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춤은 나의 신앙고백이자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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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나의 신앙고백이자 삶입니다”

 2018-06-03      제1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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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예배자 ‘최종천 형제’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춤꾼이 있다. 최종천 형제(53세, 서빙고 누리사랑부)다. 그는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말하는 것까지 불편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계단을 오를 때 벽을 짚어도 다리를 절뚝거리고, 말도 자주 더듬는다. 그런 그가 춤을 춘다. 춤출 때만큼은 장애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춤 실력도 빼어나다. 2003년 무용단 ‘트러스트’에 입단해 ‘데칼로그’, ‘시선 1+1’ 등의 작품에서 출연했다. 지난 3월에는 평창 장애인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두리 새로 서로 하나’ 공연에 출연했다.

/ 이소정 기자 s2868@onnuri.org

 



board image▶ 춤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최종천 형제


 

 

참 보기 드문 사람이다. 신앙도 깊은데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도 깊다. 거기다 마음씨까지 곱다. 춤추는 예배자 최종천 형제 말이다. 그는 3남1녀 중 첫 째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 김상예 권사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종천이를 가진지 석 달 되었을 무렵 정말 큰 뱀이 제 발 위로 지나갔어요.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 일이 뱃속에 있는 종천이에게 영향을 준 거 같아서 늘 미안하고 안타까워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가 눈의 띄게 느렸다. 일곱 살이 되서야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었다. 9살 때는 특수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홀로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가족이 있는 서울로 다시 왔다. 서울에서 일반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1년 동안 국립재활원에서 사진식자(문자를 촬영해 판본 원고를 작성하는 것)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997년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년 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힘든 시절을 보낼 때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곳은 교회였다.

“교회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했어요. 교회에만 오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하나님과 신앙 그리고 가족

 

최종천 형제에게 하나님과 교회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지금도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일주일에 성경 300장을 읽었어요. 읽는 양이 조금씩 늘어나더라고요. 많게는 일주일에 900장을 읽은 적도 있어요.”

성경 읽는 재미에 푹 빠진 그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팔다리가 쑤시고 심장이 답답했다. 고약한 악취까지 났다. 그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쳤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쑤시고 아팠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지더라고요. 더 놀라운 것은 악취가 세상에서 맡아볼 수 없는 향기로 바뀌더라고요.”

최종천 형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그날 이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계속 커져만 갔다. 지금도 매주 교회 오는 것이 얼마나 기대되고, 즐거운지 모른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자체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일 일과를 보면 교회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주일은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다. 오전 6시30분에 집을 나서서 교회에 오는데 단 한 번도 이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서빙고 온누리교회에 도착하면 본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봉사자가 없으면 안내를 자청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분들 중에 노약자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도록 제가 안내해드리고 있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뇌성마비 장애인이 노약자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돕기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다. 그는 2부 예배를 드린다. 항상 본당 가운데 맨 앞줄에 앉아 있다. 2부 예배가 끝나면 곧장 장애인을 위한 예배공동체 ‘누리사랑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콘서트홀로 이동한다. 누리사랑부에서 최종천 형제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칭찬일색이다. 그는 누리사랑부에서 자막 섬김과 점심식사 잔반처리를 도맡아서 하고 있다. 누리사랑부 소속 지체가 아프기라도 하면 심방도 간다. 이 모든 일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좋아서 한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결코 가로막지 못한다.

최종천 형제는 효심도 깊다. 누리사랑부에서 간식을 나눠주면 먹지 않고 꼭 가방에 챙긴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먹기 위해서다. 절대 간식을 혼자 먹는 법이 없다.

“선물을 받으면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께 평생 효도하며 살아야죠. 그게 도리잖아요.”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모른다. 왜 장애인으로 낳았냐고 원망할 수도 있고, 몸이 불편한 자신을 먼저 돌봐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코 그런 일이 없다. 요즘 세상에 이런 효자 보기가 쉽지 않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최종천 형제에게 온누리교회는 정말 특별한 교회다. 제2의 인생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온누리교회에 왔다. 그리고 2003년 당시 누리사랑부 담당목사의 추천으로 무용단 트러스트에 입단했다. 그의 제2의 인생이 그렇게 막 올랐다.

“장애인 역할을 맡아줄 배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마음가는대로 춤을 췄는데 그 자리에서 발탁이 됐어요. 춤을 추는데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어머니는 아들이 무용하는 것을 만류했다. 불편한 몸으로 춤을 춘다기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최종찬 형제는 38세에 춤꾼이 되었다.

무용은 그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였다. 무용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무용을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체중이 5kg나 빠질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작품은 ‘데칼로그(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몸으로 표현한 공연)’인데 그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린다는 마음으로 혼신을 다했어요. 공연 마치고 느낀 뿌듯함과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요.”

춤추는 예배자로 제2의 인생을 만끽하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또 찾아왔다. 2005년 목욕하고 나오다 넘어져서 허리뼈가 골절됐다. 그 사고로 독일과 멕시코에서 열리는 공연에 참가할 수 없게 됐다. 모든 공연을 취소해야 했다. 실의에 빠져 있는 그를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2012년 무용단 트러스트 김형희 단장이 최종천 형제를 다시 불렸다. 그리고 접었던 꿈의 날개를 펴고 또 다시 비상하도록 도왔다. 장애인 단체 7곳을 돌아다니면서 단막극 공연을 했다. 2018년 평창 장애인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공연 ‘두리 새로 서로 하나’에도 출연했다. 그에게 춤은 신앙고백이자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

“춤을 통해 저와 같은 장애인들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건강이 허락한다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춤추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거예요.”

 

 작성자   이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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