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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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합니다

 2019-11-17      제12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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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할 그때에 강합니다 
 
고후 12장 7~10절 
/ 이재훈 목사 
 
사도 바울의 고백 한 마디 한 마디를 묵상할 때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생각합니다. 너무나 쉬워 보이는 고백이지만 그 고백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역사는 매우 깊고 오묘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역설적인 고백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세상에서는 약하면 약한 것이고, 강하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
 
여러분은 스스로를 강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약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강자와 약자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합당한 구분이 아닙니다. 스위스의 정신학자 ‘폴 트루니에’가 쓴 <강자와 약자>라는 책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강자와 약자라는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을 감추려고 강하게 반응하는 사람과 약하게 반응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잘 감추어 성공한 사람은 강자처럼 보이고, 두려움을 감추는 것에 실패한 사람은 약자처럼 보일 뿐이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강자와 약자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이 사고방식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심리적 힘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강자가 되려고 사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적극적 사고방식과 긍정적 사고방식입니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보다 나은 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오래 살아보신 분들은 적극적이고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으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자기도취에 빠집니다. 그래서 문제를 문제로 여기려 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여긴다고 세상의 강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힘, 다짐, 사고방식 등이 인간을 강자로 만드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감출 뿐이고,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강자와 약자라는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올바른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며,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두렵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문제가 많고, 죄인 중에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 은혜를 구하는 것만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데 “강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강해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시고 그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 스스로의 결심과 다짐으로 강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강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고 외치며 강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율법책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밤낮으로 묵상해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켜 행하여라.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수 1:8).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고, 환경은 열악하고, 위기 상황이 끊임없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담대하면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할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그리고 주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십시오”(엡 6:10). 
디모데에게 권면할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굳세어라”(딤후 2:1). 
은혜로 굳세어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저는 오뚝이를 생각합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금방 일어납니다. 넘어진 것 같지만 바로 일어나는 회복 탄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그 힘으로 강건해지는 것이 올바른 강건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신비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강자라고 여기고, 자신의 장점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되어 있고, 약점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세상 적으로 볼 때 약점처럼 보이고, 부족함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통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성경 인물들에게 나타난 역사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사용하셨습니까? 왜 그를 지도자로 부르셨습니까? 그가 애굽의 왕궁에서 좋은 교육과 좋은 문물을 배웠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40세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배웠던 당시 최고의 교육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자신의 뜻대로 무엇인가 해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사용하시는데 있어서 40년 애굽에서의 경험은 도리어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한 가지 진리를 배우게 하시려고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장점과 강점은 무엇입니까? 치밀한 꾀입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획하는  꾀가 그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야곱 안에서 깨어지기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의 꾀였습니다. 때로 그 꾀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형과 씨름했습니다. 태어나서도 형을 넘어뜨렸습니다. 아버지도 넘어뜨렸습니다. 외삼촌도 넘어뜨렸습니다. 야곱과 붙어서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씨름왕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뜻 자체가 ‘발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야곱의 꾀는 본능적으로 움켜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 에서가 야곱을 공격해 오면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야곱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는 인생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인생이 어떻게 이긴 자입니까? 어떻게 승리자입니까? 하나님 앞에 철저히 패배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연약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자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야곱 안에 있는 꾀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합니다. 이와 정반대로 삶에서 약점, 부족함, 연약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통로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조상 대대로 우상을 섬기는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만 봐도 믿음의 조상, 많은 자손을 번성케 하는 조상으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면 믿음이 좋아야 하는데 믿음이 없고, 조상이 되려면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었던 이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도리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단어에 합당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욥입니다. 욥은 창세기 인물입니다. 연대순으로 성경을 다시 배열하면 욥기는 창세기 중간 어디에 있어야 합니다. 욥은 노아의 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 중에서 경건한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의인이었습니다. 자녀도 많이 낳은 가정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지 않고, 그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셔서 고난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약점, 부족함, 연약함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면 보이지 않는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태 죄인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교만이 있습니다. 대대로 믿음의 가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친하다는 잘못된 영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주장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우상을 섬겼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많은 자손을 번성케 하는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을 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살던 나오미가 남편과 함께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베들레헴을 떠나 잘 사는 모압으로 이민을 가서 꿈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깨졌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압에서 얻은 두 자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한 자부는 돌아가고, 룻이라는 자부와 함께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은 나를 괴롭게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밖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나오미의 상처였고 아픔이었습니다. 지우고 싶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자부 룻이 만난 보아스라는 남편을 통해 그 가문에서 다윗이 태어나게 하고,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나오미의 꿈은 깨어졌지만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어려움들이 지속된다면 미래에 더 큰 하나님의 꿈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과 연약함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역전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꿈을 이루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 인생의 연약한 점이 변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오미라는 여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점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낮추시고, 연약한 것을 통해서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인생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역사하십니다.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잘난 체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육체라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1:27~29). 
사도 바울은 세상 적으로 강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받은 계시들이 지극히 큰 것으로 인해 나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나를 쳐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7절).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고쳐보려고 하나님 앞에 세 번씩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수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의 통로가 되었던 사도 바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절의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약함의 이유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가 너무나 위대하고 놀라운 계시이기 때문에 그 계시로 인하여 자신이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막아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놀라운 진리도 사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시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의 신비, 십자가와 부활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복음의 도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 정리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계시가 지극히 커서 교만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도 바울의 교만을 미리 막아주셨습니다.   
고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죄의 결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당연히 당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둘째, 죄를 미리 막아주시는 고난입니다. 예방하는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만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막아주시려고 그를 약함 가운데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끝까지 복음의 사도로 쓰시기 위하여 그의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그를 계속 겸손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예방하는 고난을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기적을 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뿐만이 아닙니다.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세상 적으로 강자가 되어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내려오지 않고 그 자리에 죄인의 모습, 약함의 모습으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오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천사들을 불러 높은 자들을 진멸하실 수 있었지만, 강함을 사용하지 않고 약함 속에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제물이 되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은 그가 약함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고난과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십시오. 고난을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것이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드리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강자와 약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고백을 평생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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