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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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2024-09-07      제15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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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조선 시대 성군(聖君)을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세종, 영조, 정조, 성종을 말한다. 이 중에서 세종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분열 왕국 시대 선왕(善王)을 꼽으라면 성서학자들은 남유다의 아사, 여호사밧, 아마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를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요시야에게 ‘대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싶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왕이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게 해서 예배를 회복하고(23절), 우상 숭배의 모든 모양을 쓸어 버리는 우상 척결 정책을 단행하며(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던 문화를 뒤엎어 말씀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했다(25절).
하지만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에도 진노를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요시야는 재앙을 안 보고 평안히 무덤에 안장될 것’(왕하 22:20, 대하 34:28)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요시야가 애썼다 할지라도 남유다는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므낫세 왕이 나라를 완전히 망쳐놨기 때문이다. 12세에 왕위에 등극해서 무려 55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한 므낫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른다(왕하 21:1~2).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민족보다 그 죄악이 더 심하였다(왕하 21:9, 대하 33:9)’고 한다. 모든 민족에는 이방 나라가 대다수인데,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적대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필자는 므낫세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20장 19절(표준새번역)을 보면 히스기야는 자기 시대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대대손손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신앙교육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비전(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은 므낫세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자녀교육 실패’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간절한 기도로 15년을 더 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15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으며, 자기의 안위만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나의 시대에만 평탄하면 된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도 온전한 신앙이 이어지도록 힘쓸 것인가. 히스기야처럼 근시안적 신앙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요시야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앙의 개혁을 일으킬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교육은 세뇌가 아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교육이다. 학업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 말씀이 아이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면, 즉 때를 놓친다면 신앙이 회복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앙교육은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서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에(하나님의 지혜가 지식의 근본) 매우 중요하다. 신앙 전수에는 희생이 따른다. 후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커리어나 가시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문화는 참으로 아쉽다. 시간을 따로 떼어서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한다. 자녀의 온전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이 먼저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여호야긴 왕이 37년 만에 사면된다(왕하 25:27~30). 바벨론 왕이 에윌므로닥으로 바뀌면서 원년에 다른 왕들의 지위보다 여호야긴 왕의 지위를 더 높게 하고, 죄수복을 벗기며(명예 회복), 양식 등을 풍족하게 누리게 된다(물질 회복).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을까? 필자는 이를 요시야가 ‘예배 개혁, 말씀 개혁, 우상 타파’를 한 결과라고 본다. 얀 후스의 죽음이 무위로 끝난 게 아니라 100년 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실제로 일으켜 ‘얀 후스가 환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요시야의 신앙개혁 이후에 남유다가 멸망했지만, 회복이 일어난 까닭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변화가 더디 올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 각 가정의 신앙 형성을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해지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힘써야 한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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