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참된회개(4)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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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참된회개(4)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

 2019-09-29      제12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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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하나님의 임재 
시 100:1~5 
/ 이재훈 목사 
 
위대한 성자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는 아주 평범해 보이지만 가장 위대한 신앙의 행동입니다.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감사 그 자체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은혜입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의 시입니다. 시편에 감사의 고백을 담은 시들이 많이 있지만 감사를 위한 시라고 규정된 시는 시편 100편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 앞에 모여 예배할 때 이 시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지정한 시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100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경배했고, 기뻐했고, 그분 안에서의 삶을 누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신학적인 면에서 시편 100편은 일종의 ‘준비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준비 찬송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분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어떤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의미한다는 면에서 준비 찬송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기뻐 외치며 나아가라!
 
시편은 두 개의 평행되는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 다 명령형으로 시작하고, 그 명령형 다음에 그 명령의 근거를 설명하는 형태로 주어져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뻐 외치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1~2절). 
1절은 원문에서 “기뻐 외치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강력한 명령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분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라”입니다. 그분의 얼굴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때 기뻐 외치라, 기쁨의 소리를 발하라는 것입니다. 노래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강력한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감정, 상황,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 외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외치며 노래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라며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감정이 흥분하면 안 됩니다. 죄악 된 감정으로 흥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신앙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기뻐 외치고 노래하며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는 명령을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쁜 일, 즐거운 일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마음이 우울하고 힘들고 어렵고 도저히 노래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는 부르심입니다. 나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출발하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리고, 노래할 기분조차 들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있다면 나의 임재로 가득한 것입니다. 나의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노래하고, 기쁨의 소리를 내며,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시고 명령하시고 부르십니다.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나의 감정은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상황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일종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명령에 대해 “하나님의 권리 주장”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마땅히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즐거우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늘 노래하면서 나가야 한다. 참으로 경건한 마음을 지닌 회중들의 조화롭고 진심어린 아름다운 찬송은 예배의 격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큰 기쁨을 안겨준다. 회중 예배 때 찬송을 금하는 교회들이 몇몇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이를 금하는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기쁨의 소리를 발하며, 손을 높이 들고, 박수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내 감정으로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사람의 제일 되는 의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낙심되고 기쁨을 줄 만한 일들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녀관계에서 부모가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자녀를 통해 부모가 영광스럽게 되는 때 일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 얼굴을 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때입니다. 부모님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부모님을 기뻐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자녀가 부모님을 가장 즐거워한다면 그 부모는 자녀로 인해 가장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성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네 하나님을 알라!
 
우리의 기쁨은 맹목적인 기쁨, 무지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성경은 “네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라.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이고 그 목장의 양들이다”(3절).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알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 기쁨은 자기 자신이나 상황에서 나오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 때 더 큰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으신 분이며, 더 나아가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분의 양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준비를 하십니다. 한 여인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꾸십니다.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해 자녀를 보호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권리를 우리에게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이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감사하면서 그 문으로 들어가고 찬양하면서 그 뜰로 들어가라. 그분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라”(4절). 
4절은 ‘들어가라’는 또 다른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원문의 순서대로 번역하면 “들어가라.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찬양함으로 그분의 뜰로 들어가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가는 것이 감사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명령이요, 초청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 임재의 문 앞까지 나갔다면 감사는 그 임재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 임재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절정이 찬양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찬양함으로 그 궁정의 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절정은 찬양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찬양이 되지 못합니다. 시편 곳곳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광대하시다’의 영어 표현은 ‘magnify’입니다. ‘크게 보이게 한다’, ‘확대시키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크게 본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로 인해 하나님이 더 큰 분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크고 위대하고 광대하신 분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가 감사함으로 나갈 때 광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확대시키는 두 도구가 있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입니다. 현미경은 너무 작아서 볼 수 없을 때 크게 확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나 바이러스를 확대해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현미경입니다. 망원경은 정반대입니다. 실제로는 너무 큰데 거리가 너무 떨어져 보이지 않을 때 망원경을 통해서 봅니다. 저 하늘에 있는 별들을 우리 눈으로 보면 작은 점처럼 보여서 때로는 보이지도 않지만 천체망원경을 통해 보면 그 별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어떤 쪽이겠습니까? 현미경적 시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작아서 지나가도, 잊어버려도 되는 데 불평하면 그것이 점점 커집니다. 무시해도 되는 데 점점 커져서 우리 삶을 압도하게 됩니다. 크고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지나치고 무시하고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감사하게 될 때 실제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magnify’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지 체험하게 됩니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신비를 체험합니다. 감사는 망원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고백이 바로 그 고백입니다. 감사할 때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되고,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크고 놀라우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 크기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주의 진리가 온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다”(5절). 
5절의 시작은 ‘선하시기 때문이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악은 선에 대해 반역하고, 선에 기생하며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자신을 반역한 무리에 대하여 하나님은 악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실 때도 복수심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심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는 언제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지 못합니까?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히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롬 8:28).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상황, 원치 않는 사람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우리가 이 땅을 편안하고 쉽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얼마나 더 닮느냐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 텐 붐 여사는 유대인들을 숨겨준 죄로 언니와 함께 나치 수용소에 갇혀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두 자매가 갇힌 수용소는 다른 수용소보다 벼룩이 많이 들끓어서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코리 텐 붐의 언니가 이런 환경까지도 감사하자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벼룩까지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코리 텐 붐 여사는 언니가 그렇게 기도하니까 “아멘”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은 벼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나 나치 군인들이 가까이 오지 않아서 그들이 마음껏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교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벼룩으로 인해 체험하게 된 은혜입니다. 
 
감사, 믿음의 시각
 
감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사할 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광대하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감사입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벌주시거나 고난을 주신다 해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시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갖기를 원한다면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또한 은혜가 여러분을 떠나더라도 참고 기다리며, 은혜가 다시 돌아오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고 겸손하십시오.”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마지막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작을 판단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현재를 가지고 미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가지고 현재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 목적이라는 것을 믿고 현재를 바라볼 때 고난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 그 자체로 하나님 임재의 문을 열고 그 문으로 들어가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며, 그분 앞에 즐거워하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섬세하시고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운지를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 목적임을 믿고, 
현재를 바라볼 때 고난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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