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 1:4~11
이재훈 목사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선한 생각을 가졌다고 선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물론 선한 삶에는 반드시 선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생각이 가득하다 해도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선한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당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곧 우리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통해 인간 존재의 중심이 생각과 이성이라는 것을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성과 생각 중심의 존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고, 사랑에 의해 의미를 찾으며,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사랑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데키르트의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기도는 생각이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행동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이고,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리얼 바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도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 충분한 존재, 의로운 존재가 아니기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가 생명이요, 근원이요,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행동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우리의 비전을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기도는 비전을 잉태한다. 그리고 비전은 기도를 먹고 자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비전이 없는 것은 기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비전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수록 비전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하며 나가야 할지는 오직 기도 속에서 잉태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행동 ‘기도’
기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합니다. 기도 없는 행동은 방향을 잃어버린 행동이 됩니다. 많은 노력을 하지만 열매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따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기도는 믿음이 역사하도록 만듭니다. 기도는 믿음의 길을 걷게 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합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도전하게 합니다. 그것이 기도 속에 잉태된 비전이요, 믿음의 길을 걷게 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기도의 능력과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가장 소중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생각 속에 머무는 차원이 아니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기도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짓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쓰임 받은 것 이면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서 1장에 기도가 나오고, 마지막 13장에도 기도가 나옵니다. 느헤미야 13장 31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내리소서”(느 13:31).
느헤미야서의 시작과 끝이 기도요, 느헤미야의 일의 시작과 마지막이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형통할 때나 장벽을 만나 어려울 때 기도로 돌파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기도가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입니까? 관계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건강, 지식, 명예입니까? 느헤미야에게는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행동이 될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다
느헤미야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 그곳에서 자라난 유대인 후예입니다. 주전 464년부터 423년까지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술을 따라주는 직업을 천박한 직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왕은 언제든지 정적들에 의하여 암살 또는 독살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직책에 있는 사람은 왕의 신임을 받고, 왕과 친밀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위로’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느헤미야는 한 시대 하나님의 위로를 보여주었던 귀한 인물입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포로귀환이 시작되었는데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산 궁에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고국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다니엘을 바벨론의 총리로 세우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를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 술 관원으로 세우신 뜻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왕의 신임을 받아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실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위해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하여 성실과 실력과 믿음을 줄 수 있는 일꾼으로 그 위치에 올라 있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 자신만 안락하고 안전하고 편안하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예루살렘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자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조상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조상들로부터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포로로 잡혀올 때 수치스러운 모습, 고달픈 포로생활 등 귀가 닳도록 조상들로부터 민족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이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렸을 때는 이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륜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사명과 조상들에게서 들었던 하나님과 민족이야기가 그의 마음속에 희망적인 정체성으로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동족에 대한 집착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3.1운동 때 믿음의 사람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데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단지 민족주의에 국한됐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3.1운동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참여했던 것은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에게 자유라는 가치를 하나님이 선물해 주셨습니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단지 우리민족만 잘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선조들의 믿음과 신앙, 믿음의 가치가 느헤미야에게 심겨졌고, 그것이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가슴 찢어지는 통곡의 기도
“예루살렘아, 누가 네게 인정을 베풀겠느냐?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누가 네 안녕을 묻기 위해 발길을 멈추겠느냐?”(렘 15:5).
이 질문에 응답할 수 있었던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돌아갔지만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초만 놓은 채 16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성벽은 재건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방인들에게 시달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수치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받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과 수치스러운 모습에 대한 형편을 들은 이후 느헤미야의 반응과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주저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나는 몇날며칠 동안 슬픔에 잠긴 채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4절).
단어 하나하나에 느헤미야의 깨어진 마음이 나타납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슬픔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습니다. 몇 시간 지나면 슬픔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슬픔이 며칠간 지속되는 것은 순간의 슬픔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하고 묵상하고 기도해오던 마음의 슬픔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내재되어 있던 깊은 슬픔의 샘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바울, 예수님이 이렇게 울었습니다. 통곡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존재합니다. 단지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단지 동정의 눈물만 흘린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정도 우리의 중보와 헌신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정은 자기의가 되기 쉽습니다. 동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어나는 슬픔, 깨어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샘물이 느헤미야의 영혼을 적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 통곡의 눈물을 흘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고백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의 종이 밤낮으로 주 앞에 기도하니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떠서 이 기도를 들으소서. 저와 제 조상의 집을 비롯해 우리 이스라엘 족속이 주님을 거역했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께 매우 악하게 굴었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주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우리가 지키지 않았습니다”(6~7절).
진정한 회개에는 두 가지 고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며 반드시 징벌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그 언약 가운데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조차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류하고 계십니까? 진노가 왜 우리에게 쏟아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랑과 언약의 우산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언약 안에 들어오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그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나눠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워진 새 언약의 우산 아래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죄를 고백할 때 놀라운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회개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과 동족이 처한 위기는 느헤미야가 아니라 조상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라고 하지 않고 “우리 죄”라고 하고, “저와 제 조상의 집을 비롯해 우리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순서를 보십시오. 자기부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달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지도자였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여러분, 이 나라와 민족의 회복을 향한 회개의 출발은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정죄가 아닙니다. 비난의 화살이 회복을 앞당기지 못합니다. 저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입니다.
시대, 민족, 언어, 문화를 뛰어넘어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너희가 만약 죄를 지으면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버릴 것이고 만약 너희가 내게 돌아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 포로 된 사람들이 하늘 끝에 있더라도 내가 그들을 거기에서부터 불러 모아 내 이름을 위해 선택해 놓은 곳으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주께서 주의 큰 능력과 주의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들입니다”(8~10절).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관료로 자라기까지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성경적인 기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물줄기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라나 율법으로 교육 받고 경건하게 훈련받은 사람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이방 땅에서 자라나 페르시아 왕의 술 관원이 될 때까지 그는 이방문화 교육을 받고, 이방 문화 속에서 자랐을 텐데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레미야가 예언한 서책의 필사본이 돌아다녔고, 그것을 다니엘이 읽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회복을 위해 기도한 것이 다니엘 9장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모세의 율법 내용들이 필사된 서책들이 그에게 전해졌고, 그는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말씀을 묵상했을 때 시대와 민족과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시대와 문화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사도들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현실의 문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과 죄로 심판에 처해있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리라’는 회복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신 응답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주여, 이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주의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오늘 주의 종이 이 사람 앞에서 은총을 입고 잘되게 하소서.” 그때 나는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사람이었습니다”(11절).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점점 더 자원하고, 적극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종’이라는 단어를 여덟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요, 말씀대로 행하려는 자입니다. 모세를 종이라고 했고, 유다 백성들을 종이라고 했고, 자신을 종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종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전능하신 손으로 베풀어주십니다. 느헤미야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간구에서 끝나지 않고 행동합니다. 기도가 행동이라는 것이 여기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오늘 주의 종이 이 사람 앞에서 은총을 입고 잘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자신의 신분이 높아지고 세상적으로 더 형통하게 해달라는 기도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백성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한 다음에 이 기도를 한 것은 자신을 회복의 역사에 사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을 자유롭게 허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강력한 행동이 어디 있습니까? 때로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중심으로 역사가 돌아가는 것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만물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왕을 움직이시고, 역사의 반대편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종이 이 사람 앞에서 은총을 입고 잘되게 하소서”라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 기도를 표본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가 모범이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우리도 이 믿음으로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누군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민족의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