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참된 회개(7) 타락한 몸의 행실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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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참된 회개(7) 타락한 몸의 행실 죽이기

 2019-10-27      제12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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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7) 타락한 몸의 행실 죽이기

로마서 8:12~13
/ 이재훈 목사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심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이것은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은 참된 회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의 삶이야말로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회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임하시고,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들의 삶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마음에 죄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죄 가운데 있었던 옛 자아의 영향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옛 자아의 영향력이 우리 안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 생각, 세계관, 언어와 문화 속에 살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순된 모습을 가리켜 ‘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육신은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body’가 아니라 ‘flesh’입니다. 옛 자아의 영향력, 죄 가운데 있었던 옛 성품,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 성향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도록 만드는 옛 자아의 영향력이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과 동시에 옛 영향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모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하는 육신에 빚진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12~13절).
13절에 나오는 ‘몸의 행실’에서 ‘몸’은 12절에 나오는 ‘육신’과 같은 의미입니다. 몸의 행실이란 곧 육신의 행실입니다. 여기서 행실이란 어떤 외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행위를 일으키는 내적인 성향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죄악 된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적인 원인과 성향, 방식들이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바로 이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설명하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하신 단어가 빚입니다. 대표적인 비유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을 빌려간 사람을 탕감해주지 않는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한 사람이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이 100일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빚을 탕감해주지 못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것인데 백 데나리온처럼 얼마든지 탕감할 수 있는 문제를 용서하고 있지 않은 모순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실 때도 빚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사용한 ‘테텔레스타이’(Τετεσται)라는 단어는 당시 “다 지불되었다, 완불했다”라고 쓰인 단어와 동일합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빚이 있다면 언제나 채권자에게 이끌려가게 되어있습니다. 만나자고 하면 만나야 하고, 요구하면 들어줘야 합니다. 채권자에게 채무자는 언제나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할 때는 죄에 빚진 자와 같은 상태입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사랑해서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죄는 약간의 즐거움이 있어서 죄를 짓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죄는 흉악한 것이고, 그 자체가 끔찍한 것이기에 “당신은 죄를 사랑해서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원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의 빚진 자로 끌려간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시편 50편에서 다윗이 “내가 죄 가운데 잉태되었다”고 했습니다. 모태신앙은 없습니다. 모태죄인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에 빚진 자가 되어서 죄에 이끌려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 내가 너의 빚을 다 지불했다. 너는 죄에 빚진 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아직 갚을 빚이 있다”고 속입니다. “다 갚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써주신 영수증을 사탄에게 보여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탄에게 속는 것은 옛 자아의 영향력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과 죄를 짓는 성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마치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육신은 우리에게 불법침입자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빚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불법침입자와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가차 없이 내쫓아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 흉악한 불법침입자를 쫓아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 도저히 들어올 수 없도록 내쫓으라고 합니다. 내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죄의 빚을 다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순이 있습니다. 육신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행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뿐만 아니라 욕심, 이끌려가는 육신의 성향들을 죽여야 합니다. 몸의 행실이라는 단어가 매우 교묘하고 음흉하게 우리 가정에 숨어 있습니다. 조상부터 내려오는 몸의 행실이 숨어 있습니다. 어느 가정은 음란, 어느 가정은 도벽, 어느 가정은 미움과 분노, 다툼과 시기, 어떤 가정은 재물, 어느 가정은 겉은 교양인이고 신앙인, 문화인, 교육인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 육신의 행실이 교묘하게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한 예화를 보겠습니다. 
북동부에 사는 어느 유명한 변호사에게는 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성공하였지만 매일 법률사무소에 나갈 때마다 시카고의 한 도로를 걷는데 술집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갔고 아침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서 사무실로 출근했습니다. 매일 이렇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걷는데 눈이 내렸습니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그의 여섯 살 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눈을 피해 집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작은 발로 아빠가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술집 문밖에 서서 아들이 자기가 남긴 모든 발자국을 따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달려가 아이를 안아 올려 집에 있는 아내에게 데려다주고 아래층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다시는 제 발걸음이 제 아들을 술집으로 인도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제 발걸음이 제 자녀를 당신께 인도하도록 하옵소서.” 여러분의 발자국은 어디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녀와 손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21세기 세상의 공격은 가정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신념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정에 대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원수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분열시키고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백성들에게 “네가 집과 가족을 위해 싸우면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가족의 삶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방해하고 상처 주는 일이 생길 때 옳은 일을 위해 일어서십시오. 옳은 일을 위해 싸우십시오. 진리 위에 서십시오. 자녀를 하나님의 집에 데려오고, 자녀에게 주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도록 최선을 다할 때 여러분의 가정에 강한 역사가 일어나 자녀들이 절대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회에 데려오고, 성경을 펴고 기도할 때마다 가족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족을 지키고, 자녀를 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우리 가정과 가족에 맞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을 위해 싸울 가치가 있다고 결정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몸의 행실을 대항하여 싸우고 죽이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를 죽이고 이 시대를 죽일 수 있습니다.

 

육신과 반대되는 은혜의 역사

 

13절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을지를 설명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사건을 체험하고,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도록 돕습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죄 죽임(On Mortification of Sin)>이라는 책을 쓴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세 가지 답변을 제시합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 육신과 반대되는 은혜의 역사를 넘치게 일으키심으로써 우리가 그 죄를 이기고 죽일 수 있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29절을 보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역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날 때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이 내쫓기게 됩니다. 우리 안에 인내의 열매가 맺어지면 더 이상 조급함과 분노가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역사를 풍성하게 일으키심으로서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방문했을 때 어느 장로님이 “저희 교회에 너무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술에 완전히 취한 채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 성도를 징계했고 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채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에게는 어떤 징계를 하십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두 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오고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성도들 징계했으니 동일한 명령으로 주어진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성도도 징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술 취한 것을 잘했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 취한 자를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도록 이끄는 것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과 반대되는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죄를 죽이십니다.

 

죄의 뿌리와 습관에 대한 실제적 역사

 

둘째, 죄의 뿌리와 습관에 대해 실제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죄의 뿌리와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몸의 행실의 무서움입니다. 육신은 우리가 깨달아 아는 것보다 깨닫지 못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령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육신의 행실과 육신의 뿌리까지도 태우시고, 소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제도와 결심으로도 부서지지 않는 돌과 같이 단단한 마음을 비춰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강력한 치료의 광선이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올 때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은 줄도 모르고 낫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났는데 더 이상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몸의 행실을 성령님께서 치유해 버리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실제적으로 죄의 뿌리를 치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주심으로


셋째,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주심으로 죄를 죽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모실 때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죽었음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으며,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왜 우리에게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결단과 소원과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알아서 행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성령님은 우리 몸과 감정을 그렇게 치료하실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말씀으로 먼저 두들기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몸의 행실을 죽여야겠다는 소욕을 일으키시고, 기도와 결단을 하게하며, 의지를 일으키심으로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를 죽일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이 자유의지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인격적인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르고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 의지적 결단을 통해 이루어진 반역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구원과 회복, 거룩한 성화와 회개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우리의 자유의지와 함께, 우리의 자유의지 안에서 죄를 죽이는 일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마중물 넣기

 

죄악 된 몸의 행실을 죽이겠다고 결단하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은 마중물을 넣는 것입니다. 그 마중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역사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마중물을 넣어야 합니다.  
<고백록>을 쓴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참된 회개의 체험을 통해 타락한 몸의 행실을 버리고 죽이는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과거에 즐겼던 몸의 행실에서 오는 향락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체험했습니다. 놓기를 두려워했던 것을 놓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를 가져다주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의 참된 회개의 이면에는 어머니 모니카(Monica)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의 참된 회개를 원하는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세례를 받은 이후 오스티아(Ostia)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고백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육신으로는 나를 시간의 빛에 태어나게 하셨고, 자신의 마음으로는 나를 영원한 빛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과 마지막을 보내는 여정에서 이런 교훈을 남깁니다.  
“아들아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누릴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나의 바라던 것이 다 이루어졌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내가 더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 잠깐이라도 더 남아있기를 원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죽기 전에 네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의 하나님은 내가 바라던 것보다 더 풍성하게 보답해 주셔서 내가 세상의 행복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느냐.”
그리고 임종 직전 이런 부탁을 아들에게 남깁니다.
“내 몸은 어디에 묻어도 좋다. 그 일로 인해 조금도 염려하거나 신경 쓰지 마라. 단 한 가지만 부탁을 한다.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아들의 참된 회개를 간구하는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모니카가 죽기 전에 아들 어거스틴이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체험을 <고백록>에 남겨 수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신실하고 위대한 신학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열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회개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일 때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고, 이 나라와 민족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타락한 몸의 행실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내쫓고 죽이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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