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3)-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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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3)-분노 

 2019-07-14      제12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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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치명적인 죄(3)-분노 
민수기 20:7~13
이재훈 목사 
 
 
평소에 별로 분노하지 않는 분들은 분노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왜 분노가 7가지 치명적인 죄로 분류되는지 이해하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소에 자주 분노하시는 분들은 분노가 7가지 치명적인 죄로 분류되었다는 것 자체에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분노가 7가지 치명적인 죄로 분류된 이유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분명히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노의 본질은 단순히 불쾌한 감정이 아닙니다. 분노의 본질은 도덕적인 가치판단입니다. 인간이 분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도덕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으려면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 대해 반대하거나 거절하고, 반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노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넣어주신 중요한 기능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넣어주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사랑관계입니다. 그 목적은 거룩이요, 정의입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으로 나타납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이자 본질입니다.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의 공존
 
 
인간이 최초로 분노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속이는 뱀이 나타났을 때 분노해야 했습니다. 뱀을 돌로 쳐 죽였어야합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최초의 살생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뱀을 죽인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에 대해 저항했더라면 인간은 계속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선하게 분노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하고 정의롭게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뱀에게 속아 넘어갔고, 악하게 분노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갔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았기에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분노하지 않아도 될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분노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는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가 공존합니다. 어떤 분들은 “분노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분노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선한 측면만을 봅니다. 그래서 “어떤 분노든지 표출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럴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반면 분노를 비관적으로 보는 분들은 “어떤 것이든 악하다”고 합니다. 분노는 선하거나 악합니다. 아니면 선과 악이 공존 혹은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선한 분노입니다. 사탄의 분노는 악한 분노입니다. 우리 안에는 분노가 어느 한쪽이 아니라 혼재되어 있고, 일반적으로는 악한 분노로 치우쳐 있습니다. 선한 동기로 시작된 선한 분노라 할지라도 그 분노를 표현하면서 악하게 흐르기도 합니다. 
분노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기질과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저 분은 결코 화를 내는 일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분노가 있습니다. 한 번도 분노한 적이 없어 보이는 어떤 점잖은 분을 보면서 그분의 아내에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화내지 않은 분과 사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그러면 그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한번 살아보세요”라고 합니다. 화를 내지 않는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분노를 억누르거나 숨기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남몰래 자신의 방법대로 분노를 해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분노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다가 총격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권총을 들고 2층에서, 아내는 거실에 소총을 들고 총을 쏴서 지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 분별하는
세 가지 중요한 질문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일어나는 분노가 선한 분노인지 아니면 악한 분노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분노라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끊어내야 합니다. 선한 분노라면 끝까지 선한 분노로서 거룩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늘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분노의 동기가 이기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나를 넘어서는 문제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원죄 가운데 하나님 반대편에서 이기적으로 분노합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가 나의 문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둘째, 분노의 동기가 이기적이지 않더라도 내용이 십계명에 합당한 것인지 질문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십계명에 어긋났을 때 분노하십니다. 우리의 분노가 십계명을 기준으로 위반되는 사항에 대해 일어난다면 선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십계명과 전혀 상관없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면 이기적인 분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100% 이기적일 것입니다. 
셋째,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방식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노를 하십니다. 그 선한 분노를 표현하실 때도 거룩하신 성품이 나타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 8~9).
하나님의 분노가 선한 분노인 이유는 정말 악한 것에 대해서만 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에 대해 분노하실 때도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마땅한 분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내 안에 있는 분노가 더디 일어나는 분노인지 아니면 강렬하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노의 표현방식도 긍휼과 인내와 용서로 표현되는지, 아니면 조금도 긍휼이 없이 표현되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긍휼과 용서가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마땅한 진노가 임할 때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일어나는 악한 분노는 용서가 없습니다. 긍휼이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지 못합니다. 억제하지 못합니다. 악한 분노입니다. 선한 분노는 동기가 선할 뿐 아니라 방식도 선합니다. 인내와 용서와 긍휼과 친절로 대하며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 분노가 이루어질 때 회개와 거룩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 분노는 언제나 급합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기 때문에 선한 분노로 시작할지라도 점점 악한 분노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작이 선했다 할지라도 결말이 선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선한 분노로 시작했을지라도 분노가 나의 죄성과 합해져서 점점 악하게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인내와 용서와 긍휼과 친절이 하나님의 선한 분노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아니면 복수와 저주로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모세의 분노가 큰 문제인 이유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모세의 분노를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가 분노함으로써 하나님께 책망 받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수고한 모세에게 너무 가혹한 징벌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모세의 분노를 이처럼 큰 문제로 보셨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의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38년 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역에 와 있던 때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출애굽 1세대들의 반역으로 인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이 있었던 곳입니다. 방랑의 기간을 거치고 그곳에 도착한 백성들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1세대들이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도 여전히 불평합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들어라. 그리고 너와 네 형 아론은 저 회중을 모아라.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서 저 바위에다 말하면 그것이 물을 낼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위해 물이 바위에서 나오게 해 저 회중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실 수 있게 하여라”(7~8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불평하는 백성들에 대해 진노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없어서 힘들어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을 주심으로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과 비슷한 상황인 출애굽기 17장에서도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불평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호렙산에 있는 바위를 쳐서 물을 마시게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장과 비교해 보면 물을 주시는 방법이 약간 다릅니다. 르비딤에서는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 말하여(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지시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 모세가 어떻게 순종하고 분노하는지를 보십시오. 
“그와 아론이 총회를 바위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불순종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겠느냐?’ 그러고 나서 모세가 자기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치니 물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회중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셨습니다”(10~11절).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모세가 무엇을 크게 잘못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이 쏟아져 나왔고, 사람과 가축이 마셨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절 말씀을 통해 모세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겠느냐?”는 문장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세 가지 의미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물을 나오게 하는 능력을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가’라는 말을 강조해서 읽어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모세와 아론이 물을 내어주는 것처럼 백성들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내겠느냐?’에 강조점을 두면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오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너희를 위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해석해보면 ‘그럴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너희 같은 사람들을 위해 물을 내줄 필요가 있겠느냐?’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물을 기꺼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의 태도는 ‘너희는 물을 마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물이 있어도 너희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입니다. 모세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행동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견됩니다. 첫째, 지팡이를 들어서 사용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팡이를 들고 치라”고 하셔서 쳤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홍해를 가를 때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하셔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사용한 방법을 절대화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통해 몇 번 역사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도 그 지팡이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를 들고 말하라”고 하셨으니 말하면 되는 것인데 지팡이를 들고 쳤습니다. 두 번씩이나 분노하며 내리쳤습니다.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다른 말씀을 보면 모세가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민 12:3). 그러나 모세 인생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 안에 있는 폭발적인 분노의 패턴에 주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모세가 40세에 어떤 일을 했습니까? 동족 히브리인을 이집트인 노예 감독이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그 감독을 때려죽였습니다. 그때부터 모세 안에 폭발적인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동족을 보호하려는 선한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분노였습니다. 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할 때 그 금송아지를 부숴 가루를 만든 다음 물에 뿌려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과도한 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돌판을 깨뜨렸으니 다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처럼 깎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는데 이제는 모세에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깎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분노의 대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때때로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과격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마지막 시점에서도 그 문제가 나타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이렇게 다루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모세의 위치로 봤을 때 이것은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지도자의 분노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들고 두 번 내리치며 백성들을 향해 분노하는 모세의 얼굴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가 불필요한 분노를 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마음에 있는 분노는 물론 죄성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부모가 심어준 분노일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수록 자신의 분노가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선한 분노’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해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으니 너희가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곳을 므리바 물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12~13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와 악에 대하여, 분노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갈 수 있도록 분노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분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간다면 선한 분노입니다. 계속해야 하는 분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한 분노입니다. 동기는 선했을지라도 그 방식이 인내와 용서와 긍휼과 같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면 그 분노 또한 악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동기가 선하다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역사를 변화시키는 분노는 악한 분노가 아닙니다. 마틴 루터 킹, 윌리엄 윌버포스 등 역사를 변화시킨 선한 분노를 보십시오. 3.1운동에서 우리 조상들이 만세를 불렀던 그 동기가 선했고 표현 방식도 선했습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분노는 언제나 선한 분노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분노였습니다. 우리의 분노가 미움, 폭력, 복수가 아니라 인내와 용서와 친절과 긍휼, 노하기를 더디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날마다 분노의 동기를 살피고, 성령 안에서 절제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가 맺어지도록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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