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깨어서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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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깨어서 기도하라

 2018-11-18      제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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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서 기도하라
에베소서 6장 10~20절
이재훈 목사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명에 절대적인 공기는 몸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우리 몸은 공기를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숨을 쉬는 것보다 쉬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은 몸에 산소와 공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숨 쉬지 않는 것이 치명적인 것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삶,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있지만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영적전쟁에서 패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적호흡을 대신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연명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기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생생하고, 진실하고, 친밀하고, 능력 있느냐가 우리의 영적생활을 결정짓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결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강한 의지나 행동, 뜨거운 감정이나 기도의 정교한 논리가 기도응답을 받는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그분의 중보, 그분의 영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사역에 근거할 때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매듭짓는 것은 단순한 주문이 아닙니다. 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와 능력 그리고 축복
 
 
노르웨이의 오 할레스비라는 목사님이 기도에 관한 많은 책을 쓰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온전히 모셔 들이는 일이다. 이는 우리 기도가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것 그것이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온전히 계시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과 생각 속에서 예수님이 가장 높은 권위, 위치, 가장 사랑스런 대상으로 온전히 살아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기도란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초청과 임재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사시는 것이 참된 기도이자 능력입니다.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온전히 살아계시지 않다면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야 하는 이유는 참된 기도를 하나님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적전쟁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항상 기도에 힘써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기쁨으로 있어야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까? 아니면 스트레스가 쌓입니까? 무겁게 느껴집니까? 아니면 참 기쁨이 느껴집니까? 여러분,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의무로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때가 없고, 기도하지 못할 주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큰 새는 큰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날개는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무거운 날개 때문에 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거운 의무처럼 느끼지 않고, 우리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시는 축복이라고 여길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귀중한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기도하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사탄의 방해와 영혼의 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늘 깨어서 모든 일에 인내하며 성도를 위해 간구하십시오”(엡 6:18). 
여러분, 늘 깨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에서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겠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구나’”(막 14:37~38).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하셨습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는 상황에서 제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몇 차례나 방문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큼 제자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깨어있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피곤하면 자는 것이 창조 질서입니다. 피곤하면 쉬어야합니다. 그런데 정말 피곤해서 자는 잠이 아니라 너무 중요한 순간에, 깨어 기도해야 할 순간에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사탄의 활동이 있음과 동시에 육체의 잠 이전에 영혼의 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낙망에 빠질 때 취하는 것이 잠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깊은 상처와 아픔, 절망 속에 있을 때 잠을 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잠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약한 육신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적 위기에서 비장한 각오로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에게 찾아온 잠은 육체적 잠을 넘어서는 영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느 모임이나 교회에 설교하러 가면 집단적으로 자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주무시고 계십니다. 피곤해서 설교시간에 조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면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영혼이 잠들어서 의도적으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세 가지 적 ‘순진, 나태, 거만’
 
 
“시몬아,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겠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구나”(막 14:37b~38).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셨을까요? 왜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하셨을까요? 베드로가 힘주어 한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와 죽을지언정 결코 나는 주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죽을지언정’이라고 힘주어 말한 사람이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겟세마네동산에 데려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외로우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기도하던 중에 여러 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까? 제자들도 깨어 기도해야 다가올 시험에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크리스천이 마지막 십자가에서 짐을 풀고 전진할 때 잠들어있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사람은 순진, 또 한사람은 나태, 세 번째 사람은 거만입니다. 영혼을 잠들게 하는 세 가지 적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게 하는 적입니다.
순진이라는 것은 전혀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태는 잠에서 깨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거만은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순진과 나태와 거만이 제자들의 영혼 속에 있었기 때문에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이 육에게 져서 잠든 것입니다. 제자들이 잠들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 것이지만 정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기에 잠을 잔 것입니다. 
여러분, 잠자는 영혼은 닥쳐올 위기와 시험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경고가 주어져도 무시합니다. 원하는 것만 듣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않습니다. 자신은 이미 도달했다고 자만합니다. 나태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보이는 신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 있는 부패한 성질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더 부패했을까요? 아니면 우리의 영혼이 더 부패했을까요? 부패한 성향이 어디에 더 많을까요? 우리의 육신에도 부패한 성향이 있지만 욕구 이면에 있는 영혼의 옛 본성이 더 무섭습니다.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다”
 “율법이 육신으로 인해 연약해져서 할 수 없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량해 주시려고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서 죄를 심판하셨습니다”(롬 8: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더러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롬 8:7). 
여러분,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동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합리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 악함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져도 이룰 수 없고,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연악함이 우리 영혼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공로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가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 그분의 은혜, 그분의 공로, 그분의 사역을 의지하지 않는 기도는 스스로 다짐하고 결심하는 정신적 활동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기도에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속죄하심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이것을 거부하는 악함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우리 영혼 속에 그 협력자가 있습니다. 옛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사람의 성향이 남아서 우리 기도를 방해하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기도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은혜를 무력화하고,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는 육신을 죽이고 영혼이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은 간절하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간절하다’에서 마음은 헬라어로 ‘프뉴마’입니다. 영입니다. 영이 간절하다는 말씀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도 마음 깊숙한 곳에 기도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싶습니까?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문제는 악한 육신이 영혼의 소욕을 막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약한 육신을 동정하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약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의 소원이 살아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소원이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을 깨뜨리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선교사였습니다. 그분은 27살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선교사로서 활동한 기간 3년정도였는데 그분이 남긴 기도, 일기, 사역이 큰 은혜가 됩니다. 
그분이 말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에서 내려 길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니, 집에 거의 다 왔으면 집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면 되지 굳이 길에서 기도를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 속에는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학자로서 성경 66권을 주석한 몇 분 안 되는 분입니다. 정말 기도를 많이 했던 분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함께 살았던 목사님이 함께  동물원에 갔다고 합니다. 오래 전이니까 동물원 시설이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없어졌습니다. 어디 가셨는지 찾아다녔는데 한쪽 벤치에서 기도를 하고 계시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기뻐했었나 하는 마음이 들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분은 육신 안에 속한 악함, 세상에 속한 어떤 즐거움보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강한 영적 소원이 있었습니다. 깨어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배신, 하나님께 불순종, 유혹에 넘어가는 일의 결론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영의 소원을 무시하고, 연약한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에 실패하면 시험당할 때 반드시 실패합니다. 기도에 승리하면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깨어있지 못하면 위기가 닥치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깨어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옛 본성에게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육신은 옛 본성을 이용해서 온갖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시간 있을 때 기도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온갖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듭니다. 육신의 본성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과 만남을 싫어합니다. 피하려고 합니다. 만나더라도 간단히 끝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시간을 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고, 어떤 육신의 방해에도 깨어서 기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십시오. 영적싸움의 판세를 결정하는 요건은 단 한 가지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기 원하는 우리의 영이 육신의 약함을 깨고 일어나 성령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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