며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자랑’이라는 단어는 사도 바울 서신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신약 전체에서 59번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 55번이 사도 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전문용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서 39번 나오고,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도 나옵니다. 우리말로 ‘자랑’이라고 번역했지만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랑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영광을 구하다’, ‘어떤 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다’, ‘어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이 믿고 의지하여 삶의 중심이 되고, 삶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의미를 종합하면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곧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결국 신앙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면 그것이 곧 나의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14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대에서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십자가를 경건하고 고상한 하나의 장식이자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로 되돌아가보면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가장 흉악하고 잔혹한 죄수들을 가장 비참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왜 많은 액세서리 중에서 십자가가 가장 고상하고 경건한 액세서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기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를 믿음의 상징으로 내세우지 못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충격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감히 십자가를 상징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카타콤에 가 보면 ‘익투스’라는 물고기 모양이 있습니다. 익투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세주’라는 단어를 합한 것입니다. 익투스를 상징하는 것이 곳곳에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은 물고기였습니다. 십자가는 그보다 훨씬 뒤에 믿음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끔찍하고, 피하고 싶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형틀이 자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하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십자가를 항상 착용하고 다닙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고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 중 베냐민 지파였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느낌이 없는 사도 바울은 당시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태어났으면’, ‘나도 저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나도 저런 교육을 받았으면’, ‘나도 저런 사람이었으면’할 정도로 희망하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의 이력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지식이 완벽하고, 많은 학문을 체득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모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의 인생의 자랑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이유

 

사도 바울이 왜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었습니까? 첫째, 십자가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매우 거칠고,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종교적인 체계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흉악한 사형대에 그리스도가 못 박혔다는 것은 종교적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메시아는 능력이 많아야 하고, 영광스러워야 하고,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해야 하고,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그것도 사람들에 의해 못 박혀 죽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입니다. 어느 시대건 세상이 잘못 판단하면 사람들이 죽고 싶을 만큼 절망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뱉는 말, 대중적인 신념은 복음을 시시한 것으로 만듭니다. 세상은 복음을 철학의 아류, 수많은 종교 중에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로 보이게 만듭니다. 여러분, 만일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 철학의 일부가 아닙니다. 복음은 절대 한 종교의 일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종교 철학에 근거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 철학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세상이 한 인격체인 것처럼,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의 위협과 시선과 세상이 주는 평가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나를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신 것처럼 나도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 5:24).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나와 세상을 다른 관계 속에 존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고, 귀를 막고,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한복판에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지배받지 않고, 세상의 평가, 신념,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서 삶이 좌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나와 세상의 관계를 그렇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진리를 평생 체험하고 믿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요, 성화의 삶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종교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원리요, 중심이요, 체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십니다.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고, 나를 못 박았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이 능력이 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 당시 아리마대 요셉 같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던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겼습니다. 청교도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결코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고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고통

 

“바로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이 떠돌고 수고하며 우리 손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오히려 축복해 주고 핍박을 당하면 참고 누가 우리를 비웃고 헐뜯으면 선한 말로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됐습니다”(고전 4:11~13).
누구나 세상의 보물이 되기를 원하지 쓰레기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쓰레기처럼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처럼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민족의 떠오르는 미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며 그는 세상의 쓰레기 같은, 만물의 찌꺼기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도리어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체험과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 우리에게 예비 된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취급과 평가를 넘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합니다만 나는 그 이상입니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고후 11:23~28).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난당했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통보다 사도 바울을 짓누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염려입니다. 특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한 염려가 컸습니다. 그들이 육체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고난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그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육체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엄청난 분노를 냅니다. 거룩한 분노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합니다. 복음의 시각으로 보면 악한 사람만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도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종교와 도덕에 갇혀서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장 도덕적이고, 체계적이고, 의식적인 종교가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흔적,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 연결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12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종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도덕은 육체를 자랑하고 맙니다. 우리 인생에는 두 가지 자랑 내용만 존재합니다. 육체를 자랑하느냐,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느냐 입니다. 내가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육체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되고, 소망이 되고, 삶의 의욕을 북돋워 주고, 삶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대상이 바로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종교적 의식을 철저히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종교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종교적 의식이나 체계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내용이 될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1절을 쓰면서 “내가 더 큰 글씨를 쓴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그가 말하고 누군가 받아 적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사도 바울의 친필로 마무리 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글씨로 쓴 것입니다. 이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17절).
사도 바울은 육체적 고통보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믿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의 모습이 사도 바울에게는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믿고 있었고, 육체를 자랑하며,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는 수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죽음의 고통을 넘나들며 받은 고통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남은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지우고 싶은 흔적이 있습니다. 또한 자랑하고 싶은 인생의 흔적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흔적만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신 흔적을 부활하신 후에도 그대로 남겨두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었지만 십자가에서 받은 고통의 흔적은 남기셨습니다. 의도적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도마처럼 “내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나올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신앙이 영원한 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언해 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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