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모든 아이는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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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는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2019-09-08      제12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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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
 
가정위탁제도 … 정서적 애착관계 형성에 큰 역할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 
 
 
 
가정위탁제도. 친부모의 학대, 방임, 질병, 기타(사망, 혼외출생, 수감) 등의 사유로 친가정에서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경우 일정기간 아동을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가족기능을 회복하도록 원조하는 아동복지서비스다. 쉽게 말해, 여러 사유로 인해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만나기 전까지 시설이 아니라 가정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보건복지부 자료(2017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위탁아동은 총 11,983명으로, 조부모에 의한 대리양육이 7,950명(66.3%)으로 월등히 많고, 친인척위탁 3,100명(25.9%), 일반가정위탁 933명(7.8%) 순이다. 시설이 아니라 가정위탁제도가 왜 필요하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왜 가정위탁제도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양육자와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에서 자라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하나님께 입양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또 하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애착이란 한 개인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를 말한다. 동물들의 각인(출생 이후 처음 시야에 들어온 어미나 다른 움직이는 존재에 지속적인 애착을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왜냐하면 유아기에 형성된 애착관계는 한 사람이 평생 맺는 모든 대인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를 학문(이론)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영국의 소아과 의사 볼비(Bowlby)다. 
 
이론과 실험, 역사적 사건으로 증명된
아기들의 정서적 애착의 필요성과 중요성
 
볼비는 유아 초기의 애착형성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고, 애착형성이 잘 되지 않으면 아동기뿐 아니라 성인기의 여러 정신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이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유아기 시절 양육자와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로의 빨간털원숭이 실험은 볼비의 애착이론을 뒷받침해준다. 위스콘신대학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빨간털원숭이를 대상으로 애착형성 실험을 했다. 새끼원숭이를 어미와 격리시키고,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인형)와 함께 있게 했다. 하나는 차갑고 딱딱한 모형 철망에 우유병을 걸어놓았고, 다른 하나는 철망에 부드러운 벨벳천으로 싸놓은 대신 젖병은 연결하지 않았다. 새끼원숭이는 두 어미 중에서 누구에게 갔을까? 놀랍게도 새끼원숭이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철사로 된 원숭이가 아니라 배고픔을 채워주지 않지만 부드러운 촉감이 있는 벨벳천으로 덧댄 원숭이에게 붙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배고픔보다 따뜻함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할로는 아기의 정서적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아기들의 정서적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됐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몰락하고 드러난 고아원 실상이 이를 보여준다.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 루마니아를 지배했던 악명 높은 독재자다. 그는 매우 비인간적인 인구증가 정책을 내세웠다. 인구수가 늘어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군사력도 강해져서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차우셰스쿠는 가정 당 무조건 네 명 이상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자녀할당제’를 시행했다. 문제는 독재와 폭정으로 루마니아 경제가 가난해진 것이다. 빈곤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아이를 도저히 양육할 수 없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고아원이 고아들로 가득 찼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 15만 명 이상의 고아들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열악했던 루마니아 고아원의 실상이 서방 언론에 알려지며 ‘가정위탁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루마니아 고아원의 비극에 대해 게오르게트 뮬헤어(NGO 활동가)는 TED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우셰스쿠의 전시용 고아원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보육원이 많이 시끄러울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수녀원만큼 조용했습니다. 침대마다 아이들이 누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우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곳의 수간호사가 제게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우리 아이들은 정말 예의바르답니다.’ 그곳의 아기들이 다른 사람과 접촉할 시간은 하루 중 고작 몇 분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자라서 보육원을 떠날 때 사회부적응자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몰도바에서는 보육원의 여자아이들이 또래 아이들보다 인신매매를 당할 확률이 10배 높고, 러시아에서는 보육원을 떠나고 2년 뒤 20%의 아이들이 범죄 경력을 갖게 되며, 14%는 성매매에 연루되고, 10%는 자살한다고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가족에 대한 권리가 있고, 가족을 가져야 하며, 가족을 필요로 합니다. 보육원이나 고아원을 지원하는 것보다 가정위탁제도를 지원해야 합니다. (시설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뿌리 뽑을 수 있는 아동폭력의 한 형태입니다. 이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가정위탁은 꽃에 물을 주는 것…
사랑과 관심이 그 아이들을 살린다!
 
아기의 정서적 애착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이론과 실험, 역사적 사실이 타당한 주장일까? 실제 가정위탁을 하고 있는 크리스천 가정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오충화 집사(서대문공동체)네는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아내 최진옥 집사 덕에 아들 둘(현준 18세, 현민 16세), 딸 둘(현아 13세, 현주 9세)을 둔 다복한 가정이다. 오 집사네는 아이들을 위탁해서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아내 최 집사가 수년 전부터 남편 오 집사에게 아이를 위탁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데,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 자라는 것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다. 오 집사는 아내의 결정을 두 가지 이유로 걱정했다. 하나는 위탁받은 아이가 입양이 결정돼 다른 가정으로 갈 경우 아이에게 생길 분리불안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쁘게 잘 키우던 아이를 보내고 남겨질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어쩌랴. 아내의 뜻이 너무 확고했다. 결국 지난해 소정의 위탁교육을 받고 첫 번째 아이를 위탁받았다. 지난해 12월 10일 예꿈(가명, 남아)이가 오 집사네 집에 왔다. 
“예꿈이가 너무 예뻐서 소리 지르고 뽀뽀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게 우리가 그렇게 애정표현을 해도 아이가 반응이 없더라고요. 마치 영혼 없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어요. 울지도 않고요. 더 기가 막혔던 건 아이가 밤새 한 번도 안 깨는 거예요. 시설에서는 너무나 훈련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오 집사 가족들은 반응 없는 예꿈이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다. 뽀뽀도 계속 하고, 예뻐하고, 눈을 마주치고, 끊임없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그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예꿈이가 가족들의 눈을 마주치면서 웃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아이가 밤에 잠투정을 했다. 한밤중에 요란한 울음소리 때문에 가족들이 잠을 못자서 힘들었지만 너무나 기뻤다. 왜냐하면 그게 아기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정말 기뻤어요. 예꿈이가 한 달 만에 꽃피기 시작했어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아이가 참으로 아름답더라고요. 물론 우리 몸은 피곤했지만요(웃음)”
예꿈이의 입양처가 정해졌다. 예꿈이를 위탁양육한 지 꼭 두 달째 됐을 때다. 오 집사 가족은 기쁨과 눈물로 예꿈이를 양부모에게 보냈다. 아이를 보낸 날 첫째 현준이가 그러더란다. “아빠, 이제 (위탁) 그만하면 안 돼요?” 사실 예꿈이를 키우면서 첫째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한창 사춘기여서 방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아들이었다. 시큰둥해 하던 큰아들이 예꿈이를 보기 위해 안방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예꿈이를 키우면서 얻은 생각지도 못한 은혜였다. 그만큼 현준이의 상실감이 컸던 모양이다. 오 집사가 그런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마음이 아프고 상실감도 들지만 그 아이는 인생이 바뀌었어.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니?”
예꿈이를 보낸 지 2주 후, 입양기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 아이를 언제 맡을 거냐고. 오 집사는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가족여행이 끝나고 맡겠다고 했다. 그러자 기관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다만 며칠이라도 가정에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시설에서 줄 수 없는 사랑을 가정에서 줬으면 좋겠어요. 가족여행가실 때는 우리가 볼 테니까 그 전까지라도 맡아주실 수 없을까요?” 
결국 예꿈이를 보낸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예진(가명, 여아)이를 받게 되었다.  
“예꿈이를 보내고 뻥 뚫린 마음이 예진이로 인해 완전히 치유가 되더라고요.”
오 집사네는 요즘 예진이의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느라 바쁘다. 예진이가 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되기까지 약 1년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예진이의 커가는 모습을 못 볼 양부모와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정위탁은 마치 꽃에 물을 주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면 아이는 살아나요.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어요. 많은 크리스천 가정에서 아이들의 중보자, 보호자, 양육자, 멘토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한 아이에게 물을 주고 꽃을 피우도록 쓰임 받는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젊은 부부들,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위탁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위탁을 하면서 자녀들의 품이 커지거든요. 우리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가정위탁은 입양과 다르다
크리스천들의 또 하나의 사명
 
가정위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동복지법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하면 위탁아동을 양육하기에 적합한 수준의 소득이 있는 가정, 위탁아동이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양육과 교육이 가능한 가정, 25세 이상 부부로 위탁아동과 나이 차이가 60세 미만인 경우, 자녀가 없거나 자녀(18세 이상 제외) 수가 위탁아동을 포함해 4명 이내인 가정, 성범죄와 가정폭력, 아동학대, 정신질환 등의 전력이 없는 가정으로 아이를 돌보고자 하는 마음과 용기,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위탁부모가 될 수 있다. 
가정위탁과 입양은 다르다. 입양은 친부모가 친권을 포기하고 입양부모의 호적에 입적시켜 친자녀로 양육하는 것이고, 가정위탁은 친가정 복귀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의 주민등록상 주소지만 위탁부모에게 이전해 동거인 자격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다.  
가정위탁의 유익은 친부모와의 분리로 인한 아이의 불안을 최소화하고, 안정된 가정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 간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회학습이 이루어지며, 친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치유 및 성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위탁된 아동이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크리스천이라면 앞장서 가정위탁을 하거나 관련 시설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과부와 고아를 보살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2~23). 
제이홈(온누리교회 입양 커뮤니티) 오창화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국가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비난이 친부모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세상의 빛과 소금,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고 교회잖아요.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문의: 보건복지부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1577-1406
      대한사회복지회 02-552-7739
     
 
<기고>
 
입양부모를 만나기 전에도 엄마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 두말 할 필요 없는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바꿔 말해보겠다.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른이 된 여자들이 모두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자들이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엄마가 키울 수 없게 된 아이들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다. 나는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엄마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우리 같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간절히 외치고 싶다. 
이 세상에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 말은 생물학적인 인간 탄생에 대한 것으로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제도적 관점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엄마가 아이를 키웠다거나 엄마가 누군지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관점의 엄마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자신의 엄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엄마가 아닌 사람의 손에 성장한 아이들도 있다. 보육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보육사들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근로자로서의 엄마가 아무리 사랑과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돌본다고 한들, 우리네 엄마와 같을 수 있을까? 같을 수 없다면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답을 알면서도 설명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평소 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입양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성장하는 동안 아빠가 없어서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은 했지만, 엄마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고아들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도 그런 일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나 또한 엄마 없는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엄마는 자본도 학력도 인맥도 없고, 경제관념이나 장사 수완 등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계를 위해 사회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여자 혼자서 자녀를 키우는 일에 얼마나 큰 희생이 숨겨져 있는지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엄마의 희생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모든 아이에게는 당연히 엄마가 있어야 하고, 엄마라는 존재는 당연히 자신의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다고. 그리고 이 이미지를 덧입히면서 역할을 강요한다. 
 
‘엄마’라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일
 
최근 들어 주 52시간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매우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보육사는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인 동시에 근로자이다. 1주일 168시간 중에서 52시간 이내에서만 엄마 역할을 하면 된다고 법이 보호를 하겠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로제는 우리나라가 노동환경의 측면에서도 경제수준과 걸 맞는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보육시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날마다 3명 이상의 엄마들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3번 정도의 교대근무로 인해 엄마가 바뀌는 이 제도가 과연 근로환경을 개선하는 만큼 가정을 대신하는 사회복지시설이라는 시스템과 엄마를 대신하는 직업으로서 보육사의 역할을 발전시키는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3~4명의 엄마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엄마는 한 명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내편인 나의 절대적 지지자이며,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존재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쯤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챘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엄마의 품을 벗어난 즉,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한사회복지회는 입양기관이다. 이곳에서는 부모(대부분 미혼모)들이 키울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입양을 결정해서 인도된 아이들이 입양 절차를 진행하며 보호받고 있다. 부모가 없는 상태인 아이들에게 온전한 부모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는 입양부모를 만나기 전에도 엄마가 필요하다. 우리 기관의 아이들에게는 그 단 한 명의 엄마가 출생까지는 친생모였고, 기관에 온 후에는 위탁모이며, 입양된 후에는 양부모가 되는 셈이다. 입양되기 전까지 이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수일, 수개월, 수년의 시간 동안 위탁모들이 대리양육자로서 아이에게 엄마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기관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앞으로도 이에 대한 전망은 밝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관이 조금 더 많은 비용을 위탁모들에게 지불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합당한 대가라고 말할 수 없다. 엄마의 역할에 대한 가치매김을 돈으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에게 엄마의 필요를 채워줄 새로운 위탁모가 너무 절실하다.   
어른이 된 여자들이 모두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자들이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탁과 입양을 통해 양육의 몫이 더욱 커진 엄마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엄마’라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달란트는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키워야 한다. 더 많은 성도들에게 이 현실을 전파해주기를, 행동해주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 김수진 부장(대한사회복지회)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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