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4)-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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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4)-나태 

 2019-07-26      제12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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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치명적인 죄(4)-나태 
마 25:14~30 
이재훈 목사 
 
 
나태의 죄는 무엇보다 게으름으로 나타납니다. 충분한 휴식과 여가생활까지 나태의 죄로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쉼과 여가 속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면 나태의 죄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나태를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로 포함할 때는 게으름의 의미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나태의 죄는 게으름뿐만 아니라 분주함으로도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나는 쉴 틈 없이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태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영혼이 온통 일에 빠져버린 모습으로도 나태의 죄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책 가운데 ‘분주함은 헌신이 아닌 배신의 표시’라는 중요한 문구가 나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분주합니다. 첫째, 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자만하기 때문에 분주합니다. 둘째, 나태하기 때문입니다. 나태의 정반대 단어가 ‘근면과 성실’입니다. 영어 단어 ‘diligence’의 뿌리가 되는 라틴어의 뜻은 ‘사랑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근면과 성실이라는 단어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근면과 성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태를 의미하는 또 다른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acedia’인데, 이 단어의 헬라어 의미를 보면 ‘관심(사랑)이 결핍되어 있다’입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나태의 뿌리에는 참된 사랑과 관심에 대한 거부와 결핍이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하고, 마땅히 관심기울여야 하는 일들에 대한 거부와 결핍이 나태입니다. 그래서 나태는 게으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이 분주함으로 나타납니다. 단지 우리의 육체가 열심히 일하고 움직인다고 나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도 나태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분주함 모두가 나태한 죄에 빠진 영혼의 특징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비유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로 나태한 영혼에 대한 책망과 경고를 하셨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각기 충성되게 일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려워서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놓았다가 다시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열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자신의 능력을 최선을 다해 활용해서 많은 것을 남기고 배가시키는 생산적인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유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전체 말씀의 초점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할 것인데 그 종말을 어떻게 깨어 준비할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 앞에 나오는 비유에서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신부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영적 은사와 소명을 의미합니다. 달란트는 원래 화폐단위입니다. 당시 달란트는 매우 큰 단위였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1데나리온으로 계산을 했는데,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약 15~20년 가까이 매일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2달란트는 1만2천 데나리온입니다. 약 40년 동안의 수입입니다. 5달란트는 3만 데나리온, 100여 년 가량의 수입입니다. 한 달란트만 해도 한 사람이 얻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한 사람이 얻을 수 없는 가치를 말합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비유를 ‘내가 노력해서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올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도록 허락해주신 은혜를 의미합니다. 건강, 지식, 재능, 돈, 힘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로 부여된 것들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죄 밖에 없다.” 죄만 나의 것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분량대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분량으로 구별되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구별해서 맡기셨을까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다양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큰일뿐만 아니라 작은 일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큰일인지 작은 일인지, 큰 능력인지 작은 능력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을 칭찬한 것은 그들이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윤을 남겨야 칭찬을 받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좌절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주어진 일에 믿음으로 참여해서 동일한 은혜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얻었다는 것은 세상적인 이윤의 측면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입니다. 내가 은혜로 받은 사랑만큼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일한 달란트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은 사랑, 은혜, 복음을 그대로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전해준다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가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받지 않은 것, 나에게 없는 것을 남기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달란트는 내가 듣고 변화된 복음을 또 다른 영혼이 듣고 변화될 수 있도록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값진 은혜를 누군가가 받을 수 있도록, 지식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동일한 달란트를 남기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의 문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관심하다면 나태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종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은혜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 때문이고 신뢰해서입니다. 왜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다고 평가했습니까? 받은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원금은 보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굳이 악하다고 할 이유가 있습니까? 왜 그를 게으르다고 평가했습니까? 
“그때 1달란트 받은 종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굳은 분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운 나머지 나가서 주인님의 돈을 땅에 감춰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주인님의 것이 있습니다’”(24~25절). 
첫째, 그 종은 자신의 나태함을 주인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주인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있습니다. 주인이 그를 악하고 게으르다고 평가한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길 때 “만일 잘못되면 벌할 것이다”, “변상시킬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종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맡긴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로 맡긴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이 이윤을 남겼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를 잘 깨달았기 때문에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의 나태함의 책임을 주인에게 돌렸습니다. 주인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범한 죄 외에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입니까? 내가 지금 생명으로 호흡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셔서 기대를 가지고 맡겨 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가 우리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불신과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나에게는 더 많은 것을 주시지 않았고, 한 달란트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남기지 못했다”는 비난을 하나님께 돌린다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뢰하셔서 달란트를 맡기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하고 게으른 종의 시작입니다. 
둘째, 악하고 게으른 종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두려워 주인의 돈을 땅에 감추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부족할 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악이란 무엇입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작은 일을 크게 보이게 하고, 큰일을 작게 보게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오해 때문에 갖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내가 성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버리신다는 오해입니다. 이 오해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달란트를 파묻어 버릴 수 있습니다.  
셋째, 두려움이 나태의 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새 생명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달란트입니다. 이 새 생명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에 사로잡혀 옛사람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익숙했던 죄악의 습관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삶을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삶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나태를 낳지만, 
믿음은 신실함과 충성을 낳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다”(딤후 1:7). 
두려움은 나태를 낳지만, 믿음은 신실함과 충성을 낳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삶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달란트가 계속해서 배가 되고, 역사되는 것입니다. 
 
 
나태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시도록 역사되는 것이 나태의 죄를 극복한 모습입니다. 나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옛사람에 묶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계속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게으름도 사라집니다. 분주함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마땅히 맺어야 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두 가지 나태의 정의를 살펴보고 맺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칼빈 대학의 철학과 교수 레베카 드영(Rebecca K. DeYouing)이 나태를 잘 정의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로의 변혁을 거부하는 죄악 된 옛 자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아,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자아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땅에 파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달란트를 나눠줄 수 있는 새 생명을 땅에 파묻어버립니다. 새 생명이 전해졌다는 것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생명으로 끝난다면, 내 안에 있는 새 생명이 나의 옛 육신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땅에 파묻는 것입니다.  나태의 두 번째 정의입니다. 
“나태란 하나님의 사랑이 변화시키는 요구에 대한 저항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그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태는 우리의 성화와 거룩함을 방해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거부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악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파묻어버리는 것 또한 악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적어도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았다면 내가 받은 구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남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소명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땅에 파묻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이 또 다른 달란트로 열매 맺는 풍성한 역사가 일어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w@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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