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이기심 버려야 빛과 소금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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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 버려야 빛과 소금 될 수 있다!

 2020-05-16      제12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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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는 크리스천을 위하여 

이타적 사랑, 교회와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사명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가 보여준 바로 그 사랑  

board image<서빙고 교역자들이 공감소비운동 일환으로 장신대 학생들에게 비상식량 및 위생용품을 포장해 선물했다>  
 
크리스천은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을 경험하는 크리스천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본지에서는 ‘거듭나는 크리스천을 위하여’를 주제로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감정과 습성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한다. 그 두 번째 주제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크리스천’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지역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계층 이기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이기심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크리스천도 예외가 아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을 ‘이기적인 사람들의 대명사’라고 비난한다. 크리스천이 그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크리스천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이기적인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주인에게 인도하지는 못할지언정 실족하게 만드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할까? 이기심을 버려야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날 수 있다.  
코로나19가 확산 되고 있던 지난 3월, 제주특별자치도에 해외여행 이력이 있고 코로나19 증상까지 있는데도 자가격리 수칙을 무시하고 여행을 간 모녀가 있었다.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분노했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그들 모녀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어디 이뿐인가. 의료진들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에 일부 이기적인 시민들의 행태가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클럽 등 유흥시설을 간 젊은이들,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하다며 거주지를 이탈한 자가격리자, 유증상자이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지원받은 한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자가격리 중에 편의점에 간 외국인까지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공동체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태가 아닐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기주의의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다는 점이다. 그 따가운 비난에서 크리스천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도 불구하고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은 크리스천을 향한 부정적 이미지의 정점을 찍었다. “종교가 전 세계적 위기 앞에 위로는 못해줄망정 나서서 타인의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행동을 하고, 타인의 고통과 눈물에는 관심도 없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일부 교회와 크리스천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분노한 시민들이 교회 예배를 금지 해달라는 청원과 민원을 제기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을 정도니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공감하지 않는 이들이 없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깝다.
 
라반과 에돔, 성경에 기록된 이기주의
 
교회와 크리스천의 이기적인 모습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구약시절부터 이기적인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계속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반이다. 라반은 리브가의 오라비이고,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이며, 야곱의 장인이자 외삼촌이다. 그는 이기적인 탐욕의 소유자였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노여워하는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일했다. 그런데 라반이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야곱에게 시집보내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며 따져 묻는 야곱에게 라반은 라헬을 줄 터이니 7년을 더 일하라고 종용한다. 결국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라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딸마저 이용했고, 사위 야곱을 대할 때도 순전히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 했다. 그는 분명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주의자였다.
비정하리만치 이기적인 모습은 에돔의 멸망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구약서 오바댜서는 에돔의 심판(멸망)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멸망 이유가 형제의 고난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기뻐했던 이기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다.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야곱과 에서)로 출생할 때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에돔과 유다 족속(이스라엘)의 갈등의 역사가 깊다. 그 깊은 골만큼 에돔은 이스라엘 족속을 미워했다. 에돔은 느부갓네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멸망시키려 할 때, 바벨론 편에서 유다의 멸망을 도왔다. 에돔은 유다가 환난을 당할 때 외면하고, 도리어 그들의 재물을 탈취했으며, 그들의 멸망에 크게 입을 벌리고 환호할 정도로 기뻐했다. 도망하는 유대인을 막아서고 남은 자들을 인신매매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정하리만치 이기적인 에돔을 향해 하나님은 멸망이라는 심판을 내렸고, 에돔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비극을 맞이했다(AD 70년).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님의 이타적 사랑
 
교회와 크리스천은 결코 이기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가치가 ‘이타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님이 바로 그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제자들과 후손들이 그들의 이타적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사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창 14장).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당시 근동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애초에 악한 땅이었던 소돔을 택한 조카에 대한 비방이 아니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창 14:14). 
아마도 아브라함 주변 사람들은 무모해 보이는 결정을 만류했을 것이다. 일개 민간인이 어떻게 저 큰 연합군과 싸워 이기겠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환난에 처한 조카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주의자였다면 결코 그렇게 결정하고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위기에 처한 형제(이웃)를 돕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내려주셨다(창 15:5).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타적인 사랑 또한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 교제하고, 마음을 합해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성령 충만해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었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눠먹었다. 날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지냈다(행 1:14, 2:44~45, 4:32~34). 
초대교회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공동체 중심의 삶을 지향했다. 이타적인 삶과 예배를 몸소 실천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모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셨다. 예수의 이타적인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기까지 하셨다(갈 1:4).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거듭나야 한다.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 준 바로 그 이타적 사랑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기독교의 시작도 끝도 사랑이다.
온누리교회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시기,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공감소비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온누리교회 298개 다락방에서 372개 사연(5월 2일 기준)을 접수했을 정도로 성도들의 관심과 호응이 뜨겁다. 김영환 장로(OCC공동체)는 공감소비운동을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도입했다. 회식비와 야유회 비용을 상품권으로 바꿔 직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도록 독려했다. CGNTV는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작은 교회를 선정해서 장비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예배 지원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이 모든 행동의 기반이 바로 이타적 사랑이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고 했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를 버리고 거듭나는 크리스천이 되는 길이다.  
 
 
<전문가 기고>
 
이기주의 넘어서는 크리스천
‘자기부인’과 ‘자기수용’의 균형
 
이기주의 현상을 지칭하는 ‘님비(NIMBY)’라는 용어가 있다. ‘Not In My Backyard’의 약자이다. 공공의 이익에는 부합하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롭지 아니한 일을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지역에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다거나 장애인 시설, 노숙자 시설, 화장장, 임대 주택 등이 들어설 때 거주 지역의 이익을 위해서 반대하는 행위다. 
님비가 문제되는 이유는 첫째, 꼭 필요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문제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이익이 될 수도 있는데 단순히 집값이 하락하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가 많이 듣는 신조어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이기적 태도를 지적하는데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집이나 땅을 사면 투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투기로 여기는 형태와 같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사회의 이기주의 현상을 지적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이기주의적 삶의 형태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은 ‘자기애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교수인 유영권(2005년)은 한국 교회 쇠퇴의 요인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자기애적 성향이 병리적으로 되면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된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과도하게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 사람이나 기관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 칭찬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지루함과 공허감을 느끼면서 항상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교회에서는 지도자에 대한 의존욕구와 하나님에 대한 의존욕구가 융합되어 지도자를 과도하게 추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 깨닫기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기적인 삶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기적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본래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 수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 이유를 애정의 결핍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타자로부터의 충분한 사랑을 통한 자기 수용이 필요하다.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역설적 긴장 형태를 어떻게 조화시켜 이기주의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까지 내용을 ‘탕자의 비유’라고 부른다. 탕자의 비유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묵묵히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온 맏아들, 그리고 두 아들을 따뜻하게 품는 아버지다. 목회상담학자 박노권(2010년)은 탕자의 비유를 심층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는데, 그 속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탕자의 비유의 대한 해석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을 초자아(superego), 자아(ego), 원본능(id)으로 구분하였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맏아들, 아버지는 마치 이 세 가지 형태의 마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아들은 억제되지 않은 쾌락을 추구하고, 종교적 금기를 깨뜨리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는 본능의 지배를 받은 인물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고, 본능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기적 삶을 살아간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나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는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삶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통제 안에 머무르기로 작정한다. 
맏아들은 프로이드의 마음 구조에서 초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자아란 도덕, 종교, 법, 심판의 자리에 있는 자아를 말한다. 흔히 바른 생활을 하는 도덕선생, 모범적인 종교인, 부모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맏아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이라고 했다. 그는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화를 내고, 성적인 욕구를 제 멋대로 사용한 동생을 혹독하게 정죄했다. 그는 의롭고 모범적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감정이 상한 것이다. 그의 도덕적 판단은 옳은 것 같지만 매우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맏아들의 모습에서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서 이기적인 교만과 엄격한 도덕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의 부족한 모습은 아버지 안에서 연합하게 된다. 큰 아들은 여전히 화가 나 있고, 둘째 아들의 회개는 물질적 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아들의 변화된 모습과 상관없이 은혜로 그들을 수용한다. 아버지의 통제 안에서 두 아들은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에고(ego) 역할을 한다. 에고는 원래 본능과 초자아를 잘 조절해서 현실적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우리의 모습 속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모습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 속에는 본능을 추구하고자 하는 쾌락원리와 초자아를 통해 타인을 정죄하는 두 가지 모습이 갈등과 긴장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늘 내 안에 있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부인이 필요하다. 둘째 아들의 욕망을 부러워하면서도 초자아적 삶에 억눌려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하는 맏아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욕망이 수용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두 아들을 품어 준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두 아들은 인격의 두 부분인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아들은 무의식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따라 자아실현을 시도했다. 놀기 좋아하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인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위기를 경험했다. 그가 겪은 삶의 위기는 그로 하여금 개성화의 길로 이끌어 아버지에게로 향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아버지 안에서 음식과 옷과 같은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반면 맏아들은 정신의 의식적인 부분을 대표한다. 그는 특권, 우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거부한 에로스는 그림자로서 억압된 무의식의 한 측면이다. 사실 동생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속으로 동생의 삶을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의 어두운 욕망이 그의 동생에게 강하게 투사되어 비난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가끔 사회면을 장식하는 스캔들을 접하면서 강하게 분노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개성화된 자기(Self)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아들은 아버지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본질들의 화해를 경험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양극단을 모두 수용하고 통합함으로써 건강한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귀한 형상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성과 죄성을 모두 부인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이기적인 자아와 중심성을 인정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결단을 함으로써 진정한 주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수용은 자기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집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삶, 이기적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안에 이기적인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고, 비우려는 자기 부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내면의 욕구를 채울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적절한 통제 속에서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 오은규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상담코칭학 Ph.D)

<발문>
“결국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적절한 통제 속에서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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