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주일강단

주일강단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2019-11-24      제1271호

공유하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갈 5:22 
/ 이재훈 목사 
 
성도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결핍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기술에는 전문가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영역에서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이 순간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과거의 그 모든 경험이 그 순간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잠시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지만, 한순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보았을 때 물속에 빠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믿음으로 살아왔다 할지라도 한순간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물속에 빠지는 것이 믿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나는 믿음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스스로 훈련하고 개발해서 쌓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믿음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계속해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올바른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점검하고, 시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시험을 주시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가?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피고 계속해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고후 13:5). 
시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시험에 탈락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고, 깨닫고, 체험하고 살고 있지 못하다면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요한 시험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살피고, 시험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혹시 이 고백이 진부한 교리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 고백이 살아있는 체험, 살아있는 믿음의 지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믿음의 실체와 본질을 깨닫고 체험하기까지는 “나는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더 나아가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savior)이시며, 동시에 나의 주님(Lord)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며 또한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믿음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나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 구절을 ‘예수님 안에 있었던 믿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 믿음’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믿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신 믿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믿음입니다.
 
‘다중인격장애’가 가능하다면
 
예수님 안에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넘겨주신 믿음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처럼, 우리가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옛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음에 넘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육체 가운데 사실 때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 아버지의 사랑에 온전히 의탁하고 의뢰하며 믿음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믿음이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서 니의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믿음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축복이 나의 것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믿음은 자신의 옛사람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결정을 믿는 이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세대에 걸쳐 감춰져 온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 1:26~27). 
이 비밀은 영광스러운 비밀이고, 모든 시대와 세대에 걸쳐 감춰져 있었는데 이제 나타났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있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역사가 바로 이 비밀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잠시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깨우침을 주셨던 어떤 위대한 지도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고귀한 죽음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단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만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 1장 26~27절의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은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 찬양도 많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요? 솔직히 가능한 일입니까? 내 안에 나와 다른 인격이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나의 의지와 인격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그런 삶을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든지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솔직하고, 체험에 이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자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라는 체험과 정반대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끔 뉴스를 보면 세상을 놀라게 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나타납니다. 범인이 잡혔을 때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사람을 해치거나, 욕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사람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는 그 사람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또 다른 인격체처럼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결국 그 사람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그 사람이 주체할 수 없는  무서운 또 다른 인격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다중인격’ 또는 ‘이중인격’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격에 다른 인격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해리’는 분열, 분리라는 뜻입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외상이나 상처를 입으면 인격이 분리되어 끔찍한 일을 행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또 다른 인격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지만 내가 아닌 것처럼 여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 장애가 여러 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다중인격장애’라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죄, 상처,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한 사람의 인격 안에 분리와 해리가 작용함으로써 다중인격이 되는 것이 발생한다면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전혀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와 상처로 인해 분리가 된다면 정반대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죄와 상처의 충격이 아니라 축복과 은혜와 사랑과 거룩한 충격으로 인해서 인격이 통합되고, 상상할 수 없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통합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인격의 분리로 인해 내가 아닌 다른 인격들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렇게 인격이 분리되는 일이 죄와 상처로 인해 일어난다면, 역으로 죄가 아닌 은혜, 거룩, 사랑, 성령의 충격으로 인해 인격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안에 역사하는 놀라운 성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는 성령을 통해 내 안에 사신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우리가 아는 가장 강력한 원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심으로 육체적 임재는 사라졌지만 자신을 대신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은 영의 임재로 함께하심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실 때 그분이 나타내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과 형상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월리엄 탬플이라는 분은 이 문제를 셰익스피어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셰익스피어 작품 같은 희곡들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일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그처럼 희곡을 쓸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기쁜 소식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은 끝까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예수는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사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요 1:1).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설명했고,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분의 말씀과 행하심을 기록으로 남겨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의 기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내 안에 사시는 임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지만,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기는 위인전이 아닙니다.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죽은 역사가 아닙니다.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분이 인격과 영으로 내 안에 사시는 통로로써 주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내 안에 사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만 알고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때 반드시 사용하시는 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체험을 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천 년이 넘는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갈릴리 호수를 거니셨던 예수님, 가나안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예수님, 삭개오가 만난 예수님, 수많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던 동일한 체험을 우리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통로로 주신 말씀을 우리는 다른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나갈 때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음을 통해 내 안에 사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예수께서 계속해서 내 안에 사시도록 만드는 통로는 나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일은 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나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인격적인 동의와 살아있는 의지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다중인격이 죄의 충격으로 인해 인격이 분열되어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것은 불신입니다. 불신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믿음은 연합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인격이 나의 인격과 연합되는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인간성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내가 있는 것입니다. 옛 성품 가운데 타락한 자아로 살아가는 내가 아닙니다. 타락한 자아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끊임없이 믿음으로 주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내 의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 나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쓰신 <예수님>이라는 책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딱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예수님이 당신 침대에서 일어나 당신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당신 집에서 당신의 스케줄을 대신 맡으신다면 당신의 상사가 그분의 상사요, 당신의 어머니가 그분의 어머니요, 당신의 고통이 그분의 고통이 된다면 딱 한 가지만 빼고 당신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건강, 상황, 문제, 관계 모든 것이 그대로 있고 한 가지만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으로 내 삶에 오시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휴가를 떠나고, 당신의 삶은 예수님의 마음에 전적으로 믿음으로 연합되어 따르는 것이다. 그분의 우선순위가 당신의 활동을 지배하고, 그분의 열정이 당신의 결정을 좌우하고, 그분의 사랑이 당신의 행동을 지시한다고 할 때 당신은 어떤 모습이 될까?” 
학자들에 의하면 보통 사람에게도 인격 장애 증상이 있다고 합니다. 증상에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상처로 우리 인격이 파편화되고, 내가 아닌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중인격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 때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되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축복이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사람입니다. 이 체험을 날마다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1,046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