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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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2019-11-10      제12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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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 고후 4:10~14
/이재훈 목사

참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참된 고백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은 곧 하나님 은혜의 빛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삶은 너무 소중하고, 보배로운 인생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할 때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이 죽음이 의미하고 있지 않은 것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 앞에 선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나는 언젠가 죽습니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언젠가 찾아오는 죽음을 묵상해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죽지 않을 것처럼, 이 육신에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에 찾아올 죽음을 묵상해도 삶이 거룩해집니다. 만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분명 다른 차원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죽음을 묵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정신적 죽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정신적 죽음은 우리 영혼에 찾아오는 낙심, 절망, 포기, 좌절 등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파스칼에 의하면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도 인간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의 말, 한 단어로도 인간의 영혼은 낙심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고, 좌절을 경험할 만큼 인간의 정신은 강한 것 같지만 약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 정신적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죽음의 두려움이 너무 커서 우리 삶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신적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영적으로 단절 상태에 있는 죽음입니다. 분리로서의 죽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 있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경험해야 할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죽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죽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의미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입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고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고전 15:3).
“이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셨다는 것은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동참하게 만드셨을 때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우리도 부활의 생명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진리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우리를 함께 포함합니다.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재림에 함께 연합한 자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롬 6:10~11).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죄에 대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도 죄에 대해 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개념을 합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위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넘기는 모든 자들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것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했고 그분과 함께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 믿으면 여전히 죄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죄를 이기고, 죄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요, 동시에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 존재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루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심으로 우리는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죽음, 영원한 생명의 능력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항상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4:10~11).
10절과 11절이 유사한 문장인데 원어로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10절의 죽음과 11절의 죽음이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10절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제 예수님의 시신을 짊어지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을 뜻하는 헬라어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 중에 있는 행동을 표현합니다.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과 살아 있는 사람을 서로 포개서 묶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형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과 얼굴, 배와 배, 다리와 다리를 일치시켜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과 묶는 것입니다. 물론 굶어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끔찍한 것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죽음의 독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스며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다고 할 때는 그 죽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이르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나타난 죽음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종결된 죽음입니다. 완료된 상태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과정은 대부분 10절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음을 믿지만 여전히 죽을 몸 가운데 죄의 영향력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에 처하도록 우리 옛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완전히 묶어버려야 합니다.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예수님의 죽음에 묶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야 합니다, 그때 완전한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생명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24절).
‘못 박으십시오’라는 표현은 권면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료형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는 고백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날마다 매달려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연합하고, 계속 죽음을 경험하며, 결국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조롱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 네가 만일 메시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고 했습니다. 군중의 음성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서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로 살아가려고 할 때 사탄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욕심과 옛 성품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 필요가 없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면서 끊임없이 내려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리는 십자가 못 박힌 자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옛사람을 죽음에 넘겼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묶인 자다. 그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고백을 합니까? 그것은 죽음에 묶인 자가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변화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부활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난 앞에 서 보면 압니다. 위기 앞에 서 보면 압니다. 낙심하는 상황에 처해보면 압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보면 압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할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고백앞뒤에 사도 바울은 답답한 일을 경험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항상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쇠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고후 4:16절).
여러분, 사도 바울의 믿음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낙심하는 상황인데 낙심하지 않는 비결, 모두가 절망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모두가 좌절하지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죽음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육체적 죽음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와 낙심과 절망과 좌절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나는 좌절할 수 없어. 이러한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하고, 파이팅을 외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약간의 효과는 있겠지만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낙심과 절망, 답답한 일, 모든 고난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일치시켜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될 때 놀랍게도 육체적, 정신적 죽음의 고통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생명이 나의 죽을 육체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승리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로 끝나지만 그 의미는 “나는 날마다 살아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겉 사람은 날로 쇠하나 나의 속사람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는 고백은 “나는 날마다 살아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죽지 않도록 죽게 하소서.”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 내가 분리된 죽음입니다. 뒤의 죽음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삶의 시련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여러분을 넘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우리를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4장 13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또한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 대해 죽는 삶을 경험하려면 우리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자아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간주해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시도록 주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결심과 발걸음을 내딛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보혈의 역사와 능력이 임함으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됩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정신적 죽음으로 인한 삶의 고통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욕심에 대하여, 환경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는 고백을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붙잡으면 부활의 생명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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