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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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2018-10-07      제12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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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살던 집 팔아 온누리청소년센터 재건축 도운 이춘애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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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처럼 자신의 소유를 교회에 기부한 이춘애 권사와 온누리청소년센터에서 받은 감사패.


마치 곱게 늙은 귀부인 같았다. 은실로 짠 것 같은 백발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부잣집 노부인처럼 느껴졌다. 이춘애 권사(90세, 서빙고공동체)의 첫인상이 그랬다. 그러나 북한 사투리가 배어있는 말투로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이야기 속에는 결코 곱고 순탄한 삶이 없었다. 짜장면 한 그릇, 아이스케키 하나 사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을 이기려고 쉬는 날도 없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억척스럽게 일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다. 그렇게 어렵게 일군 재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기부했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이춘애 권사에게 지난 9월 19일은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됐다. 그날은 온누리복지재단 산하시설 온누리청소년센터 준공감사예배를 드린 날이다. 이춘애 권사에게 이 날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권사가 살던 집을 팔아서 기부한 헌금을 온누리청소년센터를 재건축하는데 보탰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밭을 팔아 교회에 기부한 레위족 사람 ‘바나바’(위로의 아들이란 뜻)처럼 기쁨과 은혜로 기꺼이 바쳤다. 액수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이 권사에게 조금도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받았어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게 어떻게 아깝겠어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이춘애 권사는 올해 구순(九旬, 90세)이다. 고향은 평안남도 순안이다. 21살에(1950년) 남한으로 피난 왔다. 당시 이 권사는 순안에서 이모가 있는 평양으로 잠시 피신을 한 상태였다. 징집 명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여자도 군대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무섭고 군대도 가기 싫어서 평양으로 나왔어요.” 
잠시일 줄 알았던 피신이었는데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향 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이모랑 오빠와 함께 남한으로 피난 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나중에 따로 피난 내려오셨고요.”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지만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1954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큰아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단돈 3천원 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리어카 행상도 했고요.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오르막길을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1950~60년대 한국은 정말 못 살았다. 이춘애 권사는 그 가난 속에서도 빚지지 않고 살려고 죽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그 흔한 짜장면도, 아이스케키도 못 사먹었었어요. 배추도 값이 싼 겉잎사귀만 사다 먹었고요. 그래도 남에게 외상 한 번 지지 않고 살았어요. 돈이 없어 굶주릴 때도 많았지만 남한테 빌리지 않았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어요. 나는 나쁜 것을 쓰더라도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고요.”
삶은 궁핍하고 고단했을지언정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갖은 고생과 실패, 가난이 이어졌지만 남의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았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1960년 이 권사는 남편과 함께 고무공장을 시작했다. 이때도 정직과 신용을 지키려는 이 권사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공장을 하면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동업하다 실패하고, 공장에 불이 나기도 했고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2시까지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어요. 직원들 월급날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고요. 약속과 신용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그렇게 정직하고 열심히 산 것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한 개였던 공장을 세 개로 늘릴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공장 운영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남편과 편안히 살날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다. 함께 고난을 헤쳐 온 남편이 53세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늘처럼 믿고 의지한 남편을 잃은 슬픔은 생각보다 컸다. 빈자리가 너무 컸다. 상실감과 헛헛함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었다. 
“앞만 보며 열심히 일해서 이제 조금 편히 살겠거니 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상실감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 십자가가 눈에 보이더라고요. 제 발걸음이 저절로 교회로 향하더라고요.” 
이춘애 권사는 교회에 대한 마음은 있었지만 제대로 다니진 못했다. 주일에도 공장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공장을 더 키우고, 남들 사는 것처럼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남편과 사별한 이후 이춘애 권사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열심히 운영해 온 공장을 정리해서 동업자와 아들에게 분배했다. 오로지 교회와 집을 오가는 것이 그녀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새벽기도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니고 있다. 
“하나님 믿고 나서 모든 것이 평안해졌어요. 남편 잃은 슬픔도 치유됐고, 하늘나라 백성으로 구원도 받았어요. 집안에도 아픈 사람 하나 없고, 나보다 먼저 간 자식들도 없고요. 아들들도  제 갈길 찾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벽기도하면서 나라와 교회, 온누리청소년센터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저는 하나님께 빚이 많아요” 
 
이 권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구원받은 감격, 믿음 생활하는 기쁨과 감사를 되새기며 남에게 베풀고 싶었다. 그래서 2009년 살던 집을 교회에 기증했다. 부디 좋은 일에 쓰이기만 바랐다. 그 헌신이 드디어 올해 빛을 발했다. 이 권사가 기부한 집을 팔아 온누리청소년센터 재건축비용으로 보탰다.  
“집을 흔쾌히 기부하게 된 것은 아들 덕분이에요. 아들이 먼저 교회에 기증하자고 했거든요. 아들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어미의 생각에 힘을 보태는 걸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이춘애 권사는 9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하고 꼿꼿하다. 집안일도, 취미인 화초 가꾸기도, 교회 봉사도 스스로 한다. 이 권사는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이 권사의 입술에서는 감사의 말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남을 사랑하며 착하게 살아야 해요. 남한테 무언가를 줄 때는 좋은 것을 주고, 누가 오면 물 한잔이라도 대접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는 하나님한테 많은 걸 받았다는 거예요.”
이 권사는 오늘이라도 하늘나라 가고 싶다고 했다. 노인들이 흔히 말하는 빨리 죽고 싶다는 푸념이 아니다. 
“누군가 그랬어요. 장사 중에 ‘예수 장사’가 가장 남는 거라고요. 인생을 돌아보니 그 말이 정말 맞더라고요. 제가 남한테 빚지지 않고 살아왔다고 했잖아요? 저는 하나님께 빚이 많아요. 하나님께 너무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여한 없이 오늘이라도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요.”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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