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참된 회개(1) 돌이키고 돌이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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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참된 회개(1) 돌이키고 돌이키라

 2019-09-01      제1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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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1) 돌이키고 돌이키라
에스겔 33:11 
이재훈 목사 
 
 
신앙생활 하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가장 쉽게 흘려버리는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왜 성도들이 회개에 대한 말씀을 쉽게 흘려버리는 것일까요? 첫째, 회개가 너무나 쉬운 것이라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죄를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죄가 심각하지 않기에 회개하는 것도, 용서받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깊은 회개를 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알고 지은 죄를 모두 회개했다 할지라도, 모르고 지은 수많은 죄를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회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둘째, 회개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 인간은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양심에 가책이 있습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음이 괴로워 자살했습니다. 사울도 마음에 늘 짐이 있었습니다. 후회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악한 아합왕도 마음이 괴로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회개가 아닌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을 때 남아 있었던 양심의 자연적 기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과 참된 회개를 통해 얻어야 하는 의의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 가운데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만 참된 회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셋째, 회개를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지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평생 회개가 필요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나는 이미 회개했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고,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에 이제 회개라는 단어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개라는 단어를 쉽게 흘려버리는 이유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517년 로마 교황청을 반박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그 첫 번째 문항이 바로 회개에 대한 문항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로 말씀하신 의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회개한 사람은 전 생애를 걸쳐 항상 회개하는 성도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반박할 때 교황청의 부패한 것을 95개나 열거해야 하는데, 왜 회개를 첫 번째 항목으로 내걸었을까요? 그 이후에 나오는 94개조 항목들이 첫 번째 항목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한번 하고 지나가는 통과의례로 여기고, 그 이후부터는 회개와 상관없이 살아가도 된다는 잘못된 회개관과 의식 때문에 중세 교회가 타락했고,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분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한 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어려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은 이미 회개했다고 자신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르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회개가 너무나 먼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둘째, 회개라는 말이 너무 멀리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목소리와 성령의 감동을 외면한 채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마음이 금강석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짓다 보면 더 이상 회개할 능력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회개할 마음, 회개의 부르심을 완전히 차단한 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역사하는 ‘회심’
 
 
“그때부터 예수께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준비되었고, 그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 밖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인류에 존재하는 모든 아픔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밖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안으로 다시 초청하십니다. 조건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나님 나라로 다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영원한 생명의 집이지만, 회개하지 않고 그 나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를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왜곡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요구되는 회개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음을,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음을 말해줘야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선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실제입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오는 어떤 사상의 체계가 이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은 이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는 진리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회개하는 영혼은 반드시 믿는 영혼입니다. 믿는 영혼은 반드시 회개하는 영혼입니다. 만일 내 안에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뒷면에 내가 죄로부터 떠나는 회개의 체험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참된 회개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랍게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회개의 영이 임하고, 우리가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는 공존하는 동시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역사할 때를 ‘회심’(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회심은 믿음과 회개가 동시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양심으로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 뉘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참된 회개는 성령과 말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회개의 시작은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회개의 시작은 스스로의 결심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높임을 받으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회개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수단과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어떤 위인의 권면이나, 위로의 말이나 질책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들에게 들려질 때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통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역사가 각 심령 속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통로가 되어서 구원을 얻는 회개의 역사가 심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 속에 체험될 때 가장 중요한 반응이 회개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참된 회개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성령님의 임재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행해야 할 회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 전체 메시지를 요약하라고 하면 바로 이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이 말씀에 참된 회개의 세 가지 진리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첫째, 악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이치입니다. 악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느냐 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악인을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비난받고, 때로는 감옥에 갇힐만한 나쁜 일을 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의하는 악인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된 회개를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육신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괴로워하며 몸부림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하며 괴로워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신약의 1/3을 기록하는데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저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셔서 놀라운 계시의 비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미리 본 사람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그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즈음이면 비교적 많은 사역을 이룬 원숙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에게 끔찍한 악이 있음을 발견하고 괴로워합니다. 악은 우리가 한번 회개한다고 완전히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의롭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회개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면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악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한 영혼으로 살지 않으면 한순간에 악이 우리를 사로잡는 사도 바울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실체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게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졌다는 것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초신자 때 경험하는 것이고 이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가 더 어려워지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초기에 자신을 소개할 때는 사도됨을 강조했습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후반기로 갈수록 사도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후반기로 갈수록 자신을 지극히 낮추며 자신의 악함을 고백합니다. 가장 후반기에 쓴 서신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딤전 1:15). 예전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데도 자기 안에 늘 같이 존재하는 악의 무서운 실체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가 일어나면 내 안에 온통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진을 위해서 더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참된 회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거짓 없이 철저히 회개하면 산다 
 
 
둘째, 악인이 거짓 없이 철저히 회개하면 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악인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의무가 없으신 분입니다.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로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까지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중요한 목적이 우리의 회개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믿음과 회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고 계십니다.
 
 
회개하여 죽음과 멸망 피하기를
 
 
셋째,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죽음과 멸망을 피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악인이 회개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악인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것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노력이요, 집 안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노력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찾고 기다리고 일하며 악인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음성을 붙잡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왜 죽고자 하느냐?” 이 말씀을 우리가 붙잡을 때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돌이켜야 할 악이 있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네가 왜 죽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붙잡고 은혜를 간구하며 믿음으로 나올 때 내 안에 참된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매일 묵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매일 눈을 뜰 때, 잠자리에 들 때, 길을 걸을 때, “돌이키고 돌이키라. 네가 왜 죽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악을 행하기를 즐겨 했던 우리 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빠져있던 악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드러내시는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나아갈 때 성령의 임재가 우리 안에 회복될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 받을까 봐 두려워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실재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살고자 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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