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6代째 믿음의 계보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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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代째 믿음의 계보를 잇는다

 2018-09-14      제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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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부터 신앙을 지켜온 ‘석승호 목사네’ 
 
6대째 신앙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믿음의 가문이 있다. 석승호 목사(양재 차세대)네가 그 주인공이다. 1代 고조부 석은찬 영수(領袖), 2代 증조부 석옥린 목사, 3代 조부 석윤경 목사, 4代 아버지 석남식 목사, 5代 본인 석승호 목사, 6代 석승호 목사의 자녀들까지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증조부부터 석승호 목사까지는 4대째 목회자이다. 이들 가족의 신앙을 연수(年數)로 치자면 한 세기를 거뜬히 넘는다. 또한 증조부 석옥린 목사는 순교자이고 아버지 석남식 목사는 선교사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사진 뒷줄 왼쪽부터 석승호 목사 형 석승권 집사(명성교회), 본인, 부모 석남식 목사와 김선옥 사모, 조부 석윤경 목사와 이순옥 사모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용인 양지 소재)에 있는 석옥린 목사 사진과 순교기념비



 


 


 
“몇 대 신앙, 목회자의 아들, 순교자 조상…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사람들이 훌륭한 믿음의 집안이라고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조상의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믿음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석승호 목사네 신앙의 뿌리는 고조부 석은찬 영수부터 시작됐다. 석은찬 영수는 평안남도 평원군 부백리(평양 근교의 농촌마을)가 고향인데 그곳에 부백리교회를 세운 장본인이다. 
“고조부께서 평양이랑 가까운 곳이 고향인데 그 덕분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한국 교회 초기에는 ‘영수’라는 특별한 직분이 있었는데 온누리교회로 치면 당회서기와 비슷해요. 목사 대신 성도들을 계도하고 가르치는 직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조부께서는 신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주 헌신된 분이셨다고 해요.”
증조부 석옥린 목사(2代, 목회자 1代)는 신앙 좋은 아버지 밑에서 일찍 복음을 접했다. 석옥린 목사는 젊어서 3.1만세운동을 하다 1년 동안이나 일제에 쫓겨 숨어 살아야 했다. 상황이 잠잠해지자 석옥린 목사는 21살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농번기에는 일을 하고, 농한기에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9년 만에 졸업했다. 석옥린 목사는 아버지가 세운 부백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민족교육과 계몽운동에 뜻을 품었다. 무식(無識)하고 무지(無知)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일신학원도 세웠다.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호소했다. 목사로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민족의식과 신앙심 고취를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해방 후에는 김화식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기독교자유당(평양의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당)을 창당하려 했다. 그러나 내부고발로 무산되고 흥남감옥에 갇히게 됐다. 그때부터 석 목사 가족의 고난이 시작됐다. 
“증조부께서 감옥에 갇히고, 할아버지(석윤경 목사)는 공산당에 쫓기는 신세였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석남식 목사)와 고모는 어릴 때였고요. 나중에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당시 집 천장에 조그만 비밀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할아버지가 숨어계셨다고 하더라고요. 몇 개월 동안 어린 자녀들한테도 비밀로 하고 할머니가 몰래 밥을 올려드리고 그랬대요. 할아버지는 천장에 숨어있으면서도 요한계시록을 외울 정도로 많이 읽고 묵상하셨대요. 아무래도 종말과 박해 이야기가 가득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그 힘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셨던 것 같아요.” 
고난은 계속 됐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온 가족이 기로에 놓였다. 감옥에 갇힌 석옥린 목사를 두고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피난 내려오기 전에 할머니께서 시아버님 면회를 하셨는데, 그때 증조부께서 ‘믿음 때문에 갇혔지만 나는 괜찮다’고 하셨대요. 그게 증조부님을 본 마지막이었대요. 인천상륙작전 이후 공산당이 후퇴하면서 감옥에 있는 반동분자들을 모두 총살했는데, 증조부께서도 그때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석옥린 목사는 순교자가 됐다. 증조부 석옥린 목사가 순교할 당시 석승호 목사의 조부 석윤경 목사(3代, 목사 2代)는 평양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석윤경 목사는 처음부터 목회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석윤경 목사는 공부를 잘해서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였는데 부모의 기도가 진로를 바꾼 것 같다고 한다.  
“증조부께서 외출할 때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셨대요. 우리 첫째가 목사가 돼야 한다고요. 그 기도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원래 전공이 기계쪽이었는데 결국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순교자, 4대 째 목사, 선교사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부르심이 더 중요
 
석승호 목사 가문에는 선교사도 있다. 석승호 목사의 아버지 석남식 목사(4代, 목사 3代)는 은퇴 이후 통합측 총회파송으로 사이판 선교사가 됐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처음부터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니었대요. 아버지는 학창시절 일반사회 과목을 특히 잘 했는데 대입시험에서 하필 그 과목을 못해서 낙방했대요. 그래서 재수를 했는데 순교하신 증조부가 떠올랐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대를 이어서 목회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고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석남식 목사는 재수 중에 진로를 변경하고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아버지(석윤경 목사)와 할아버지(석옥린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석남식 목사는 한국에서 목회를 은퇴한 이후 사이판 선교사로 섬겼다. 당시 사이판에서 일하던 조선족들을 신앙교육해 중국 본토로 재파송하는데 힘썼다.   
석승호 목사(5代, 목사 4代) 또한 그의 아버지(석남식 목사)와 할아버지(석윤경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니란다. 어릴 때는 슈바이처가, 중학생이 돼서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도 여고 국어선생. 
“중학교 때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고, 영어나 암기과목을 잘 못했어요. 국어는 우리말이니까 쉽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특히 여고 국어선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고는 남학생들의 로망이었거든요(웃음).”
석승호 목사가 진로를 바꾼 것은 군 생활을 할 때였다.  
“군교회 학생부(군교회 자녀들 대상)를 맡고 있었는데 학생들을 인솔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걸까, 내가 뭘 하면서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일까?’를 고민했어요. 그 고민 끝에 내가 진짜 잘 하는 게 꼭 국어교사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형의 진로 변경도 한몫했다. 2살 터울 형이 신학이 아닌 성악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형이 진로를 변경하는 걸 보면서 마음속으로 부담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내가 (대를 이어) 목회자가 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담감 말이에요.”
석승호 목사는 2005년 12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합격했다. 당시 사이판에서 선교하던 아버지께 그 소식을 알렸다. 아버지는 그에게 목회자가 되라고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들이 신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슬픈 소식이 닥쳤다. 아버지 석남식 목사의 지병이 갑자기 악화돼 사이판에서 소천한 것. 석남식 목사는 사이판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할아버지가 어차피 우린 천국에서 만날 거라고, 내 아들은 사이판 선교사이니 사이판에 묻히는 게 맞다고 하셨어요.”
아버지의 임종을 못 본 석승호 목사는 얼마나 슬펐을까.  
“솔직히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 안에 있던 교만이 사라졌어요. 아버지는 ‘3대째 목사’라는 후광이 있었어요. 저도 신학교에 합격했을 때 ‘4대째 목사 집안’이라는 후광을 입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후광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된 거에요.”
돌이켜보면 석승호 목사 본인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다. 집안의 후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부르심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승호 목사에게 들은 6代째 이어온 신앙의 계보는 의외로 담백하고 진솔했다. 증조부의 순교, 부친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한 이야기를 선뜻 꺼내놓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을 텐데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러면서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재산보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아이들의 인생을 길게 봤으면 좋겠어요. 대학입시가 아이들의 인생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자녀를 끝까지 응원해주십시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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